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한의 얼굴이 순간 찌푸려지면서 그에게 되물었다.“할아버지, 무슨 뜻이에요?”‘심미연과의 이혼?’그가 어떻게 심미연과 이혼한다는 말인가?더구나 온지유와 그런 사이도 아니기에 그녀와의 결혼도 더더욱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강준형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먼저 내 물음에 대답해!”지난번에 심미연에게도 똑같은 물음을 물었는데 그녀는 강지한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답했다.하지만 오늘 강지한의 행동은 누가 봐도 선을 넘었고 이에 따라 심미연이 혹시나 이혼하는 걸로 마음을 굳힌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단 한 번도 이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그런 비겁한 짓은 절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더구나 유일하게 잠자리에서 흥미를 돋게 하는 사람이 바로 심미연인데 혹시나 이혼하게 되면 혼자 해결해야 한다.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보면 분명 심적으로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아무튼 절대 이혼은 말도 안 돼!’“하지만 너랑 온지유는 이미 형수와 시동생 사이를 넘어선 관계가 되었어. 또한 오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미연이를 구박한 행동은 누가 봐도 그 애한테 큰 상처였을 거야. 네가 이혼하기 싫다고 해도 미연이는 이미 마음을 굳혔을 거라고! 그 애가 변호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 아니지?”사실 강준형은 그가 이혼하기 싫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안심되었다.구제 불능한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미연이가 다시는 이혼에 대해 말도 못 꺼내고 제 옆에 꼭 붙어 있게 할 방법이 있으니까요.”어쨌든 지금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자기 의료팀에서 치료받고 있기에 강지한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 자기 앞에서 절대 이혼하자고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그렇다면 한 번 더 믿어볼게. 그러나 오늘 미연이가 받은 수모를 보상해 주기 위해 난 이노하이브 주식 1%를 그 애한테 주기로 마음먹었어. 그리고 이 일은 네가 직접 처리해. 지난번처럼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무조건 넘겨. 안 그러면 내
기절한 척하느라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잊어버렸다.“미연아, 할아버지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넌 좀 어때? 병원에 가 봤어? 의사가 뭐래?”강준형은 혹시나 수화기 너머의 심미연이 놀랄까 한껏 다정하게 물었다.“병원 갈 정도는 아니라 저도 괜찮아요. 가봤자 괜히 돈만 낭비해요.”심미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돈으로 차라리 할아버지께 맛있는 음식 사드릴게요.”그 말에 강준형도 활짝 웃었다.“착하다.” 심미연은 언제나 심성이 착한 아이였고 그의 앞에서는 항상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할아버지, 오늘 제 생일상을 마련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비록 마무리가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꼭 하고 싶었어요.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 꼭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만약 강지한과 온지유만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오붓한 생일잔치를 아마 평생 기억했을 것이다.하지만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것 때문에 확실히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았다. 또한 이번이 아마 강씨 가문에서 보내는 마지막 생일일 것이다.“오늘 밤의 일로 내가 지한이를 호되게 혼내줬는데 많이 다쳤어. 그러니까 네가 옆에서 잘 돌봐줘. 혹시나 열이라도 나면 주치의 부르고.”강준형의 목적이 바로 오늘 밤 심미연과 강지한이 함께 있는 것이다.아직은 부부인데 떨어져 지내면 마음도 자연히 멀어진다고 생각했다.심미연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답했다.“알겠습니다.”강준형이 오늘 강지한을 혼낸 건 심미연을 대신해서 화를 내준 것과 동시에 그녀가 얌전히 집에 돌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아니면 강준형도 이렇게까지 티 나게 귀띔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미연아, 나도 지한이가 너를 많이 힘들게 하고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난 여전히 네가 우리 지한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강준형은 말하면서도 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강지한이 오늘 심미연을 어떻게 대했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를 용서하라고 요구하는 자신이 너
