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손목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실린 힘은 매서웠다.
그러나 채아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가만히 숨을 골랐다.
살갗을 파고드는 단단한 굳은살의 감촉. 7년 동안 새벽 트랙을 함께 달리며 지겹도록 쥐어 보았던 차도현의 오른손이었다.
"……차도현 선배님."
채아가 나직하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도현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늘 속에서 초점을 찾지 못해 흔들리던 검은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쳤다.
"윤…… 채아?"
"네. 2학년 윤채아예요."
도현의 시선이 채아의 얼굴 어딘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초점이 닿지 않는 눈동자에는 지독한 불안과 방어 본능이 서려 있었다.
그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더니, 불에 덴 사람처럼 채아의 손목을 홱 놓았다.
"……여기서 뭐 해."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자신의 취약한 순간을 후배에게 들켰다는 수치심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돋아나 있었다.
"서민경 코치님 기록표 가져다드리러 가던 길이었어요."
채아는 아린 손목을 매만지며, 도현의 발끝 바로 앞에 놓인 수리용 철제 허들을 가리켰다.
"통로 입구에 수리 중인 허들이 있어서요. 선배 발에 걸릴까 봐 불렀어요."
도현의 턱선이 팽팽하게 굳었다.
그는 어두운 바닥을 내려다보려 했지만, 밝은 야외 트랙에서 어두운 지하 통로로 급격히 들어온 탓에 암순응(Dark Adaptation)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통로에 드리운 그늘 속에서는 남아 있던 빛의 차이마저 희미해졌다.
도현은 허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보지 못하고 있었다.
채아는 전생의 자신처럼 호들갑을 떨며 도현의 팔을 붙잡지 않았다. 불쌍하다는 듯 동정의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다.
다만 세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차분하게 방향을 일러주었다.
"오른쪽으로 세 걸음만 비켜서 가시면 돼요. 벽 쪽에 안전 난간이 있어요."
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알아서 해."
그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걸음을 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발끝이 삐져나온 허들 다리에 툭 걸리며 상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칫……!"
도현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바닥으로 꼬꾸라질 뻔한 순간, 채아의 단단한 손이 도현의 팔꿈치를 단호하게 받쳐 들었다.
"선배, 자존심 부리다 발목 인대 나가면 다음 달 춘계 대회 못 나가요."
도현이 흠칫하며 굳어졌다.
채아는 허들을 발로 밀어 길을 비웠다. 쇠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도현의 고개가 움찔 돌아갔다. 넘어질 뻔한 자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이제야 짐작한 듯했다.
"잡아 드릴 테니까 벽 난간 잡으세요. 딱 세 걸음만요."
채아는 도현의 팔꿈치를 가볍게 쥔 채 오른쪽으로 유도했다. 도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채아가 이끄는 대로 발을 옮겨 차가운 스테인리스 벽 난간을 쥐었다.
단단한 지지대가 손에 닿자, 도현의 어깨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봤어?"
도현이 벽을 짚은 채 낮게 물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뭘요?"
"내가…… 레인을 못 보고 휘청거린 거."
채아는 잠시 침묵했다. 거짓말로 얼버무리며 넘기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네. 봤어요. 다른 사람한테 함부로 말하지는 않을게요. 대신 불편한 데가 있으면 코치님한테는 얘기해 봐요. 방금도 위험했잖아요."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채아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초점은 맞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깊은 충격과 의문이 서려 있었다.
동정도, 호들갑도, 소문낼 욕심도 없는 후배.
자신이 알던 서한체대 육상부의 시끄럽고 이기적인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선배, 저 먼저 가볼게요. 서 코치님 기다리시거든요."
채아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전생처럼 도현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거나, 기숙사 방까지 따라가 약을 발라주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도현은 어두운 통로에 홀로 서서, 멀어져 가는 채아의 단단하고 가벼운 발소리를 오랫동안 들었다.
***
이튿날 오전, 대운동장 메인 트랙.
초여름처럼 뜨거운 4월의 햇살 아래 육상부의 공식 훈련이 한창이었다.
도현은 전날의 불안을 털어내려는 듯, 선글라스를 끼고 스타팅 블록에 서서 무리하게 100미터 대시를 반복하고 있었다.
타앙! 탕!
