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너무 위험한 여자 / Chapter 1 - Chapter 10

All Chapters of 너무 위험한 여자: Chapter 1 - Chapter 10

33 Chapters

1. 언니가 죽었다.

비는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구급차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유리는 택시 창밖을 보며 흐려지는 시야를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는 단 한 문장이었다."가족분이시죠? 지금 바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조유진. 유리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여러 번 굴려보았다. 살아 있는 동안, 언니의 이름을 그렇게 또박또박 마음속에 되새긴 적이 있었던가. 지금은, 이름의 모양이 너무 선명해서 아팠다.도착한 병원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응급실은 소란스러웠지만, 그녀가 안내받은 복도는 정적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비닐 커튼이 희미하게 흔들릴 뿐, 사람들의 말소리도 발소리도 공기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유리는 안내를 따라 천천히 걷다가, 문득 발끝이 멈췄다.자동문 너머, 하얀 천 아래로 누워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시트가 걷히고, 언니의 얼굴이 드러났다.조유진. 차가운 이마, 닫힌 눈, 말라버린 입술. 그토록 자주 웃던 입꼬리는 완전히 굳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얼굴이,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유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목 안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삼키느라 이가 맞부딪혔다.“가족분이시죠.” 의사의 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조심스레 건네받았다. 유진의 검사기록이었다. 그는 말을 고르듯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참… 이건, 꼭 전달드려야 해서요. 임신… 8주차였습니다.”임신.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마치 바닥이 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두 귀가 순간적으로 먹먹해졌고, 의사의 입술만이 허공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무언가 말을 이어갔지만, 유리는 듣지 못했다.언니는 아이를 갖고 있었다. 누구의 아이인지, 어떻게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해한 사람처럼. 하지만 눈은 흐리지 않았다. 그 감정은 눈물보다 훨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

2. 의도적 기시감

유리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빗소리가 방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방 안은 조용했다. 유진의 방이었고, 이제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는 언니가 매일 아침 메이크업을 하던 자리였다.거울 속 얼굴은 어정쩡했다. 아직 울음이 가시지 않은 눈, 푸석한 피부, 잡히지 않는 윤곽. 그녀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언니보다 못났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 말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유진은 어디서나 주목받는 사람이었고, 유리는 그늘이었다.하지만 그날 이후, 그녀는 그늘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복수를 하려면, 사랑받아야 했다. 사랑받으려면, 매혹적이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벽해야 했다.유리는 결심했다. 이 얼굴로는 안 된다고. 지금의 자신은, 언니를 죽인 그 사람 앞에 설 수 없다고.“전부요.”성형외과 상담실, 유리는 거울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눈, 코, 턱. 의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유리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미 죽은 언니의 무게가 그녀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있었다.수술은 아팠다. 상상보다 훨씬. 전신이 얼얼했고, 거울을 보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견뎌야 했다. 고통은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었다.밤이면 눈을 감고 상상했다. 언니가 죽던 장면, 마지막으로 들려준 목소리, 그리고 그 남자의 얼굴. 얼굴은 아직 본 적도 없지만, 그의 존재는 선명했다.유리는 낮에는 병원, 밤에는 헬스장에 있었다. 운동을 시작한 건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눈빛 때문이었다. 분노가 몸 어딘가에 고여 있으면, 눈빛이 흐려지니까. 땀이 나야 잡념이 빠졌다.조금씩 그녀는 바뀌었다. 체형이 달라졌고, 자세가 달라졌다. 말투도 바꿨다. 목소리는 낮게 깔았고, 눈은 오래 마주치지 않았다. 그 모든 변화는 한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한 연기였다.화장대 앞에 앉은 유리는 립스틱을 꺼냈다. 선홍색. 유진이 좋아하던 색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그보다 더 짙은, 피와 비슷한 톤을 골랐다. 치명적인 것을 입어야,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

