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공개 테스트 당일 아침 8시, 체육관 1층 여자 육상부 락커룸.
경기를 앞두고 감도는 공기는 유난히 서늘하고 건조했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 속에는 멘톨 파스 냄새와 오래된 우레탄 고무 냄새가 뒤섞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라커룸 벤치에 앉아 발목에 단단하게 산화아연 테이핑을 감던 동기 이진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건넸다.
"채아야, 근데 오늘 아침 6시 좀 넘어서 수아 선배가 라커룸 쪽에 어슬렁거리는 거 봤거든? 보냉병 찾으러 왔다면서 두리번거리던데, 뭔가 표정이 쎄하더라."
진희의 무심한 한마디가 채아의 뇌리에 날카로운 경종을 울렸다.
‘최수아……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전생의 기억이 오버랩되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채아는 서둘러 테이핑을 마무리하고 사물함으로 다가갔다.
채아는 자신의 사물함 번호 키를 능숙하게 누르고 문을 열었다.
선반 맨 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던 검은색 스포츠 신발 주머니를 꺼냈다.
이틀 동안 서민경 코치와 새벽마다 킥 앵글을 가다듬으며 갈고닦은 주황색 카본 스파이크였다.
가방 지퍼를 열고 오른발 스파이크를 꺼내 든 순간, 채아의 손끝에 낯설고 이질적인 촉감이 걸렸다.
"……!"
밑창의 탄소 섬유 플레이트 측면.
스파이크 핀이 박힌 전족부와 아치를 잇는 가장 중요한 지지대에 날카로운 공업용 커터칼 자국이 깊게 그어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꿈치를 단단하게 감싸야 할 힐컵 내부의 지지 봉합선이 안쪽에서 교묘하게 실밥이 뜯겨 나가 있었다.
육상 스프린트의 역학을 잘 아는 자가 저지른 악의적인 테러였다.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튀어 나가는 순간, 스프린터의 발목에는 자기 체중의 4배가 넘는 폭발적인 하중이 실린다.
플레이트 지지대가 버티지 못하면 착지 때 발이 크게 흔들릴 수 있었다. 발목 바깥쪽 인대를 다칠 위험을 알고 있기에, 채아는 손상된 밑창에 체중을 싣지 않았다.
발을 넣으면 상처는 가려질 것이었다. 채아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겉만 보고 신었다면 출발선을 박차기 전까지도 몰랐을 손상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벼락처럼 뇌리를 스쳤다.
스물한 살의 춘계 대회 전날 아침, 채아는 이 똑같은 훼손을 마주했었다.
‘신발이 좀 헐거워졌나? 그래도 지금 말하면 감독님한테 혼날 텐데…….’
‘선배들이 경기 앞두고 예민하니까, 내가 참고 뛰면 괜찮겠지. 어떻게든 버텨보자.’
대회 전날 훈련에서 바보처럼 혼자 참고 달리다 50미터 가속 구간에서 스파이크 밑창이 터져 나갔고, 발목 외측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며 수술대에 올랐었다.
수술실에서 눈을 떴을 때 돌아온 것은 격려나 치료비가 아니라, "자기 몸 하나 간수 못 해 팀 분위기를 망쳤다"는 마정호의 차가운 비난과 퇴출 통보였다.
선수 생명이 그 자리에서 꺾였고, 재활비조차 지원받지 못한 채 도현의 무보수 매니저로 전락했던 비극의 시작점.
채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두 번은 안 당해. 절대로.’
채아는 전생처럼 울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훼손된 스파이크를 발에 넣어보지도 않았다.
채아는 곧장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카메라 플래시를 켜고 30도 각도로 비스듬히 그어진 칼자국 단면과 뜯겨진 실밥, 그리고 사물함 도어록 주변의 미세한 스크래치까지 초근접 접사로 선명하게 촬영했다.
금속 절삭 가루가 묻어 있는 힌지 부분까지 각도별로 스무 장이 넘는 사진을 찍어 클라우드 드라이브에 실시간으로 백업했다.
동영상으로 훼손 부위의 유격과 비틀림을 꼼꼼히 기록하며 타임스탬프까지 확실하게 남겼다.
증거 보존이 완벽하게 끝난 뒤에야 채아는 스파이크 주머니를 들고 락커룸을 나섰다.
복도 계단을 내려가던 채아의 앞을 커다란 인영이 막아섰다.
차도현이었다.
도현은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복도 창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침 훈련을 마치고 채아의 테스트를 보기 위해 미리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채아의 빠른 발걸음 소리를 듣자마자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윤채아, 테스트 준비는 다 끝났……"
도현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채아가 곁을 지나려다 멈췄고, 손에 든 신발 주머니가 바스락거렸다.
