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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붉은 테더의 시작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2 20:13:54

체육관 앞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한낮의 따스한 봄 햇살이 연둣빛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렸지만, 차도현의 주위를 감도는 공기는 한겨울 서리처럼 시렸다.

서민경 코치의 완강한 진료 지시를 받은 도현은 굳은 얼굴로 스파이크 가방을 고쳐 메고 있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듯 그의 눈동자는 흙바닥의 명암 경계선을 불안하게 더듬고 있었다.

"차도현 선배님."

등 뒤에서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현이 흠칫하며 돌아보자, 땀을 닦아내고 가벼운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윤채아가 서 있었다.

도현의 날카로운 턱선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자신의 취약한 상태를 가장 먼저 목격한 후배였다. 또다시 동정이나 어설픈 위로를 건네려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차갑게 쳐낼 생각이었다.

"왜 부르지? 난 지금 바빠."

"대학병원 가시는 거죠? 외래 진료 혼자 가실 생각이면 같이 가 드릴게요."

도현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내가 왜 너랑 병원을 가야 하지? 눈에 먼지가 좀 들어간 것뿐이야. 별일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선배, 자존심 세울 때 아니에요."

채아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도현의 흔들리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동정의 기색이 없었다. 오직 매일 얼굴을 맞대는 동료 스프린터로서의 담담한 이성뿐이었다.

"접수창구도 찾고 검사실도 옮겨 다녀야 하잖아요. 아까 통로에서도 부딪힐 뻔했고요. 제가 길은 봐드릴게요. 검사받을지 정하는 건 선배지만, 혼자 가다가 다치지는 마요."

도현의 호흡이 순간 멎었다.

정확하게 제 시야의 약점을 찌르는 지적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너…… 내 눈 상태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확신하듯 말하지?"

"아무것도 몰라요. 전 의사가 아니니까요."

채아는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전문의한테 확인받으러 가자는 거예요. 병원 동행은 가 드리겠지만, 진료실에 같이 들어가진 않을게요. 검사 결과를 감독님이나 팀에 알릴지 말지도 온전히 선배가 결정할 몫이에요. 전 길만 봐 드릴 뿐이에요."

결과 공개와 판단의 주도권을 온전히 자신에게 넘겨주는 태도.

남의 약점을 쥐고 흔들거나, 값싼 동정심으로 위세를 부리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도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채아의 올곧은 얼굴을 응시했다.

혼자 버스를 타고 낯선 병원 복도를 헤매다가는 정말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가슴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딱 접수대 앞까지만이야. 진료실 근처엔 얼씬도 마."

도현이 낮게 읊조리며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

검사가 끝난 그날 저녁, 채아는 무인 수납기에서 진료비 계산서를 출력하고 도현의 손에 영수증을 쥐여주었다.

"선배, 택시 탈게요. 지하철 환승 통로는 퇴근 시간이라 지금 선배 시야로는 너무 위험해요."

도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서한체대로 돌아오는 내내, 차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서울 도심의 네온사인 불빛들이 도현의 망막에는 희뿌연 안개처럼 번져 들었다.

단거리 스프린터로서 가장 찬란하게 꽃피워야 할 나이에 찾아온 불치의 어둠.

전생에서 이 절망을 마주했을 때 도현은 술과 방황으로 몸을 망가뜨렸고, 결국 자신의 그림자 뒤로 채아를 끌어들여 그녀의 인생까지 파멸로 몰아넣었었다.

***

몇 시간 전, 한국대학병원 안과 센터.

채아의 경고는 정확했다.

병원 로비는 백색 형광등이 번쩍이고 수백 명의 환자와 보호자들이 뒤엉켜 도현에게는 거대한 암흑의 미로와 같았다.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도현의 시야 속에서 사람들의 윤곽은 파편처럼 흔들렸다.

채아는 과도하게 도현의 팔짱을 끼거나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았다.

그저 도현의 오른편에서 반 보 앞서 걸으며 발소리와 기둥의 위치를 나지막하게 일러주었다.

"앞에 자동문 스테인리스 턱 있어요. 발 살짝 올리세요."

"세 걸음 뒤에 오른쪽 엘리베이터입니다. 사람이 많으니 왼쪽 벽 쪽으로 붙을게요."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는 안내 덕분에 도현은 단 한 번도 부딪히거나 휘청이지 않고 3층 특수검사실 앞 대기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약속대로 채아는 진료실 문밖 복도 대기석에 홀로 앉아 육상 매거진을 펼쳤다.

