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이 비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진이경은 재빨리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면서 그녀에게 말했다.“그럼 실례하겠습니다!”말을 마친 뒤 재빨리 그녀를 소파에서 안아 올렸다.그러자 심서연은 깜짝 놀랐다가 곧바로 진이경의 뺨을 한 대 때렸다.“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내려줘요!”진이경은 방금 맞은 게 귀까지 윙윙 울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유진 씨, 난 유진 씨 여자인데 어떻게 다른 남자가 이러는 걸 가만히 내버려둘 수 있어! 내 남자가 맞긴 해?”심서연은 욕설을 퍼부었지만 박유진은 그저 눈살을 찌푸린 채 담담하게 노트북을 켰다.설령 심서연과 결혼한다고 해도 어차피 그녀와 잠자리도 가지지 않을 것이기에 다른 남자가 그녀를 안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못 본척하는 그의 모습에 심서연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유진 씨, 날 이따위 취급했다가 내가 심미연한테 가서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그제야 박유진이 시선을 심서연에게 돌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일단 내려줘.”심서연은 내리자마자 진이경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다시 한번 내 몸에 손을 댔다가는 사람을 시켜서 당신을 매장해 버릴 거야!”그리고 매서운 얼굴로 진이경을 쏘아보았다.하지만 진이경은 본 체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병실 밖을 떠났다.심서연은 한껏 짜증이 섞인 얼굴로 몸을 탈탈 털더니 입으로 중얼거렸다.“비서인 주제에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 역겨워 죽겠어!”박유진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어디 봐서 이런 사람이 대갓집 규수란 말인가, 시장 바닥에서 막말을 퍼붓는 아줌마들이랑 전혀 다를 게 없는데!인성이 참,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근데 남은 인생을 이런 여자와 함께해야 한다니...“유진 씨, 방금 저 인간 당장 해고해.”심서연은 그의 앞에 다가가 짜증을 냈다.이때, 박유진은 단번에 그녀의 목을 힘껏 졸랐다.삶의 철칙이 죽어도 여자한테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었지만 오늘 심서연이 그
심서연은 그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유진 씨, 심미연이 그렇게 좋아?”그 여자는 그저 자기보다 얼굴만 더 예쁘장하게 태어났을 뿐인데 박유진이 이토록 죽자 살자 매달리는 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녀는 심미연도 밉고 박유진도 미웠다.“심서연, 네가 했던 말을 잊지 마!”박유진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지금 심미연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중요한 건 자신이 심미연에게 무얼 해줄 수 있냐는 것이다.“절대 심미연을 괴롭히지 않을게. 그러니까 저녁에 식사 자리고 뭐고, 그냥 다음 주에 결혼하자!”심서연은 어느새 눈가가 빨개진 채 그에게 말했다.박유진이 심미연을 위해 이 결혼을 하는 거라면 어디 해보자고!앞으로 평생 서로가 괴로워하면서 살아가 보자!“그래.”박유진이 그제야 손에 힘을 풀었다.“심서연, 다시 한번 말하는데 그 약속 꼭 지켜.”말을 마친 뒤 그대로 화장실에 가서 마치 불결한 물건을 만지기라도 한 듯 손을 빡빡 씻기 시작했다.심서연은 그의 행동을 보더니 또다시 화가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박유진은 지금 그녀와 살이 닿는 것조차 혐오스러워할 정도였다.손을 닦으며 나오다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심서연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왜 아직도 안 갔어?”그는 심서연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싫었다.“지금 당장 우리 부모님께 다음 주에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려야겠어. 근데 유진 씨, 우리 결혼식에 심미연도 꼭 데려와!”심서연의 말에 박유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불행하게 살아가는 심미연에게 자신이 행복한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하지만 박유진은 그대로 심서연을 지나쳐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우리 결혼식에 어떤 분들을 초대할지는 우리 어머니가 결정할 거야.”당연히 심미연은 초대하지 않을 것이고 오는 걸 바라지도 않는다.“왜? 심미연이 보고 속상해할까 봐 걱정돼?”그러다가 호탕하게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어쩌면 홀가분해할지도? 애초에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으
