정은은 차갑게 웃었다.“송 교수님에게 있어, 약간의 성과를 거둔 여성은 모두 남자에 의지했단 건가요?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바네스과학기술대학교 백지예 교수님은요?”“국내에서 손꼽히는 천문 물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국가 우주선 발사기지의 교수이기도 하잖아요.”“백 교수님은 누구를 의지하셨나요? 이 분야에서 누가 백 교수님보다 더 대단한 거죠? 송 교수는 어떻게 한 마디로 우수한 여성의 노력과 성과를 부정할 수가 있죠?”“그 더러운 생각 때문에? 그래서 누구를 봐도 다 부당한 수단으로 올라온 것 같은 거예요?”“아니면, 송 교수님의 머릿속에는 더럽고 저속한 것들만 있을 뿐, 과학사업을 위해 헌신한 여성의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거예요?”“오늘까지만 해도 정상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박식하고 덕망이 높은 교수님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네요.”송정후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화가 나서 무슨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바로 이때, 오미선은 왼쪽의 작은 문을 열고 나왔고, 안경 뒤의 눈은 차갑게 그를 주시했다.“송 교수, 방금 한 그 말 다 들었어. 정은이는 내 학생이야. 지금 무엇을 암시하거나 인도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난 내 학생이 그 어떤 모독과 무시를 받는 것도 용납하지 않아.”“당장 정은이에게 사과해!”오미선은 목소리가 우렁차서 마치 자식을 보호하는 암컷 사자와 같았다.송정후의 안색이 갑자기 보기 흉해졌다.‘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니. 잠시 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릴지도 몰라. 그래도 내 체면이 중요하지...’“방금 난 농담을 한 것일 뿐인데...”정은은 송정후의 말을 끊었다.“이런 농담은 조금도 웃기지 않아요.”재석도 담담하게 말 한마디 덧붙였다.“만약 이런 농담이 여성의 노력과 헌신을 무시하고, 교수님과 학생에게 부당한 관계가 있다고 모함하는 것이라면, 그건 너무 과분한 것 같은데.”송정후는 오늘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그들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아는 초조하게 방안에서 왔다갔다했다.1분 안에 시계를 수십 번도 더 본 것 같았다.수아는 입술을 깨물었고, 조용한 환경은 그녀의 마음속의 불안함을 확대시켰다.수아는 몇 차례 핸드폰을 들려고 했지만, 결국 다시 책상 위에 엎어 놓았다.마침내 그 시간이 되자, 수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재빨리 방문을 열어 복도로 나왔다.이어 표정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린 뒤, 평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교수님, 계세요? 제가 방금 실험보고서를 정리할 때 A, 아니다, 3조의 데이터에 문제가 좀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하지만 확실하지 않아서 교수님 찾아 토론하고 싶은데, 지금 괜찮으세요?”안에는 응답이 없었다.“교수님? 저 수아예요.”안은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발작하기 시작했나 봐. 아마 지금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을 거야.’“교수님?! 괜찮으세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일단 문부터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저 지금 너무 걱정된단 말이에요...”문을 족히 2분이나 두드린 수아는 손까지 부었지만, 안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수아는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설마,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아니야, 난 분명히 옆방에서 문 여는 소리를 들었고, 특별히 문구멍으로 확인했어. 교수님은 40분 전에 확실히 방으로 돌아갔다고,’‘설마... 돌아온 후에 또 나간 거야?’‘그런데 이 시간에 나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그러나 안에 만약 정말 사람이 있다면, 재석은 문을 열지 않더라도 대답을 했을 것이다. 절대로 지금처럼 귀머거리인 척할 리가 없었다.수아는 참지 못하고 문구멍으로 다가가더니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러나 안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수아는 또 문에 엎드려 안의 동정을 살폈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계속 두드리며 떠볼 수밖에 없었다.“교수님, 안에 계신 거 알아요. 저한테 정말 중요한 일이 있으니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그러나 적막이 흐를 뿐이었다.여자의 안색은 점
정은은 평소처럼 담담한 목소리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수아는 참다못해 방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조 교수님 뵌 적 있어?” “네, 만찬 자리에서요... 같이 돌아왔죠.”“그, 그다음엔...?”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다급하게 물었다.“그다음이요?” 정은은 눈썹을 찌푸리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돌아온 이후에, 조 교수님이 너한테 다시 안 오셨어?” 정은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수아를 몇 번 훑어보았다. “이 시간에, 조 교수님이 저를 찾아올 이유라도 있나요?”“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수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하지만 정은은 수아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다가,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선배님 지금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설마... 조 교수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그 말과 동시에 정은은 재석이 있는 맞은편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수아는 재빨리 정은을 붙잡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조 교수님은 분명히 쉬고 계실 텐데, 괜히 방해해서 뭐 하려고?” “그럼 방금 말한 건... 도대체 뭐예요?” 정은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그, 그냥 물어본 거야. 조 교수님이 혹시 너한테 들렀나 해서. 왜, 안 돼?” 수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서 자기 방으로 걸어가 버렸다.걸으면서도 투덜거렸다. “진짜 피곤하게 굴어. 피해망상 있는 거 아냐...?”‘더 말하다간 내 표정에서 다 티 날지도 몰라... 소정은, 눈치는 또 왜 이렇게 빠른 거야.’수아는 차마 더 머물 수도, 더 물을 수도 없었다. 정은의 방에 들어갈 기회를 찾기는커녕, 지금은 그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정은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욕실로 향했다.욕실 안, 커다란 욕조는 이미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수도꼭지는 아직도 틀어져 있었고, 넘친 물은 욕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상태였다.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정은은 물을
