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힐로 이사 온 며칠 동안, 고현아는 주강인의 ‘원맨쇼’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낮에는 평소처럼 일했고 퇴근 후의 모든 시간은 그녀에게 더없이 중요한 일, 바로 [유진]에 쏟아부었다.
[유진]은 과거 고현아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이름을 따 설립한 드레스 브랜드였다. 한때 업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누렸으나 아버지가 병상에 눕게 되면서 몇 년째 방치된 상태였다.
숙련된 장인들은 하나둘 흩어졌고, 오랜 시간 손발을 맞췄던 원단 업체와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브랜드 공식 홈페이지마저 멈춰 선 지 한참이었다.
이제 고현아는 부모님의 염원을 이루고자 그 브랜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다.
그동안 많은 단골들이 각 플랫폼에 아쉬움을 표하고 수소문했지만, 그 정도로는 [유진]의 부활에 턱없이 부족했다.
흩어진 장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것도 시급하긴 하나 현재 급선무는 최고급 원단 공급망을 다시 확보하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고현아는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했고 몇몇 원단 업체들과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번번이 품질이 조악하거나 주문량이 너무 적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다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고급 시폰과 실크를 취급하는 오래된 공급 업체를 찾아냈다.
저녁 여섯 시, 그녀는 직접 운전해 두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약속 장소는 최상층에 있는 VIP룸에 마련되어 있었다.
두천 레스토랑은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졌다. 주홍색 문과 정교한 난간이 빚어내는 고즈넉하고 우아한 분위기 덕분에 이곳은 언제나 비즈니스 미팅이나 연회 장소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직원이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고 예약 정보를 확인한 뒤 고현아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검은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측면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주 대표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
협상을 조율할 당시, 상대측 비서는 본인들 대표님이 [유진]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고현아의 아버지와도 구면이라기에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흔쾌히 미팅을 수락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에 고현아는 상대가 과연 누구일지 내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입구에서 레스토랑 직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정장 차림의 한 여성이 곧장 그녀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고현아 씨. 저는 형원 그룹 대표님 비서 곽수빈입니다.”
이 목소리, 분명 협상을 조율할 때 통화했던 그 사람인데 형원 그룹이라니?
강현 방직 쪽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언제 형원 그룹으로 바뀐 걸까?
곽수빈은 고현아의 의구심을 눈치챈 듯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강현 방직은 보름 전 형원 그룹 산하로 편입되었습니다. 원래 해외 시장을 주력으로 삼던 저희 그룹이 최근 몇 년간 국내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기존의 협력 사항이나 업무 전반을 저희가 일괄 인수하게 된 겁니다.”
형원 그룹은 고현아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이엔드 럭셔리 브랜드를 전문으로 다루며 화려한 오트 쿠튀르 전시회나 사교 파티를 주최하는 해외 기반의 대기업이었다. 그들이 고급 원단 사업을 필두로 국내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처럼 작은 브랜드가 형원 그룹 대표 비서의 응대를 받을 만큼 대단한가 싶었다.
“고현아 씨, 이쪽으로 오시죠. 저희 고 대표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고 대표님?
문득 고현아의 뇌리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곽수빈을 따라 들어선 안쪽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기다란 회랑을 지나자 고풍스러운 룸 내부가 드러났다. 천장에 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고전적인 방 안에서 화려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고 원형 테이블 중앙에는 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그윽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현아의 시선이 안쪽으로 향했고 이내 상석에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 닿았다.
회색 캐주얼 수트 차림의 남자가 의자에 나른하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테이블 가장자리를 짚은 채 찻잔을 천천히 돌리고 있던 남자의 눈매가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다 고현아를 발견한 순간, 깊고 영롱한 눈동자 속에 옅은 희열이 번졌다.
“현아야.”
고요한 호수에 돌멩이가 떨어진 듯 고현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상대는 바로 고하준이었다.
며칠 전 도지혜에게 언뜻 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고현아는 그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잠시 멍하니 멈춰 서 있는 사이, 어느새 고하준이 곁으로 다가왔다. 남자가 비스듬히 눈을 흘기자 곁에 있던 곽 비서는 눈치껏 자리를 비워주었다.
