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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9화

Autor: 네입클로버
강지연은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분주히 오갔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초콜릿색 창문에만 머물러 있었다. 몸도 마음도 텅 비어 안이 비어버린 껍데기처럼 서 있었다.

경호원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부르지 않았다면 더 오래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발걸음을 옮길 때도 공허했다. 몸이 비워진 듯 속이 헛헛했고 어디에도 단단히 디디고 서 있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차에 올라타자 엔진 소리가 낮게 울렸다. 백색소음처럼 귓가를 채우는 진동이 오히려 의식을 더 흐리게 만들었다.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잠들 것만 같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다혜였다. 이제는 무용단 부단장이 된, 가장 든든한 오른팔.

“단장님, 곧 귀국하시는 거죠? 가을 공연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요.”

“응, 아마 며칠 안으로 돌아갈 거야. 지난번 회의안 괜찮았어. 수정한 부분 있으면 보내줘.”

“네, 바로 보내드릴게요.”

전화를 끊자 파일이 곧 도착했고 강지연은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무리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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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623화

    돌아온 것이든, 끝나지 않는 꿈이든 상관없었다. 강지연은 두 가지만은 분명히 하기로 했다.하나는, 지금의 자신이 다시는 온하준을 좋아하지 않게 만드는 것.다른 하나는, 온하준이 이하나를 좋아하지 않게 만드는 것.그래야 온하준이 이하나를 잃고 무너져 술에 빠지는 일도 없고 그를 말리려다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도 없고 그 사고 때문에 결혼하는 일도 없고 결국 그가 자신을 구해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모든 것이 달라진다. 설령 이것이 꿈이라 해도 이 꿈속에 하루를 더 머무는 한 이 두 가지만은 반드시 해내겠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지금까지의 꿈들은 시점이 제멋대로였다. 졸업 직전이기도 했고 온하준의 할머니가 병들었을 무렵이기도 했으며 막 고1이 되어 아무 일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이기도 했다.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때였다.온하준의 할머니는 건강했고 이하나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이였다.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문과와 이과 선택이었다.그때의 그녀는 예술 전공을 준비하면서도 어리석게 이과를 택했다. 단지 온하준과 같은 반이 되고 싶어서였다.그 시절에는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 분명했고 많은 무용대학은 이과생을 받지 않았다.그럼에도 그녀는 이과를 선택했다. 온하준이 해성에서 대학을 다니게 될 테니 자신도 해성에서 이과를 받아 주는 예술 계열을 찾으면 된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했다.하지만 그 선택이 얼마나 큰 제약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로 인해 국내 최고의 무용대학 대표 전공과는 완전히 멀어졌고 전공 선생님조차 놀랄 정도였다.그래도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이라면 흔들리지 않고 문과를 택할 생각이었다.주말에 집에 갔을 때 할머니의 물음에도 강지연은 단호하게 문과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다.사실 무엇을 선택하든 홍순자는 늘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고 그런 질문은 그저 서로를 향한 관심과 대화를 위한 것이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리며 차유준에게서 온 문자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622화

    강지연은 눈앞에 서 있는 어린 온하준을 바라보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정제된 눈매와 차가운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늘 세상을 비웃듯 무심하던 그 눈빛에는 지금 분명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아직 이 세상에 자신이 신경 쓰는 일이 남아 있다는 듯한, 솔직한 의문.“내가 왜?”이번 주 내내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길고 긴 꿈에 갇힌 채 아무리 애써도 깨어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한때 닷새를 내리 잠들었던 적이 있었기에 조금 더 기다려 보려고도 했다. 닷새만 버티면 다시 눈을 뜰 수 있을 거라고.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 있을 거라고.하지만 아니었다. 여전히 이곳이었고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지금 그녀는 정말로 열여덟의 강지연의 몸 안에 들어와 있었다. 돌아갈 방법은 보이지 않았고 막막했고 혼란스러웠다.“내가 말을 걸면 대답도 안 하다가 옆 반 차유준이랑은 웃고 떠들잖아. 지금 뭐 하자는 거야?”온하준의 목소리에 알 수 없는 날이 서 있었다. 강지연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언제 차유준이랑 웃고 떠들었어?”“월요일. 둘이 같이 학교 왔잖아. 걔가 나한테 자랑까지 했어. 너희 집에서 밥 먹었다고.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는데?”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기색이 낯설었다.기억 속의 고등학생 온하준은 늘 무심했고 타인을 향해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강지연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같이 온 거 아니야. 학교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거지.”“우연? 그러면 너희 집 가서 밥 먹은 것도 우연이야?”비웃듯 되묻는 말에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 보니 그것도 우연이네.”같은 버스를 탄 것도, 친구가 약속을 취소한 것도 전부 우연이었다.“누굴 바보로 알아?”온하준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마침 버스가 도착했다. 강지연이 올라타려는 순간 온하준이 그녀의 가방끈을 붙잡았다.“왜?”뒤돌아보자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앞으로 차유준이랑 엮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621화