시야가 좁아진 탓에 주로의 흰 선을 밟지 않으려고 억지로 보폭을 좁히다 보니, 스타트 구간에서 발목이 뒤틀리며 기록이 10초 8대까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서민경 코치가 스톱워치를 보며 혀를 찼다.
"차도현! 오늘 킥 밸런스가 왜 이래? 골반이 자꾸 오른쪽으로 쏠리잖아!"
도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죄송합니다. 다시 뛰겠습니다."
"됐어, 10분 쉬고 다시 해."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채아는 씁쓸한 숨을 내쉬었다. 몸의 이상을 숨긴 채 억지로 밀어붙이는 질주는 결국 파멸로 이어질 뿐이었다.
채아는 자신의 훈련에 집중했다. 6레인 스타팅 블록 앞에 앉아 둔근 탄성과 발목 족저근막의 반발력을 차분하게 점검했다.
전생에서 망가졌던 몸 대신, 지금의 몸은 깃털처럼 가볍고 용수철처럼 탄력 있었다.
가볍게 30미터를 치고 나갔을 때, 발바닥에 감기는 우레탄의 탄성이 기분 좋게 척추를 울렸다.
그때, 등 뒤에서 운동화 밑창이 트랙 우레탄을 거칠게 비비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왔다.
"윤채아."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채아가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유니폼 위에 코치 재킷을 걸친 4학년 최수아가 서 있었다.
서한체대 여자 단거리의 실세이자, 마정호 감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온갖 특혜를 누리던 선배.
수아의 손에는 어제 채아가 행정실에 직접 제출했던 바로 그 춘계 대회 참가 신청서 사본이 들려 있었다.
수아는 턱을 치켜들며 신청서 종이를 채아의 가슴팍에 툭 던지듯 내밀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채아는 흩날리는 서류를 허공에서 가볍게 낚아챘다.
"선발전 참가 신청서인데요."
수아가 기가 차다는 듯 차가운 실소를 흘렸다.
"내가 여자부 신청서는 취합해서 한꺼번에 낸다고 분명히 공지했을 텐데? 너 선배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니?"
수아가 채아의 코앞까지 다가와 독기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4학년들 졸업 앞두고 실업팀 스카우트 걸려 있는 거 몰라? 너 같은 2학년 나부랭이가 벌써부터 선발전 기웃거릴 때가 아니야. 선배들부터 뛰고 자리가 남으면 네 차례가 오는 거야."
전생의 채아는 이 말에 얼어붙어 고개를 숙였었다. 선배들의 억지와 카르텔에 밀려 제 이름을 스스로 지웠었다.
하지만 지금의 채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시원하게 말아 올리며 또박또박 쏘아붙였다.
"수아 선배님. 육상 트랙은 학번 순으로 뛰는 줄서기 판이 아니라, 기록 순으로 뛰는 출발선인데요?"
수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굳어졌다.
"뭐라고? 너 지금 선배한테 대드는 거야?"
"대드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연맹 공인 기준 기록 11초 60을 통과한 선수는 누구나 출전할 권리가 있어요. 선배님 공인 최고 기록이 11초 52고, 제 기록이 11초 48이에요. 기록으로 보나 규정으로 보나 제가 빠져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어요."
채아는 신청서 서류를 반듯하게 접어 자신의 트레이닝복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주변에서 몸을 풀던 육상부 동기들과 후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저 멀리 벤치에서 얼음팩을 대고 있던 도현의 고개 역시 채아의 목소리를 향해 돌아갔다.
수아의 입술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윤채아, 너 오늘 일 마 감독님한테 그대로 보고할 거야. 각오해."
"네, 보고하세요. 저도 연맹 대회운영위원회에 규정대로 질의할 테니까요."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채아의 눈빛 속에서, 새로운 계절의 거대한 승부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수아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며 코치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채아는 주머니 속 접수증을 가만히 매만지며 심호흡을 했다.
첫 번째 작은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채아는 수아가 사라진 코치실 문을 보았다. 잠시 뒤, 복도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접수증을 더 깊이 넣고 걸음을 옮겼다.