코끝에 익숙한 삼나무 향이 스며들며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나 이제 돌아왔어.”
고현아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그녀의 의식은 강제로 그 뜨거웠던 여름날로 끌려갔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철거 공장 앞에서 고하준을 ‘데려왔던’ 그날의 기억이었다.
열 살부터 스무 살까지 아무런 예고 없이 나타났다가 아무런 예고 없이 사라졌던 이 남자.
그 교통사고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고 다시 만났을 땐 형원 그룹 총수가 되어 있었다.
남자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를 마주한 듯 눈꼬리에 다정한 빛을 띠었다. 그는 고현아의 왼손 약지를 지그시 매만지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제 어디도 안 가.”
고현아는 그의 눈을 마주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눈은 풋풋함을 벗어던지고 날카로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고귀함이 흘렀고 금테 안경 너머의 검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그녀가 읽을 수 없는 깊이가 담겨 있었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고고한 꽃처럼 귀하게만 보이는 이 남자가 과거엔 쓰레기 더미 속에서 들개와 먹이를 다투던 아이였다는 사실을.
그는 몸을 낮춰 다시 한번 그녀를 품 안으로 깊숙이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친밀함에 고현아는 몸이 굳어버렸다.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낸 탓인지 아니면 이제는 달라진 그의 신분과 위치 때문인지 이 온기가 낯설고 불편했다.
그녀는 슬그머니 고하준을 밀어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잘됐네요.”
은연중에 그녀가 거리를 두는 모습에 고하준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고현아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며 자상하게 의자를 빼주었다.
고현아도 굳이 내숭 떨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듣기로 이혼한다면서?”
고현아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녀는 대답을 피하려는 듯 가방 안에서 기획안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유진]에 대해서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고하준을 응시했다.
“형원 그룹이 강현 방직을 인수한 게 단순히 국내 시장 확장을 위한 것만은 아니겠죠?”
그녀의 노골적인 회피에 고하준은 그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웃어 보였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고현아가 내민 기획안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유진]에 관해서라면 나도 잘 알지. 아버지가 생전에 손수 일궈낸 브랜드잖아. 몇 년간 방치되긴 했어도 본질은 그대로야. 여전히 많은 단골들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형원 그룹이 하고 싶은 건 단순한 투자가 아니라 그 명맥을 다시 살려내는 거야.”
아버지라...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가슴이 또다시 저릿하게 아파왔다.
고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핵심을 찔렀다.
“형원 그룹이 아니라 하준 오빠의 개인적인 의지겠죠?”
이에 고하준이 웃었다.
“그렇다면? 뭐 문제 돼? 내가 현아 너랑 어르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자격이 없다는 거야?”
...
주강인 앞의 술잔은 거의 그대로였다.
왁자지껄한 술자리 분위기도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오직 손에 쥔 휴대폰 화면만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대화창에는 그날 밤 보냈던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흘째 아무런 답장이 없다니.
옆에 있던 류태현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대표님, 송 대표님께서 잔을 올리십니다.”
주강인이 나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무심하게 술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쳤다. 이내 목구멍으로 넘어간 술의 쌉쌀하고도 강렬한 맛에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지만, 가슴 속 깊이 깔린 짜증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그에게 너무 낯설었다. 예전에 아버지와 틀어졌을 때조차 이런 적은 없었으니까.
휴대폰 화면 위로 그의 찌푸린 미간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전에는 고현아가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이틀 이상 연락을 끊은 적이 없었다.
옆에 있던 류태현은 주강인의 불쾌감을 눈치채고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모님께서 요즘 [유진] 일로 바쁘신 것 같습니다.”
‘유진?’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전망 없는 작은 작업실 말인가?
예전에 고현아가 그 브랜드를 다시 살릴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대충 뭐라고 답했던 것 같은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주강인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녀만 원한다면 그런 작업실쯤은 열 개라도 당장 만들어줄 수 있을 텐데.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애가 참, 별짓을 다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