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물 한 잔 마시러 갈게요. 운전 조심하세요!” 한유나는 조금 당황하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이진영이 자신을 미래의 이 부인이라고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혹시 결혼을 서두를 만큼 정말 나를 좋아하게 된 건가?’ 그녀는 오늘 밤 부모님과 결혼에 대해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씨 가문은 명문가라 결혼 준비가 복잡하고 예절도 많아서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이진영과 결혼한다는 생각에 한유나의 가슴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건 많은 여자들이 꿈꾸는 일이었다!문 앞과 차 안에서 이진영은 핸드폰을 옆에 두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연기 속에서 신하린의 붉어진 눈이 떠올랐다. 그가 한유나와 결혼한다고 해도 그와 신하린 사이의 관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여자는 도대체 왜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심미연과 신하린은 방에 들어갔고 신하린은 거침없이 두 사람 세트 메뉴를 주문했다. 곧 방문이 열리고 두 명의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가 장미꽃을 하나씩 들고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은 귀엽고 매혹적이었다. 심미연은 급히 손을 내밀어 신하린의 팔을 잡았다. “난 남자는 필요 없어.” 그녀는 이미 임신 중이라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면 안 되니까.신하린은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저 즐기고 싶은 마음이었고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너 필요 없으면 내가 다 가질 거야.” 신하린은 소파에 기대어 두 남자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둘 다 내 옆에 앉아요.”이진영과 그 여자는 곧 결혼하게 된다. 두 사람은 분명 한 침대에서 함께 자고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교감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녀는 싱글인 여자로서 인생을 즐길 때 제대로 즐겨야 한다. 두 남자는 그녀의 옆에 순순히 앉았다. 장미꽃을 입에 물고 얼굴을 가까이 대며 큰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감쌌다. 두 사람의 숨결이 서로 얽혔다.신하린은 심장이 급격히 요동치며 남자를 밀어내려고 손을
신하린은 조금 짜증이 나서 손을 뻗어 그를 잡았다. “먼저 나 좀 놔줘요!” 이진영은 얼굴을 돌릴 틈도 없이 그녀의 손톱에 얼굴을 긁혀 잘생긴 얼굴에 긴 상처가 남았다.하지만 신하린 앞에서만큼은 그의 성격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지금 그와 신하린의 관계는 얼어붙었고 신하린은 더 이상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더 이상 참을 성질이 남아있지 않았다. 심미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진영은 어떻게 강지한보다 더 밉상일 수 있지.’ 신하린은 조금 당황한 채 입술을 꽉 물었다. “이진영 씨, 만약 나한테 그렇게 한다면 난 평생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이진영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손끝에 끈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기분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어차피 넌 평생 내 곁에 있어야 해. 용서하나 안 하나 그게 무슨 상관이야?”그동안 그녀를 얼마나 아껴줬는데 결국 그녀는 여기서 다른 남자와 즐기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제 그 역시 그녀의 감정 따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녀를 자기 곁에 묶어두고 이제는 오직 자신과만 자게 만들 것이다.신하린은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난 당신 장난감이 아니에요. 왜 평생 당신 곁에 있어야 하는데?” 심미연은 신하린의 붉어진 눈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잠시 망설이다가 두 사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진영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심미연은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신하린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말라고 눈짓으로 전했다. 이진영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한유나의 번호를 확인한 뒤 바로 전화를 받았다.“진영 씨, 도착했어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귀에 스며들자 이진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신하린이 이런 말투로 나한테 말한다면 아마 너무 기뻐서 뛰어오를 거야.’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밖은 춥고
방금 전의 답답한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진영은 이 모든 걸 이해한 뒤 시선은 더 확고해졌다. “와! 유나 총괄 엔지니어의 남자 친구 진짜 잘생겼다!” 누군가가 놀라며 외쳤다. 한유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자부심을 느꼈다. ‘누구 남자 친구인데 당연히 잘생겼지!’ “취했어요? 걸을 수 있겠어요?” 이진영이 부드럽게 물었다. 한유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걸을 수 있어요.” “내가 안고 나갈게요.”이진영은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구부려 그녀를 안았다. “세상에. 진짜 로맨틱해!” “남자는 잘생기고 여자는 예쁘고 너무 잘 어울려. 천생연분이야.”한유나는 이진영이 자기를 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잠깐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이내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쌌다. “진영 씨, 이러면 안 돼요.”