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자주 만나면 되지.’“이것만 다 먹고 가자.”심미연은 케이크 한 입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맞다. 그런데 난 내일부터 휴가라서 언제 다시 회사로 출근할지 몰라. 그러니까 경호원은 필요 없을 것 같아.”지금 그녀는 임신 중이라 그런지 아주 잘 먹었고 자주 허기짐을 느꼈다.더구나 저녁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엄청 배고픈 상태였다.“벌써 출산 휴가 쓰는 거야?”박유진이 의아해서 물었다.‘강지한이 임신한 사실을 알았나?’‘보아하니 두 사람도 꽤 애틋하네.’“아니. 그냥 단순히 휴가를 낸 거야.”어디까지나 개인 사정이라 심미연은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래. 케이크 먹어.”박유진도 더 이상 물어보는 게 실례인 것 같아 여기서 멈췄다.심미연은 고개를 숙이고 남은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고 박유진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하지만 누군가가 창밖에서 카메라로 두 사람을 몰래 찍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그렇게 심미연은 다 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배부르다. 이제 그만 가자.”“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가게에서 나왔고 박유진은 걸음이 느린 그녀를 배려해서 일부러 천천히 걸어줬다.아무런 대화도 없이 어느새 차가 세워진 곳까지 도착하자 박유진은 다정하게 차 문을 열어줬다.심미연은 조심스레 운전석에 앉아 창문을 내리고 웃으며 인사했다.“갈게. 오빠도 조심히 가.”“그래. 알겠어.”박유진은 조심스레 차 문을 닫아준 뒤 한 발짝 물러섰고 심미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자리를 떴다.하지만 박유진은 그녀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심미연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강지한이 거실 소파에 앉아 차가운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지금 병원에서 온지유랑 같이 있어야 할 사람이 집에 있으니 심미연은 의아해서 그에게 물었다.“왜 왔어?”“이 늦은 시간에 누구를 만나러 나간 거야? 말해봐.”강지한은 손에 든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더니 살벌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순간 심미연의
열어보니 케이스 안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반짝이고 있었다.순간 강지한의 눈빛에 살기가 돋치더니 한껏 매서운 눈빛으로 심미연에게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다친 다리를 끌면서까지 그 인간을 만나러 간 이유가 고작 이 브로치 때문이었어?”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참아왔던 울화가 치밀어올랐다.분명히 그가 떠날 때까지 그녀는 걷는 것 조차 힘들어했는데 박유진한테는 그런 아픔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만나러 갔다고 생각했다.그 뜻인즉, 박유진은 여전히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이란걸 말해준다.강지한의 얼굴은 끔찍할 정도로 매우 음산했고 마치 곧 폭풍우가 휘몰아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심미연은 이미 그한테 들킨 마당에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긴 뒤 싱긋 웃으며 답했다.“지한 씨는 한밤중에도 온지유 씨 만나러 잘만 다녔고, 또 두 사람이 밤새 같이 있었던 적도 많았잖아? 난 그저 잠깐 만나 생일 선물만 받고 왔을 뿐인데 굳이 비교하자면 내가 너무한 것도 아니잖아? 강지한 씨, 화내기 전에 먼저 자기 행실부터 뒤돌아보는 게 어때?”자신은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왜 심미연만 제재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더구나...그들은 쇼윈도 부부이다. 각자 알아서 살면 되는데 왜 갑자기 질투 나는 척인지 그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이제 두 사람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나랑 온지유 씨는 아주 결백해. 그게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였던 두 사람이랑 같아?”강지한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그대로 손에 든 케이스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브로치가 갖고 싶으면 내가 내일 당장 이것보다 더 이쁘고 값비싼 걸로 사 오라고 할게!”솔직히 강지한 자신도 지금 왜 이 브로치를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알지 못했다.그저 심미연은 아직 자기 여자고, 오직 그만이 심미연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 다른 남자들이 넘보는 게 싫었다.하지만 이 모든 반응이 다 질투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심미연은 버려진 케이스를 빤히 쳐다보며 애써 감정을 추슬렀