박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이때 심서연이 허리를 숙이고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됐다. 이제 갈게. 저녁에 봐.”역시나 남자는 물티슈를 급히 뽑아내더니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벅벅 닦았지만 어차피 이제 곧 자기 남편이 될 사람이라 상관없었다.결혼하기만 하면 이런 스킨십은 할 기회가 많으니까.박유진은 얼굴을 닦은 뒤 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하지만 너무 덤덤한 그의 반응에 심서연은 또다시 짜증이 슬슬 몰려왔다.그렇게 한참 동안 박유진을 쏘아보다가 결국 병실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떠나간 뒤 박유진은 곧바로 진이경에게 전화를 걸었고 얼마 안 돼서 그는 병실 안으로 쭈뼛거리면서 들어왔다.“대표님... 저는...”“말해. 왜 그 소식을 퍼뜨렸는지.”박유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사모님께서 협박하셨어요...”진이경은 한껏 낮은 소리로 답했다.그 소식은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자기 회사 대표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어머니한테는 당연히 말해줘야 하지 않나?“당장 인수인계 시작하고 넌 내일부터 해고야.”한번이 쉽지, 나중에는 계속 이런 실수가 반복될 게 뻔한데 그의 곁에는 이런 사람을 두면 안 된다.“대표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진이경은 회사에서 붙여준 비서인데 같이 일한 시간이 짧다 보니 박유진의 성격이 어떤지 잘 모르고 있었다. 하여 이미자가 그를 협박했을 때도 솔직하게 다 말해줬다.박유진은 단호하게 다시 그에게 말했다.“그만 돌아가.”그는 한번 결정한 일은 쉽게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다.하여 진이경은 어쩔 수 없이 돌아서야 했다.“대표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진이경마저 떠난 뒤 박유진은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내일부터 네가 내 비서로 일해.”전화를 끊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심미연이 로펌에 도착해보니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이때 임현이 다급히 다가오면서 그
“변호사님, 근데 사장님은 왜 또 오셨어요? 할 일이 그렇게도 없으신지.”임현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심미연은 그녀의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짓더니 그녀에게 말했다.“그만 나가서 일 봐요.”강지한이 그녀를 찾는 원인은 아까 병원에서 그를 못 본척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다가도 혹시나 온지유를 달래주기 위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근데 표정이 너무 무섭던데 혹시 변호사님께 손을 대는 건 아니겠죠?”임현은 살기 어린 모습으로 들어오던 강지한을 발견하고 걱정되어 냉큼 달려왔다.들어보니 명문가에는 비뚤어진 마음가짐을 가진 남자들이 많다고 하던데 보통 가정 폭력이나 바람피우는 방법으로 여자들을 괴롭힌다고 했다.근데 자기 회사의 잘생긴 사장님이 이런 변태적인 성격을 가진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심미연은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이 매우 웃겼다.“빨리 가요. 사장님께 들켰다가는 이대로 해고당할지도 모르니까.”임현도 참 대담한 것 같다.혹시나 강지한이 듣게 되면 바로 그녀를 해고할 텐데.“그럼 이만 나가볼게요. 혹시나 사장님께서 손찌검이라도 하면 바로 저를 부르세요.”임현은 그래도 심미연이 걱정되었다.“그래요.”그렇게 임현은 빠르게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황급히 뛰어가는 모습을 본 심미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러자 강지한이 그녀에게 다가와 차갑게 물었다.“뭐가 웃겨?”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야.”그를 보자마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이때, 갑자기 강지한이 그녀를 품에 안으면서 물었다.“미연아, 오늘 왜 병원에 간 거야?”충분히 사람을 보내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는 심미연이 하는 말을 직접 듣고 싶었다.얼굴이 남자의 가슴팍에 부딪혔는데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심미연은 고개를 들고 그에게 되물었다.“유진 씨 보러 갔어. 나도 묻고 싶은데 왜 유진 씨랑 술 마시게 된 거야?”강지한은 심미연 입에서 박유진의 이름이 들리자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박유진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설마 박유진이 심미연한테 모든 걸