입에서는 투정 섞인 말이 나왔지만 마음속은 달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이 부인으로서 누려야 할 특권이죠.”이진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았고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한유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얼굴에 상처는 어떻게 난 거예요?” 가장 중요한 건 그 상처가 왠지 모르게 애매하고도 은근히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여자가 화나서 긁은 듯한 자국처럼 보였다. ‘혹시 진영 씨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걸까?’ 이진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긁었을 뿐이에요.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지만 한유나는 순간 그가 진짜로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때 다른 방에서는 신하린이 술병을 안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까 이진영이 그녀 앞에서 전화를 받은 일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취하게 만들고 싶었다.“하린아, 적당히 마셔. 너무 취하면 내가 너를
박유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진영 도련님.” 경성에서는 이씨 가문의 사람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이진영의 아버지는 정치에 몸담고 있고 어머니의 집안은 부유한 대가문이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 이씨 가문과는 충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때 박유진 품에 안겨 있던 여자가 몸을 움직이며 두 손으로 박유진의 목을 감싸고는 입에서 거침없이 욕을 내뱉었다. “이진영 이 자식! 죽어버려.” 이진영은 얼굴이 어두워졌고 여자의 두 손을 처절하게 응시했다. 만약 눈빛만으로 그 손을 잘라낼 수 있었다면 아마 벌써 뼈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며칠 전 이 여자는 술에 취해 그를 때리고 욕하며 밤새도록 괴롭혔다. 그런데 오늘 밤 또 술에 취하다니! ‘이 여자는 자기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가!’ 하지만 이진영이 가장 많이 화가 나는 점은 이 여자가 술에 취해 결국 박유진에게 안겨 나왔다는 것이다! 박유진이 누구냐? 박씨 가문의 도련님이다. 신하린이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 남자. 처음으로 심미연을 돕기 위해 그를 찾아갔을 때 침대에서 거칠게 당했던 그녀는 결국 울며 박유진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의 감정을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속이 터지고 억울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를 벌주기 위해 그는 집안의 구석구석에서 그녀를 가졌다. 그렇게 그녀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그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함께한 5년 동안 그는 도무지 그녀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박유진뿐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이진영은 눈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안겨 있는 여자를 그냥 당장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심미연은 이진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급히 서둘러 설명했다. “방금 이진영 씨가 떠난 후 하린이가 마음이 괴로웠던 거 같아요. 계속 술을 마시는데 내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
“언제 검사하러 가? 내가 같이 갈게.”박유진은 화제를 바꾸어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가자!”심미연이 거절하려고 할 때 박유진이 입을 열었다.“내가 줄 서는 거나 비용을 내는 것 정도는 도와줄 수 있어. 너 임산부인데 이리저리 뛰어다니려면 너무 피곤할 거야.”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침묵했다.예전에 이진영과 신하린이 사귈 때 이런 우대를 받아도 괜찮으나 이제 이진영은 결혼 상대도 있고 신하린과의 관계도 유지할 수 없으니 그녀는 더는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이 주는 우대를 받을 수 없다.하지만 검사를 받으려면 줄을 서야 하고 또 위층과 아래층을 오르내려서 심미연 혼자서는 확실히 매우 피곤하긴 했다.박유진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그녀가 다시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았다.“그럼 다음번 검사 때 부를게.”박유진은 그녀의 대답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전에 넥타이에 넣었다고 했던 카드를 가져왔어?”심미연은 갑자기 그 일이 떠올랐다.“차에 있어.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네 차는 내가 비서에게 가져가라고 할게.”박유진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유난히 부드럽게 들려 마치 여자를 달래는 것 같았다.심미연이 시간을 보니 이미 새벽 1시가 되였다. 이렇게 늦게 혼자 차를 몰고 집에 돌아가는 것은 확실히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유진을 따라 차에 올랐다.“넌 임산부야. 앞으로 이렇게 늦게 다니지 마.”박유진은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며 말했다.“너 먼저 좀 자. 도착하면 내가 깨울게.”그는 잔소리하고 있었지만 심미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강지한과 결혼한 3년 동안 할아버지는 가끔 그녀의 귓가에 몇 마디 했다.지금 그녀가 이혼했으니 그녀가 할아버지를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어 잔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이미 졸음이 밀려온 심미연은 차가 시동을 건 지 얼마 가지 않아 잠이 들었다.여자의 얕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유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랑이 넘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일부러 차의 속