하루빨리 강지한과 이혼할 수 있기를.하루빨리 뱃속의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 그녀와 만날 수 있기를.소원을 빌고 촛불을 불었다.신하린은 초들을 모두 뽑아 휴지통에 버린 뒤 심미연에게 포크를 건네며 말했다.“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런지 이런 미니 컵케이크 밖에 남지 않았더라고. 아쉽지만 이거라도 맛있게 먹자.”심미연은 한 숟갈을 떠서 신하린의 입가에 가져갔다.“첫입은 네가 먹어.”신하린은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한껏 기대에 찬 심미연의 눈빛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받아먹었다.“물이 끓으면 내가 잔치 국수도 말아줄게. 케이크 다 먹고 국수 먹으면 되겠다.”말을 마친 뒤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갔다.심미연은 급히 자리를 뜨는 신하린과 또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아끼는 사람은 외할머니 외에 신하린 밖에 없는 듯했다.얼마 후, 신하린이 국수가 다 되었다고 그녀를 불렀다.심미연이 허겁지겁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은 뒤 주방에 와 보니 테이블에 국수 두 그릇이 올려져 있었다.계란 고명까지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있는 국수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간지럽히더니 단번에 없던 식욕을 자극했다.심미연은 냉큼 자리에 앉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와, 맛있는 냄새!”신하린은 그녀의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건넸다.“뜨거울 때 먹어. 아니면 국수라서 다 불어.”심미연은 신하린을 꼭 안아주며 감격스레 말했다.“하린아, 진짜 잘 먹을게!”“겨우 국수 한 그릇에 이 정도로 감동한다고? 나중에 비싼 음식 사줬다가는 아주 울고불고 난리 나겠는데?”그러자 심미연이 다시 의자에 앉으며 답했다.“비싼 음식보다 난 이 국수가 더 좋아.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랑은 비교가 안 되지!”“알겠어. 다음에는 내가 더 비싸고 정성스러운 요리를 준비할 테니까 빨리 먹어.”신하린은 말을 마친 뒤 재빨리 면을 입에 넣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그리고 화면에 뜨는 이름을 보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의사가 뭐래? 쌍둥이니까 특별히 뭘 더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신하린은 술잔을 내려놓고 심미연의 배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다시 봐도 여기에 두 명의 아이가 들어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는데 하루빨리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바랐다.“안정기가 아니라서 남편이랑 잠자리는 갖지 말라고 했어.”강지한과 같이 살게 되면 분명 매일 저녁 하자고 덤빌 텐데 그녀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해 내기 어려웠다.또한 강지한은 이 일에 대해서 순순히 물러서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이대로 돌아가면 네 침대로 기어들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 거절하면서 뭐라고 핑계 댈 건데?”신하린이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아니면 우리 집에 와서 있을래? 집이 이렇게 넓은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그러나 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신하린과 이진영 사이를 고려해 봤을 때 그가 분명 자주 이 집에 드나들 것 같았다.지금은 신하린이 아무리 혼자 산다고 해도 두 사람이 분위기를 내고 싶은 눈치면 또 자리를 피해줘야 하기에 오히려 심미연의 입장에서는 더 불편할 것 같았다.“내일 우리 사무실로 가겠다며? 우리 집에 있으면 내일 아침 같이 출근하면 되잖아!”신하린은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일단은 네 사무실로 출근은 하겠지만 나중에 다시 리우로 돌아가야지. 난 무조건 우리 스승님을 모함했던 사람을 찾아내서 판결을 뒤집을 거야.”심미연은 한껏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윤미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스승인 진운혁의 투신 사건에 대한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는데 무조건 법률 사무소에 계속 붙어 있어야만 그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무슨 뜻인지 알아. 하지만 넌 지금 홑몸도 아닌데 변호사는 하루 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잖아. 네 몸이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어서 그래!”“남들도 다 출산 예정일 직전까지 일하다가 휴가 내잖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 아기들은 너무 착해서 날 힘들게