정은은 남자의 이런 반응이 처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지금 재석의 몸에서 느껴지는 변화가...그게 어떤 감정의 결과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설마...’“그렇게 오래 있었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었어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있는 재석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들려온 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고 힘없는 목소리였다. “응...” “그럼, 선배님... 난...” 정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쩐지 숨이 막히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정은아... 나가줄래?” 재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잠시 뜸을 들인 후,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이런... 비참한 모습, 너한테 보이고 싶지 않아.”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부탁이야...”그 말에 정은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알겠어요.”조용히 욕실을 나서며, 문을 부드럽게 닫았다. 그 순간,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참자, 참아야 돼...’정은은 견딜 수 없었다. ‘저 남자... 지금 나한테 애원하고 있잖아.’ ‘자존심이라도 남기고 싶어서, 나한테 부탁하고 있잖아.’ 그래서, 정은은 뒤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욕실 안, 문이 닫히자마자 재석의 굳어 있던 등이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그대로 물 속으로 몸을 맡기며, 다시 깊숙이 침잠해 버렸다. 차가운 물이 사지를 감쌌지만, 몸 안에서 타오르는 열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아니야... 아까, 잠깐이었어. 정은이가 손을 댔을 때... 그때는 분명...’정은의 그 손길에서 전해졌던 미묘한 시원함, 재석은 그 순간만큼은 분명 조금 나아졌었다. 그걸 느꼈기에, 그는 오히려 더더욱 참기 힘들었다. 그게 얼마나 달콤했는지 알기에, 지금 이 고통은 배가 됐다. ‘이 상태로 정은이를 곁에 두면... 분명 난, 감당 못 할 거야.’ 재석은 다시 머리까지 물에 담갔다. 시야는 가려지고, 숨결은 끊겼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정은
“왜... 그러세요?” 정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남자의 손바닥은 너무 뜨거웠다. 마치 불에 달군 듯한 쇠가 손목을 감싸는 순간, 그 열기가 피부를 타고 전해져왔다. ‘이건... 단순한 열 아니야.’ “정은아, 너...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아?” 재석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묘하게 짙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정은은 한 손에 든 해열 패치를 흔들며 말했다. “선배님의 이마에 해열패치를 붙이려고요. 이게 문제라도 되나요?”재석의 시선이 깊어졌다. “지금 넌, 약 먹은 남자를 곁에 두고 있는 거야.”“그래서요...?” 정은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위험할 수 있어.”“선배님, 날 위험하게 만들 거예요?” 정은의 반문에, 재석은 씁쓸하게 웃었다.“나... 생각보다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야. 이런 상태에선...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가 정은의 손목을 붙잡은 순간, 말랑하고 차분한 감촉이 손끝에 번졌다. 마치 고운 비단처럼 스치는 그 감촉은 도리어 더욱 강한 갈증을 불러왔다. ‘더... 갖고 싶어졌어. 손목만으로는 부족해. 그 이상을 원해.’하지만, 정은이 나직이 말했다. “아니에요.” 재석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뭐?” “선배님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에요. 정말로 선을 넘었을 거였다면, 아까 욕실에서 이미... 그렇게 됐겠죠.”재석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정은은 아무 말 없이 해열 패치를 꺼내 남자의 이마에 붙였다.“좀 괜찮아졌어요?” “응, 약 먹었으니까 곧 나아질 거야.”“그, 그거 말고요.” 정은은 살짝 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열 말고... 그쪽 말이에요. 몸 상태는... 좀 가라앉았어요?”재석의 얼굴은 이미 붉었지만, 그 순간엔 귀까지 활활 타올랐다. “너... 그거, 들었어?” ‘설마... 그 소릴 들었단 말이야?’‘얼마나 들은 거지?’ ‘혹시 나를... 더럽다고 생각했다면...’재석의 입술이 움찔거
경찰 쪽의 출동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호텔 측도 연락을 받자마자 즉시 직원을 보내 협조에 나섰다. 양쪽이 제일 먼저 한 건 재석이 머물던 객실을 출입 통제하고, 실내 공기 샘플을 채취하는 일이었다.이후 호텔 총지배인과 함께 보안실로 이동해 CCTV 영상을 직접 확인하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이런 소란이 벌어졌으니, 구경하러 몰려드는 투숙객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호텔 직원들의 빠르고 능숙한 대응 덕에 곧 정리되었다....그 와중에 재석 옆방, 수아의 방은 단 한 번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궁금해서라도 문 열고 한 번쯤 내다보지 않겠는가? 하물며 ‘잘 아는 조 교수’가 쓰러졌다면 더더욱.피하려는 티가 너무 나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그런 태도는 더 수상할 뿐이었다. 하지만 수아는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챌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 그녀는 그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방 안을 종횡무진 오가며, 말 그대로 뜨거운 철판 위에 떨어진 개미처럼 불안과 초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등줄기는 땀으로 흥건했고, 입가는 경련이 난 듯 떨렸으며, 손의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정은과 얘기하고 나서 돌아온 뒤부터 수아의 가슴은 한시도 가라앉지 않았다. 몇십 분이 지났는데도, 옆방은 너무 조용했고, 마치 재석이 그 방 안에서 증발이라도 한 것 같았다.그리고 경찰이 도착했다.도어 스코프로 제복을 본 순간, 수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경, 경찰? 누가, 누가 신고를? 설마...’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정은은 방에서 나온 재석이 경찰과 정식으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을 본 순간, 마지막 남은 한 줄기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진짜 신고했어... 조 교수가... 직접...’‘어떡해... 이러다 경찰이 나까지...’절망감에 휩싸인 수아는, 침대 위에 던져져 있던 핸드폰을 불현듯 바라보았다. ‘전화해야 해. 지금 이대로면 안 돼.