순간 강지한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죽은 건가?’오늘 마침 자살 시도했던 온지유 때문에 강지한은 자연스레 그녀의 이런 행동이 자살이라고 생각했다.하여 냉큼 달려가 욕조 안의 심미연을 건져 올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심미연, 만약 죽어버리면 지금 당장 내 의료팀을 전부 철수해 버릴 꺼야! 그러니까 정신 차려!”너무 다급한 나머지 목소리까지 떨렸다. 순간 너무 시끄러운 소리에 심미연은 잠에서 깨어 천천히 눈을 떴는데 눈앞의 강지한을 발견하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왜 이래?”“죽은 줄 알았잖아!”강지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너무 피곤해서 잠이 들었을 뿐이야.”심미연은 눈을 비비며 다시 물었다.“내가 죽는 게 그렇게 무서웠어?”심미연은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무조건 살아야만 희망이 있고 더 나은 미래를 볼 수 있기에 절대 혼자 죽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괜히 집에서 죽었다가 나중에 흉가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집값만 내려가!”솔직히 강지한은 방금 그녀가 진짜로 죽었을까 봐 매우 놀랐지만 이제 와서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걱정하지 마. 온지유 씨 같은 사람은 당신 때문에 죽는시늉까지 할 수 있겠지만, 난 아니야.”온지유는 멘탈이 약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절대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그녀의 단호함에 강지한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졌다.“누가 온지유가 죽었다고 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설마 내 말뜻을 이해 못 한 건가?’‘온지유가 죽었다고 한 적이 없는데?’하지만 남자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했다.심미연은 잠깐 생각해 보다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혹시 오늘 지유 씨가 진짜 당신 때문에 죽겠다고 한 거야?”아니면 저 사람이 이 정도로 예민하게 굴 이유가 없어 보였다.강지한이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닥쳐. 계속 허튼소리를 하면 바로 2층에서 던져버릴 거야!”심미연은 그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자기 생각이 딱 들어맞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
“심미연, 무슨 뜻이야!”강지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가 실수로 수건을 잡아당긴 바람에 그녀가 몸에 두르고 있던 가운이 그대로 풀어졌다.순간 깜짝 놀란 심미연이 비명을 질렀다.“뭐 하는 짓이야!”“아직 머리도 안 말랐는데 침실로 가면 안 되지!”강지한은 어색한 기운을 애써 달래며 재빨리 그녀의 머리에 수건을 던져줬다.“빨리 말려!”심미연은 그의 손에 들린 가운을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그거나 먼저 돌려줘.”쑥스러움이 한껏 묻어난 말투에 강지한의 몸은 또다시 반응하기 시작했다.수건을 들고 심미연에게 다가가 물기를 닦아주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귀를 살짝 베어 물었다.심미연은 축축한 상태에서 귀까지 간질거리니 기분이 묘했다.방금까지 자신을 모질고 거칠게 대하던 남자가 순간 너무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3년 동안 부부로 지내면서 유독 침데에서만 호흡이 잘 맞았다. 게다가 지금 심미연은 임신한 상태이고 성욕이 아주 강할 때라 그의 작은 손놀림에도 빠르게 온몸이 불덩이가 되고 두 다리는 나른해졌다.강지한은 더는 못 참고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심미연이 다리를 힘껏 오므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애원했다.“지한 씨... 제, 제발... 멈춰. 나 배 아파.” 심미연은 애써 정신을 차리고 무의식적으로 자기 배를 움켜쥐었다.원래 오늘 저녁에 병원에 가야 했고 신하린이 예약까지 마쳤는데 외할머니 일 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었다. 이 상태에서 또 강지한이랑 그 짓을 하게 되면 뱃속의 아이한테 무리가 갈게 뻔했다.‘그럴 수는 없지!’“이러면서 나를 거부해? 심미연, 아직도 내가 싫어?”강지한은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더니 힘껏 자기 몸에 밀착시켰다.부드럽고 또 향기로운 그녀를 당장에라도 품에 안고 먹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심미연은 지금 이 순간에 수치심만 들었다.분명 그를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몸이 자기도 모르게 반응해 버렸기 때문이다.부부로 산 세월이 오래되어서 그런가, 그녀의 민감한 곳이 어딘
