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체육관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 계단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앞서 걸어가는 4학년 최수아의 발걸음은 거칠었고,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는 신경질적인 숨소리가 연신 새어 나왔다.
그 뒤를 따르는 윤채아의 걸음은 차분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복도 벽면에는 서한체육대학교 육상부가 과거 전국체전과 종별선수권에서 획득한 트로피와 빛바랜 사진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겉보기에는 화려한 영광의 전당이었지만, 그 속내는 마정호 감독과 몇몇 유력 선수들의 사리사욕으로 곪아 터진 썩은 환부였다.
전생의 채아는 이 복도를 지날 때마다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주눅 들기 바빴다.
‘내가 조금만 참으면 팀이 평화로워지겠지.’
‘선배들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나한테도 차례가 돌아오겠지.’
그 착하고 미련했던 체념이 결국 제 청춘을 갉아먹고 스물여덟의 고독사로 이끌었던 독약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선배들의 스파이크를 대신 닦아주고, 원정 숙소에서 잡무를 도맡으며 ‘착한 후배’라는 칭찬 몇 마디에 스스로의 권리를 지워버렸던 바보 같은 세월.
하지만 지금 채아의 두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벌컥!
수아가 감독실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갔다.
"감독님!"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신문을 뒤적이던 마정호 감독이 찻잔을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야? 훈련 시간에 복도가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수아가 기다렸다는 듯 마 감독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님, 이것 좀 보세요. 2학년 윤채아가 제멋대로 행정실에 가서 춘계 선발전 개인 참가 신청서를 냈답니다."
마 감독의 짙은 눈썹이 불쾌하다는 듯 꿈틀거렸다.
"뭐? 개인 신청서?"
수아가 채아를 째려보며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제가 분명히 4학년 졸업반 취합해서 감독님 결재받고 올린다고 공지했잖아요. 실업팀 스카우트 앞둔 선배들 자리 먼저 챙겨주는 게 우리 팀 전통인데, 후배가 이렇게 위아래도 없이 치고 나가면 팀 기강이 뭐가 됩니까? 저번 계주 때도 후배들 희생 덕분에 금메달 딴 건데, 얜 지 혼자만 살겠다고 이래요."
마 감독이 안경을 고쳐 쓰며 채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 감독의 시선은 채아의 얼굴보다 먼저 트레이닝복 가슴의 학교 로고에 닿았다. 이 방에 들어오면 선수의 이름보다 소속부터 앞세우곤 했다.
전생에서 채아는 이 눈빛에 질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었다.
팀에서 방출하겠다는 협박 한마디에 제 꿈과 출발선을 스스로 포기하고, 도현의 시각 보조와 잡무로 밀려났던 비극의 시작점.
하지만 지금 채아의 가슴속에는 두려움 대신 서늘한 분노와 냉철한 이성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윤채아."
마 감독이 헛기침을 하며 권위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수아 말 들었지? 육상은 혼자 뛰는 종목 같아도 결국 팀 스포츠야. 선배들 실업팀 자리 잡고 길을 터줘야 너희 같은 후배들도 다음 해에 기회를 얻는 법이다."
마 감독이 서랍에서 붉은 인주와 결재 도장을 만지작거리며 훈계를 늘어놓았다.
"우리 육상부에서는 2학년이 개인전 욕심내는 거 아니다. 이번 선발전은 수아랑 4학년들한테 양보해라. 신청서는 내가 행정실에 전화해서 반려 처리하라고 할 테니까, 넌 군말 말고 훈련이나 해."
전생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파렴치한 회유였다.
선배의 자리를 사주기 위해 후배의 날개를 꺾는 추악한 카르텔.
채아는 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어둔 참가 신청서 접수증 사본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감독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감독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수아의 입이 떡 벌어졌고, 마 감독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지금 감독 말을 거절하겠다고 했어?"
"네. 이번 대회 참가 요강과 학교 접수 절차를 확인했습니다."
채아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똑 부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기록 11초 48은 신청 기준인 11초 60을 통과합니다. 접수도 끝났고요. 제가 빠져야 한다면 선배 순서 말고, 요강에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윤채아, 너 지금 말대꾸하는 거야?"