순간 심미연은 어리둥절했지만 곧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난 강지한이랑 이미 이혼했어요.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는 내가 결정해요. 게다가 강지한은 지금 이미 새 애인과 함께 살고 있는데 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꼭 알고 싶을 것 같지 않아요.”“네? 강지한이 새 애인과 함께 산다고요? 누군데요?”이진영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강지한은 그런 사람 아니지만 강지한의 이 전처는 독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아이에게 강지한을 인정하게 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진영 씨가 알고 싶으면 강지한에게 물어봐도 돼요. 강지한은 당사자니 나보다 더 잘 알겠죠. 다 물었으면 이제 미연이를 위층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요?”겨울이 되어 밤 온도는 매우 낮았다. 심미연도 조금 쌀쌀하게 느껴져 자기도 모르게 외투를 꼭 잡았다.이진영은 눈빛을 그녀의 외투로 향하더니 눈썹을 실룩이며 두 사람이 이 정도로 사이가 좋다는 걸 강지한이 알면 미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진영 도련님?”심미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몇 데시벨 높였다.이진영은 정신을 차리고 인사하며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심미연과 박유진 사이는 강지한이 고민할 문제지 아무 상관 없는 그가 많은 걱정을 할 필요 없다.신하린을 안고 차에서 내린 이진영은 박유진이 차 옆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심미연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그의 눈 밑에 비치는 사랑은 숨길 수 없었다.이진영은 강지한 대신 자기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이대로 가면 강지한은 아웃될 것이 확실하다.“진영 도련님, 가요.”심미연의 목소리에 이진영은 비로소 생각을 접고 발걸음을 내디뎠다.박유진은 줄곧 제자리에 서서 심미연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후 담배에 불을 붙였다.담뱃를 한 모금 들이켜니 머릿속이 온통 심미연의 모습으로 가득하였다.휴대폰 벨 소리가 그를 생각에서 끌어냈다.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한 그는 연결 버튼을 눌렀다.“기한성이 내일 비행기로 경성에 도착해.”박유진은 무덤덤한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화를 낼 것이다.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멀리해야 한다.“할 말 있으면 빨리해!”한밤중에 잠에서 깼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너 새 애인이랑 동거한다며?”이 말은 어차피 심미연이 한 말이고 그는 단지 그대로 뱉었을 뿐이다.“왜? 이씨 가문이 무너질 것 같아? 너 가십거리나 듣고 다닐 만큼 한가한 거야?”강지한이 차갑게 웃었다. 쌀쌀한 목소리는 이런 밤에 유난히 소름 끼치게 들렸다.“이 말은 네 전처가 알려준 건데 나랑 무슨 상관이야!”정말 그가 말했더라면 강지한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심미연이 어떻게 너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두 사람 아주 잘 알아?”이혼하더니 누구든 남자면 모두 강지한의 눈에는 연적일 수 있었다.“미연 씨가 나를 훈계하자마자 너를 언급했어.”이진영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허튼소리를 했다.어차피 강지한이 심미연에에 물어볼 수도 없을 테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자신만 알 것이다.“허, 이혼했는데도 나를 지켜보는 거야?”강지한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기분이 좋아졌다.그는 심미연이 아직 그를 잊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새 애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던데 정말이야?”이진영은 사실 본인이 더 궁금했다.그의 인상 속에서 강지한은 그렇게 빈틈없이 여자를 곁에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내 새 애인이 누군데?”강지한은 의아해하며 심미연 이 여자가 뒤에서 그의 명성을 더럽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모르면 난 더 모르지.”이진영은 심미연이 일부러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지 생각했다.어쨌거나 그는 그때 그녀가 임신한 일을 강지한에게 알리겠다고 했으니 그녀는 그가 강지한에게 말하는 것을 막으려고 일부러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나도 모르는 일을 전처가 잘 알고 있다니.”강지한은 실눈을 뜨고 생각하다가 마음속에 한 가지 의심이 스쳤다.오늘 저녁에 온지유가 미르 파크에 머무는데 집안의 아줌마가 심미연에게 말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그 여자는
“여기까지만 말할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강지한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그는 이 정도만 말할 수 있을 뿐 다른 것은 이진영 자신이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그는 그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릴 수 없다.휴대폰을 내려놓자 그는 이미 잠기가 완전히 가셨다.방금 이진영이 한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심미연 이 여자, 내가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그는 고개를 저으며 심미연 모습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리고 싶었다.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을 수록 그녀의 모습은 더 선명하게 변했다.괜히 마음이 초조해진 그는 아예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 외투를 걸치고 서재로 갔다.