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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이 부러질 듯 시큰거릴 때마다 윤채아는 낡은 운동화 끈을 더 세게 조여 매곤 했다.
가장자리가 닳아 헤진 스파이크 밑창, 뒤꿈치가 터져 나간 낡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을 신고 얼마나 많은 트랙의 흙먼지를 뒤집어썼는지 셀 수도 없었다.
남자 100미터 10초 23, 국가대표 스프린터 차도현.
그 눈부신 이름이 서서히 어둠에 잠겨 갈 때, 그의 곁을 지키며 7년을 보낸 것은 채아였다.
시력이 떨어져 혼자서는 레인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도현을 위해 새벽마다 손목 끈을 쥐었다. 그가 다시 달릴 수만 있다면 제 하루쯤 갈아 넣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고 믿었다.
원정 숙소를 잡고, 보조 장비를 챙기고, 치료비와 진행비가 모자라면 밤마다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채아야, 넌 괜찮아?"
도현이 어두운 눈을 깜빡이며 물어올 때마다, 채아는 늘 바보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선배, 난 당연히 괜찮죠. 내 걱정은 말고 내일 훈련 리듬이나 생각해요."
괜찮다는 말은 편리했다.
그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동안 채아의 이름은 국가대표 선발전 명단에서 영원히 지워졌고, 무리한 보조 주행으로 발목 인대는 회복 불능으로 닳아 없어졌다.
스물여덟의 초겨울. 지하 월세방 탁상달력 한구석에는 몽당연필로 눌러 쓴 마지막 메모가 남아 있었다.
‘다음엔 내 경기도 준비해야지.’
그러나 다음은 오지 않았다.
도현의 사촌 에이전트의 밀린 잡무를 밤새 정리하고 돌아오던 복도 끝에서, 채아의 심장은 뚝 멎어 버렸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뺨이 닿는 순간까지도 채아는 제 손목에 묶여 있던 붉은 끈의 서글픈 감각을 떠올렸다.
그렇게 모든 것이 비참하게 끝난 줄 알았다.
***
"야, 윤채아! 멍하니 서서 뭐 해? 서민경 코치님이 스타트 기록표 가져오래!"
귀를 찌르는 외침과 함께 폐부로 밀려든 것은 쓰러졌던 복도의 퀴퀴한 냄새가 아니었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봄바람.
햇빛을 받아 뜨겁게 달아오른 붉은 우레탄 트랙의 고무 냄새와 운동장 특유의 싱그러운 흙내음이었다.
채아는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제자리에서 휘청거렸다.
"허억……!"
"어라? 채아야, 얼굴이 왜 그렇게 하얗게 질렸어? 어디 체하기라도 한 거야?"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형광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이진희였다. 서한체육대학교 육상부 동기.
분명 5년 전 실업팀에 입단하며 연락이 뜸해졌던 친구가 스물한 살의 생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채아는 떨리는 손으로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군살 없이 단단하게 다져진 탄력 있는 종아리. 바닥을 굴러 보아도 뼈마디를 갉아먹던 만성 염증과 끔찍한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스마트폰 액정에는 선명한 날짜가 떠 있었다.
[2024년 4월 7일 일요일 13:42]
스물한 살. 서한체육대학교 2학년의 봄이었다.
‘돌아왔어…… 내가, 정말로 다시 시작하는 거야?’
꿈인가 싶어 뺨을 꼬집자 얼얼한 통증이 생생하게 번졌다.
"채아야, 목타면 물이라도 마실래?"
진희가 가리킨 벤치로 다가가 물병을 낚아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푸하앗! 쿨럭, 쿨럭!"
"야! 그거 내 레몬맛 전해질 음료야! 네 파란 보냉병은 저기 있잖아!"
진희가 기겁하며 등을 찰싹 두드렸다. 새콤한 전해질 음료가 목구멍을 찌르는 순간 기침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쿨럭, 아하하…… 미안, 목이 너무 타서."