수아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지만, 채아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마 감독을 똑바로 응시했다.
"선배님들의 실업팀 스카우트 사정은 안타깝지만, 그것이 제 정당한 기회를 빼앗을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트랙은 양보하는 곳이 아니라 기록으로 증명하는 자리니까요."
"너……!"
마 감독이 벌떡 일어나 책상을 내리쳤다.
쾅!
"건방진 자식! 감히 감독 앞에서 규정 운운해? 내가 출전 명단에서 네 이름 빼버리면 그만이야! 실업팀 추천서 한 장 못 받고 운동 그만두고 싶어?"
마 감독의 서슬 퍼런 으름장에 채아는 물러서지 않고 휴대폰 화면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이미 행정실 공식 접수증을 수령했고, 연맹 온라인 전산망에도 제 개별 등록 번호로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만약 정당한 사유 없이 제 이름이 누락된다면, 연맹 공정위원회와 대학 체육윤리센터에 정식으로 이의 신청을 제기할 것입니다."
채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더 이상 부당한 권력에 떨며 울던 순진한 스물한 살의 여대생이 아니었다.
탁자 위에서 접수증 모서리가 조금 떨렸다. 채아는 종이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목소리만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감독님."
채아가 핸드폰 상단의 녹음 표시등을 가리켰다.
"지금 말씀은 녹음해뒀습니다. 제 이름이 빠지면, 이 대화와 접수증을 같이 제출하겠습니다."
마 감독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규정대로 맞서는 채아를 억지로 찍어눌렀다가는, 자신이 은밀하게 관리하던 판공비와 훈련비 명목의 비자금 문제까지 감사팀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그때, 반쯤 열려 있던 감독실 문밖 복도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멈춰 섰다.
문틈 사이로 차도현이 서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채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도현의 고개가 감독실 안쪽을 향해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자신에게 침착하게 난간을 안내해 주던 후배.
그리고 지금 감독의 서슬 퍼런 압박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출발선을 지켜내는 윤채아.
도현은 복도에 선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채아가 저런 말을 듣는 동안 자신은 제 시력과 기록에만 매달려 있었다. 복도에 선 도현은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처음 보는 광경인데도, 오래 외면한 일을 뒤늦게 마주한 듯 가슴이 아렸다.
수아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감독님! 이렇게 규정 들이밀면서 팀을 흔드는 애를 그냥 두실 거예요?"
마 감독은 복도의 인기척을 의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좋아, 규정 좋아하시네."
마 감독이 이를 갈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서류 접수는 네 권리라고 치자. 하지만 우리 육상부의 최종 엔트리는 오직 실력으로만 결정한다."
마 감독이 채아를 노려보며 선전포고를 날렸다.
"나흘 뒤, 전 선수단이 보는 앞에서 100미터 공개 테스트를 연다. 네가 자랑하는 그 기준 기록이 요행이 아니라는 걸 전원 앞에서 증명해 봐. 만약 수아보다 0.01초라도 늦으면, 그땐 네 발로 신청서 찢고 나가."
수아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채아를 비웃었다.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뛰어봐, 윤채아."
채아는 흔들림 없이 가슴을 폈다.
"네, 좋습니다. 나흘 뒤 트랙 위에서 기록으로 뵙겠습니다."
채아는 정중하게 목례한 뒤 감독실 문을 열고 나섰다.
복도에 서 있던 도현과 채아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도현은 계단 쪽으로 돌아서는 채아의 발소리를 좇아 고개를 움직였다. 붙잡을 말을 찾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난간 끝을 한 번 눌렀다.
