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튿날 오전, 대운동장 락커룸 앞 게시판.
육상부 훈련 레인 및 시간 배정표가 새롭게 공지되자마자 선수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야, 이거 배정표 너무한 거 아니야?"
"오전 9시부터 11시,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메인 트랙 3, 4, 5레인이 전부 최수아 선배랑 4학년 전용이네."
"윤채아는 어디야?"
"채아? 정오 12시 뙤약볕 타임에…… 그것도 우레탄 다 뜯겨 나간 8레인이랑 보조 흙구장 배정됐어."
게시판을 확인한 채아의 동기 이진희가 분통을 터뜨렸다.
"채아야! 이거 마 감독이랑 수아 선배가 대놓고 너 테스트 망치라고 텃세 부리는 거잖아! 정오에 트랙 지열이 40도까지 올라가는데 거기서 어떻게 스타트 연습을 해? 게다가 8레인은 빗물 배수구 옆이라 바닥이 울퉁불퉁하다고! 발목 나가면 어쩌려고!"
주변의 2학년 후배들도 눈치만 볼 뿐 감히 마 감독의 배정표에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채아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정호의 전형적인 보복 수법이었다.
서류로 누르지 못하니 훈련 환경을 망가뜨려 선수의 컨디션을 갉아먹는 치졸한 수작.
하지만 채아는 화를 내며 감정을 낭비하지 않았다.
"진희야, 괜찮아. 트랙 탓하면서 시간 버릴 여유 없어."
채아는 배정표 사진을 휴대폰으로 찍어 증거로 남긴 뒤, 곧장 본관 1층 트랙 관리실 옆 서민경 코치의 연구실로 향했다.
똑똑.
노크 후 문을 열자, 태블릿으로 선수들의 구간 기록을 분석하던 서 코치가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라, 채아야."
서 코치는 이미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차가운 표정이었다.
책상 위에는 마 감독이 결재한 편파적인 배정표 사본이 놓여 있었다.
"배정표 봤지? 마 감독이 수아 편 들어주려고 아주 대놓고 판을 깔았더구나."
"네, 코치님. 하지만 전 핑계 대고 싶지 않습니다. 대체 훈련 일정과 장소를 상의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서 코치의 눈빛에 흐뭇한 감탄이 스쳤다.
서 코치는 말없이 옆 의자를 빼주었다. 채아는 그제야 내려놓지 못하고 있던 가방을 무릎 위에 얹었다.
선수 시절 단거리 100미터와 200미터를 주름잡았던 원칙주의 지도자의 눈에는, 채아의 강단 있는 기백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좋다. 정규 대관 시간 전인 새벽 5시 30분부터 7시까지 대운동장 4레인을 열어주마. 관리실 열쇠는 내가 책임진다. 그리고 오후 5시 이후 조명이 켜지기 전까지 1시간은 보조 트랙 직선 주로를 써. 내가 직접 스타트 타이머 눌러줄 테니까."
서 코치는 책상 서랍에서 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채아의 지난 시즌 스타트 분석 사진을 꺼내 보였다.
"마 감독 밑에서 뛴 1년 동안 상체 기립 타이밍이 너무 빨라졌어. 30미터까지는 고개를 들지 말고 지면 반발력을 온몸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데, 넌 10미터만 지나도 상체가 벌떡 일어선다. 둔근과 햄스트링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지."
"네, 코치님. 저도 첫 발에서 골반 힌지가 풀리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 테스트까지 오래 남진 않았지만, 급하게 몸을 바꿀 생각은 마라. 첫발을 밀어내는 자세부터 잡자. 네 최고 기록 11초 48을 다시 낼 수 있는 몸으로 만드는 게 먼저야."
서 코치의 전문적이고 따뜻한 피드백이 채아의 마음에 단단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코치님!"
채아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곧장 새벽 훈련 준비에 돌입했다.
***
다음 날 새벽 5시 30분, 대운동장.
