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죄송합니다. 지금 간성읍 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제설차가 국도부터 치우고 있어서 펜션 진입로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보일러 기름은 사흘 정도는 충분하고, 창고에 장작이 있습니다. 음식이나 술은 부족하시면 관리동 냉장고에 있는 것을 드셔도 됩니다. 길이 열리는 대로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절대 밤에는 밖에 나가지 마세요.]
“어머님… 우리 고립된 것 같습니다. 펜션 주인도 지금은 올라오지 못한다고 하네요.”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휴대폰에 뜬 문자를 읽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그 말이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지혜는? 다른 사람들은?”
장모님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처가에서 술기운이 오를 때마다 나는 강원도 고성에서 보냈던 군 생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때마다 끝까지 맞장구를 쳐준 사람은 장모님뿐이었다. 집사람은 늘 내 입을 막았지만, 장모님은 손을 턱에 괴고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와… 눈이 그렇게나 많이 온다구?”
그 말투에는 걱정보다 호기심이 먼저 묻어 있었다. 장모님은 내가 말하는 하얀 눈 세상을, 어쩐지 동화 속 풍경처럼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이번 연말 연휴는 강원도에서 눈 구경을 하며 보내자고, 내가 처가 식구들에게 먼저 제안한 것은.
내 술주정에는 인상을 썼던 모두였지만, 새해 맞이 가족여행에는 다들 흔쾌히 찬성했다. 한겨울의 강원도는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벽난로, 유리창 너머로 조용히 쌓이는 눈을 떠올리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문제는 우리가 한 차로 움직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연휴 직전까지도 일이 밀린 아내는 장인어른과 처제를 태우고 뒤따라오기로 했다.
아니, 어쩌면 진짜 문제는 우리가 눈을 너무 낭만적으로만 생각했다는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벽잠이 없는 장모님이 빨리 출발하자고 서두르시는 바람에, 나는 장모님과 단둘이 먼저 펜션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눈은 희미하게 흩날리는 정도였다. 손바닥에 내려앉기도 전에 사라지는, 가볍고 예쁜 눈.
우리가 예약한 펜션동 뒤로는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관리사가 있었다. 그곳에 사는 펜션 주인은 오후쯤 시내에 급한 볼일을 보러 내려간다고 했다. 읍내에 잠깐 다녀온다고만 했었다.
그 몇 시간 뒤, 나는 산 입구는 물론 강원 북부 산간 전체가 거의 마비 상태라는 재난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방금, 발을 동동 구르는 기색이 그대로 묻어나는 펜션 주인의 문자가 도착했다.
고립이 언제 풀릴지는 알 수 없었다. 강원도는 폭설에 익숙한 지역이었다. 국도와 마을길은 결국 제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그 길들에서 한참 떨어진 산속 펜션이었다.
우리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올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장모님과 단 둘이 남겨진 며칠…
무슨일이 생길까?
**
나는 그녀만큼 걱정하는 척했다.
“뉴스 보셨어요?”
“안 좋대. 며칠은 계속 이럴 거라는데?”
장모님은 침실 세 개짜리 통나무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래도 전기랑 휴대폰은 터져서 다행이야.”
— 팟!
그 말이 저주가 되었는 지 말이 끝나기 채 2초도 지나지 않아 전기가 나갔다.
실내는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창밖에서는 눈보라가 소리 없이 휘몰아쳤고, 서쪽 창문에는 흰 손바닥 같은 눈발이 계속해서 들러붙었다.
장모님의 눈이 커졌다. 어둠에 적응하는 중인지, 정말로 겁을 먹은 건지 잠시 알 수 없었다.
“어머, 어머, 어머. 세상에. 지금이라도 빠져나가야 되는거 아냐???.”
그녀는 완전히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저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장모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발걸음이 급했고, 그만큼 판단도 흐려진 것 같았다.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녀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눈보라가 안으로 밀려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거실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눈이 벌써 60센티는 쌓였겠어요. 차로는 절대 못 나갑니다.”
나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여기서 버텨야 해요.”
문에 손을 얹고 천천히 닫았다.
“눈이 들어오잖아요, 어머니.”
“아… 이런.”
장모님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깨달은 사람처럼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거의 무너지듯 내게 안겼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두 팔로 그녀를 감쌌다.