그리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네. 지금 당장 갈게요!”무슨 일인지 물어보기도 두려웠다.신하린은 심상치 않아 보이는 심미연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미연아, 무슨 일이야?”심미연은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몸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그리고 이상하게 자꾸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외할머니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미연아, 대답해 줘. 나 놀라게 하지 말고!”신하린은 가볍게 그녀의 얼굴을 잡고 한껏 높은 소리로 물었다.그제야 정신이 살짝 돌아온 심미연이 그녀에게 답했다.“외할머니가 지금 응급실로 실려 갔대서 빨리 가봐야겠어.”“같이 가자.”신하린은 설거지하려던 고무장갑을 내팽개치고 메슥거리는 속도 애써 참으며 심미연과 같이 출발했다.그리고 저녁에 술을 마셨기에 어쩔 수 없이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차에 오른 뒤 심미연은 여전히 몸을 잘게 떨며 신하린의 어깨에 기댔다.신하린은 한껏 기운 없는 모습으로 가만히 누워있는 그녀가 너무 가슴이 아팠다.“미연아, 외할머니는 별일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심미연한테는 외할머니의 존재가 가장 소중한데 혹시나 그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예감이 안 좋아. 외할머니가 진짜로...”심미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또다시 몸을 잘게 떨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할머니가 얼마나 선한 분이신데 이대로 너만 두고 가시진 않을 거야. 아무런 일도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신하린은 애써 담담하게 그녀를 다독였지만 솔직히 방금 심미연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도 똑같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가끔은 사람의 육감은 정말 정확히 들어맞을 때 있다.게다가 지금 심미연이 가장 신경 쓰고 걱정하는 사람이 외할머니라 무조건 그녀한테 아무런 일도 없기를 바라야 했다.아니면 심미연의 성격으로는 절대로 혼자 감당해 내기 어려울 것이다.심미연은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슬픔을 참았다....이때, 인하 병원의 V
“오늘은 일단 돌아가. 내가 내일 다시 전화할 테니까!”온지유는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참고 그녀에게 말했다.“큰 사모님, 제발 조금이라도 먼저 빌려주세요. 빈손으로 돌아가면 그 사람들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눈치 빠른 추가영은 진작에 그녀가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또한 그녀의 말대로 지금 집에 돌아가면 돈은 고사하고 바로 죽임을 당할 게 뻔해 보였다.하여 작은 액수라도 빌려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나도 지금 돈이 없어!”그러나 온지유는 추가영에게 단돈 백 원도 주기 싫었다.“큰 사모님은 제가 밖에서 이 일에 대해 함부로 떠들어댈지 걱정도 안 되시나 봅니다? 그때 가서 인터넷에 온통 사모님의 가십거리로 도배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추가영은 어쩔 수 없이 최후의 방법을 꺼냈고 오늘 돈을 받지 못하면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온지유가 아무리 무서워도 사채업자들은 진짜 사람을 때려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아니면 오늘 이 자리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온지유가 깊은 한숨을 들이쉬더니 핸드폰을 꺼냈다.“먼저 3천만 원 보낼게. 이래도 만약 그 거래 증거들을 인터넷에 떠벌렸다간 그때는 진짜 생매장당할 줄 알아!”비록 요구했던 1억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3천만 원이라도 일단 가져가야 했다.송금해 준 뒤 당장 꺼지라고 호통치는 온지유의 성화에 추가영은 허겁지겁 자리를 빠져나왔다.문소영이 두 달 후에 양수로 DNA 검사를 한다고 했다. 어차피 아이의 아빠가 강지한이고 강지성과는 이복형제이기에 어쩌면 유전자 검사 결과에서 어느 정도는 강지성과 혈연관계가 있는 걸로 나오리라 생각했다.하지만 방금 저 빌어먹을 여자가 그게 자기 아들의 정액이었다고 실토한 바람에 모든 계획이 다 수포로 되었다.사실 온지유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저 여자의 말에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았다.강지한처럼 똑 부러진 사람이 일 처리를 그렇게 소홀히 했을 리가 없다.이게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심미연은 진작에 시험관 임신을 시도했을