아직 걷히지 않은 푸르스름한 새벽안개 사이로 서늘한 아침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채아는 붉은 우레탄 트랙 4레인 스타팅 블록 앞에 앉아 스파이크 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그러나 머릿속의 기억과 현재 스물한 살 육체의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전생에서 도현의 훈련을 도우며 익힌 주법과 수없이 되짚었던 동작은 생생했지만, 현재의 몸은 지난 1년간 마 감독의 주먹구구식 과훈련으로 인해 둔근과 햄스트링의 밸런스가 미세하게 무너져 있었다.
지면 접촉 시간을 줄이려는 의욕이 앞선 탓에 자세가 흔들렸다.
스타팅 블록에서 튀어 나가는 첫 발.
"차려, 탕!"
서 코치의 신호와 함께 블록을 박차는 순간, 상체가 생각보다 일찍 들려버렸다.
콰앙!
지면 반발력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한 채 허벅지 뒤쪽 근육에 찌릿한 과부하가 걸렸다.
"큭……!"
채아가 휘청거리며 20미터 지점에서 속도를 줄였다.
스톱워치를 든 서 코치가 엄하게 지적했다.
"채아야, 몸이 벌써 섰어. 첫발을 밟자마자 고개부터 들었잖니. 방금 느낌 기억해둬. 촬영한 거 같이 보고, 이번엔 속도 낮춰서 다시 하자."
채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무릎을 짚었다.
‘그래, 조급해하지 말자. 내 몸의 한계를 똑바로 인정해야 해.’
전생의 기억만 믿고 자만해서는 안 되었다.
현재의 근력과 탄성에 맞는 정직한 빌드업이 필요했다.
채아는 숨을 고르고 다시 스타팅 블록으로 걸어갔다.
출발 자세를 다시 맞추고, 골반이 먼저 들리지 않도록 낮은 강도의 기본기 드릴을 반복했다.
새벽 트랙 위로 거친 숨소리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어느덧 아침 7시가 다 되어 훈련을 마치고 벤치로 걸어가던 채아의 앞을 커다란 그림자가 막아섰다.
차도현이었다.
사실 도현은 새벽 6시부터 관중석 맨 위 그늘막에 앉아 채아의 훈련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흐릿하게 번지는 시야 속에서도, 쉬지 않고 블록으로 돌아가 흙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달리는 채아의 악바리 같은 실루엣은 눈이 시릴 만큼 선명했다.
벤치 곁에 물병을 들고 선 채아의 모습이 문득 겹쳐 보였다. 언제였는지 떠오르지 않는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만은 이상하리만큼 익숙했다.
‘선배, 오늘은 컨디션 어때요?’
‘선배, 내일 날씨 흐리다니까 눈 보호 안경 꼭 챙기세요.’
그러다 트랙을 박차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채아는 그 누구보다 뜨겁게 자신의 주로를 달리고 있었다. 방금 머릿속을 스친 모습과 눈앞의 후배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 눈부신 광경을 바라보며 도현은 묘한 죄책감과 억누를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도현은 땀에 젖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채아를 내려다보며 낮게 입을 열었다.
"배정표 봤어."
채아가 고개를 들자, 도현이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말을 이었다.
"마 감독한테 가서 내 전용 훈련 시간을 너한테 떼어주겠다고 말할게. 내 이름 대면 마 감독도 메인 레인 비워줄 수밖에 없어."
남자부 독보적 에이스의 권력을 이용해 후배의 불공정을 단칼에 해결해 주겠다는 제안.
전생의 도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파격적인 배려였다.
하지만 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배, 마음은 고맙지만 거절할게요."
도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지? 뙤약볕에서 뛰다간 테스트 당일에 햄스트링 올라와."
"선배가 안 뛰는 시간까지 제가 받으면, 또 누구한테 기대서 들어갔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훈련 자리는 코치님이랑 찾았어요."
채아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도현을 꿰뚫었다.
"대신 부탁은 있어요. 감독님이 나중에 말을 바꾸면 오늘 배정표를 봤다고 얘기해 주세요. 제가 원한 건 선배 자리까지 달라는 게 아니었다고요."