인하병원, VIP 병실.병실 침대에 창백한 얼굴로 핸드폰을 꼭 쥐고 있는 온지유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심미연, 그 여자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강지한이 집을 그리 헐레벌떡 뛰어가나 싶었다.‘고약한 계집애!’그리고 하루빨리 방법을 찾아 심미연을 없애버려야 했다.바로 이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리자 온지유는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자마자 육현성의 얼굴이 보였다.“현성 오빠, 여긴 웬일이에요?”온지유가 의아해서 물었다.밤도 늦었는데 갑자기 여기엔 무슨 일인가 싶었다.그러자 육현성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온지유를 품에 안았다.“지유 씨, 잠깐만 안고 있을게요.”심상치 않은 그의 목소리에 온지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여태껏 큰형수라고 부르던 육현성이 갑자기 호칭도 바꾸고 이런 행동을 하니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그것도 아주 큰 일.“아니요. 그저 안고 싶어서요.”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그녀도 같이 안아줬다.“무슨 일이 있으면 저한테 말해요. 어쩌면 제가 해결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육현성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녀로서는 받아 줄 수도, 또 거절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조금이라도 여지를 주면 바로 달려드는 사람인데 지금은 무슨 일인지부터 알아야 했다.“진짜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저 한번 안아주고 금방 가려고 했거든요.”온지유를 안고 있으니 또 가기 싫어졌다.하지만 고민 끝에 재빨리 팔을 풀고 다시 일어섰다.“오늘 많은 실례를 범했네요. 화내지 말아 주세요. 큰형수님.”육현성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처럼 침대 옆에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다.그 모습에 온지유는 그의 손을 다시 다정하게 잡아주면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화 안 내요. 그러니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요.”육현성한테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아니면 이 정도로
육현성은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파 또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제가 진성 쪽에 집이 한 채 있는데 리우까지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요. 만약 진짜 갈 곳이 없으면 거기서 지내도 되고 거기에 가사 도우미도 두 분 정도 붙여드릴게요. 지유 씨, 이제 더 이상 당신이 힘든 일은 없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그의 말은 매우 감동적이었고 온통 온지유를 배려한 말들이었다.육현성은 가능하다면 자신의 모든 걸 온지유에게 주고 싶었다.그의 고백처럼 들리는 말에 온지유는 육현성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싱긋 미소를 지었다.그러다가 다시 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저랑 심미연 씨 관계는 이제 벌어질 대로 벌어졌어요. 저번에 제가 인터넷에서 된통 욕먹게 된 일도 아마 들었을 텐데 만약 제가 오빠네 집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또다시 네티즌들을 이용해서 저를 공격할 거예요. 저는 지금 그저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싶어요. 그리고 혹시나 이 소식이 육씨 가문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오빠도 곤란하게 될 텐데 괜히 저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요.”육현성은 그녀의 말에 더욱 가슴이 아파 팔에 힘을 꽉 주면서 답했다.“그렇다고 지유 씨가 고생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심미연은 제가 반드시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온지유는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화를 내는 육현성이 너무 고마웠다.예전부터 그는 온지유가 무얼 먹고 싶다고 하면 아무리 한밤중이라고 해도 나가서 사다 주곤 했었다.나중에 강지성에게 시집을 갔어도 그녀에 대한 다정함은 여전했다.그저 예전보다 분수에 맞게 거리를 살짝 뒀었지만 오늘만큼은 예전의 육현성으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현성 오빠, 괜히 저 때문에 바보 같은 짓 하지 말아요. 아무리 그래도 심미연은 지금 강지한의 아내이고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는 날에는 강지한 씨부터 분명 오빠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괜히 그 사람이랑 사이가 벌어질 필요는 없잖아요.”온지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말리자 육현성