3. 낯선 여자, 낯익은 기척

서이현은 느긋한 걸음을 자주 걸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리듬을 그 혼자만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늘 여유롭고 방심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 하지만 그날, 그는 멈췄다.빨간 코트, 검은 하이힐. 그리고 정면에서 다가온 여자. 그는 그녀를 모른다고 확신하면서도, 쉽게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요?”여자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상대를 흔들기보다, 묘하게 안착하는 음색이었다. 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무의식적으로. 어쩌면 방어적으로.“왠지…그대가 기억나진 않지만, 낯설진 않아서요.”그 말이 끝나고도 몇 초간, 두 사람은 마주 선 채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일부러 웃지 않았다. 친근함이나 호의가 아닌, 묘한 거리감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계산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보았고, 그 안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기가 흘렀다."미친놈..."유리는 그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음성으로 속사였고, 먼저 시선을 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스스로를 들켜버릴 것 같아서. 이현은 그대로 서 있었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게 간질거렸다. 이름도, 나이도, 아무 정보도 없는 여자. 그런데 왜. 왜 그 눈빛이 낯익다고 느껴졌을까.며칠 후, 또 우연히 마주쳤다. 이번엔 호텔 로비였다. 이현이 친구들과 저녁 약속을 마치고 나오는 길, 그녀는 혼자 서 있었다. 핸드백을 여는 동작도 느리고, 시선을 내리는 각도조차 절도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라고 부르기도 하죠.”이현이 말을 걸었다.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미소는 여전히 없었다.“그런 말, 자주 쓰세요?”“가끔요. 하지만 지금은... 써도 될 것 같은데요.”“그럼, 그렇게 하세요.”유리는 그 말만 남기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이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이름조차 모르는 여자에게 두 번 연속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

4. 본능적 소유

“차 한잔 하자는 말이, 그렇게 고민할 일이야?”이현은 언제나 상대의 흐름을 엉망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다.눈웃음을 머금은 말투, 농담과 진심 사이를 기어 다니는 얄미운 어조.하지만 정작 그의 표정엔, 말의 무게를 지탱하려는 책임 같은 건 없었다.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말을 고르는 게 아니라, 고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그 침묵에 이현은 웃음을 흘렸다.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뭐, 그 정도 관심도 못 끄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좀 과신했나.”유리는 그를 바라봤다.얼굴은 매끈했고, 눈매는 유려했지만, 그 속엔 그 어떤 온기도 없었다.그의 태도는 방탕했고, 그의 말은 가볍고, 그의 눈빛은 방심 그 자체였다.“그럼 됐고. 언젠가 마시고 싶을 때 연락이나 하시든가. 이름은 모르겠지만, 얼굴은 기억하니까.”이현은 말끝을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웃는 얼굴이 익숙하다는 듯, 아니 그보다, 자기 표정을 잘 아는 사람처럼 능숙했다.유리는 입꼬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가볍게 흔드는 사람은 가볍게 무너진다.그녀는 이미 그를 무너뜨릴 설계를 거의 완성한 상태였다.“내 이름, 알고 싶어요?”그 순간 이현의 움직임이 멈췄다.돌아선 고개가 천천히 그녀를 향했다.유리는 똑바로 그를 바라봤다. 미소도, 호의도 없었다.“와, 목소리는 매력 있네. 그거 하나는 인정.”칭찬 같지 않은 말을 대놓고 하는 태도.유리는 애초에 그에게 기대한 게 없었기에 놀라지 않았다.오히려 잘 작동되는 장난감처럼, 그의 반응은 예측 가능한 수준이었다.“궁금하면, 스스로 알아내요.”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이현은 무심하게 뒷모습을 훑더니, 입가에 조용히 혼잣말을 남겼다.“성격도 독특하네. 근데 좀 끌리긴 한다.”그날 저녁, 유리는 호텔 방에서 이현의 SNS를 다시 열었다.불필요하게 많이 찍힌 셀카, 파티, 클럽, 외제차, 와인, 무의미한 인맥과 무의미한 웃음.그는 가식 없는 허세로 무장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