도현은 홀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산동제를 넣고 1시간에 걸친 정밀 안저 촬영, 시야 검사(Goldmann Perimetry), 그리고 망막 전위도 검사(ERG)가 이어졌다.

검사가 모두 끝난 뒤, 백발의 안과 교수가 모니터에 뜬 도현의 망막 단층 사진을 띄워놓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차도현 선수, 언제부터 야간 훈련 때 레인이 잘 안 보였습니까?"

도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야간 훈련을 피하기 시작한 건 반년 전부터요. 그전에도 어두운 데서는 불편했는데, 익숙한 트랙에선 버틸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익숙한 장소에선 몸으로 외운 방향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시력이 유지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제는 밝은 곳에서도 작은 글자나 사람 얼굴을 구별하기 어렵지요?"

교수가 레이저 포인터로 모니터의 망막 주변부를 가리켰다.

망막 가장자리를 따라 뼈세포 모양의 검은 색소 침착(Bone-spicule pigmentation)이 빽빽하게 번져 있었다.

"전형적인 망막색소변성증(Retinitis Pigmentosa)입니다. 유전성 망막 질환이에요."

교수의 목소리는 건조하면서도 냉혹했다.

"주변 시야만 좁아진 게 아닙니다. 중심 시력도 크게 손상됐고, 렌즈로 교정해도 형태를 알아보는 능력이 아주 낮습니다. 빛이 있는 방향을 느끼는 것과 물체를 구별하는 건 달라요.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동과 생활에서 필요한 도움부터 정해야 합니다."

사형 선고와도 같은 진단이었다.

"손상된 시력을 원래대로 되돌리기는 어렵습니다. 동반된 문제를 치료하고, 남아 있는 시각과 다른 감각을 활용하는 재활을 함께 논의해야 해요. 지금 상태에서 100미터를 혼자 전력으로 달리는 건 위험합니다. 우선 단독 전력 질주는 중단하세요."

도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자신의 개인 최고 기록, 10초 23.

올림픽 결승 무대를 꿈꾸며 피를 토하듯 달려온 자신의 찬란한 청춘이, 스물두 살의 봄날에 완전히 끝장났다는 진실이 비수처럼 심장을 난도질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는 도현의 다리는 힘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복도 대기석에서 일어선 채아가 다가왔다.

도현은 차가운 복도 벽을 짚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올 만큼 이를 악물었다. 차마 인정하기 두려운 절망이 목구멍을 턱 막았다.

‘끝났어. 내 육상은……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채아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으르렁거리듯 애원했다.

"……윤채아, 너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서 코치님한테도, 마 감독한테도…… 그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도현의 손이 채아의 옷자락을 놓지 못했다.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전생에서 도현이 채아의 손을 묶고 매달렸던 바로 그 나약하고 잔인한 침묵의 족쇄였다.

채아는 도현의 떨리는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동정도, 비난도 없는 담담한 눈빛이었다.

채아는 가방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파우치에서 무언가를 꺼내 도현의 떨리는 오른손 바닥 위에 탁 올려놓았다.

부드럽고 질긴 나일론 섬유의 묵직한 감촉.

중앙에 붉은색 벨크로 패드가 덧대어진, 50cm 길이의 훈련용 테더였다.

도현이 멍하니 손바닥 위의 물건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이게…… 뭔데?"

채아가 도현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무슨 물건인지 먼저 알아볼 수 있도록 손목에 거는 고리 쪽을 그의 손끝에 대주었다.

도현은 떨리는 손으로 붉은 테더를 어루만졌다.

고작 50cm 남짓한 나일론 끈.

손목에 거는 고리를 더듬자 운동 장비라는 짐작이 들었다. 하지만 이 끈을 어디에 쓰라는 건지 몰라 도현은 채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 끈은…… 어디서 난 거야?"

"시각장애 선수들이 가이드 러너와 함께 달릴 때 쓰는 테더예요. 보행 적응 훈련에 써보려고 챙겼어요. 잘 늘어나지 않는 끈이라 옆 사람의 움직임을 느끼기 쉬워요."

채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지금 결정하라는 건 아니에요. 다만 선배가 다시 뛰고 싶으면, 혼자 버티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도 찾아봐요."

"다만 이걸 잡았다고 바로 전력으로 달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코치님과 상의하고, 걷는 것부터 맞춰야 해요."

도현의 호흡이 턱 멎었다.

"코치님한테는 선배가 직접 말해요. 어디까지 알릴지도 상의하고요. 훈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그다음에 같이 물어봐요."

도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손바닥 위에 놓인 붉은 테더가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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