도현은 숨을 멈췄다.
자신의 호의를 단칼에 거절당했음에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출발선을 지키려는 채아의 당당한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려왔다.
‘언제부터 저렇게 단단한 눈을 하고 있었던 거지?’
도현은 채아의 차분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도현은 대답을 고르느라 입을 다물었다. 제 이름을 내세우면 편하게 풀릴 줄 알았는데, 채아는 그보다 오래 남을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고집불통이군."
도현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돌아섰다.
그때, 트랙 한편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서민경 코치가 도현을 불렀다.
"차도현, 잠깐 이리 와봐라."
도현이 다가가자 서 코치가 매서운 눈빛으로 도현의 발목과 자세를 뜯어보았다.
"도현아, 너 요즘 스타트 블록에서 킥 찰 때 시선이 자꾸 왼쪽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코너 주로에서 흰 선 밟을 뻔한 게 이번 주만 세 번째야. 며칠 전에도 통로에서 허들에 걸릴 뻔했다면서?"
도현의 호흡이 순간 멎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에 손끝이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서 코치가 스톱워치를 접어 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훈련 고집 피우지 말고, 오늘 당장 대학병원 안과 가서 정밀 검사받아라. 코치로서의 지시다."
도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굳어졌다.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어둠의 전조가, 서한체대 트랙 위로 서늘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아침 7시 30분, 제주 서귀포 전지훈련 선수단 식당.전지훈련에 참가한 각 대학 육상부와 실업팀 선수들로 식당 안은 이른 아침부터 왁자지껄했다. 배식대의 갓 구운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와 계란 프라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고, 그 옆에는 신선한 과일 샐러드가 놓여 있었다.식판을 들고 테이블 구석 자리에 앉은 채아는 젓가락으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연신 헛기침을 삼켰다.맞은편에 앉은 차도현 때문이었다.도현은 언제나처럼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주변 테이블의 다른 대학 선수들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역시 서한체대 차도현 선배 포스는 장난 아니다"라며 수군거릴 만큼 차갑고 서늘한 간판스타의 위압감 그대로였다.하지만 테이블 위의 실제 상황은 정반대였다.도현은 제 식판의 계란을 주겠다고 했다. 채아가 그릇을 가까이 가져오자 손끝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계란 프라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옮겨주었다.탁."선배……?"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도현이 헛기침을 하며 덤덤하게 속삭였다."단백질 보충해라. 오늘 오전 훈련 인터벌 빡빡하다며.""나 이미 달걀 두 개 받았는데요?""그럼 배고프면 먹어. 더 먹으라고 억지로 주는 건 아니고…… 네가 좋아하는 반숙이길래."도현의 무심한 말투와 달리, 선글라스 너머 그의 귀 끝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손끝으로 사과의 껍질을 정
처마 끝을 타고 흘러내리던 굵은 물방울이 점차 가늘어지더니, 이내 뚝, 뚝 소리를 내며 멎어 들었다.서귀포의 여름 소나기는 요란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밤하늘 너머로 물러났다.빗줄기가 말끔히 씻어내린 밤공기 속에서 짙은 흙내음과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한층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물기를 머금은 아스팔트 위로 목조 가로등 불빛이 길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처마 아래에 바짝 붙어 서 있던 두 사람의 숨결은 여전히 가빴다.도현의 엄지손가락은 여전히 채아의 이마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빗방울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던 손길이 귓가를 스쳐, 가느다란 턱선 쪽으로 아주 느리게 미끄러져 내렸다.스프린터 특유의 거친 굳은살이 박인 도현의 커다란 손바닥.그 손바닥이 살갗에 닿는 순간, 채아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일어 숨을 깊게 들이켰다."비…… 완전히 그쳤네요."