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향기로 수놓다

봄 향기로 수놓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By:  쭈의잔상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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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년 조선, 남원. 현대의 수의사 견우성은 정체불명의 힘에 휘말려 과거로 떨어지고, 그곳에서 베를 짜며 살아가는 관기 이연서를 만난다. 서로 다른 시대와 신분, 삶의 방식 속에서 충돌하던 두 사람은 상처를 치료하고 위기를 함께 넘기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러나 우성에게는 돌아가야 할 현대가 있고, 연서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있다. 춘향전에 견우직녀 설화를 수놓은, 사랑과 선택 그리고 이별을 넘어 이어지는 두 사람의 시간여행 로맨스. 조선과 현대를 가르는 은하수 위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운명을 바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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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금빛ㅊㅊ
금빛ㅊㅊ
다음 화 언제 올라와요? ㅠㅠ 궁금해요
2026-09-02 18:31:32
1
0
21 Chapters
1-01 시작은 끝으로부터
째깍-째깍-시곗바늘이 날카롭게 베는 소리가 진한 블랙 체리 냄새와 섞여 어두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우성은 구석으로 밀려난 채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허공 속에서 발버둥쳤다.띠, 띠띠-띠.갑자기 들려오는 도어록 소리와 함께 소연이 들어왔다. 또각거리던 그녀의 신발이 현관에 가지런히 놓이고, 적갈색 손가방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졌다.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법도 한데, 소연은 마치 제 집인 양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우성을 찾아낸 그녀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아이 참, 또 왜 이러고 있어-”소연의 목소리에 우성이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화려한 눈화장과 생기 넘쳐 보이는 입술, 반짝이는 눈동자가 어둠을 밝게 비췄다. 우성의 앞에 쪼그려 앉은 소연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살짝 숙이며 말했다.“밥 또 안 먹었지? ...가만있어 봐, 내가 뭐 좀 해 줄게.”“...왜 또 왔어?”우성의 갈라진 목소리가 부엌으로 향하는 소연에게 겨우 닿았지만 금세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소연은 일어나 냉장고를 이리저리 뒤지며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아 맞다, 오빠. 그거 알아? 오늘이 우리 헤어진 지 벌써 100일째더라. 시간 진짜 금방 가지?”아무렇지 않게 뱉는 그녀의 물음에 우성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는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무심한 소연이 새삼 얄미워졌다.‘...100일.’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나 싶어 우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사람이 말하면 좀 대꾸를 해 줘야지. 말하는 사람이 무안하잖아.”“...그만하고 가. 어차피 안 먹어.”우성의 차가운 말투에 소연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안 먹기는 왜 안 먹어. 굶어 죽게? 차려 놓고 갈 테니까 꼭 먹어.”“...”우성은 소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헤어지자고 했던 건 다름 아닌 소연이었다. 우성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런 그를 잠깐 지켜보던 소연은 정적 속에서 요리를 계속했다.그녀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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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같은 향, 다른 시대
향 냄새가 장례식장 안을 침울하게 메웠다. 부모 곁에서 조문객을 맞던 우성은 친구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초겨울이 스며든 검은 코트를 입고 나타난 천호가 그대로 멈추어 우성의 눈을 마주했다. 단정하고 깔끔한 코트 차림의 예진도 토트백을 두 손으로 가만히 쥐고서 그의 옆에 멈추어 섰다.짧은 침묵이 흐른 후, 천호가 조심스럽게 우성에게로 걸어갔다. 그동안의 공백을 서둘러 채우려는 듯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안았다. 우성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삼키고 입을 열었다.“...와 줘서 고맙다.”초췌한 우성의 모습을 본 예진은 눈물이 났지만, 괜스레 퉁명스러운 말부터 꺼냈다.“연락하고 사는 게 어렵냐? 이럴 때만 부르고 있어...”“그러지 마. 이럴 때라도 부른 게 어디야. 난 얘 어떻게 된 줄 알았어.”천호와 예진의 타박에 우성이 미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희가 손님들과 대화를 끝내고 천호와 예진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그녀에게 꾸벅 목례하며 말했다.“많이 힘드시죠?”천호의 다정한 말에 정희가 대답했다.“아니에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들이니?”그녀가 우성의 팔을 슬쩍 잡으며 물었다. 우성이 그녀에게 친구들을 소개했다.“아, 여기는 제가 다니던 병원의 원장 옥천호, 그리고 여기는 그 앞에서 카페를 하는 도예진이에요. 둘 다 대학교 때부터 친구예요.”