살아 있다는 감각이 온몸의 세포마다 피어올랐다. 숨이 온전히 쉬어졌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4월 7일이라는 날짜가 머릿속을 벼락처럼 스쳤다.
춘계 대학 육상 선수권 겸 국가대표 1차 선발전 참가 신청 마감일. 마감 시각은 오늘 오후 5시였다.
전생의 이날, 채아는 신청서를 내지 못했다.
선배 최수아가 ‘졸업 앞둔 4학년들한테 양보하는 게 관례’라며 서류를 가로막았고, 마정호 감독도 ‘팀 화합을 위해 이번엔 양보하라’며 어깨를 두드렸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시야가 흐려져 공포에 떨던 차도현의 방으로 불려 가 적응 훈련을 돕느라 제 인생의 가장 찬란했을 출발선을 스스로 날려 버렸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양보 안 해.’
채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남의 인생을 대신 뛰어 주는 것으로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다시 쥐었다. 접수 마감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오늘은 제 이름부터 올릴 것이다.
"진희야, 나 본관 행정실 좀 다녀올게!"
"어? 서 코치님 기록표는?"
"행정실 다녀와서 바로 가져다드릴게!"
채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트랙을 박차고 달렸다.
타앙, 타앙!
스파이크가 아닌 일반 러닝화였음에도 지면을 차고 나가는 탄력이 놀랍도록 가벼웠다.
***
대회 접수 때문에 휴일에도 문을 연 체육지원 행정실. 벽걸이 시계는 14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채아? 무슨 일이야? 땀을 뻘뻘 흘리고."
"선배님, 춘계 대회 참가 신청서 내러 왔어요. 여자 대학부 100미터 단거리 개인전이요."
채아는 벽에 비치된 양식을 꺼내 능숙하게 볼펜을 놀렸다.
[소속: 서한체육대학교 육상부 / 성명: 윤채아 / 종목: 여자 100m / 공인 개인 최고 기록: 11초 48]
전생의 채아가 피눈물을 흘리며 포기했던 제 이름 석 자였다. 조교가 서류를 받아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4학년 최수아 선배가 여자 단거리는 자기가 취합해서 감독님 결재받고 낸다고 했는데? 너 수아 선배한테 말 안 하고 온 거야?"
전생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채아는 생긋 웃으며 또박또박 대꾸했다.
"이번 대회 참가 요강 확인했어요. 기준 기록을 통과하면 학교에 개별 신청서를 낼 수 있더라고요. 제가 직접 서명한 신청서로 접수해 주세요."
"어? 규정상으로는 그렇긴 한데……"
평소 고분고분하던 후배가 참가 요건을 짚어내자 조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아 선배 취합본이랑 겹치면 나중에 시끄러워질 텐데."
"겹치면 전산에서 중복 확인하고 제 자필 서명 본으로 확정해 주세요. 전 제 손으로 직접 내러 왔으니까요."
채아는 서류 하단에 정자로 서명했다.
"선배님, 접수 도장 지금 찍어 주시겠어요?"
똑 부러지는 태도에 조교는 마지못해 붉은 접수인을 쾅 찍었다.
‘접수 완료: 2024.04.07 14:18’
손바닥만 한 접수증 사본을 품에 꼭 쥐는 순간,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전율이 솟구쳤다. 전생에 맥없이 도둑맞았던 첫 번째 출발선을 드디어 제 손으로 되찾아 온 것이다.
***
대운동장으로 돌아왔을 때, 채아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운동장 한구석, 4레인 스타팅 블록 근처.
봄바람을 등지고 홀로 서 있는 커다란 인영이 있었다.
186센티미터의 균형 잡힌 체격. 짙은 흑발 아래 날카로운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
차도현이었다.
대한민국 단거리 육상의 독보적인 에이스이자, 전생의 채아가 7년 동안 청춘과 온몸을 바쳐 지키려 했던 사람.
도현은 스타팅 블록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겉보기엔 여전히 서늘하고 오만한 천재의 모습이었지만, 채아의 눈에는 뚜렷하게 보였다.