평소 훈련 뒤와 달리 숨이 짧게 끊겼다. 도현은 손을 뻗으려다 기다렸다. 먼저 물어야 할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채아는 숨김없이 스파이크 주머니를 열어 도현의 손에 쥐여주었다.
"스파이크 밑창이 잘렸어요. 고의로 그어놓은 커터칼 자국이에요."
도현이 굳은 손가락으로 스파이크 플레이트의 칼자국을 더듬었다.
손끝을 스치는 깊은 균열.
도현의 턱선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건…… 완전히 발목을 부러뜨리려고 작정한 짓이잖아."
도현의 눈동자에 서슬 퍼런 살기가 번뜩였다.
"누구 짓이야? 최수아냐? 마 감독이 시킨 짓이야?"
도현이 주먹을 쥐며 복도 계단을 박차고 올라가려 했다.
채아가 도현의 소매를 단호하게 낚아챘다.
"선배, 멈춰요."
"이걸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지금 당장 락커룸 엎어버리고 마 감독한테 따져야 해!"
"따져서 심증만으로 소란 피우면, 증거 불충분으로 저만 '경기 직전 핑계 대는 비겁한 선수'로 몰려요."
채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얼음처럼 단단했다.
"선배가 흥분해서 날뛰면 마 감독은 선배 징계 빌미만 잡아요. 사진이랑 동영상으로 증거는 이미 다 남겼어요. 선배가 절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체육지원처 가서 복도 CCTV랑 락커룸 출입 전산 기록 보존 요청 공문을 함께 신청해 주는 거예요."
도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자신의 감정적인 분노보다, 냉철하게 현실적인 대책을 세우는 채아의 이성이 훨씬 더 앞서 있었다.
도현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장비 관리실이랑 행정실 전산 담당자, 내가 직접 만나서 기록 확보할게."
도현은 떨리는 손으로 찢어진 카본 플레이트를 쓸어내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윤채아, 내가 마 감독한테 가서 내 권한으로 출전 엔트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어. 나 하나 빠지면 서한체대 육상부 1년 농사가 통째로 날아가니까 마 감독도 내 말은 거절 못 해."
자신의 에이스 지위를 무기로 채아를 보호하겠다는 도현의 제안.
하지만 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배가 화난 건 알아요. 저도 그래요. 그래도 지금은 부탁한 것부터 해줘요."
채아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한 쇳소리가 배어 있었다.
"CCTV가 지워지기 전에 남겨두고 싶어요. 전 코치님한테 신발부터 보여드릴게요. 감독님한테 따지는 건 그다음에 같이 해도 되잖아요."
도현은 채아의 올곧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채아는 신발 주머니 끈을 다시 묶었다. 도현이 잡고 있던 소매를 놓아주자, 두 사람은 복도의 서로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현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 채아가 부탁한 건 출전권을 대신 얻어달라는 일이 아니었다. 기록을 보존해 달라는 말을, 자신이 또 다른 제안으로 덮으려 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선배."
채아는 곧장 서민경 코치의 연구실로 향했다.
서 코치는 훼손된 스파이크를 보더니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이 파렴치한 것들이…… 감히 선수 신발에 칼을 대?"
서 코치가 분노로 책상을 내리쳤다.
"테스트 당장 중단시키마. 감사팀 불러서 전수 조사부터 해야겠어."
"아닙니다, 코치님."
채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망가진 신발로는 안 뛸 거예요. 대신 안전하게 신을 수 있는 다른 신발이 있으면 테스트는 하고 싶습니다. 제가 기권했다는 말로 끝내고 싶지 않아요. 조사는 조사대로 부탁드릴게요."
서 코치가 채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최수아의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아가 육상부 선배들과 함께 코치실 문을 열어젖히며 비아냥거렸다.
"윤채아, 테스트 시간 다 됐는데 여기서 뭐 해? 설마 신발 망가졌다고 기권 핑계 대려는 건 아니지? 자기 장비 하나 간수 못 하는 애가 무슨 국가대표를 하겠다고 나서니? 뛸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깨끗하게 기권해."