온지유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내가 알기로는 외할머니께서 오랫동안 병원에 누워계셨다던데 그만하면 돌아가실 때도 됐지.솔직히 너도 지긋지긋했잖아? 오히려 나중에 내가 고맙다고 느껴질걸?”심미연 앞에서 온지유는 단 한 번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해 감추는 법이 없었다.아무리 강지한에게 고자질한다고 해도 절대 그가 심미연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무서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심미연이 뻔뻔스럽게 말하는 온지유를 한껏 살기가 돋친 눈빛으로 쏘아보며 물었다.“온지유,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양경자가 응급실에 실려 간 뒤 심미연은 몇 번이고 의사한테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이제 진짜로 외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다가 왜 갑자기 응급실까지 실려 오게 되었는지 의문스러웠던 찰나에 문득 화장실에서 두 간호사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웬 여자가 와서 양경자에게 온갖 악독한 말을 퍼붓고 갔는데 얼마 가지 않아 쓰러져서 바로 응급실로 실려 왔다고 했다.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 온지유밖에 없었다.분명 본가에서 맞은 일이 심미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복수심에 양경자를 찾아간 것이다.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경자가 듣자마자 응급실에 실려 온 걸 보면 과장해서 말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강지한과의 사이에 대해 말했겠지!’심미연은 너무 화가 나 그쪽은 일단 신하린에게 맡기고 재빨리 온지유를 찾아왔다.온지유는 불같이 화내는 심미연을 보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거의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계속 병원에 그렇게 누워있는 것도 매달 돈이 엄청 들잖아. 그 돈을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 돈이 없으면 또 지한 씨한테 손을 벌리겠지. 그런데 어차피 이제 두 사람은 이혼할 사이이고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갈 텐데 내가 미리 지한 씨 돈을 절약해 주는 게 뭐가 문제야?”온지유는 마치 강지한과 금방에라도 부부가 될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도 심미연을
심미연이 지금 당장 온지유를 죽이게 되면 살인죄를 면치 못한다.하여 외할머니를 먼저 잘 보내드린 뒤에 다시 온지유에게 따지리라 마음먹었다.온지유는 그러다가 문득 심미연의 배를 보게 되었는데 여느 임산부처럼 배가 불러오지 않고 여전히 납작한 걸 발견했다.사람을 시켜서 몰래 확인해 보니 심미연은 이씨 가문 근처의 병원에서 검사받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임신 기간이 딱 한 달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그 당시 온지유가 막 임신했을 때 입덧이 너무 심해 강지한은 거의 매일 그녀를 늦게까지 돌봐주다가 집에 돌아가곤 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가지고 임신까지 했다니!강지한은 분명 자기 입으로 심미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버릇처럼 말했으니 남자 쪽이 적극적으로 덤빌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그렇다면 저 불여우가 먼저 강지한을 꼬셨다는 건데!’두 사람이 침대에서 자기 몰래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온지유는 질투 나 미칠 것 같았다.요 몇 년 동안 그는 강지한에게 수없이 대놓고 들이댔고 심지어는 알몸 상태로 덤벼들기까지 했지만 강지한은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처음에는 강지성이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녀와 잠자리를 갖는 게 께름칙하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고 혹시나 또 그녀가 내연녀로 몰려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받을까 봐 심미연과의 관계를 먼저 정리한 뒤에 다시 그녀에게 마음을 열 것으로 생각했다.심미연을 그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잠자리도 갖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예상을 깨고 그녀가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또한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아직 강지한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오늘에 그녀를 유산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 같았다.‘무언가 찔리는 게 있으니까 강지한에게 알려주지 못했겠지!’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온지유는 눈빛이 순간 돌변하더니 단번에 심미연의 배를 향해 발길질했다.하지만 그녀의 이런 행동을 진작에 눈치챘던 심미연은 재빨리 피했고 온지유는 그대로 침대에 부딪힌 뒤 바닥에 넘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심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