강지한은 욕망에 사로잡혀 그녀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었다.심미연은 마음속의 불안을 억누르며 다급하게 말했다.“지한 씨, 여기는 로펌이고 내 사무실이야.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른다고! 우리 관계를 공개하고 싶다면 난 상관없어. 다만 온지유가 로펌에서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이지!”온지유를 향한 강지한의 사랑은 맹목적이었으니 그녀가 조롱당하는 꼴은 절대 못 볼 터였다.강지한의 손길이 멈췄다. 그는 심미연의 귓불을 물며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미연아, 너 사실 무서워하고 있는 거지?”만약 이 여자가 정말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관계를 아는 걸 개의치 않는다면 지금쯤 온갖 방법으로 그를 유혹해야 할 것이다.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를 막기 위해 급하게 애쓰고 있다.이혼을 제기한 후 이 여자의 행동은 완전히 달라졌다.예전에는 그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이것은 그녀가 정말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는 원래 그녀와 마음을 나누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러나 심미연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속에 허전함을 느꼈다.심미연은 그의 말을 듣고는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맞아, 무서워. 나는 온지유가 내연녀라고 욕먹고 되려 내가 그녀의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았다고 거짓말을 퍼뜨릴까 봐 두려워!”온지유는 거짓말과 피해자 코스프레에 능숙해서 결국에는 온갖 거짓말로 그녀를 모함할 것이었다.그럼 로펌 전체에 또 뒷말이 무성할 테고 바닥이 좁은 업계 특성상 소문은 순식간에 퍼질 것이다.심미연은 절대 남들이 자신과 강지한이 부부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눈은 맑고 투명했고 말투는 당당했다. 이에 강지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가 소송에서 이기는 이유는 말을 잘하는 것 외에 연기까지 잘하기 때문이군... 저런 청순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면 누가 의심이나 하겠는가.’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에 끓어오르던 욕정은 가라앉았지만 이상하게도 키스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
강지한의 가슴에 심미연은 토사물을 쏟아냈다. 시큼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미연아...”강지한은 이를 악물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가 키스하는 게 이렇게 싫단 말인가? 토하기까지 하다니!심미연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휴지를 뽑아 그의 옷을 닦아주었다.“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옷을 닦자마자 속이 다시 메스꺼워졌다. 그녀는 강지한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사무실을 뛰쳐나가 화장실로 달려갔다.다행히 점심을 시어머니와 함께 먹어 많이 먹진 않아서 한 번 토하고 나니 속이 편해졌다.심미연이 세면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틀자마자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정말 고고한 줄 알았더니! 뒤로는 남자한테 배까지 불리셨군요! 가식 좀 그만하시지.”심미연은 물을 받아 입을 헹구고 세수를 한 후 천천히 돌아서 백현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내 사생활에 관심이 많네요. 설마 나 좋아하세요?”“미연 씨, 임신했네요!”백현지는 심미연을 훑어보며 비꼬듯 웃었다. “어떤 늙은 남자 거예요?”심미연은 고고한 척했지만 임신 사실을 퍼뜨리기만 하면 그녀는 바로 나락으로 떨어져 영원히 재기 불능이 될 것이다.심미연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백현지가 임신 사실을 알아차리다니.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임신했다고? 증거 있어요?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말하지 마시죠!”백현지는 코웃음을 쳤다.“지금 나랑 병원 가서 피검사 하면 30분 안에 임신 여부를 알 수 있어요. 감히 할 수 있겠어요?”전에 두 번 임신했을 때 입덧이 굉장히 심했기 때문에 방금 심미연이 화장실에서 토하는 소리를 듣고 바로 임신을 떠올렸다.심미연은 손을 닦으며 말했다.“지원 씨가 본가로 돌아간다던데 현지 씨나 잘하세요. 내 일에 신경 끄시고.”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심미연이 나가자마자 백현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온 팀장님, 방금 미연 씨가 임신한 걸 발견했어요...”온지유는 그 말에 저도 모르