그녀의 몸은 생각보다 작지 않았다. 두꺼운 니트 너머로도 체온이 느껴졌고, 어깨에 묻힌 숨이 불규칙하게 떨렸다. 겁에 질린 사람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생각과, 그래서는 안 되는 다른 생각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서로 부딪쳤다.
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괜찮습니다. 아직 기름도 있고, 장작도 있고, 음식도 있어요.”
내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침착했다.
하지만 침착한 건 목소리뿐이었다.
내일은 크리스마스였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고, 술은 충분했다.
**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장모님은 내가 피워놓은 벽난로 앞에서 두 손을 녹이고 있었다. 장작은 생각보다 잘 탔다. 불길은 낮고 붉게 흔들리다가, 이따금 마른 나무 속을 터뜨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지냈다는 거야. 상상한 것 이상이야, 정말.”
“뭐, 이런 곳에서도 살아지니까요. 겨울에는 텐트에서도 자는걸요.”
그녀의 칭찬과 불기운이 동시에 밀려와 뺨이 달아올랐다.
거실은 벽난로의 불빛으로 겨우 환해져 있었다. 전기가 끊긴 통나무집 안에서 불은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빛이 벽과 천장에 얇게 번졌고, 장작이 이글거릴 때마다 그림자들이 벽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나는 난로 옆에 앉아, 우리가 챙겨온 화이트 와인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자기 전에 시간이나 좀 때울까요?”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허기가 속에서 조용히 이를 세우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장작불이 만들어내는 묘한 온도 때문인지, 아니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 술 생각이 유난히 선명했다.
장모님은 어떠실까.
“후… 나도 한잔 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술을 즐기는 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식사에 곁들이는 와인은 좋아했고, 특히 사위와 마주 앉는 술자리는 마다하지 않았다. 가끔은 자신의 주량보다 조금 더 나아갔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젊어지는 것 같았다. 말수가 조금 늘고, 웃음이 조금 가벼워지고, 눈빛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오늘도 그럴까.
“조금 취하면 잠이 잘 오실 거예요.“
— 뽕.
코르크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무심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모님은 몸에 붙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불빛 때문인지, 그림자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가까운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시선을 오래 두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그녀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자넨 늘 조금 취하지는 못하잖아.”
장모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할 일도 없는데, 그냥 마음껏 마셔.”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럴까요, 어머님? 그럼 소주로 갈까요?”
그녀는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오늘은 와인으로 해.”
— 꼴꼴꼴.
잔 안으로 옅은 금빛이 흘러들었다.
“그래도 와인잔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네요.”
나는 잔을 채워 그녀에게 건넸다.
**
한 시간쯤 지나자 첫 번째 병은 비어 있었다.
나는 두 번째 병의 코르크를 뽑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진실 게임 쪽으로 밀어 넣었다.
기다리고 있는 질문이 있었다.
장모님은 늘 내가 지혜를 만나기 전 어떤 연애를 했는지 궁금해했다. 한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간 자신의 삶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사위라는 남자를 조금 더 알고 싶어서였는지, 술이 들어가면 꼭 그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다만 그때마다 아내는 중간에서 말을 끊었다.
“엄마, 또 시작이야?”
그리고 대화는 번번이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훼방꾼이 없었다.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내가 먼저 말했다.
“흐흐. 그럴 것 같았어. 우리 딸 만나기 전에 만났던 여자는 왜 헤어졌어?”
장모님이 와인을 홀짝였다.
동작이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말이 꼬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취해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불빛과 술기운과, 바깥을 꽉 막아버린 눈이 사람의 판단을 조금씩 무르게 만들고 있었다.
“뭐야, 말해봐. 얼마나 만났고 왜 헤어졌어?”
장모님은 얼굴을 붉힌 채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등은 벽난로 때문에 뜨거웠고, 얼굴은 창문 쪽에서 스며드는 냉기로 서늘했다. 그 극단적인 온도 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취기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탓이었을까.
평소라면 입 밖에 내지 못했을 말이, 그날은 너무 쉽게 올라왔다.
“음… 서로 좀 안 맞았어요.”
“뭐가?”
나는 잠시 망설였다.
돌아갈 수 있는 틈은 그때까지 있었다.
“속궁합이요.”