바닥의 흰색 레인 선을 내려다보는 각도, 초점을 맞추지 못해 미세하게 기울어지는 고개, 발끝으로 블록을 툭툭 차며 위치를 더듬는 불안정한 동작까지.
‘망막색소변성증…… 저때도 보이지 않는 걸 혼자 숨기고 있었구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저려 왔다.
달려가 "선배, 괜찮아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라고 묻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채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멈춰 섰다.
‘이번 생에는 네 곁에 있을게. 대신 내 출발선도 지킬 거야.’
채아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잔디밭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도현이 스파이크 가방을 메고 보조 경기장 지하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외 트랙의 눈부신 햇살에서 어두컴컴한 그늘막 통로로 들어서는 순간, 급격한 명암 차이에 도현의 발걸음이 크게 엉켰다.
통로 입구에는 수리 중인 철제 허들이 놓여 있었다.
터널처럼 시야가 좁아진 도현에게는 사각지대의 철골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발끝이 허들에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선배, 조심해요!"
채아가 달려가 도현의 옷자락을 낚아채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도현의 손이 벼락처럼 허공을 갈랐다.
파악!
거칠고 단단한 손이 채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정확하게 낚아챘다. 손목뼈가 얼얼할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앗……"
그늘 속에서 차도현의 검은 눈동자가 채아를 향했다.
초점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러나 사나운 맹수처럼 잔뜩 경계심을 품은 서늘한 눈동자였다.
도현이 숨을 죽인 채 낮게 으르렁거렸다.
"거기, 누구 있어?"
아침 7시 30분, 제주 서귀포 전지훈련 선수단 식당.전지훈련에 참가한 각 대학 육상부와 실업팀 선수들로 식당 안은 이른 아침부터 왁자지껄했다. 배식대의 갓 구운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와 계란 프라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고, 그 옆에는 신선한 과일 샐러드가 놓여 있었다.식판을 들고 테이블 구석 자리에 앉은 채아는 젓가락으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연신 헛기침을 삼켰다.맞은편에 앉은 차도현 때문이었다.도현은 언제나처럼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주변 테이블의 다른 대학 선수들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역시 서한체대 차도현 선배 포스는 장난 아니다"라며 수군거릴 만큼 차갑고 서늘한 간판스타의 위압감 그대로였다.하지만 테이블 위의 실제 상황은 정반대였다.도현은 제 식판의 계란을 주겠다고 했다. 채아가 그릇을 가까이 가져오자 손끝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계란 프라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옮겨주었다.탁."선배……?"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도현이 헛기침을 하며 덤덤하게 속삭였다."단백질 보충해라. 오늘 오전 훈련 인터벌 빡빡하다며.""나 이미 달걀 두 개 받았는데요?""그럼 배고프면 먹어. 더 먹으라고 억지로 주는 건 아니고…… 네가 좋아하는 반숙이길래."도현의 무심한 말투와 달리, 선글라스 너머 그의 귀 끝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손끝으로 사과의 껍질을 정
처마 끝을 타고 흘러내리던 굵은 물방울이 점차 가늘어지더니, 이내 뚝, 뚝 소리를 내며 멎어 들었다.서귀포의 여름 소나기는 요란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밤하늘 너머로 물러났다.빗줄기가 말끔히 씻어내린 밤공기 속에서 짙은 흙내음과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한층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물기를 머금은 아스팔트 위로 목조 가로등 불빛이 길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처마 아래에 바짝 붙어 서 있던 두 사람의 숨결은 여전히 가빴다.도현의 엄지손가락은 여전히 채아의 이마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빗방울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던 손길이 귓가를 스쳐, 가느다란 턱선 쪽으로 아주 느리게 미끄러져 내렸다.스프린터 특유의 거친 굳은살이 박인 도현의 커다란 손바닥.그 손바닥이 살갗에 닿는 순간, 채아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일어 숨을 깊게 들이켰다."비…… 완전히 그쳤네요."