“그렇군요, 늘 얘기만 듣다가 이제야 보네요. 먼 길 와 줘서 고마워요. 식사는 했어요? 얼른 저기 가서 식사부터 해요.”정희가 우성과 친구들을 살갑게 챙기며 말했다. 천호와 예진은 얼떨결에 정희의 손에 끌려가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우성이 너도 얼른 와서 같이 밥 먹어. 계속 서 있었잖아.”정희의 말에 우성도 그들 뒤를 따라갔다. 세 사람은 어쩐지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 천호가 테이블 위에 수저를 나누어 놓으며 우성에게 물었다.“그... 물어봐도 돼?”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천호에게 우성이 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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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베 짜는 여인
아침 해가 미처 뜨기도 전, 연서는 저도 모르게 눈이 떠져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는 밤새 식지 않은 아랫목의 온기가 옅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누웠던 자리를 돌아보며 이불과 요를 차례로 개어 한쪽에 가지런히 밀어 두었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방문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연서는 빗을 들어 긴 머리를 쓸어내렸다. 빗살 사이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빗어질 때마다, 엉켜 있던 생각들도 가지런히 정리되는 듯했다. 그녀는 늘 하던 대로 단정히 머리를 매만지고 소복을 챙겨 입었다. 흰 옷고름을 여미는 손길이 빠르고 능숙했다.바깥으로 나온 연서는 아직 희미한 어둠이 남은 마당을 한 번 바라보며 기지개를 쭉 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상쾌한 아침 이슬 냄새가 가슴 깊이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부엌으로 가서 쌀을 헤아리고 물을 맞추어 솥에 안치기 시작했다. 작은 물소리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연서가 불씨를 살려 아궁이에 넣고 입김을 불어넣자, 이내 잔불이 빨갛게 타올랐다.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진이 아직 눈도 다 뜨지 못한 얼굴로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품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연기 냄새를 맡자마자 말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연서의 옆으로 다가왔다.“...벌써 일어났어요?”연서는 대꾸 대신 물 한 바가지를 건네주었다. 어진은 한 손으로 바가지를 받아 벌컥벌컥 마시고는 크하- 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었다.“오늘은 나 데리러 안 와도 돼.”연서가 불길을 살피며 말했다. 어진은 여전히 졸음이 묻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예? 왜요?”“응, 언제 끝날지 몰라서. 국휼 이후 첫 일과잖아?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안 정해져서, 언제 마칠지도 몰라.”어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손끝으로 그릇 가장자리를 긁적이던 그녀가 이내 투덜대듯 말했다.“그럼 저는 계속 어머니랑 일해야 돼요? 관아 가는 길이 유일한 쉬는 시간인데...”어진의 서운한 말투에 연서는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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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서쪽으로 간 목동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린 예성이 말없이 집 안으로 휙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마당을 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우성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에서 내린 우성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에서 볼 때보다 훨씬 많은 별이 검푸른 밤 위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선명한데도, 어쩐지 더 멀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웬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어느새 발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달빛을 받은 털은 밤공기 속에서 묘하게 푸른빛을 내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우성과 눈이 마주치자 태연한 걸음으로 다가와 우성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그는 그대로 쪼그려 앉으며 조심스레 고양이의 얼굴에 손을 내밀었다. 우성의 손끝이 고양이의 정수리를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온기가 차가운 우성의 손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고양이를 만지던 그가 중얼거렸다. “춥겠다...” 그의 손길을 받던 고양이는 이내 몸을 슥 빼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한쪽 발이 아픈지 절뚝거리며 집 뒤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가다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꼭 따라오라는 것만 같았다. 우성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 뒤를 따랐다. 집 뒤쪽은 가로등이 없어 훨씬 어두웠다. 쓰지 않는 농기구며 장작 더미, 오래된 광주리 같은 것들이 밤 그림자에 묻혀 희미한 윤곽만 남기고 있었다. 