강지한은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심미연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마음이 불안했다.“미연아, 왜 자꾸 토해? 혹시 임신한 거 아니야?”온지유도 임신했을 때 자주 토하고 입맛도 없었다.심미연은 눈꺼풀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마음속 불안을 억누르며 태연한 척 말했다. “아까 키스할 때 혀를 깨물어서 입안 가득 피 맛이 났거든. 그게 너무 역해서 토할 수밖에 없었어. 왜 자꾸 임신 얘기를 꺼내는 거야? 설마 나한테 애 낳아달라는 건 아니겠지?”그녀는 강지한을 속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만약 속이지 못하면 그는 분명 병원에 가라고 할 것이다.피검사 한 번이면 모든 게 다 들통날 테니까.일단 강지한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낙태는 불 보듯 뻔했다.이런 생각에 심미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며 머리를 급히 굴렸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의 턱을 들어 올렸다.심미연은 바로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분홍빛의 작은 혀에는 상처가 나 있었고 피가 배어 나와 혀끝을 붉게 물들였다.“깨문 자국 보이지?”심미연이 물었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손으로 그녀의 혀끝을 꼬집으며 코웃음 쳤다.“유난은.”여자의 피부는 약해서 조금만 세게 힘을 줘도 멍이 들고 며칠씩 가는 법이었다.아까는 너무 화가 나서 힘 조절을 못 했더니 혀를 깨문 줄도 몰랐다.그의 말에 심미연은 안도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나 깨물랬어!”이제 그는 임신에 대해 캐묻지는 않을 것 같았다.강지한은 그녀의 귀엽고 순진한 모습에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박유진하고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좋은 사람이 아니야!”심미연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랜 시간 박유진과 함께해 온 그녀는 강지한보다 그를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박유진은 마음이 착하고 여려서 심서연과 이렇게 된 것도 다 자기 때문이었다. 평생 갚아도 모자랄 만큼 그에게 큰 빚을 진 심미
소리를 듣고 백현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강지한을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처럼 빨리 뛰었다.‘잘생겼다! 목소리도 좋아! 몸매도 짱이네! 이 사람이 대표님이라고?’심미연은 빠른 걸음으로 강지한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회사로 돌아간다며? 빨리 가!”지금 문이 열려 있는데 백현지가 큰소리로 외치기라도 하면 로펌 사람들이 모두 구경하러 몰려들 게 분명했다.그녀는 강지한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알릴 생각이 없었다.어차피 곧 그와 이혼할 텐데 애초에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필요는 없었다.강지한은 초조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심기가 불편해졌다.이 여자는 자신과 엮이는 게 그렇게 싫은 건가?“미연아, 너...”강지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미연은 그를 밖으로 밀어내고 이어서 백현지까지 밀쳐낸 후 문을 쾅 닫았다.하마터면 문에 코끝을 부딪칠 뻔한 강지한은 반사적으로 코를 만지며 눈빛이 차가워졌다.이 여자가 감히 그를 내쫓다니.정신을 차린 백현지는 달려들어 심미연을 잡아끌었다.“비켜요! 대표님을 만나야겠어요!”대표님이 심미연과 잘 수 있다면, 분명 그녀와도 잘 수 있을 것이다.그녀가 심미연보다 더 예쁘고 몸매도 더 좋으니까.백현지는 속으로 계속해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되뇌었다.심미연은 그녀를 밀치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대표님과 온 팀장이 무슨 사이인지 잊었어요? 감히 온 팀장님 남자를 건드렸다간 가만 안 둘 텐데?”백현지는 굳어버렸다.조금 전까지 그녀는 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어때요? 정신이 좀 들어요?”심미연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겁먹었다는 것을 알았다.온지유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서 어떻게 온지유를 화나게 할 수 있겠는가.백현지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누가 온 팀장의 남자를 빼앗겠다고 했어요! 미연 씨, 그쪽이야말로 대표님과 단둘이 뭐 하는 거예요? 온 팀장님에게 다 이를 거예요!”온지유에게 비밀을 많이 알려줄수록, 그녀는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