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늦은 오후의 햇살이 흐릿하게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창밖을 물들인 주홍빛은 조금씩 푸르스름한 어둠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스며든 바람은 계절의 경계를 흔드는 듯, 낯설고도 익숙한 기운을 남겼다.
유리는 사무실의 불을 끄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서류뭉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 익명으로 전달받은 이 파일의 존재는
새벽으로 넘어가는 도시의 숨결은 느리고 조용했다.가끔 스치는 바람이 가로수 가지를 흔들며 잎을 떨구었고,그 잎이 땅에 닿는 소리마저도 누군가의 한숨처럼 느껴지는 고요한 거리.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기 속을 유리는 이우와 함께 천천히 걷고 있었다.긴 말을 하지 않았다. 말보다 감정이 먼저였고, 감정보다 앞선 건 눈빛이었다.그녀의 걸음은 조금 느렸고, 그 느림은 결코 불안도, 두려움도 아닌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의 호흡처럼 묵직하고 조심스러웠다.이우는 그녀의 옆에서 말없이 걷고 있었다.그는 자주 그런 방식으로 그녀를 이해했다.말을 묻지 않고, 대신 호흡을 맞추는 방식.
늦은 밤의 공기는 말수가 적었다.차가운 바람이 지하철 출입구 근처를 스치고 지나갈 때,사람들의 걸음은 바쁘지만 서로를 보지 않았고, 모두가 무언가를 향해 걷고 있었지만정작 어디로 가는지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 시간.유리는 그 한복판에 조용히 서 있었다.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고, 긴 코트 자락이 허공을 가르듯 미세하게 펄럭였다.손은 두 주머니 안에 감춰져 있었고,가슴 깊은 곳에서 느릿하게 올라오는 긴장이 목구멍 아래 어디쯤을 조용히 조이고 있었다.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낯익지 않은 얼굴, 그러나 사진으로만 보아온 실루엣.강도훈은 짧은 눈인사를 건넨 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근처의 작은 공원이었을까.가로등이 간헐적으로 불을 비추는 벤치에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사람의 그림자가 적은 그 공간에, 두 인물의 기척만이 조용히 눌어붙어 있었다.“당신이 왜 날 찾아왔는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습니다.”강도훈의 첫 마디는 피하지도, 그렇다고 맞서지도 않는 묘한 중립의 톤이었다. 무책임할 수도 있고, 혹은 책임을 감당할 각오일 수도 있는 애매한 거리.“유진 언니와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사람이 당신이었다는 것, 알고 있어요.”유리의 말은 담담했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침잠한 울림이 있었다.그 울림은 한때 언니를 사랑했을지도 모를 이 남자를 조용히 베어내는 날 선 물결 같았다.강도훈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그리고 천천히 고백처럼 말하기 시작했다.“그날… 난 그녀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하지만, 그 무너짐의 원인이 내가 될 줄은… 몰랐어요.”그 말의 끝에는 자신조차 끝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감돌고 있었다.“그녀가… 임신한 걸 알게 됐을 때,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그녀는 말하지 않았고, 난… 묻지 않았어요.”유리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그녀의 눈동자는 어두운 밤 안에서도 또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왜요. 그렇게 사랑했다면, 왜 묻지 않았죠?”“그게,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하늘의 색이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서 망설이듯 번지고 있었다.쥐죽은 듯 고요한 도시의 공기는 어딘가 눅눅하게 젖어 있었고,창가에 맺힌 이슬은 아직 태양을 받아들이기 전의 불완전한 투명함을 띠고 있었다.그날 아침, 유리는 창가에 서 있었다.손끝에는 어젯밤 호텔 방에서 발견한 사진 한 장이,그리고 마음 안에는 유진이라는 이름이 남긴 마지막 조각이 뚜렷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강도훈.’이름은 너무 평범했고, 그래서 오히려 더 무섭게 다가왔다.수많은 사건의 중심에서 늘 그림자처럼 비켜서 있던 존재.그러나 이제, 그는 기억 저편의 무게로 다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도심의 경계를 쓸고 지나가던 새벽이었다.잠들지 못한 밤이 끝나고, 그 어스름한 경계에 첫 빛이 깃들 무렵,도시는 잠시 모든 소리를 지운 채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건물과 건물 사이로 번지는 먼빛 속에서,긴장을 꾹 눌러 삼킨 채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늘어지고 있었다.유리는 검은색 코트를 여며 입고 조용히 걸었다.그녀의 시선은 앞으로 향해 있었지만,의식은 자꾸만 몇 해 전으로, 유진이 마지막으로 사라졌던 날의 오후로 미세하게 되감겨 가고 있었다.‘언니,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그녀의 마음속에는 수없이 반복된 질문이 있었고,오늘은 그 답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조금씩 그녀의 숨을 조이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흐릿하게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창밖을 물들인 주홍빛은 조금씩 푸르스름한 어둠으로 변해가고 있었고,그 사이사이로 스며든 바람은 계절의 경계를 흔드는 듯, 낯설고도 익숙한 기운을 남겼다.유리는 사무실의 불을 끄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서류뭉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며칠 전, 익명으로 전달받은 이 파일의 존재는 처음엔 단순한 협박의 흔적처럼 느껴졌다.그러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녀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이건 협박이 아니라 경고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이름 하나‘강도훈.’처음 보는 이름이었다.하지만 서류 속에서 이 남자는 유진이 사라지기 전날 마지막으로 만난 인물이었다.
하루가 길게 늘어진 끝자락에서, 태양은 조용히 기울고 있었다.창밖은 어느새 적막한 주홍빛에 잠겨 있었고,건물 외벽을 타고 내리는 빛의 결조차도 마치 오래전 기억처럼, 조용히 흐려지고 있었다.그날의 저녁, 유리는 그 창 앞에 앉아 있었다.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하지만 마음속에선 온갖 조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엉켜 있었다.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건 오직 자신의 숨소리뿐.그리고 그 숨 사이, 잊고 싶었던 이름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서인국.’그 이름은 언니의 삶을, 그리고 죽음을 뒤틀어놓은 중심이었다.조유진이라는 한 여자의 마지막을,하나의 스캔들이라는 이름 아래 침묵시켜버린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