채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빗소리가 멎어버리자 자신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요란한 심장 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도현의 귀에 닿을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도현이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조금만…… 더 걷다 들어갈까.""네."두 사람은 처마 밑을 빠져나와 촉촉하게 젖은 해변 산책로로 걸어 나갔다.바다 위로 먹구름이 걷히며 은빛 달빛이 수평선 가득 부서져 내렸다.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모래톱에 맺힌 빗방울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밤 9시의 서귀포 해변 산책로는 한산했다.철썩, 철썩.검은 현무암 갯바위를 부드럽게 핥고 물러서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채우고 있었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함께 불어오는 밤바람이 낮 동안 훈련으로 달아올랐던 대지를 서늘하게 식혀 주었다.숙소 방을 나서기 전, 룸메이트 이진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채아의 후드 집업 옷깃을 털어주며 신신당부했었다."야, 윤채아. 도현 선배가 밤에 산책 가자고 불렀는데 너 설마 훈련용 삼선 슬리퍼 끌고 나가려는 건 아니지? 제발 예쁜 흰 운동화 신고 나가라. 둘이 오늘 분위기 장난 아닐 것 같으니까!""진희야, 그냥 산책이라니까.""그냥 산책은 무슨! 서한체대 최고 철벽남이 밤바다를 걷자는데 그게 그냥 산책이냐? 응원한다, 우리 챔피언!"진희의 장난기 가득한 배웅을 뒤로하고 나온 채아는, 산책로 입구의 목조 가로등 아래에서 바닥의 조개껍데기를 발끝으로 툭툭 굴리고 있었다.사촌 에이전트 차진우는 구속되었고, 마정호 감독도 더는 두 사람의 훈련을 좌우할 수 없었다. 남은 절차까지 끝난 건 아니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그들의 연락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오롯이 서로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밤이었다.탁, 탁.모래알이 섞인 보도블록을 짚는 단단한 지팡이 소리가 들려왔다.채아가 고개를 들었다.가로등 불빛 속으로 차도현이 걸어오고 있었다.훈련용
며칠 뒤, 서울 수서경찰서 경제범죄수사팀 앞.검은 마스크를 푹 눌러쓴 차진우가 수사관들의 손에 이끌려 호송차로 향하고 있었다. 횡령 및 업무상 배임, 정보통신망법상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신청된 사전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전격 발부된 것이었다.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진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망치듯 얼굴을 가렸다.도현의 망막 질환을 약점 잡아 치료비를 가로채고, 조작된 대포폰 가짜 메신저로 채아를 파멸시키려 했던 파렴치한 사기꾼의 말로는 비참했다. 대학 커뮤니티 에브리타임과 포털 뉴스에는 채아를 향한 비난 대신, 사기꾼 에이전트의 구속 소식과 함께 두 선수를 향한 응원의 글들이 줄을 이었다.동시에 서한체육대학교 총장 직속 감사실에서도 단호한 처분이 내려졌다. 마정호 감독은 감사실 회의실 책상 앞에 불려 가 서늘한 처분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마정호 감독. 최수아 선수의 스파이크 훼손 사건을 무마하려 한 직권남용과, 차진우의 허위 언론 플레이를 알고도 묵인·방조한 사실이 특별 감사를 통해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징계위원회 결정에 따라 감봉 3개월 및 육상부 선수 지도 및 엔트리 전결권을 전면 박탈합니다."감사실장의 냉정한 선고에 마 감독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더 이상 항변할 명분은 없었다.체육관 로비 게시판에는 윤채아 선수의 명예 회복과 차도현 선수의 T11 국가대표 도전을 전폭 지지한다는 학교 본부의 공식 공고문이 내걸렸다.선수 지도와 출전 결재는 서민경 코치에게 일원화되었다. 채아는 게시된 공고를 사진으로 남겼다. 누가 책임지고 답해야 하는지, 이번에는 이름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도현은 강 변호사의 법률 사무소에서 새로운 표준 선수 매니지먼트 계약서에 자필 서명을 남겼다.과거 사촌 진우에게 백지위임했던 계약의 효력과 대리권은 정리되었다. 원본은 이후 책임을 묻는 데 필요해 법률 사무소에 보관했다.새 계약서는 결정권과 대리 업무의 범위를 나눠 적었다. 도현은 항목을 읽어주는 음성을 멈추고, 본인 확인 없이 바꿀