채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빗소리가 멎어버리자 자신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요란한 심장 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도현의 귀에 닿을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도현이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조금만…… 더 걷다 들어갈까.""네."두 사람은 처마 밑을 빠져나와 촉촉하게 젖은 해변 산책로로 걸어 나갔다.바다 위로 먹구름이 걷히며 은빛 달빛이 수평선 가득 부서져 내렸다.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모래톱에 맺힌 빗방울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밤 9시의 서귀포 해변 산책로는 한산했다.철썩, 철썩.검은 현무암 갯바위를 부드럽게 핥고 물러서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채우고 있었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함께 불어오는 밤바람이 낮 동안 훈련으로 달아올랐던 대지를 서늘하게 식혀 주었다.숙소 방을 나서기 전, 룸메이트 이진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채아의 후드 집업 옷깃을 털어주며 신신당부했었다."야, 윤채아. 도현 선배가 밤에 산책 가자고 불렀는데 너 설마 훈련용 삼선 슬리퍼 끌고 나가려는 건 아니지? 제발 예쁜 흰 운동화 신고 나가라. 둘이 오늘 분위기 장난 아닐 것 같으니까!""진희야, 그냥 산책이라니까.""그냥 산책은 무슨! 서한체대 최고 철벽남이 밤바다를 걷자는데 그게 그냥 산책이냐? 응원한다, 우리 챔피언!"진희의 장난기 가득한 배웅을 뒤로하고 나온 채아는, 산책로 입구의 목조 가로등 아래에서 바닥의 조개껍데기를 발끝으로 툭툭 굴리고 있었다.사촌 에이전트 차진우는 구속되었고, 마정호 감독도 더는 두 사람의 훈련을 좌우할 수 없었다. 남은 절차까지 끝난 건 아니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그들의 연락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오롯이 서로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밤이었다.탁, 탁.모래알이 섞인 보도블록을 짚는 단단한 지팡이 소리가 들려왔다.채아가 고개를 들었다.가로등 불빛 속으로 차도현이 걸어오고 있었다.훈련용
며칠 뒤, 서울 수서경찰서 경제범죄수사팀 앞.검은 마스크를 푹 눌러쓴 차진우가 수사관들의 손에 이끌려 호송차로 향하고 있었다. 횡령 및 업무상 배임, 정보통신망법상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신청된 사전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전격 발부된 것이었다.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진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망치듯 얼굴을 가렸다.도현의 망막 질환을 약점 잡아 치료비를 가로채고, 조작된 대포폰 가짜 메신저로 채아를 파멸시키려 했던 파렴치한 사기꾼의 말로는 비참했다. 대학 커뮤니티 에브리타임과 포털 뉴스에는 채아를 향한 비난 대신, 사기꾼 에이전트의 구속 소식과 함께 두 선수를 향한 응원의 글들이 줄을 이었다.동시에 서한체육대학교 총장 직속 감사실에서도 단호한 처분이 내려졌다. 마정호 감독은 감사실 회의실 책상 앞에 불려 가 서늘한 처분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마정호 감독. 최수아 선수의 스파이크 훼손 사건을 무마하려 한 직권남용과, 차진우의 허위 언론 플레이를 알고도 묵인·방조한 사실이 특별 감사를 통해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징계위원회 결정에 따라 감봉 3개월 및 육상부 선수 지도 및 엔트리 전결권을 전면 박탈합니다."감사실장의 냉정한 선고에 마 감독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더 이상 항변할 명분은 없었다.체육관 로비 게시판에는 윤채아 선수의 명예 회복과 차도현 선수의 T11 국가대표 도전을 전폭 지지한다는 학교 본부의 공식 공고문이 내걸렸다.선수 지도와 출전 결재는 서민경 코치에게 일원화되었다. 채아는 게시된 공고를 사진으로 남겼다. 누가 책임지고 답해야 하는지, 이번에는 이름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도현은 강 변호사의 법률 사무소에서 새로운 표준 선수 매니지먼트 계약서에 자필 서명을 남겼다.과거 사촌 진우에게 백지위임했던 계약의 효력과 대리권은 정리되었다. 원본은 이후 책임을 묻는 데 필요해 법률 사무소에 보관했다.새 계약서는 결정권과 대리 업무의 범위를 나눠 적었다. 도현은 항목을 읽어주는 음성을 멈추고, 본인 확인 없이 바꿀