그 익숙한 어둠을 지나자, 약간 경사진 작은 언덕 위에 주변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낯선 기계였다. 사람의 앉은키를 조금 넘을 듯한 크기였고, 무광의 쇠로 된 표면은 묘한 패턴으로 뒤틀리듯 맞물려 있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아버지가 새로 산 정미기곈가?’ 우성은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 희미한 빛의 정체는 기계에 표시된 디지털 숫자였다. 가까이 다가간 우성은 4와 46, 그리고 415.071800이라는 기묘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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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조선에 떨어진 별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린 우성의 눈앞에는 낯선 여인의 얼굴이 있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도 큼직한 눈과 곧은 콧날이 유난히 선명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흰 한복을 입은 여인은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그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우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 그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산기슭, 바닥에서 희미하게 이는 흙냄새와 마른 풀 냄새, 검은 밤하늘.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낮은 초가지붕의 윤곽. 우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우성은 팔꿈치로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고개가 조금 들리자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곧바로 다시 몸을 눕히고 숨을 골랐다. “어... 어떻게 된 거죠?”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묻자 여인이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어색한 그의 말투와 행동 때문에 그녀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깃들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 먼저 말씀해 주시지요.” 우성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정신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흰 고양이, 낯선 기계, 사방으로 번지던 푸른빛. 우성은 다급히 주위를 훑었지만 기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기계...! 혹시 여기 있던 기계는 어떻게 됐어요?” 여인은 그가 쓰러져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흙이 동그랗게 눌리고, 마른 풀은 한 방향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기계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왔을 때는 나리 한 분뿐이었습니다.” “파란빛은요? 여기서 빛이 났을 텐데.” 연서의 눈매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보았습니다. 산기슭이 한순간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나리께서 쓰러져 계셨고요.” 그 말에 우성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만 본 환각이라고 넘길 수도 없게 되었다. 누군가 꾸민 일이라면 대체 무엇을 위해 이 산속까지 끌고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 제 질문에 먼저 답해 주시지요.” 말뜻은 알아들었지만 말의 결이 묘했다. 사투리인가. 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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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두 가닥의 실, 하나의 베틀
조선 남원골.우성은 충격에 젖은 눈으로 연서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선’이라는 두 글자가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조... 선...?”우성이 겨우 입을 열었다. 연서가 그런 우성을 바라보았다. 그가 쓰러져 있던 자리, 그의 반응, 기묘한 차림새, 말투. 모든 것이 그녀에게 어색하게 다가왔다.심지어 지금의 이 질문마저도 매우 수상하고 이상했다. 본인이 어느 지역에 있는지 모른다는 건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도, 어떤 나라에 있는지도 모를 수가 있을까?“...예.”연서가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우성이 묶인 손으로 눈을 비볐다. 손등이 얼굴에 닿는 감각이 너무 생생했다. 꿈이라고 하기엔 밤공기는 너무 차가웠고, 온몸은 많이 욱신거렸다.연서는 더 이상 지체하기 곤란하다는 듯 주위를 한 번 더 두리번거리더니 우성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일단 내려가시지요. 밤이 깊어질수록 위험합니다. 적어도 길가로 가셔서 말씀 나누시지요.”그리고 그녀는 몸을 휙 돌려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잡아 들었다.“자, 잠깐만요.”우성이 다급히 불렀다. 연서가 또 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우성은 자신의 묶인 손을 들어 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저 좀 한 번만 일으켜 주세요.”연서는 다시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그의 묶인 손목을 붙잡았다. 우성은 무릎을 구부려 두 발로 땅을 딛고 힘차게 일어났다. 