5. 천천히, 확실하게 무너뜨려

카페는 비어 있었다. 오후 네 시, 사람도 음악도 없고, 창밖으론 겨울 햇살이 멍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유리는 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판도 보지 않은 채 손끝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문질렀다. 짧은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을 깨는 낯익은 목소리.“여기 분위기, 우리 둘 말고는 죽었네.”서이현.느긋하게 웃으며 걸어온 그는 여전히 손 하나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자신감은 여유로 위장하고, 무례는 농담으로 바꾸는 사람이었다.“근데, 그게 더 좋지 않아요?”유리는 맞받아치지 않았다.이현은 말하면서도 상대방이 무슨 감정으로 있는지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었다.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말을 꺼내는 게 아니라, 자기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말하는 남자.“당신, 처음 봤을 땐 좀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눈빛이 좀 독해서.”“그럼, 안 마주쳤으면 좋았겠네요.”“근데 묘하게 좋더라고요. 그런 거.”그는 무심한 척,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계속 말을 던졌다.유리는 그의 언어가 무너지는 타이밍을 계산 중이었다.단순히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유도하는 방식으로.“이름은 아직 안 알려줄 거예요?”“그쪽은요?”“서이현.”유리는 눈썹도 움직이지 않았다.드디어. 드디어 그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전… 나중에요.”“어려운 사람이네.”그가 웃었다. 대책 없는 미소였다. 그리고 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는 지금,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모른다.아니, 흔들린다는 감정을 ‘흥미’라고 착각하는 중일 것이다.“그런데 말이에요.”이현은 컵을 들며 말을 이었다.“나는 원래 사람 얼굴 잘 기억 못 하거든요. 근데, 당신 얼굴은 자꾸 떠올라요. 그게 좀 웃겨요.”유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웃긴가요?”“아니, 신경 쓰여서 웃긴 거죠.”그의 눈빛이 진지해지려는 찰나, 유리는 시선을 돌렸다.그에게 진지함을 허락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그는 진심을 꺼내면 지게 될 남자였다.“지금은 신경만 쓰세요.”“그럼 나중엔?”“그건 그쪽 하기 나름이죠.”카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

6. 불꽃은 조용히 타오른다

자정이 지나도록, 이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핸드폰 화면은 1분 단위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액정은 그의 초조함을 여과 없이 비춰냈다.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다.원하면 얻을 수 있었고, 다가가면 반응이 있었던 세상 속에서,그녀는 유일하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여자였다.그러니까, 더 끌렸다.‘이름조차 알 수 없는 여자.’그 말은 마치 독처럼 이현의 머릿속을 반복해서 스며들었다.그녀의 얼굴, 그녀의 말투, 그녀의 눈빛…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떠올랐다.그리고 그 불안한 끌림이 그에게 처음으로 어떤 감정을 깨우고 있었다.한편 유리는 그 시간, 자정이 넘은 자택에서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모니터 속엔 로스쿨 수험자료가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엔 검찰시험 예상 스케줄이 띄워져 있었다.그녀의 복수는 단발적이어선 안 된다.처벌은 반드시, 법의 이름으로. 이현에게 언니를 죽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그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릴 증거로 만들어야 했다.그것이 그녀가 법을 선택한 이유였다. 검사가 되는 것,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라 목적이었다.지금은 잠시 ‘그의 이상형’인 여자의 탈을 쓰고 있지만,결국 마지막 순간엔 ‘조유리 검사’라는 이름으로 그를 마주설 것이다.복수는 반드시 정의로 위장되어야 한다.그때야말로, 그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질 것이다.다음 날 오후, 이현은 유리를 보기 위해 일부러 자주 가는 라운지를 찾았다.이번엔 어떤 구실도 붙이지 않았다. 그저 보고 싶었다. 그것뿐.“자주 오시네요.”유리는 이미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목소리는 담담했고, 감정은 걸러져 있었다.“솔직히 말하면… 그냥 기다렸어요.”이현은 가볍게 웃으며 고백했다.유리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건 입술 끝만 올린 형식적인 웃음이었다.“기다리면 보상이 있을 거라 생각하셨어요?”“당신은 그런 여자잖아요. 예측하기 어렵고, 무슨 룰이 있는 것 같고.”“그럼 이제 어떤 룰인지 알겠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