채아는 도현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등 뒤로 서늘한 봄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녀의 주머니 속 접수증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며칠 뒤, 서울 수서경찰서 경제범죄수사팀 앞.검은 마스크를 푹 눌러쓴 차진우가 수사관들의 손에 이끌려 호송차로 향하고 있었다. 횡령 및 업무상 배임, 정보통신망법상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신청된 사전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전격 발부된 것이었다.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진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망치듯 얼굴을 가렸다.도현의 망막 질환을 약점 잡아 치료비를 가로채고, 조작된 대포폰 가짜 메신저로 채아를 파멸시키려 했던 파렴치한 사기꾼의 말로는 비참했다. 대학 커뮤니티 에브리타임과 포털 뉴스에는 채아를 향한 비난 대신, 사기꾼 에이전트의 구속 소식과 함께 두 선수를 향한 응원의 글들이 줄을 이었다.동시에 서한체육대학교 총장 직속 감사실에서도 단호한 처분이 내려졌다. 마정호 감독은 감사실 회의실 책상 앞에 불려 가 서늘한 처분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마정호 감독. 최수아 선수의 스파이크 훼손 사건을 무마하려 한 직권남용과, 차진우의 허위 언론 플레이를 알고도 묵인·방조한 사실이 특별 감사를 통해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징계위원회 결정에 따라 감봉 3개월 및 육상부 선수 지도 및 엔트리 전결권을 전면 박탈합니다."감사실장의 냉정한 선고에 마 감독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더 이상 항변할 명분은 없었다.체육관 로비 게시판에는 윤채아 선수의 명예 회복과 차도현 선수의 T11 국가대표 도전을 전폭 지지한다는 학교 본부의 공식 공고문이 내걸렸다.선수 지도와 출전 결재는 서민경 코치에게 일원화되었다. 채아는 게시된 공고를 사진으로 남겼다. 누가 책임지고 답해야 하는지, 이번에는 이름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도현은 강 변호사의 법률 사무소에서 새로운 표준 선수 매니지먼트 계약서에 자필 서명을 남겼다.과거 사촌 진우에게 백지위임했던 계약의 효력과 대리권은 정리되었다. 원본은 이후 책임을 묻는 데 필요해 법률 사무소에 보관했다.새 계약서는 결정권과 대리 업무의 범위를 나눠 적었다. 도현은 항목을 읽어주는 음성을 멈추고, 본인 확인 없이 바꿀
화요일 오전 9시 5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대기실.두꺼운 방음문 너머로 수백 명의 취재진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송사 중계 카메라의 삼각대가 바닥을 긁는 소리와 플래시 충전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거울 앞에 선 차도현은 단정한 검은색 수트의 옷깃을 조용히 바로잡았다.눈을 가린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미세하게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주먹을 쥔 손가락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가이드 러너 한태준이 도현의 넓은 어깨를 툭 쳤다."긴장하지 마, 도현아. 네가 트랙에서 흘린 땀은 우리가 알잖아.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준비한 얘기부터 차근차근 해."도현의 법률 대리인인 강 변호사 역시 두꺼운 서류철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서 차진우 씨의 사설 대포폰 가상 계정 생성 IP와 계좌 추적 영장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아펙스 코리아 측에서도 법무팀 명의의 공식 지지 성명서를 회견에 맞춰 전달해 왔습니다.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도현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자."오전 10시 정각, 대기실 문이 열리고 도현이 회견장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수십 대의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번뜩이는 백색광 속에서도 도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마이크 앞에 섰다.웅성거리던 장내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도현이 마이크를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 단거리 육상 선수 차도현입니다."낮고 차분한 중저음이 스피커를 타고 회견장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갔다."최근 언론에 보도된 저의 건강 상태와 사적인 논란에 대해, 당사자인 제가 직접 진실을 밝히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 몸의 상태와 선수로서의 진로는 그 누구의 왜곡된 대변이 아닌, 오직 저 자신의 목소리로 밝히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도현은 단상 스크린에 한국대학병원의 의학 진단서를 띄웠다."저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습니다. 주변 시야뿐 아니라 중심