그는 엉덩이와 등에 잔뜩 묻은 흙을 털고 싶었지만 차마 그것까지는 부탁하지 못하고 연서의 눈치를 보았다.그녀는 우성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다시 뒤돌아 한 발짝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성이 그런 그녀의 뒤를 따랐다.산길은 생각보다 훨씬 좁고 어두웠다. 달빛이 닿는 곳만 희끄무레할 뿐, 몇 걸음만 비켜서도 금세 어두운 그늘에 가려졌다. 흙길엔 크고 작은 돌이 박혀 있었고, 발밑에서는 마른 가지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났다.우성은 본능적으로 연서 쪽으로 붙어 걷기 시작했다. 길도 잘 모르거니와, 지금 이 상황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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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짜여 드는 빛처럼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 등잔불이 마루에 길게 번졌다. 금선은 문지방을 손으로 짚은 채 연서와 어진을 번갈아 보았다. 숨이 약간 가쁜 두 사람의 얼굴은 희미하게 상기되어 있었다.“왔으면 왔다 하지, 왜 이리 큰 소리로 사람을 놀라게 하느냐.” “죄송해요, 제가 딴 생각을 하다가 그만 넘어져서...”연서가 대답할 틈 없이, 어진이 끼어들며 말했다. 금선이 혀를 쯧쯧 차더니 말했다.“내 너희들 때문에 굶어 죽게 생겼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제야 와서 밥도 안 하고 그리 서 있는지 원...” “어, 얼른 차릴게요.”금선의 투덜거림에 연서가 얼른 부엌으로 향하며 말했다. 어진도 후다닥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금선은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방문을 닫았다. 방문이 닫힌 걸 본 어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서에게 말했다.“...이제 어쩌실 거예요? 지금 관아에서 몫이 내릴 때까지 먹을 쌀이 정해져 있는데...” “그렇다고 견우님을 굶길 수는 없지 않니? 내 식사를 가져다드릴 것이니 걱정 말거라.”연서는 기다렸다는 듯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어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솥에 물을 부었다.---정강이를 거하게 찧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우성은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손전등을 켰다. 그는 다친 부위를 비추어 자세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하아... 부러진 줄 알았네...”아픔이 서서히 사그라들 때 즈음, 그의 눈에 연서의 방 안이 조금씩 들어왔다. 흙과 나무 냄새가 어우러진 그녀의 공간은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잘 개어진 이불과 안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길쌈 도구와 장신구들은 우성이 상상하던 ‘춘향’의 방과 제법 잘 어울렸다.“진짜 조선 시대 같은 느낌이긴 하네...”그는 핸드폰 화면을 켰다.11월 6일(월)10:11시간은 대체로 맞는 듯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핸드폰은 어떤 신호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성은 닳아가는 배터리를 보며 걱정스레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손전등을 끄고 비행기 모드와 저전력 모드를 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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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그대는 아름답다
연서는 우성이 내민 핸드폰을 눈 한 번 깜빡이지도 못한 채 바라보았다. 우성은 연서의 옆으로 조금 다가와 사진 앱을 열었다. 손바닥만 한 검은 판 안에 사람의 얼굴과 낯선 옷차림, 길거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어 있었다. 심지가 타는 냄새도, 기름 냄새도 없이 그렇게도 밝았다.“어찌...이런 작은 거울 안에 이런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까?”겨우 입을 뗀 연서의 목소리에는 놀람과 흥분이 동시에 스며 있었다. 우성은 핸드폰을 든 채 연서의 눈치를 살폈다.“이건 사람들이 먼 훗날 만든 기계예요. 봐봐요.”우성이 카메라 앱을 열어 셀피 모드로 연서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띵동 소리와 함께 찍힌 사진을 확인한 우성은 곧장 연서에게 보여줬다. 그녀는 눈 깜짝할 새에 그려진 두 사람의 완벽한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연서가 혼이 쏙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이걸 어찌 사람이 만들었다 하십니까? 더더욱 하늘의 이치나 조화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연서는 그 안으로 들어갈 듯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우성은 어쩐지 우쭐한 기분이 들어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마치 하늘나라를 엿보기라도 하는 듯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빼앗겼다.한동안 우성은 사진들을 하나둘 넘기며 연서에게 미래의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또다시 남녀유별이라고 꾸짖던 자신의 모습을 까맣게 잊은 채 우성의 옆에 바짝 붙어서 사진들을 구경했다.그러다 갑자기 우성이 미처 지우지 못한 여자의 사진이 불쑥 나타났다. 화장한 소연의 화려하고 또렷한 얼굴과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 환한 웃음이 현대의 빛 아래에서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우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아...”그는 급히 화면을 꺼버렸다. 방 안에는 다시 등잔의 노란빛만 남았다. 갑자기 꺼진 화면에 놀란 연서는 아쉬운 표정으로 우성을 바라보았다. 우성은 당황했는지 핸드폰을 다급하게 품 안으로 다시 넣었다.“그분이 누구시길래 그리 숨기십니까?”우성은 ‘전 여자 친구’라는 말을 어떻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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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변명과 변호 사이
