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아는 주경섭이 떠난 뒷모습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3년을 꾹 참아오다가 오늘 드디어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차피 이혼할 사이인데 주씨 가문 사람을 좀 건드렸다고 벌벌 떨 이유가 뭐가 있을까?
주강인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단번에 휘어잡으며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의외네. 남들 앞에서는 내 편을 다 들어주고?”
고현아는 그를 홱 밀쳐내고는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꼬듯 말했다.
“비즈니스 멘트일 뿐이에요. 과몰입하지 마시죠, 주 대표님.”
‘비즈니스 멘트?’
주강인이 혀를 쯧 찼다.
거실에 모인 사람들 틈에서 고현아는 그간 갈고닦은 화술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빠르게 사모님들의 사교계에 파고들었다. 불과 30분 만에 벌써 다섯 건의 예약 주문을 받아냈고 심지어 자기 딸의 결혼식 드레스를 맞춰달라는 제안까지 들어온 참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생각지 못한 사업 아이템을 떠올렸다. 재벌가 딸들의 결혼식 피로연 드레스, 나아가 종류별로 머메이드, A라인, 벨라인까지 영역을 넓히는 것도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물론 그건 지금 운영하는 작업실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뒤의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그 시각, 주강인은 다리를 꼬고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아 그녀의 동선을 따라 집요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왜 그녀가 이곳에 오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결국 손님을 끌어모으러 온 거였네!’
그때, 가정부가 성씨 가문의 아가씨가 문 앞에 도착했다고 알렸다.
주강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으러 나가려 할 때 성은지가 이미 환한 웃음을 띠고 문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주호섭을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주호섭은 그녀에게 앉으라 권하며 그녀 아버지 근황을 물었다. 수술이 순조롭게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강인 오빠 덕분이에요. 오빠가 세심하게 신경 써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순조롭지 못했을 거예요.”
주호섭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도움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당연히 강인이가 해야 할 일이고 따지고 보면 우리 집안에서 너희 집안에 빚을 진 거잖아.”
이에 성은지가 손을 저었다.
“아저씨, 그런 말씀 마세요. 강인 오빠가 이만큼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더구나 옛날 일은...”
분위기가 지나치게 무거워지자 성은지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녀가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을 주호섭에게 건네면서 거실의 공기는 금세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한편 거실 한쪽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현아의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들고 있던 귤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거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또다시 아버지 생각이 났다.
성은지를 볼 때마다 그녀는 아버지가 왜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그 비극적인 이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성은지를 대하는 다정한 태도는 고현아 자신이 이 주씨 가문에 결코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오직 그녀 자신뿐이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애초에 주강인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하지만 이내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아마 아버지는 진작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문턱의 높은 집안에는 오가는 정이 없다. 부자지간이든 부부지간이든 마찬가지였다.
고현아는 무료한 듯 연못가에서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며 시간을 보내는데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현아 씨?”
물 위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 그녀는 뒤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곧이어 몸을 일으켜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성은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강인 오빠 아내분이 엄청 미인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는데 오늘 직접 뵈니 과연 소문대로네요.”
거실에서 연못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고현아는 이것이 절대 우연한 만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성은지 씨,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이유가 뭐죠?”
단순히 예쁘다는 칭찬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터였다.
성은지는 고현아의 직설적인 화법에 순간 당황한 듯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방금 아저씨께 들었는데 전통 의상 디자인을 하신다고요. 아저씨께 선물하신 옷도 다 봤어요.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요.”
고현아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칭찬 고마워요.”
성은지는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웃을 때마다 뺨에 패는 보조개가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그냥 편하게 말 놓으세요, 현아 씨. 강인 오빠도 ‘은지야’라고 반말하거든요.”
‘은지야! 그래, 그렇게 불렀었지. 그것도 수없이!’
통화 너머로도, 면전에서도, 심지어 욕실 안에서까지 그 이름 두 글자는 마치 파리처럼 어디든 끈질기게 따라붙어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고현아는 일부러 친한 척하는 그녀의 말꼬리를 잘라내듯 표정 변화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그녀는 주강인의 연인과 엮일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혼이 퇴사야? 인수인계를 하게?'
한편 고현아의 말에 성은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어색하게 서 있을 따름이었다.
고현아는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하얀 원피스 차림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크고 맑은 눈망울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하이힐을 신었을 텐데도 고현아보다 한참 작은 키, 왜소한 체구에 가녀린 몸매라니, 남자들뿐만 아니라 같은 여자가 봐도 절로 보호 본능이 일 만큼 연약함 그 자체였다.
성은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까 고현아가 던진 그 노골적이고 날 선 말에 어떻게 대꾸할지 궁리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반응을 마주하니 오히려 고현아 쪽이 난감해졌다.
차라리 대놓고 덤벼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남의 자리를 꿰차고 앉았냐고 따져 묻는 게 이렇게 우물쭈물하며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백번 나을 것 같았다.
한참의 정적 끝에 성은지가 입을 뗐다.
“강인 오빠랑 괜찮은 거예요? 둘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고요?”
‘지금 날 떠봐? 우리가 이혼한다는 걸 벌써 눈치챈 거야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거야?’
고현아는 이런 식의 간 보는 듯한 질문에는 절대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질문을 다시 상대에게 툭 던져버릴 뿐이었다.
“은지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이에 성은지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좀... 부부처럼 안 느껴지긴 해서요.”
“부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데요?”
고현아는 고개를 떨군 채 입을 꾹 다문 그녀를 보며 슬슬 인내심이 바닥났다. 이제 막 자리를 떠나려 하는데 성은지가 불쑥 앞을 가로막아 섰다.
“실은 현아 씨한테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요.”
고현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한편 성은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강인 오빠가 홍 교수님을 독일로 모시고 간 일 말이에요. 원래 현아 씨 몫이었던 기회를 우리가 가로챈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고현아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표정은 덤덤했지만, 몸 옆으로 늘어뜨린 양손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꽉 쥐어지고 있었다.
“이 일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진 거 저도 알아요. 하지만 오빠도 너무 걱정이 앞서서 그런 거니까... 제가 대신해서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대신이요?”
고현아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대신한다는 거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무고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상대방을 보며 고현아는 차갑게 비웃음을 날렸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니까 은지 씨는 신경 끄시고 본인 앞가림이나 잘하세요.”
“아니,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차라리 직접 따지고 들었으면 그 배짱이라도 인정했을 텐데 겉으로는 무고한 척하면서 뼈 있는 말로 도발하는 꼴이라니. 가증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고현아는 속이 다 울렁거렸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나무 아래에서 통화 중인 주강인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은지 씨 아버님 수술은 잘 끝났죠?”
성은지는 뜬금없는 질문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성은지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고현아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성은지는 마치 허공에 주먹질한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원하는 답은커녕 아무것도 캐내지 못했다.
소문과 달리 고현아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돌아오던 주강인이 다가오는 고현아를 발견하고는 무언가 말을 건네려 했다. 다만 그녀는 무표정하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곁을 스쳐 지나갔다.
주강인은 근처에 서 있는 성은지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성은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오빠, 혹시 현아 씨랑 이혼해요?”
주강인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목소리도 한 톤 낮게 깔렸다.
“걔가 그래?”
성은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짐작이에요. 방금 현아 씨한테 오빠 얘기를 꺼냈는데 반응이 너무 냉담한 거예요.”
주강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래.”
그 짧은 대답을 남기고 남자는 고현아를 향해 걸어갔다. 성은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의구심에 휩싸였다.
저 사람, 고현아한테 정말 아무런 마음도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