    차유준은 갑자기 자기 머리를 탁 치며 말했다.“아, 망했다. 게임을 하다가 종점 지나쳤어.”강지연은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버스에서 내렸다.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뒤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차유준이 난처한 표정으로 따라오고 있었다.“아까 친구가 전화 왔는데 밖으로 나갔대. 나 지금 갈 데가 없어. 너희 집 가서 저녁만 먹고 가면 안 돼?”강지연은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집에는 왜 안 가?”“집에 가도 혼자야. 부모님 또 해외 출장 가셨거든.”차유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그 순간 강지연은 문득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차유준이 갑자기 사라졌던 이유를 떠올렸다.부모님이 무역 일을 했고 졸업과 동시에 해외로 나가 대학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강지연은 갑자기 그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필경 지금이 꿈속이라고 해도 왠지 그가 가엾어 보였다.“그래, 알았어. 같이 가자.”그녀의 말에 차유준은 환하게 웃으며 뒤를 따랐다.그리고 그날, 강지연은 차유준이라는 사람이 의외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별것 아닌 일에도 한참을 웃었고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으며 말도 곱게 해 밥 먹는 내내 홍순자를 웃게 했다.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그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머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아는 듯했다.차유준은 그렇게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지연아, 그 애는 너희 반 전학생이니? 학부모 회의에서 못 본 이름인데.”설거지하며 홍순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강지연은 그 걱정이 무엇을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옆 반 학생이에요. 오늘 친구 만나러 왔다가 못 만났대요. 부모님도 외국 출장 중이라 집에 안 계신다고 했고요.”“그렇구나.”홍순자는 더 묻지 않았다.꿈에서 보았던 장면들은 모두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었지만 그날 밤 강지연은 처음으로 십여 년 전의 할머니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아직 혹독한 시간을 겪기 전이라 기운이 좋았고 눈빛도 맑았다.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620화

    눈앞의 온하준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소년의 턱에 막 돋아난 짧은 수염까지 보였고 눈썹 끝에 맺힌 땀이 석양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이전의 꿈들 속에서 그녀는 늘 바깥에서 바라보는 관객이었고 무대 위 강지연의 삶을 구경하듯 지켜보는 처지였다.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숨 쉬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또 다른 관객은 존재하지 않았다.“물 안 줄 거야? 뭐 그렇게 멍하니 있어?”온하준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강지연은 물병을 꽉 움켜쥔 채 놓지 않고 있었다.“나한테 한눈 팔려서 그러는 거잖아.”온하준의 뒤에서 웃으며 다가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친 사람, 차유준이었다.고등학생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대로 바라본 적 없던 얼굴을 그녀는 처음으로 또렷하게 보았다.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 여겼기에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하니 이목구비가 생각보다 선명했다. 그리고 눈빛 어딘가에 묘하게 익숙한 기운이 스쳤다.그녀와 차유준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두 사람 뭐 하는 거야?”온하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아무것도 아니야. 나 물 좀 줘.”차유준이 길게 팔을 뻗어 그녀 손에서 물병을 낚아챘다.“그거 내 거야.”온하준의 목소리에 드물게 날 선 기색이 섞였다.차유준은 물병을 흔들며 느긋하게 물었다.“이름 써놨어? 부르면 대답이라도 한대?”“강지연 손에 들려 있으면 당연히 내 거지. 네 거야?”이를 악문 온하준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내 이름이 안 쓰여 있다고 네 이름이 쓰여 있는 건 아니잖아.”날 선 말투에도 차유준은 웃으며 물병을 흔들었다.“내 거야, 차유준 물. 대답해 봐.”그리고 몸을 돌려 일부러 가느다란 목소리로 덧붙였다.“네, 주인님. 여기 있습니다.”강지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나이대 남자애들은 다 이렇게 유치한 건가.그녀는 가방을 메고 등을 돌렸다. 오늘은 주말이었고 할머니 댁으로 가는 날이었다.익숙한 길을 걷는데도 기분은 이상했다. 마치 다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619화