수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불안해졌다. 그녀는 마치 정신 잃은 파리처럼 방 안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의심하면 어때? 네가 입 다물고 있으면, 증거는 없어. 결국엔 풀어줄 수밖에 없어.]그 말을 듣자, 수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정하기 시작했다.“그 약... 도대체 뭐야? 순도가 높고 효과도 강하다고 했잖아. 근데 조재석은 멀쩡해 보이던데?”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쪽이 대답했다.[질문이 너무 많네.]수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한 가지만 분명히 해두자. 우린 협력 관계야. 말투 좀 조심하지 그래?”[하... 말투? 협력 관계라 했지? 좋아, 그럼 하나 묻자. 넌 뭘 했는데? 약은 내 거고, 약을 넣은 것도 내가 보낸 사람이야.][넌? 목욕하고, 옷 벗고 조재석이랑 자는 게 다였지? 웃기지 마. 날로 먹으려다 다 망쳐놓고, 지금 나한테 협력을 운운해? 네가 감히?]그 모욕적인 말에 수아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분노했다.“너... 대체 누구야? 뭘 원하는 건데? 피해자인 척하지 마. 너도 결국 나를 이용해서 조재석을 치려고 한 거잖아! 우리 둘 다 깨끗한 거 없어!”[쳇, 멍청한 것.]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수아는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야! 뭐?! 누가 멍청하다는 거야?! 말해봐! 여보세요?!”[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를 바랍니다.]‘없는 번호?’수아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췄다. ‘그 사람이 전화를 끊고 내가 다시 걸기까지는 고작 몇십 초...’ ‘그 사이에 유심을 빼고 번호를 없애버린 건가?’‘이 사람... 대체 정체가 뭐야?’ ‘그리고... 그 약은...?’...한편, 재석은 2층 방으로 가지 않고, 아직도 정은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그래도 내가 2층에 가는 게 낫겠지?”정은은 체온계를 내려놓고 말했다.“지금 선배님의 체온 몇 도인지
정은은 벌떡 일어나 재석에게 달려갔다.남자의 눈은 꼭 감긴 채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소리는 거칠기 그지없었다.“선배님? 선배님... 제 말 들리세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재석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좀처럼 뜨이지 않았다.“선배님! 제발 깨어나세요!”간절한 외침 끝에, 재석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정은아?”“하...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어요...”정은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찰나, 갑자기 재석의 손이 뻗쳐 나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거센 힘으로 당기더니 그녀는 고스란히 재석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이었다.“꺅...!”‘지금... 뭐야 이게?!’“정은아...”남자의 숨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거칠게 들려왔다.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둘이 몸이 너무 가까워서, 마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서로를 녹일 것만 같았다. “읏...”재석이 저도 모르게 신음하듯 소리를 내뱉었다.정은의 온몸이 굳어버렸다.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정신이 흐려진 듯한 재석의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설마, 약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된 거야?’정신을 다잡은 정은은 바로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재석을 밀어 침대 쪽으로 눕힌 후, 온몸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그러고는 한 손으로 이마에 손을 얹었다.“앗!!!”뜨거운 열기에 놀란 정은이 입을 틀어막았다.‘이건... 단순한 열이 아니야. 열기가 심하게 오르고 있어...’“선배님! 제 말 들려요? 정신 좀 차려봐요! 선배님!”하지만 재석은 계속해서 중얼댔다.“정은아... 정은...”단지 이름을 부를 뿐인데, 묘하게 끈적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그 숨소리와 어우러지니, 괜히 귀가 달아오르는 듯했다.‘하... 미치겠네. 이 분위기 뭐야...’정은은 괜히 고개를 숙였지만, 시야에 들어온 건, 벌어진 가운 틈 사이로 드러난 재석의 단단한 상체.잘 정리된 근육, 그리고 땀으로 촉촉이 젖은 피부.‘어?!’‘눈을 어디에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