화요일 오전 9시 5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대기실.두꺼운 방음문 너머로 수백 명의 취재진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송사 중계 카메라의 삼각대가 바닥을 긁는 소리와 플래시 충전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거울 앞에 선 차도현은 단정한 검은색 수트의 옷깃을 조용히 바로잡았다.눈을 가린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미세하게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주먹을 쥔 손가락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가이드 러너 한태준이 도현의 넓은 어깨를 툭 쳤다."긴장하지 마, 도현아. 네가 트랙에서 흘린 땀은 우리가 알잖아.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준비한 얘기부터 차근차근 해."도현의 법률 대리인인 강 변호사 역시 두꺼운 서류철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서 차진우 씨의 사설 대포폰 가상 계정 생성 IP와 계좌 추적 영장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아펙스 코리아 측에서도 법무팀 명의의 공식 지지 성명서를 회견에 맞춰 전달해 왔습니다.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도현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자."오전 10시 정각, 대기실 문이 열리고 도현이 회견장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수십 대의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번뜩이는 백색광 속에서도 도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마이크 앞에 섰다.웅성거리던 장내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도현이 마이크를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 단거리 육상 선수 차도현입니다."낮고 차분한 중저음이 스피커를 타고 회견장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갔다."최근 언론에 보도된 저의 건강 상태와 사적인 논란에 대해, 당사자인 제가 직접 진실을 밝히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 몸의 상태와 선수로서의 진로는 그 누구의 왜곡된 대변이 아닌, 오직 저 자신의 목소리로 밝히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도현은 단상 스크린에 한국대학병원의 의학 진단서를 띄웠다."저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습니다. 주변 시야뿐 아니라 중심
체육지원처 대회의실의 블라인드 틈새로 정오의 따가운 햇살이 비쳐 들었다.본관 정문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몰려든 취재진과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번뜩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을 뒤덮은 악의적인 찌라시 기사 때문이었다.[단독] 차도현의 눈먼 사랑? 후배 Y선수, 수천만 원 훈련비 요구 의혹…… 지인 메신저 대화 폭로캠퍼스 안은 수군거림과 호기심 어린 시선들로 들끓었다.전생이었다면 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울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선배 곁에 있어서 선배를 망치는 걸까'라는 자책감에 질식하며, 세상의 비난을 홀로 뒤집어썼을 터였다.하지만 지금의 채아는 달랐다.서민경 코치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실로 향하는 채아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훈련 일지와 통장 사본, 경찰청 접수증을 단단히 챙겨 든 손끝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여기서 답할 필요는 없어. 질문은 모아서 받고, 확인한 내용만 얘기하자. 힘들면 내가 옆에서 끊어줄 테니까.""네, 코치님. 준비 다 끝냈어요."채아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출발선을 지키기 위해선 어떤 진흙탕 싸움도 피하지 않을 각오였다.회의실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도현의 메인 후원사인 대기업 스포츠 브랜드 '아펙스 코리아' 마케팅 총괄팀장과 사내 법무팀 변호사 두 명이 굳은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사촌 에이전트 차진우가 후원사에 긴급 제출했다는 40페이지짜리 정산 감사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선수의 심신미약 상태를 악용한 후배 선수의 부당한 금전 편취 및 계약 위반 정황 보고.'보고서 표지에 박힌 자극적인 문구를 전해 들은 도현의 턱선이 서늘하게 굳어졌다.아펙스 마케팅팀장이 헛기침을 하며 서류철을 톡톡 두드렸다."차도현 선수. 우리 브랜드는 지난 3년간 차 선수의 성실함과 투지를 믿고 매년 수억 원대의 훈련비와 전용 장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왔습니다. 그런데 시각 질환을 숨긴 것도 모자라, 후배 선수에게 거액의 훈련 지원금을 빼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