    강지연은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분주히 오갔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초콜릿색 창문에만 머물러 있었다. 몸도 마음도 텅 비어 안이 비어버린 껍데기처럼 서 있었다.경호원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부르지 않았다면 더 오래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을지도 모른다.발걸음을 옮길 때도 공허했다. 몸이 비워진 듯 속이 헛헛했고 어디에도 단단히 디디고 서 있지 못하는 느낌이었다.차에 올라타자 엔진 소리가 낮게 울렸다. 백색소음처럼 귓가를 채우는 진동이 오히려 의식을 더 흐리게 만들었다.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잠들 것만 같았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다혜였다. 이제는 무용단 부단장이 된, 가장 든든한 오른팔.“단장님, 곧 귀국하시는 거죠? 가을 공연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요.”“응, 아마 며칠 안으로 돌아갈 거야. 지난번 회의안 괜찮았어. 수정한 부분 있으면 보내줘.”“네, 바로 보내드릴게요.”전화를 끊자 파일이 곧 도착했고 강지연은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무리 없는 구성이라는 판단이 서자 그대로 진행하라고 답했다.[단장님, 언제 돌아오세요?]그 마지막 질문에서 손이 멈췄다. 두 번이나 답을 썼다가 지우고 결국 짧게 보냈다.[아직은 몰라. 다혜야, 당분간 무용단을 부탁해. 해성에 도착하면 바로 연락할게.][네, 단장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문자를 끝으로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잠깐 눈을 붙이자 어느새 집이었다.요 며칠 집안의 화제는 줄곧 그녀의 귀국 문제였다.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강희라는 이민을 포함해 장기 체류를 고려해 보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홍순자의 적응을 걱정해 결정을 미뤘지만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달라졌다.강시우의 회사는 국내에서 자리를 잡았고 유럽에서 자란 그조차 이제는 그곳이 더 편하다고 했다.결국 선택은 그녀와 할머니의 몫이었다.오늘은 강시우도 집에 있었다. 온하준의 행방을 알아보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조차 흔적을 찾지 못했다.데이터와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추적하는 시대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감쪽같이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618화

    안나는 쿠키 가게 앞에 서서 불 꺼진 진열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가게는 예전에 강지연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더러워져 있었다. 몇 차례 비를 맞은 탓에 먼지는 진흙이 되어 유리창을 얼룩지게 덮고 있었다.안나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유리를 닦기 시작했다. 몇 년 묵은 시간의 흔적이 휴지 몇 장으로 지워질 리 없는데도.“안나 씨.”강지연이 조심스럽게 불렀다.안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돌아섰고 그녀를 보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강지연 씨.”“안나 씨, 돌아온 거예요?”강지연은 심장이 세게 뛰는 걸 겨우 눌러 담으며 물었다. 말끝이 흔들리지 않도록 애써 숨을 고르며.“나는 돌아왔어요.”안나는 담담하게 말했다.“이미 한참 전에.”“얼마나 된 거죠?”‘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 돌아왔다는 건가? 아니면 함께 돌아왔다는 뜻인가?’“온하준이 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 돌아왔어요.”그 말에 강지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러면 온하준은?’“온하준 회복이 안 좋았어요?”혹시 다리가 심하게 망가져서, 그래서 헤어진 건가. 온갖 추측이 스쳤다.안나는 고개를 숙인 채 씁쓸하게 웃었다.“아니요. 그럭저럭 괜찮았어요.”안도감이 스쳤지만 동시에 더 큰 의문이 밀려왔다. 왜 안나 혼자 돌아온 건지.안나는 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강지연 씨, 나는 온하준의 여자 친구가 아니에요.”강지연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뭐라고요?”“나는 온하준이 고용한 사람이에요.”안나는 숨을 길게 내쉬고 쿠키 가게를 가리켰다.“가게를 꾸렸을 때 직원이었어요. 그런데 두 배 월급을 주면서 강지연 씨 앞에서 여자 친구인 척해 달라고 했어요.”‘왜 그런 짓을...’묻기도 전에 이유가 떠올랐다. 앞으로는 남처럼 지내자고 말했던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온하준은 강지연 씨 가까이에 있고 싶다고 했어요.”조용한 말 속에 희미한 원망이 비쳤다. 강지연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안나 씨,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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