우성은 조선 시대 아줌마의 낯선 모습에 기가 눌렸다. 자신을 보는 시선이 날카로워, 그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금선은 우성을 바라보며 그의 태도를 살폈다. 연서는 그런 둘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했다. 그녀는 버선발로 차가운 바닥만 동동 구르며 서 있었다. 곧 옷매무새를 정돈한 우성이 금선과 마주했다. 그가 몸을 숙이며 말했다.“...안녕하세요.”우성의 인사에 금선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아무렇지 않게 정중히 인사하는 그의 모습에 기가 찬 금선은 고개를 들며 짧은 침묵을 끝냈다.“나리는 뉘십니까?”연서가 조심스레 그 둘 사이를 막아서며 대답했다.“이분은 설서초라는 곳에서 오신 분으로, 어젯밤 뒷산 어귀에서 쓰러져 계셨던 분이에요. 시간이 늦어 하룻밤만 머물고 가신다 하셨어요.”그녀는 민망한 마음에 말끝을 조금 흐렸다. 연서의 대답에도 금선은 우성에게서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는 어진이 나서서 말했다.“참말이에요. 혼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 호랑이 밥이 될 뻔했어요.”“...”두 사람의 변호에도 금선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연서와 어진도 눈치만 살필 뿐,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마당에 무거운 침묵이 다시금 내려앉았다.금선이 물었다.“직접 말씀하실 수는 없으십니까?”우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처럼 예의 없는 말을 하게 될까 두려웠다. 자신이 조선 시대에 왔을 가능성을 인정한 시점부터는 더욱 조심스럽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람들의 어투나 화법을 비슷하게나마 따라 해 보려 노력했다.“...제 이름은 견우성이라고 합니다.”금선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견우?”우성의 질린 표정이 잠깐 스쳤다.“아니... 견, 우성이요.”우성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서초 강변에서... 동물의 병을 치료하던 사람입니다. 남원에 볼 일이 있어 이곳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그 이후의 일은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그 말에 어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연서 역시 가만히 우성을 바라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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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증거는 반드시 진실로 가는가? (1)
조선에서의 두 번째 밥을 먹던 우성은 밖에서 나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자박자박 다가오는 발소리와 마루가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나리,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어진의 목소리에 우성이 음식을 빠르게 삼켰다.“네, 들어오세요.”어진이 방문을 열고 따스한 햇살과 함께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흰 무명 옷 한 벌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앉아서 우성에게 그 상복을 내밀었다. 우성은 젓가락을 상 위에 올려놓고 그 옷을 받아 들었다.“이건...”“이것은 언니의 부친께서 생전에 입으셨던 상복입니다. 일단은 이것을 입으시고, 차차 맞는 옷을 구해 보자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우성은 옷을 펼치지 못했다. 자신을 이곳에 붙잡아 두겠다는 금선의 의도가 선명했다. 망설이는 우성을 보고 어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그러십니까?”우성이 어진을 바라보았다.“저는 조선 사람이 아니라 쉽게 섞이지 못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아까 어진 씨도 봤겠지만, 저는 조선의 예법이나... 규율, 생활 방식 이런 걸 전혀 알지 못해요. 모두가 수상하게 여길 거예요.”“그건 그렇죠. 솔직히 지금도 엄청 수상해 보이시는 건 사실이니까요.”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은 애꿎은 옷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진은 그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다가 다시 말했다.“어쨌든, 어머니의 계획은 이래요. 나리께서... 이 집의 고공(雇工)으로 일해 주시는 거예요.”“...고공?”우성은 처음 듣는 말이라 어진에게 되물었다.“예... 그러니까... 이 집에 함께 기식하시면서 저희의 일손을 도와주시는 거지요.”“머슴 같은 걸 말하는 거예요?”어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머슴...이 뭐예요?”“아... 머슴은 지금 있는 말이 아닌가?... 그럼 노비?”“예에-? 노비라뇨, 큰 오해이십니다.”어진이 놀라 손사래까지 쳐 가며 부정했다. 우성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재차 물었다.“그러니까, 어머님이 저한테 일을 시키면 저는 그 일을 하고,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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