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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오후 5시의 조건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2 20:13:56

손바닥에 닿는 붉은 나일론 테더의 감촉은 낯설고도 차가웠다. 도현은 주먹을 꽉 쥐어 테더를 움켜쥐었다.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말의 구원이 뒤섞여 가슴속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내가…… 이걸 잡고 뛰라고?"

도현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

"난 국가대표였어. 혼자서 10초 23을 뛰던 차도현이라고. 그런데 이제는 누군가와 끈을 묶어야 뛸 수 있다는 거야?"

채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차갑게 응수했다.

"10초 23은 선배가 세운 기록이죠. 하지만 지금은 통로의 허들도 놓치고, 트랙에서 발을 헛디뎠잖아요. 선배도 아까 검사받고 나와서 제대로 걷지 못했고요. 제가 못 본 척한다고 달라져요?"

뼈를 때리는 현실적인 지적에 도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받아들이세요. 눈이 멀었다고 해서 심장이 멈춘 건 아니잖아요.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왜 지레 포기해요?"

채아는 테더를 쥔 도현의 손을 가볍게 툭 쳤다.

"혼자 못 뛰면 둘이 뛰는 법을 배우면 돼요. 서민경 코치님께 상태를 솔직하게 보고하고, 안전한 저속 적응 훈련부터 시작하세요. 그게 선수가 트랙에 남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채아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병원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도현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손바닥 속 붉은 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을 펼칠 때마다 붉은 끈이 손금 사이에 걸렸다. 병원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던 길이었다. 도현은 채아가 사라진 출구 쪽을 한참 향하고 있었다.

***

다음 날 오후 3시 50분, 서한체대 트랙 연구실.

서민경 코치는 도현이 내민 대학병원 정밀 검사 진단서를 들고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망막색소변성증…… 결국 이거였구나."

서 코치의 눈가에 짙은 안타까움과 비통함이 스쳤다.

대한민국 단거리 육상의 보물 같은 에이스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

하지만 도현의 표정은 어제와 달리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코치님, 육상을 그만두고 싶지 않습니다.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의 T11 등급 규정을 찾아봤습니다. 전문 가이드 러너와 함께라면 다시 트랙에 설 수 있습니다."

서 코치가 고개를 들며 도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예전 기록만 생각하면 힘들 거다. 혼자 뛰던 습관부터 다시 배워야 해. 가이드와 맞출 시간도 필요하고. 그래도 해보겠니?"

"감당하겠습니다. 달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도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고속 주행은 무리다. 시각 차단 상태에서 보행 감각과 보폭을 맞추는 저속 텐덤 기초 드릴부터 시작해야 해."

서 코치가 스톱워치를 집어 들었다.

"채아한테 부탁해 뒀다. 채아가 당분간 워밍업 파트너를 맡아줄 거다."

그때 연구실 문이 열리고 채아가 들어왔다.

채아는 땀복을 입은 채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코치와 도현을 바라보았다.

"코치님, 훈련 조건이 있어요."

도현의 시선이 채아에게 닿았다.

채아는 도현을 향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오후 5시 이후에요."

"뭐?"

"오늘은 코치님과 상의해서 제 춘계 선발전 100미터 개인 훈련을 오후 4시부터 5시까지로 당겼어요. 제 훈련을 전부 끝내고, 5시부터 딱 30분간만 선배 보행 적응 훈련을 도와드릴게요. 5시 30분이 되면 칼같이 끝납니다."

도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과거의 채아였다면 제 훈련 따위는 팽개치고 하루 종일 도현의 곁을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채아는 달랐다.

채아는 휴대폰 알람을 맞춰 책상에 놓았다. 5시 30분. 도현은 화면을 읽는 대신 설정 완료음을 들으며, 방금 들은 시간을 되짚었다.

도현은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안도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 때문에 이 아이의 인생이 부서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그를 숨 쉬게 했다.

"……좋아. 5시에 트랙에서 보지."

***

사실 오후 4시부터 5시까지 채아가 훈련하는 동안, 도현은 트랙 옆 벤치에 앉아 그녀의 모든 것을 귀로 듣고 있었다.

타앙! 탕!

스파이크 핀이 붉은 우레탄을 강타하는 매서운 파열음.

채아의 거칠고 뜨거운 숨소리, 그리고 지면을 짓누르는 규칙적이고 완벽한 보폭의 궤적.

‘빠르다…… 며칠 전보다 스타트 반발력이 훨씬 날카로워졌어.’