체육지원처 대회의실의 블라인드 틈새로 정오의 따가운 햇살이 비쳐 들었다.본관 정문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몰려든 취재진과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번뜩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을 뒤덮은 악의적인 찌라시 기사 때문이었다.[단독] 차도현의 눈먼 사랑? 후배 Y선수, 수천만 원 훈련비 요구 의혹…… 지인 메신저 대화 폭로캠퍼스 안은 수군거림과 호기심 어린 시선들로 들끓었다.전생이었다면 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울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선배 곁에 있어서 선배를 망치는 걸까'라는 자책감에 질식하며, 세상의 비난을 홀로 뒤집어썼을 터였다.하지만 지금의 채아는 달랐다.서민경 코치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실로 향하는 채아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훈련 일지와 통장 사본, 경찰청 접수증을 단단히 챙겨 든 손끝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여기서 답할 필요는 없어. 질문은 모아서 받고, 확인한 내용만 얘기하자. 힘들면 내가 옆에서 끊어줄 테니까.""네, 코치님. 준비 다 끝냈어요."채아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출발선을 지키기 위해선 어떤 진흙탕 싸움도 피하지 않을 각오였다.회의실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도현의 메인 후원사인 대기업 스포츠 브랜드 '아펙스 코리아' 마케팅 총괄팀장과 사내 법무팀 변호사 두 명이 굳은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사촌 에이전트 차진우가 후원사에 긴급 제출했다는 40페이지짜리 정산 감사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선수의 심신미약 상태를 악용한 후배 선수의 부당한 금전 편취 및 계약 위반 정황 보고.'보고서 표지에 박힌 자극적인 문구를 전해 들은 도현의 턱선이 서늘하게 굳어졌다.아펙스 마케팅팀장이 헛기침을 하며 서류철을 톡톡 두드렸다."차도현 선수. 우리 브랜드는 지난 3년간 차 선수의 성실함과 투지를 믿고 매년 수억 원대의 훈련비와 전용 장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왔습니다. 그런데 시각 질환을 숨긴 것도 모자라, 후배 선수에게 거액의 훈련 지원금을 빼돌
월요일 아침, 서한체육대학교 캠퍼스는 이른 시간부터 벌집을 쑤셔놓은 듯 발칵 뒤집혀 있었다.본관 앞을 오가는 학생들과 운동부 선수들이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번졌다. 체육관 입구에 들어서는 채아의 등 뒤로 따가운 시선들이 꽂혀 내렸다.포털 사이트 스포츠 연예 섹션 1위에 굵고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박혀 있었다.[단독] '육상 국가대표' 차도현, 희귀 실명 질환으로 은퇴 위기?[충격] 망막색소변성증 판정 숨기고 활동…… 후배 육상 선수와의 은밀한 데이트 포착!기사 하단에는 지난 주말 대학가 골목길에서 사복 차림으로 손을 잡고 걷고 있던 도현과 채아의 사진이 모자이크도 없이 적나라하게 박혀 있었다.'서한체대 육상부 간판스타 차도현(22)이 중심 시력을 상실해 가는 유전성 망막 질환을 앓고 있으며, 최근 비밀리에 시각장애 스포츠 등급을 신청한 것으로 확인되었다.''한 체육계 관계자에 따르면, 차도현은 최근 춘계 대회에서 우승한 단거리 유망주 윤채아(21)와 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훈련 지원과 개인 비서 명목으로 거액의 금전이 오간 정황이 포착되었다고 전했다.'기사를 읽어 내리는 채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었다.'체육계 관계자…… 차진우.'도현의 사촌 에이전트 차진우가 위탁 계약 해지 통보에 앙심을 품고 악의적으로 언론에 정보를 유출한 것이 분명했다.도현의 병명을 숨겨 후원금을 횡령하려다 실패하자, 도현의 시각장애를 자극적인 가십거리로 팔아넘겨 파멸시키려는 추악한 발악이었다."채아야, 이거 봤어?"기숙사 로비로 달려온 동기 이진희가 사색이 된 얼굴로 스마트폰을 내밀었다."아침부터 포털에 기사 도배되고 에브리타임이랑 육상 커뮤니티 난리 났어. 마정호 감독님이 너랑 도현 선배 지금 당장 감독실로 오라고 소집 통보했어.""알고 있어, 진희야."채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가방을 고쳐 멨다.전생의 채아였다면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선배를 지켜야 해, 내가 다 뒤집어써야