며칠 뒤, 서울 수서경찰서 경제범죄수사팀 앞.검은 마스크를 푹 눌러쓴 차진우가 수사관들의 손에 이끌려 호송차로 향하고 있었다. 횡령 및 업무상 배임, 정보통신망법상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신청된 사전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전격 발부된 것이었다.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진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망치듯 얼굴을 가렸다.도현의 망막 질환을 약점 잡아 치료비를 가로채고, 조작된 대포폰 가짜 메신저로 채아를 파멸시키려 했던 파렴치한 사기꾼의 말로는 비참했다. 대학 커뮤니티 에브리타임과 포털 뉴스에는 채아를 향한 비난 대신, 사기꾼 에이전트의 구속 소식과 함께 두 선수를 향한 응원의 글들이 줄을 이었다.동시에 서한체육대학교 총장 직속 감사실에서도 단호한 처분이 내려졌다. 마정호 감독은 감사실 회의실 책상 앞에 불려 가 서늘한 처분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마정호 감독. 최수아 선수의 스파이크 훼손 사건을 무마하려 한 직권남용과, 차진우의 허위 언론 플레이를 알고도 묵인·방조한 사실이 특별 감사를 통해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징계위원회 결정에 따라 감봉 3개월 및 육상부 선수 지도 및 엔트리 전결권을 전면 박탈합니다."감사실장의 냉정한 선고에 마 감독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더 이상 항변할 명분은 없었다.체육관 로비 게시판에는 윤채아 선수의 명예 회복과 차도현 선수의 T11 국가대표 도전을 전폭 지지한다는 학교 본부의 공식 공고문이 내걸렸다.선수 지도와 출전 결재는 서민경 코치에게 일원화되었다. 채아는 게시된 공고를 사진으로 남겼다. 누가 책임지고 답해야 하는지, 이번에는 이름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도현은 강 변호사의 법률 사무소에서 새로운 표준 선수 매니지먼트 계약서에 자필 서명을 남겼다.과거 사촌 진우에게 백지위임했던 계약의 효력과 대리권은 정리되었다. 원본은 이후 책임을 묻는 데 필요해 법률 사무소에 보관했다.새 계약서는 결정권과 대리 업무의 범위를 나눠 적었다. 도현은 항목을 읽어주는 음성을 멈추고, 본인 확인 없이 바꿀
화요일 오전 9시 5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대기실.두꺼운 방음문 너머로 수백 명의 취재진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송사 중계 카메라의 삼각대가 바닥을 긁는 소리와 플래시 충전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거울 앞에 선 차도현은 단정한 검은색 수트의 옷깃을 조용히 바로잡았다.눈을 가린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미세하게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주먹을 쥔 손가락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가이드 러너 한태준이 도현의 넓은 어깨를 툭 쳤다."긴장하지 마, 도현아. 네가 트랙에서 흘린 땀은 우리가 알잖아.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준비한 얘기부터 차근차근 해."도현의 법률 대리인인 강 변호사 역시 두꺼운 서류철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서 차진우 씨의 사설 대포폰 가상 계정 생성 IP와 계좌 추적 영장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아펙스 코리아 측에서도 법무팀 명의의 공식 지지 성명서를 회견에 맞춰 전달해 왔습니다.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도현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자."오전 10시 정각, 대기실 문이 열리고 도현이 회견장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수십 대의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번뜩이는 백색광 속에서도 도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마이크 앞에 섰다.웅성거리던 장내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도현이 마이크를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 단거리 육상 선수 차도현입니다."낮고 차분한 중저음이 스피커를 타고 회견장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갔다."최근 언론에 보도된 저의 건강 상태와 사적인 논란에 대해, 당사자인 제가 직접 진실을 밝히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 몸의 상태와 선수로서의 진로는 그 누구의 왜곡된 대변이 아닌, 오직 저 자신의 목소리로 밝히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도현은 단상 스크린에 한국대학병원의 의학 진단서를 띄웠다."저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습니다. 주변 시야뿐 아니라 중심