7. 조작된 온도

그의 집은 고급 펜트하우스였다.유리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이현의 사치와 허세는 그에겐 정체성 같은 것이었으니까.와인, 음악, 조명.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 했지만,그의 말투와 행동은 조심스러워졌고, 눈빛은 자꾸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초대했잖아요.”“근데… 진짜 올 줄 몰랐거든.”유리는 웃지 않았다.대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왜요? 제가 당신한테 너무 어려운 여자라서?”“아니, 너무… 신경 쓰이는 여자라서.”이현은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그리고 한참 뒤, 유리는 잔을 들고 조용히 물었다.“정말… 신경 쓰여요? 그 정도로?”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생각나요.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매일.”그 말은 고백 같았지만, 유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대신,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할게요.”“벌써 가요?”“당신과 더 있으면 오늘 밤을 넘길 것 같아서….”유리의 그 말이 너무 매혹적이고, 강한 유혹을 암시했지만, 이현은 붙잡지 못했다.문을 열고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자신이 지금 어떤 게임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 채,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그녀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작은 미소를 지었다.입꼬리 끝에 스친 감정은 동정도, 연민도 아니었다.예정된 무너짐. 그것을 설계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냉정한 웃음이었다.이제 반쯤은 넘어왔다. 그리고 난, 절반에선 절대 멈추지 않는다.이현은 요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는 자신이 낯설었다.새벽 두 시. 욕실 불빛 아래 비친 얼굴은 평소보다 수척했고, 눈가에는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그녀와 만난 이후, 그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하루의 대부분이 그녀를 중심으로 재편됐고,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결정하는 데만 한 시간을 쓰기도 했다.평소라면 미련하다고 치부했을 행동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고 있었다.그는 몰랐다. 그가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

8. 감정의 방치

며칠 뒤, 유리는 그를 직접 만났다. 카페는 조용했고, 사람은 거의 없었다.그녀는 늦게 도착했고, 이현은 그보다 훨씬 일찍 와 있었던 눈치였다.“기다렸어요?”“아니요, 그냥… 일찍 도착했어요.”그는 그녀를 보며 애써 웃었지만,그 웃음 뒤로 묘한 불안이 드러나 있었다.“요즘 어때요?”그녀가 물었다.이현은 순간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솔직히… 별로예요. 뭔가 계속 허전하고, 생각 많고.”“저 때문이에요?”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닿았다.“네.”짧은 대답. 그 안엔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도 미소를 짓지 않았다.“그럼, 계속 그렇게 두죠.”그 말에 이현은 숨을 멈췄다.“계속 그렇게…?”“생각하게 두고, 기다리게 두고, 애타게 두고.”그녀의 말투는 차분했고, 감정 하나 얹지 않은 목소리였다.그는 그 앞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날 밤, 유리는 침대에 누워 스스로에게 다짐을 남겼다.[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다. 그를 무너뜨리는 것도, 내가 무너지는 것도, 동시에 시작될 수 있다.]그리고 다음 줄엔 이렇게 적었다.[조유리. 잊지 마. 너는 검사가 될 여자다.그리고 그의 입에서 자백을 받아낼 여자다.]불 꺼진 방 안.그녀는 눈을 감고 한 번 더 다짐했다.“끝까지, 흔들리지 말 것.”이현은 요즘, 자신이 말수를 줄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무리해서 웃지도 않았고,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평소처럼 ‘놀고사는 놈’으로 보이기엔, 내면이 너무 고요했고, 너무 시끄러웠다.그녀에게 보내는 문자 횟수는 점점 늘어났고,답장은 여전히 짧았다. 하지만 그는 더 많은 말 대신,그녀의 반응 하나를 곱씹는 데 하루를 쓰고 있었다.[오늘은 뭘 하고 있어요?] [다음에 봐요.] [좋은 하루 보내요.]“다음에, 다음에, 다음에…”이현은 혼잣말을 중얼이며 창밖을 내다봤다.비가 올 듯, 맑은 듯, 우울한 하늘. 그의 머릿속도 그랬다.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