도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현은 채아가 온전히 제 속도로 뛰는 소리를 이렇게 오래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후배의 훈련에 관심을 둔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도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질주가 벤치 앞을 지나 멀어졌다. 출발선으로 돌아오는 채아에게 코치가 짧게 조언했고, 잠시 뒤 다시 같은 박자가 트랙 위로 이어졌다.

스스로를 갉아먹던 희생양의 모습은 없었다.

오후 5시 정각, 대운동장 보조 트랙.

채아는 100미터 스타트 인터벌 세션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현의 앞에 섰다.

도현은 눈에 짙은 안대를 착용한 채 굳은 자세로 서 있었다.

"선배, 손목 내미세요."

채아가 도현의 왼손 손목에 붉은 테더의 벨크로를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 손목에 반대편 루프를 걸었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50cm의 나일론 끈.

"출발은 걷기부터예요. 제 오른발이 나갈 때 선배 왼발이 나가야 해요. 보폭은 60센티미터로 고정합니다."

"알았어."

"출발합니다. 하나, 둘!"

첫 걸음을 떼는 순간, 리듬이 사정없이 꼬였다.

도현은 보이지 않는 시야의 공포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보폭을 넓게 벌렸고, 채아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채며 앞으로 쏠렸다.

"앗……!"

채아가 휘청거리며 도현의 품으로 쓰러질 뻔했다.

도현이 황급히 발을 멈추며 채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두 사람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안대 아래로 도현의 턱선에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미안하다…… 다친 데 없어?"

도현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채아는 헛기침을 하며 도현의 품에서 물러섰다.

테더를 통해 전해지는 도현의 뜨거운 맥박이 손등을 타고 전해졌다.

"괜찮아요. 끈을 너무 잡아당기지 마세요. 테더는 끌고 가는 밧줄이 아니라, 신호를 주고받는 신경망이에요. 힘을 빼고 장력만 느끼세요."

두 사람은 다시 출발선에 섰다.

하나, 둘. 하나, 둘.

열 번, 스무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두 사람의 발소리가 하나의 리듬으로 포개지기 시작했다.

타박, 타박.

일정한 박자의 가벼운 러닝화 소리가 트랙 위에 평화롭게 울려 퍼졌다.

도현의 굳어 있던 어깨가 서서히 풀려나갔다.

보이지 않아도 달릴 수 있다는 감각. 끈을 통해 전해지는 채아의 리듬이 등대처럼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삐비빅-!

채아의 스마트폰 타이머가 요란하게 울렸다.

[5시 30분 종료]

채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목의 벨크로를 뜯어냈다.

촤악.

끈이 풀리며 도현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아쉬움이 도현의 가슴을 턱 찔렀다.

"벌써 끝난 건가? 10분만 더 하지."

도현이 무심코 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채아는 도현의 손등을 가볍게 톡 밀어내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안 돼요. 약속한 30분 끝났어요. 저 쿨다운 스트레칭하고 샤워하러 가야 해요."

도현은 뻗었던 손을 거두어 무릎 위에 얹었다.

더 붙잡고 싶었지만, 채아의 단단한 선 긋기 앞에서 더는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그래. 고생했다."

채아는 쿨다운을 마치고 기숙사로 향했다.

그리고 샤워를 마치고 오후 6시 30분, 운동장 옆 벤치를 지나가던 채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어스름한 노을빛이 트랙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운동장 한구석.

차도현이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다.

노을빛이 짙게 물든 벤치로 다가온 채아의 발소리를 듣고,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편의점에서 사 온 차가운 이온 음료 한 캔이 놓여 있었다.

도현은 시원한 캔을 채아 쪽으로 가볍게 내밀었다.

"……마셔라."

채아가 눈을 깜빡이며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캔 표면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손끝을 적셨다.

"선배, 1시간 동안 여기서 계속 기다린 거예요?"

"응."

도현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엷게 미소 지었다.

흐릿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였지만, 그 속에 담긴 온기만큼은 봄날의 저녁노을보다 따뜻했다.

"아까 네 마지막 대시, 좋았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4시 반에 뛴 세 번째 인터벌 말이야. 마지막까지 발소리가 가벼웠거든. 너 샤워하고 나오면 주려고 사 왔어."

채아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려왔다.

기다림의 주체가 바뀌어 있었다.

전생에서 7년 내내 도현의 훈련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사람은 채아였다.

지금 채아의 손에는 도현이 건넨 캔이 있었다. 마실 틈도 없이 다음 일을 찾던 예전과 달리, 서둘러 어디론가 갈 필요가 없었다. 채아는 벤치 옆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선배, 고마워요."

채아가 음료수 캔을 쥐며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트랙 위로, 완전히 새로운 계절의 바람이 기분 좋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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