체육지원처 대회의실의 블라인드 틈새로 정오의 따가운 햇살이 비쳐 들었다.본관 정문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몰려든 취재진과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번뜩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을 뒤덮은 악의적인 찌라시 기사 때문이었다.[단독] 차도현의 눈먼 사랑? 후배 Y선수, 수천만 원 훈련비 요구 의혹…… 지인 메신저 대화 폭로캠퍼스 안은 수군거림과 호기심 어린 시선들로 들끓었다.전생이었다면 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울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선배 곁에 있어서 선배를 망치는 걸까'라는 자책감에 질식하며, 세상의 비난을 홀로 뒤집어썼을 터였다.하지만 지금의 채아는 달랐다.서민경 코치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실로 향하는 채아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훈련 일지와 통장 사본, 경찰청 접수증을 단단히 챙겨 든 손끝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여기서 답할 필요는 없어. 질문은 모아서 받고, 확인한 내용만 얘기하자. 힘들면 내가 옆에서 끊어줄 테니까.""네, 코치님. 준비 다 끝냈어요."채아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출발선을 지키기 위해선 어떤 진흙탕 싸움도 피하지 않을 각오였다.회의실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도현의 메인 후원사인 대기업 스포츠 브랜드 '아펙스 코리아' 마케팅 총괄팀장과 사내 법무팀 변호사 두 명이 굳은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사촌 에이전트 차진우가 후원사에 긴급 제출했다는 40페이지짜리 정산 감사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선수의 심신미약 상태를 악용한 후배 선수의 부당한 금전 편취 및 계약 위반 정황 보고.'보고서 표지에 박힌 자극적인 문구를 전해 들은 도현의 턱선이 서늘하게 굳어졌다.아펙스 마케팅팀장이 헛기침을 하며 서류철을 톡톡 두드렸다."차도현 선수. 우리 브랜드는 지난 3년간 차 선수의 성실함과 투지를 믿고 매년 수억 원대의 훈련비와 전용 장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왔습니다. 그런데 시각 질환을 숨긴 것도 모자라, 후배 선수에게 거액의 훈련 지원금을 빼돌
월요일 아침, 서한체육대학교 캠퍼스는 이른 시간부터 벌집을 쑤셔놓은 듯 발칵 뒤집혀 있었다.본관 앞을 오가는 학생들과 운동부 선수들이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번졌다. 체육관 입구에 들어서는 채아의 등 뒤로 따가운 시선들이 꽂혀 내렸다.포털 사이트 스포츠 연예 섹션 1위에 굵고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박혀 있었다.[단독] '육상 국가대표' 차도현, 희귀 실명 질환으로 은퇴 위기?[충격] 망막색소변성증 판정 숨기고 활동…… 후배 육상 선수와의 은밀한 데이트 포착!기사 하단에는 지난 주말 대학가 골목길에서 사복 차림으로 손을 잡고 걷고 있던 도현과 채아의 사진이 모자이크도 없이 적나라하게 박혀 있었다.'서한체대 육상부 간판스타 차도현(22)이 중심 시력을 상실해 가는 유전성 망막 질환을 앓고 있으며, 최근 비밀리에 시각장애 스포츠 등급을 신청한 것으로 확인되었다.''한 체육계 관계자에 따르면, 차도현은 최근 춘계 대회에서 우승한 단거리 유망주 윤채아(21)와 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훈련 지원과 개인 비서 명목으로 거액의 금전이 오간 정황이 포착되었다고 전했다.'기사를 읽어 내리는 채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었다.'체육계 관계자…… 차진우.'도현의 사촌 에이전트 차진우가 위탁 계약 해지 통보에 앙심을 품고 악의적으로 언론에 정보를 유출한 것이 분명했다.도현의 병명을 숨겨 후원금을 횡령하려다 실패하자, 도현의 시각장애를 자극적인 가십거리로 팔아넘겨 파멸시키려는 추악한 발악이었다."채아야, 이거 봤어?"기숙사 로비로 달려온 동기 이진희가 사색이 된 얼굴로 스마트폰을 내밀었다."아침부터 포털에 기사 도배되고 에브리타임이랑 육상 커뮤니티 난리 났어. 마정호 감독님이 너랑 도현 선배 지금 당장 감독실로 오라고 소집 통보했어.""알고 있어, 진희야."채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가방을 고쳐 멨다.전생의 채아였다면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선배를 지켜야 해, 내가 다 뒤집어써야