9. 틈이 생기는 자리

이현은 요즘 잠드는 데 두 시간이 걸리고, 잠든 뒤엔 두 시간마다 깬다.밤은 너무 길고, 낮은 너무 짧았다.그가 느끼는 유리는, 정확히 손에 닿지 않는 거리만큼의 여인이다.너무 가까우면 놓칠까 두렵고, 너무 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운.오늘도 그는 다섯 번째로 휴대폰 화면을 켰다.그녀의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지만,그는 답장을 받지 못하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있었다.익숙함이 아니라, 체념처럼.[오늘은 좀 많이 생각났어요. 당신.]그는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리고는 핸드폰을 천천히 엎어두었다.답장은, 내일쯤이면 올 것이다.그는 그것조차 알고 있었다.유리는 메시지를 읽고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화면만 켜서 확인하고, 손끝으로 화면을 천천히 내렸다.그가 보낸 이전 메시지들도 차례차례 다시 읽었다.그는 이제 거의 다 무너졌다.말끝마다 감정을 흘리고, 보내는 말마다 해답을 바라고 있었다.유리는 노트북을 열어 ‘사건 일지’를 새로 정리했다.[단계 3 – 과거 유도 / 사건 언급][이현 심리: 애정 → 의존 → 두려움 → 죄책감 흐름 유도]그녀는 커서를 깜빡이는 메모 위에 조용히 타이핑을 시작했다.[그가 불안해지기 시작한 시점은 나의 침묵 이후. 그는 대답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고백을 통해 통제권을 되찾으려 할 가능성 높음. 그 순간을 역으로 사용한다.]며칠 뒤, 유리는 다시 그를 만났다.이번에는 그가 아니라 그녀가 먼저 제안한 약속이었다.카페는 한산했고, 창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이현은 머리카락이 다 젖은 채로 도착했다.“왜 우산 안 써요?”유리가 물었다.그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냥… 뛰어오느라.”그는 웃으면서도,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눈빛이었다.피곤해 보였고, 초조해 보였다.그녀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 말했다.“요즘 무슨 생각해요?”“당신 생각이죠. 뭐, 달라질 게 있나요.”“그 전엔요. 나 만나기 전에는요.”그의 눈빛이 흔들렸다.“그건 왜 물어요?”“그냥 궁금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

10. 감정적 자백

“임신했어요.”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고, 말없이 내민 진료 기록은 현실을 박았다.그는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 한 번도 핸들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그리고 그날 밤, 그 여자는 사고를 당했다.‘내가 죽인 건 아닐 거야.’‘아무도 나보고 책임지라 하지 않았어.’‘그냥… 불행한 우연이었잖아.’그는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아니, 믿고 싶었다.하지만 유리의 말이, 유리의 시선이 그 기억을 다시 꺼내고 있었다.일주일 만에 유리는 메시지를 보냈다.[보고 싶네요.]이현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답장을 보냈다.[언제든요. 지금도 돼요. 꼭 봐요.]그날 밤, 두 사람은 다시 마주 앉았다.이현은 말없이 유리를 바라보다,처음으로 스스로 말을 꺼냈다.“내가… 당신에게 뭘 숨기고 있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냥… 그런 기분이 자꾸 들어요.내가 무슨 잘못을 했고, 그게 당신한테 곧 들통날 것 같은 이상한 예감 같은 거.”유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그건 예감이 아니라, 기억이에요.”그 말에 이현은 숨을 멈췄다.그녀는 처음으로 조용히 그의 손등을 덮었다.“그 기억, 언젠간 말하게 될 거예요. 자기 입으로.”그날 이후, 유리는 자신이 계획한 것보다 빠르게이현의 안에서 죄의식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지금은 되묻지 않아야 했다.묻는 순간, 그는 다시 방어적으로 변할 수 있다.지금은 조용히, 더 조용히 조이는 시간이었다.다이어리에는 단 한 줄만 적었다.[자백 직전 단계. 그는 과거를 잊지 않았다. 그는 그걸 알고 있다.]이현은 자신의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는 걸, 늦게서야 자각했다.그녀와 나눈 짧은 말 한마디, 스친 손끝의 체온,그 모든 게 머리가 아닌 심장과 폐를 먼저 흔들고 있었다.유리가 말없이 떠났던 일주일.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핸드폰을 들었다 놨고,메시지를 보내놓고 다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
PREV
123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