말을 뱉고 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
장모님은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는 얼굴을 했다. 그다음에는 제대로 들었지만 의미를 처리하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응? 으응? 뭐… 뭐라고? 무슨 궁합?”
뒤늦게 뜻을 알아차린 듯 장모님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뭐야, 그게! 아하하하”
그리고 터지듯 웃었다.
그 웃음은 놀람에 가까웠다. 장모님은 잔에 남아 있던 와인을 한 번에 비우고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훔치며 아직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니… 우리 순둥이 사위가 어쩌다 그런 이유로 헤어졌다는 거야?”
그녀는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 공대를 나왔고, 누구나 이름을 아는 대기업은 아니지만 건실한 중견기업에 다녔다. 큰 굴곡 없는 인생.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외모와 체형. 처가 식구들이 보기에는, 무난하고 성실하고 조금 재미없는 사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런 사람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몸을 쓰는 취미 말고는 오래 붙잡아본 것이 없었다. 운동, 추위, 물, 산, 한계에 가까운 것들. 그리고 그런 것들보다 더 오래 나를 흔든 욕망이 있었다.
어릴 때 집을 나간 어머니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인지, 내 결핍은 자주 나이 든 여자들의 쪽으로 기울었다. 다정함과 피로가 함께 묻어 있는 여자들. 젊음보다 생활이 먼저 보이는 여자들. 웃을 때보다 한숨을 쉴 때 더 진짜 얼굴이 드러나는 여자들.
지혜는 나의 그런 면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평온하기만 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래도 우리는 결혼했고, 제법 완벽에 가까운 생활을 만들어왔다.
다만 지혜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내 안에서 가끔, 너무 자주, 선을 넘는 상상이 자란다는 것.
“후후.”
나는 여유로운 척 웃으며 장모님을 바라보았다.
장모님은 처음에는 ‘에이,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웃음을 거두지 않자, 그 표정이 조금씩 흐려졌다. 웃음이 줄고, 어깨가 아주 조금 움츠러들었다.
“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네. 우리 사위가… 착한 줄로만 알았더니. 아니, 그래서 그게 자기가 너무 쎘던 거야? 아니면 여자쪽을 못 맞춰 준거야?”
입가에 말이 맴돌았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영 못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하면 모든 것이 망가질 것 같았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잠깐 멈춰 있었다.
그리고 결국, 더 나쁜 쪽을 골랐다.
“장모님이 한 번 확인해 보실래요?”
장모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녀는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끝에 힘이 빠졌는지 잔이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카펫 위라 깨지지는 않았지만 그 작은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못 믿으시는 거 아니에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다. 하지만 목 안쪽이 바짝 말라 있었다.
장모님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아… 그… 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믿을게. 믿을 테니까.”
장모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에 코르크를 다시 막는 손이 조금 서툴렀다.
“후… 나 취했나 봐. 자러 가야겠어.”
그녀는 안방 쪽으로 도망치듯 걸어갔다. 문간에서 한 번 뒤돌아보았지만, 그 눈빛에는 방금 전의 장난스러움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이 방 쓸게. 자네는 나머지 방 중에 아무 데나 자. 자기 전에 불 잘 피워놓고. 오늘 밤 많이 추울 것 같네.”
문이 닫혔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차인 것인지, 용서받은 것인지, 아니면 아주 조용히 경고를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친 짓을 한 거겠지.
나는 그녀가 부탁한 대로 장작을 더 넣었다. 불은 금세 다시 살아났다. 마른 나무가 속을 터뜨리는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거실에 자리를 깔고 누웠을 때, 벽난로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추웠다.
이불을 산더미처럼 덮고 있어도, 추위는 틈을 찾아 들어왔다. 벽 사이로, 창문 가장자리로, 내 말이 남긴 균열 사이로.
한참을 뒤척이다가 어디선가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옷을 벗고 이불 안에 들어가면 몸과 이불 사이의 열이 더 잘 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완전히 헛소리였다.
밤은 거칠고 혹독했다.
밖에서는 눈보라가 집을 긁고 있었다.
안에서는 내가 한 말이, 계속해서 나를 긁고 있었다.
겨우 잠이 드려는데, 잠결같이 들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저기… 김서방?"
장모님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내 어깨를 흔들었다. 위에서 그녀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