춘계 대회가 끝난 첫 번째 토요일 오후 2시, 혜화동 대학로 거리.초여름의 싱그러운 녹음이 마로니에 공원의 붉은 벽돌길 위로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주말을 맞은 인파로 북적이는 마로니에 공원 앞 시계탑 벤치에 차도현이 단정한 린넨 셔츠와 슬랙스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늘 땀에 젖은 트레이닝복만 입던 도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눈부시게 단정한 청년의 실루엣이었다.도현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스마트폰의 보행 경로를 안내하는 음성 지도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혜화역 2번 출구 엘리베이터 위치, 점자 블록 동선, 그리고 사전에 예약해 둔 레스토랑의 계단 턱 높이까지.도현은 시각 장애 판정을 받은 이후 처음으로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이곳까지 이동해 왔다.이틀 동안 경로를 확인했고, 역에서는 엘리베이터 방향을 직원에게 물었다. 도착한 뒤에도 긴장이 남아 셔츠 소매를 두 번이나 접었다 폈다. 채아가 오기 전에는 진정하고 싶었다."차도현 선배!"맑고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왔다.도현이 고개를 들자 은은한 비누 향기가 바람을 타고 번졌다.채아는 하늘색 반팔 셔츠 원피스를 입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스파이크와 운동복을 벗어던진 채아의 모습은 트랙 위의 매서운 야수가 아니라, 영락없이 화사한 스물한 살의 여대생이었다.도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일찍 왔네, 채아야.""선배 사복 입은 거 처음 봐요. 맨날 땀복만 보다가 셔츠 입으니까 육상 선수가 아니라 잡지 모델 같네요."채아가 장난스럽게 웃자 도현이 쑥스러운 듯 귓바퀴를 붉혔다."네 목소리도 오늘은 좀 다르다. 훈련할 때처럼 재촉 안 하네."두 사람은 사전에 예약해 둔 조용한 골목 안쪽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채아는 도현의 팔을 억지로 붙잡거나 과도하게 이끌지 않았다.도현이 하얀 케인과 발끝 감각으로 차분하게 턱을 넘을 수 있도록, 그저 반 보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맞출 뿐이었다.레스토랑 안에는 은은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 몬도 트랙 4레인.출발 신호를 알리는 전자 부저음이 거대한 스타디움의 정적을 날카롭게 깨뜨렸다."여자 대학부 100미터 결승, 각 레인 선수 제자리에."장내 심판의 엄숙한 구령과 함께 채아는 스타팅 블록에 천천히 양발을 얹었다.오른쪽 5레인에는 174센티미터의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는 한국체대의 괴물 신예 강하은이 서 있었다.준결승 기록은 강하은 11초 34, 윤채아 11초 35.단 0.01초 차이로 갈린 두 여왕의 물러설 수 없는 진검승부였다.주변의 2레인, 3레인, 6레인에도 각 대학을 대표하는 4학년 엘리트 스프린터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경기장의 모든 공기는 4레인과 5레인 사이로 팽팽하게 집중되어 있었다.관중석 상단에는 서한체대와 한국체대의 대형 응원 현수막이 맞닿아 펄럭였고, 피니시 라인 부근에는 실업팀 스카우트들과 국가대표 코칭스태프들이 일제히 초시계와 비디오카메라를 쥐고 숨을 죽였다.결승선 주변에는 각 대학의 응원단이 북을 두드리며 함성을 질렀고, 결승 주로의 붉은 몬도 우레탄은 한낮의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심판들이 전광판의 풍속계를 최종 점검했다.[Wind: +0.8m/s (공인 유효 풍속)]완벽한 조건이었다. 바람조차 두 사람의 진검승부를 축복하고 있었다.채아는 스타팅 블록의 페달을 발뒤꿈치로 툭툭 치며 미세한 각도를 맞췄다.0.01초로 승패가 갈리는 단거리의 세계였다. 채아는 블록을 조금 옮겨 발바닥이 페달에 닿는 위치부터 다시 확인했다.스타디움 위로 쏟아지는 5월의 햇살은 눈이 시리도록 뜨거웠다.저 멀리 관중석 맨 앞자리 난간에 선글라스를 낀 차도현이 서 있었다.그의 곁에는 가이드 러너 한태준이 함께 서서 트랙의 4레인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도현은 장내 방송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태준이 채아가 블록을 맞추고 있다고 짧게 설명해주었다.채아는 결승선 너머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남의 어둠을 대신 짊어지느라 제 출발선을 도둑맞았던 전생의 비극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