온지유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육현성은 또다시 그 주범이 심미연이라고 생각했고 날 잡아서 심미연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만약 말로 통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쓸 수밖에.“지유 씨,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도울게요. 그런데 지금은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전 이만 갈 테니까 푹 쉬어요.”육현성은 말을 마친 뒤 바로 자리를 떴다.병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서야 온지유는 침대에서 일어나 손에 감은 붕대를 풀었다.사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고 거즈에 묻은 피도 그녀가 일부러 묻혀놓은 것이다.자살 시도도 당연히 쇼였고 상처는 살짝 났지만 빠르게 아물었다.이제 자살 쇼로도 강지한을 못 붙잡았으니 무조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한창 달게 자고 있던 심미연은 갑자기 누가 몸을 누르고 있는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잠에서 깼다.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강지한의 얼굴이었는데 무드등의 따뜻한 빛이 남자의 얼굴에 드리워지니 한층 다정해 보이기도 했다.그러다가 문득 뱃속의 아이가 생각나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지한 씨, 왜 그래요?”잠에서 금방 깨어난 탓에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웠는데 괜히 어두운 불빛 때문에 더욱 야하게 들렸다.“방금까지 계속 나랑 하자고 애원하길래 난 또 시작해도 되는 줄 알았지.”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어리둥절했다.그와 3년 동안 같은 침대를 쓰면서 매일 그의 품 안에서 잤던 건 사실이다.하여 잠결에 자연스레 또 그의 품에 기어들어 갔나 싶었다.‘그렇다고 해도 아까 분명 자기 전에 이불을 각자 덮을 수 있도록 두 개로 나눴는데 왜 지금 내가 저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걸까?’“우리 사모님께서 원한다고 하시는데 제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강지한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방금 진짜로 심미연이 그의 이불 안으로 파고들면서 자기 품에 안기는 바람에 그도 잠에서 깼다.그리고 쌕쌕거리면서 세상모르
심미연은 짜릿함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지한 씨, 하지 마요!”“끝까지 안 하고 그저 기분이 좋아지게만 해줄게. 그래도 싫어?”“싫어. 난 잘 거야!”심미연은 한껏 단호하게 답했지만 남자가 억지로 강요하면 어쩌나 걱정되었다.“내가 이렇게나 열심히 서비스해 주는데도 싫다고? 사모님, 거짓말 좀 그만하시죠.”남자는 부드럽게 심미연의 몸을 훑으며 또 끊임없이 그녀의 귀에 입김을 내뿜었다.더는 참을 수 없었던 심미연은 그를 힘껏 밀쳐내고 침대에서 한 바퀴 구른 뒤 조심스레 배를 움켜쥐고 침대 한쪽에 앉았다.그제야 강지한과 거리를 둘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순간 낯빛이 어두워졌다.눈앞의 여자는 지금 명백히 자신과의 잠자리를 거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박유진 때문이야?’‘아까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심미연은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빤히 바라보자 괜히 마음에 찔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자 강지한은 단번에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몸 아래에 깔고 그녀의 잠옷을 열어젖혔다.“넌 아직 내 아내야. 그러니까 부부의 임무를 다하는 건 당연하고 날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소리야!”분명 심미연과 박유진 사이에 자기가 모르는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 강지한은 오늘 무조건 그녀와 잠자리를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빠르게 그녀의 잠옷이 활짝 열렸는데 아직 실내 온도가 차가운 탓에 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지한 씨, 이건 부부로서의 임무가 아니라 명백한 성폭행에 해당해서 내가 고소할 수도 있어!”심미연은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지만 남자는 끄떡도 없었다.“네 실력만 믿고 지금 우리 쪽 법률팀과 싸우겠다는 거야? 심미연 씨, 꿈도 참 야무지네요.”여자의 하얀 피부를 보고 있으니 강지한은 또다시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순간 남자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참지 못해 한껏 거칠게 움직였다.심미연은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에 침대 머리맡에 손을 뻗다가 손에 집히는 핸드폰으로 그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