아침 7시 30분, 제주 서귀포 전지훈련 선수단 식당.전지훈련에 참가한 각 대학 육상부와 실업팀 선수들로 식당 안은 이른 아침부터 왁자지껄했다. 배식대의 갓 구운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와 계란 프라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고, 그 옆에는 신선한 과일 샐러드가 놓여 있었다.식판을 들고 테이블 구석 자리에 앉은 채아는 젓가락으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연신 헛기침을 삼켰다.맞은편에 앉은 차도현 때문이었다.도현은 언제나처럼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주변 테이블의 다른 대학 선수들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역시 서한체대 차도현 선배 포스는 장난 아니다"라며 수군거릴 만큼 차갑고 서늘한 간판스타의 위압감 그대로였다.하지만 테이블 위의 실제 상황은 정반대였다.도현은 제 식판의 계란을 주겠다고 했다. 채아가 그릇을 가까이 가져오자 손끝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계란 프라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옮겨주었다.탁."선배……?"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도현이 헛기침을 하며 덤덤하게 속삭였다."단백질 보충해라. 오늘 오전 훈련 인터벌 빡빡하다며.""나 이미 달걀 두 개 받았는데요?""그럼 배고프면 먹어. 더 먹으라고 억지로 주는 건 아니고…… 네가 좋아하는 반숙이길래."도현의 무심한 말투와 달리, 선글라스 너머 그의 귀 끝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손끝으로 사과의 껍질을 정
처마 끝을 타고 흘러내리던 굵은 물방울이 점차 가늘어지더니, 이내 뚝, 뚝 소리를 내며 멎어 들었다.서귀포의 여름 소나기는 요란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밤하늘 너머로 물러났다.빗줄기가 말끔히 씻어내린 밤공기 속에서 짙은 흙내음과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한층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물기를 머금은 아스팔트 위로 목조 가로등 불빛이 길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처마 아래에 바짝 붙어 서 있던 두 사람의 숨결은 여전히 가빴다.도현의 엄지손가락은 여전히 채아의 이마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빗방울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던 손길이 귓가를 스쳐, 가느다란 턱선 쪽으로 아주 느리게 미끄러져 내렸다.스프린터 특유의 거친 굳은살이 박인 도현의 커다란 손바닥.그 손바닥이 살갗에 닿는 순간, 채아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일어 숨을 깊게 들이켰다."비…… 완전히 그쳤네요."채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빗소리가 멎어버리자 자신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요란한 심장 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도현의 귀에 닿을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도현이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조금만…… 더 걷다 들어갈까.""네."두 사람은 처마 밑을 빠져나와 촉촉하게 젖은 해변 산책로로 걸어 나갔다.바다 위로 먹구름이 걷히며 은빛 달빛이 수평선 가득 부서져 내렸다.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모래톱에 맺힌 빗방울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밤 9시의 서귀포 해변 산책로는 한산했다.철썩, 철썩.검은 현무암 갯바위를 부드럽게 핥고 물러서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채우고 있었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함께 불어오는 밤바람이 낮 동안 훈련으로 달아올랐던 대지를 서늘하게 식혀 주었다.숙소 방을 나서기 전, 룸메이트 이진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채아의 후드 집업 옷깃을 털어주며 신신당부했었다."야, 윤채아. 도현 선배가 밤에 산책 가자고 불렀는데 너 설마 훈련용 삼선 슬리퍼 끌고 나가려는 건 아니지? 제발 예쁜 흰 운동화 신고 나가라. 둘이 오늘 분위기 장난 아닐 것 같으니까!""진희야, 그냥 산책이라니까.""그냥 산책은 무슨! 서한체대 최고 철벽남이 밤바다를 걷자는데 그게 그냥 산책이냐? 응원한다, 우리 챔피언!"진희의 장난기 가득한 배웅을 뒤로하고 나온 채아는, 산책로 입구의 목조 가로등 아래에서 바닥의 조개껍데기를 발끝으로 툭툭 굴리고 있었다.사촌 에이전트 차진우는 구속되었고, 마정호 감독도 더는 두 사람의 훈련을 좌우할 수 없었다. 남은 절차까지 끝난 건 아니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그들의 연락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오롯이 서로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밤이었다.탁, 탁.모래알이 섞인 보도블록을 짚는 단단한 지팡이 소리가 들려왔다.채아가 고개를 들었다.가로등 불빛 속으로 차도현이 걸어오고 있었다.훈련용
며칠 뒤, 서울 수서경찰서 경제범죄수사팀 앞.검은 마스크를 푹 눌러쓴 차진우가 수사관들의 손에 이끌려 호송차로 향하고 있었다. 횡령 및 업무상 배임, 정보통신망법상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신청된 사전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전격 발부된 것이었다.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진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망치듯 얼굴을 가렸다.도현의 망막 질환을 약점 잡아 치료비를 가로채고, 조작된 대포폰 가짜 메신저로 채아를 파멸시키려 했던 파렴치한 사기꾼의 말로는 비참했다. 대학 커뮤니티 에브리타임과 포털 뉴스에는 채아를 향한 비난 대신, 사기꾼 에이전트의 구속 소식과 함께 두 선수를 향한 응원의 글들이 줄을 이었다.동시에 서한체육대학교 총장 직속 감사실에서도 단호한 처분이 내려졌다. 마정호 감독은 감사실 회의실 책상 앞에 불려 가 서늘한 처분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마정호 감독. 