춘계 대회가 끝난 첫 번째 토요일 오후 2시, 혜화동 대학로 거리.초여름의 싱그러운 녹음이 마로니에 공원의 붉은 벽돌길 위로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주말을 맞은 인파로 북적이는 마로니에 공원 앞 시계탑 벤치에 차도현이 단정한 린넨 셔츠와 슬랙스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늘 땀에 젖은 트레이닝복만 입던 도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눈부시게 단정한 청년의 실루엣이었다.도현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스마트폰의 보행 경로를 안내하는 음성 지도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혜화역 2번 출구 엘리베이터 위치, 점자 블록 동선, 그리고 사전에 예약해 둔 레스토랑의 계단 턱 높이까지.도현은 시각 장애 판정을 받은 이후 처음으로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이곳까지 이동해 왔다.이틀 동안 경로를 확인했고, 역에서는 엘리베이터 방향을 직원에게 물었다. 도착한 뒤에도 긴장이 남아 셔츠 소매를 두 번이나 접었다 폈다. 채아가 오기 전에는 진정하고 싶었다."차도현 선배!"맑고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왔다.도현이 고개를 들자 은은한 비누 향기가 바람을 타고 번졌다.채아는 하늘색 반팔 셔츠 원피스를 입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스파이크와 운동복을 벗어던진 채아의 모습은 트랙 위의 매서운 야수가 아니라, 영락없이 화사한 스물한 살의 여대생이었다.도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일찍 왔네, 채아야.""선배 사복 입은 거 처음 봐요. 맨날 땀복만 보다가 셔츠 입으니까 육상 선수가 아니라 잡지 모델 같네요."채아가 장난스럽게 웃자 도현이 쑥스러운 듯 귓바퀴를 붉혔다."네 목소리도 오늘은 좀 다르다. 훈련할 때처럼 재촉 안 하네."두 사람은 사전에 예약해 둔 조용한 골목 안쪽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채아는 도현의 팔을 억지로 붙잡거나 과도하게 이끌지 않았다.도현이 하얀 케인과 발끝 감각으로 차분하게 턱을 넘을 수 있도록, 그저 반 보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맞출 뿐이었다.레스토랑 안에는 은은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 몬도 트랙 4레인.출발 신호를 알리는 전자 부저음이 거대한 스타디움의 정적을 날카롭게 깨뜨렸다."여자 대학부 100미터 결승, 각 레인 선수 제자리에."장내 심판의 엄숙한 구령과 함께 채아는 스타팅 블록에 천천히 양발을 얹었다.오른쪽 5레인에는 174센티미터의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는 한국체대의 괴물 신예 강하은이 서 있었다.준결승 기록은 강하은 11초 34, 윤채아 11초 35.단 0.01초 차이로 갈린 두 여왕의 물러설 수 없는 진검승부였다.주변의 2레인, 3레인, 6레인에도 각 대학을 대표하는 4학년 엘리트 스프린터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경기장의 모든 공기는 4레인과 5레인 사이로 팽팽하게 집중되어 있었다.관중석 상단에는 서한체대와 한국체대의 대형 응원 현수막이 맞닿아 펄럭였고, 피니시 라인 부근에는 실업팀 스카우트들과 국가대표 코칭스태프들이 일제히 초시계와 비디오카메라를 쥐고 숨을 죽였다.결승선 주변에는 각 대학의 응원단이 북을 두드리며 함성을 질렀고, 결승 주로의 붉은 몬도 우레탄은 한낮의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심판들이 전광판의 풍속계를 최종 점검했다.[Wind: +0.8m/s (공인 유효 풍속)]완벽한 조건이었다. 바람조차 두 사람의 진검승부를 축복하고 있었다.채아는 스타팅 블록의 페달을 발뒤꿈치로 툭툭 치며 미세한 각도를 맞췄다.0.01초로 승패가 갈리는 단거리의 세계였다. 채아는 블록을 조금 옮겨 발바닥이 페달에 닿는 위치부터 다시 확인했다.스타디움 위로 쏟아지는 5월의 햇살은 눈이 시리도록 뜨거웠다.저 멀리 관중석 맨 앞자리 난간에 선글라스를 낀 차도현이 서 있었다.그의 곁에는 가이드 러너 한태준이 함께 서서 트랙의 4레인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도현은 장내 방송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태준이 채아가 블록을 맞추고 있다고 짧게 설명해주었다.채아는 결승선 너머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남의 어둠을 대신 짊어지느라 제 출발선을 도둑맞았던 전생의 비극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