화요일 오전 9시 5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대기실.두꺼운 방음문 너머로 수백 명의 취재진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송사 중계 카메라의 삼각대가 바닥을 긁는 소리와 플래시 충전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거울 앞에 선 차도현은 단정한 검은색 수트의 옷깃을 조용히 바로잡았다.눈을 가린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미세하게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주먹을 쥔 손가락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가이드 러너 한태준이 도현의 넓은 어깨를 툭 쳤다."긴장하지 마, 도현아. 네가 트랙에서 흘린 땀은 우리가 알잖아.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준비한 얘기부터 차근차근 해."도현의 법률 대리인인 강 변호사 역시 두꺼운 서류철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서 차진우 씨의 사설 대포폰 가상 계정 생성 IP와 계좌 추적 영장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아펙스 코리아 측에서도 법무팀 명의의 공식 지지 성명서를 회견에 맞춰 전달해 왔습니다.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도현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자."오전 10시 정각, 대기실 문이 열리고 도현이 회견장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수십 대의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번뜩이는 백색광 속에서도 도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마이크 앞에 섰다.웅성거리던 장내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도현이 마이크를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 단거리 육상 선수 차도현입니다."낮고 차분한 중저음이 스피커를 타고 회견장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갔다."최근 언론에 보도된 저의 건강 상태와 사적인 논란에 대해, 당사자인 제가 직접 진실을 밝히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 몸의 상태와 선수로서의 진로는 그 누구의 왜곡된 대변이 아닌, 오직 저 자신의 목소리로 밝히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도현은 단상 스크린에 한국대학병원의 의학 진단서를 띄웠다."저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습니다. 주변 시야뿐 아니라 중심
체육지원처 대회의실의 블라인드 틈새로 정오의 따가운 햇살이 비쳐 들었다.본관 정문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몰려든 취재진과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번뜩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을 뒤덮은 악의적인 찌라시 기사 때문이었다.[단독] 차도현의 눈먼 사랑? 후배 Y선수, 수천만 원 훈련비 요구 의혹…… 지인 메신저 대화 폭로캠퍼스 안은 수군거림과 호기심 어린 시선들로 들끓었다.전생이었다면 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울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선배 곁에 있어서 선배를 망치는 걸까'라는 자책감에 질식하며, 세상의 비난을 홀로 뒤집어썼을 터였다.하지만 지금의 채아는 달랐다.서민경 코치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실로 향하는 채아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훈련 일지와 통장 사본, 경찰청 접수증을 단단히 챙겨 든 손끝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여기서 답할 필요는 없어. 질문은 모아서 받고, 확인한 내용만 얘기하자. 힘들면 내가 옆에서 끊어줄 테니까.""네, 코치님. 준비 다 끝냈어요."채아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출발선을 지키기 위해선 어떤 진흙탕 싸움도 피하지 않을 각오였다.회의실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도현의 메인 후원사인 대기업 스포츠 브랜드 '아펙스 코리아' 마케팅 총괄팀장과 사내 법무팀 변호사 두 명이 굳은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사촌 에이전트 차진우가 후원사에 긴급 제출했다는 40페이지짜리 정산 감사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선수의 심신미약 상태를 악용한 후배 선수의 부당한 금전 편취 및 계약 위반 정황 보고.'보고서 표지에 박힌 자극적인 문구를 전해 들은 도현의 턱선이 서늘하게 굳어졌다.아펙스 마케팅팀장이 헛기침을 하며 서류철을 톡톡 두드렸다."차도현 선수. 우리 브랜드는 지난 3년간 차 선수의 성실함과 투지를 믿고 매년 수억 원대의 훈련비와 전용 장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왔습니다. 그런데 시각 질환을 숨긴 것도 모자라, 후배 선수에게 거액의 훈련 지원금을 빼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