최수아 선수의 스파이크 훼손 사건을 무마하려 한 직권남용과, 차진우의 허위 언론 플레이를 알고도 묵인·방조한 사실이 특별 감사를 통해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징계위원회 결정에 따라 감봉 3개월 및 육상부 선수 지도 및 엔트리 전결권을 전면 박탈합니다."감사실장의 냉정한 선고에 마 감독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더 이상 항변할 명분은 없었다.체육관 로비 게시판에는 윤채아 선수의 명예 회복과 차도현 선수의 T11 국가대표 도전을 전폭 지지한다는 학교 본부의 공식 공고문이 내걸렸다.선수 지도와 출전 결재는 서민경 코치에게 일원화되었다. 채아는 게시된 공고를 사진으로 남겼다. 누가 책임지고 답해야 하는지, 이번에는 이름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도현은 강 변호사의 법률 사무소에서 새로운 표준 선수 매니지먼트 계약서에 자필 서명을 남겼다.과거 사촌 진우에게 백지위임했던 계약의 효력과 대리권은 정리되었다. 원본은 이후 책임을 묻는 데 필요해 법률 사무소에 보관했다.새 계약서는 결정권과 대리 업무의 범위를 나눠 적었다. 도현은 항목을 읽어주는 음성을 멈추고, 본인 확인 없이 바꿀
화요일 오전 9시 5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대기실.두꺼운 방음문 너머로 수백 명의 취재진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송사 중계 카메라의 삼각대가 바닥을 긁는 소리와 플래시 충전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거울 앞에 선 차도현은 단정한 검은색 수트의 옷깃을 조용히 바로잡았다.눈을 가린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미세하게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주먹을 쥔 손가락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가이드 러너 한태준이 도현의 넓은 어깨를 툭 쳤다."긴장하지 마, 도현아. 네가 트랙에서 흘린 땀은 우리가 알잖아.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준비한 얘기부터 차근차근 해."도현의 법률 대리인인 강 변호사 역시 두꺼운 서류철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서 차진우 씨의 사설 대포폰 가상 계정 생성 IP와 계좌 추적 영장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아펙스 코리아 측에서도 법무팀 명의의 공식 지지 성명서를 회견에 맞춰 전달해 왔습니다.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도현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자."오전 10시 정각, 대기실 문이 열리고 도현이 회견장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수십 대의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번뜩이는 백색광 속에서도 도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마이크 앞에 섰다.웅성거리던 장내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도현이 마이크를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 단거리 육상 선수 차도현입니다."낮고 차분한 중저음이 스피커를 타고 회견장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갔다."최근 언론에 보도된 저의 건강 상태와 사적인 논란에 대해, 당사자인 제가 직접 진실을 밝히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 몸의 상태와 선수로서의 진로는 그 누구의 왜곡된 대변이 아닌, 오직 저 자신의 목소리로 밝히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도현은 단상 스크린에 한국대학병원의 의학 진단서를 띄웠다."저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습니다. 주변 시야뿐 아니라 중심
체육지원처 대회의실의 블라인드 틈새로 정오의 따가운 햇살이 비쳐 들었다.본관 정문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몰려든 취재진과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번뜩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을 뒤덮은 악의적인 찌라시 기사 때문이었다.[단독] 차도현의 눈먼 사랑? 후배 Y선수, 수천만 원 훈련비 요구 의혹…… 지인 메신저 대화 폭로캠퍼스 안은 수군거림과 호기심 어린 시선들로 들끓었다.전생이었다면 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울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선배 곁에 있어서 선배를 망치는 걸까'라는 자책감에 질식하며, 세상의 비난을 홀로 뒤집어썼을 터였다.하지만 지금의 채아는 달랐다.서민경 코치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실로 향하는 채아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훈련 일지와 통장 사본, 경찰청 접수증을 단단히 챙겨 든 손끝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여기서 답할 필요는 없어. 질문은 모아서 받고, 확인한 내용만 얘기하자. 힘들면 내가 옆에서 끊어줄 테니까.""네, 코치님. 준비 다 끝냈어요."채아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출발선을 지키기 위해선 어떤 진흙탕 싸움도 피하지 않을 각오였다.회의실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도현의 메인 후원사인 대기업 스포츠 브랜드 '아펙스 코리아' 마케팅 총괄팀장과 사내 법무팀 변호사 두 명이 굳은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사촌 에이전트 차진우가 후원사에 긴급 제출했다는 40페이지짜리 정산 감사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선수의 심신미약 상태를 악용한 후배 선수의 부당한 금전 편취 및 계약 위반 정황 보고.'보고서 표지에 박힌 자극적인 문구를 전해 들은 도현의 턱선이 서늘하게 굳어졌다.아펙스 마케팅팀장이 헛기침을 하며 서류철을 톡톡 두드렸다."차도현 선수. 우리 브랜드는 지난 3년간 차 선수의 성실함과 투지를 믿고 매년 수억 원대의 훈련비와 전용 장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왔습니다. 그런데 시각 질환을 숨긴 것도 모자라, 후배 선수에게 거액의 훈련 지원금을 빼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