그동안 회사와 심미연의 관계가 어색해지며 그는 일의 효율이 낮아져 많은 일이 쌓여 있었다. 어차피 잠이 오지 않으니 그는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문을 밀고 서재에 들어서자 책상 위의 꽃병에 꽂힌 안개꽃이 한눈에 보였다.그의 생각은 단번에 이전으로 되돌아갔다.심미연이 그와 결혼해 미르 파크에 들어온 후부터 매일 집에 신선한 꽃이 있었다. 공기 중에는 떠다니는 꽃향기가 폐로 흡입돼 마음을 상쾌하게 했다.또 각양각색의 아침 식사가 있었는데 매일 반복하지도 않았다.그 외에도 그는 매일 옷차림도 여러 스타일로 바뀌었으며 옷과 바지가 영원히 검은색과 회색이어도 심미연은 생동감 있고 생기발랄한 셔츠로 매칭할 수 있었다.심미연과 결혼한 지 3년이 되니 이런 것들은 이미 그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지금 심미연이 사라졌어도 그의 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아무런 차이도 없지만 사실 그만이 알고 있다. 모든 것이 변했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미간을 누르며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파일 처리를 시작했다.바쁜 시간은 언제나 빨리 지나간다.곧 날이 밝아 따뜻한 아침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강지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으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최근 그의 담배도 점점 잦아지고 있는데 매일 적지 않은 양을 피우고 있다.
나민희는 원래 진운혁을 제거하기 위해 강혁승이 이용했던 사람인데 진운혁은 운이 좋아 결국 살아남았다.그동안 강혁승은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손에 묻은 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심미연은 재빨리 진운혁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스승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그녀는 어렵게 진실을 밝혀냈고 이제 막 행동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관련자들이 하나둘씩 다 경찰에 붙잡히고 있었다.온지유는 경찰을 보자마자 얼굴이 하얘져 그대로 병실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심미연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뒤쫓기 시작했다.이번엔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온지유는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심미연은 이번엔 진짜로 끝장을 내고 싶었다.온지유는 너무 급하게 달리다가 결국 도로 한가운데로 갔고 차에 치여 그대로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심미연이 헐레벌떡 달려갔을 때 온지유는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심미연을 본 온지유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한 자 한 자 말하기 시작했다.“나... 절대... 너한테... 안 져...”심미연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이미 졌어. 아주 오래전에.”온지유는 눈을 크게 뜨고 억울함을 품은 채 숨을 거두었다. 말 그대로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그 뒤를 쫓아온 육현성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쓰러진 온지유를 보자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지유야, 괜찮아! 너 안 죽어. 내가 바로 응급실로 데려갈게!”심미연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동안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온지유는 결국 강지한에 대한 집착 때문에 모든 걸 망쳤지만 다행히 그녀는 그 지옥에서 일찍 빠져나왔다.“왜 이러고 서 있어? 날씨도 더운데.”뒤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미연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니 박유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엔 깊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오빠, 진성에 있는 거 아니었어? 여긴 어쩐 일
강지한은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장애물을 치워버리면 이제는 심미연과 함께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심미연은 강지한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강지한,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설마 그도 그녀처럼 모든 진실을 파헤친 걸까?‘아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하지만 강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다 보면 알 거야.”설명은 하지 않겠다는 그의 담담한 말투가 더 무서웠다.심미연은 그를 노려보았고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아아악!”고개를 확 돌린 그녀는 강혁승이 온지유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은 장면을 목격했다. 원래도 험악했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거의 괴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이 자식, 당장 그 손 놔!”육현성이 달려와 주먹을 날렸지만 그의 형편없는 싸움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그는 주먹을 몇 번 주고받다가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병실은 곧 아수라장이 됐고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강지한 쪽을 흘끗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는 여전히 평온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또 들어섰다. 심미연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속력으로 달려갔다.“스승님! 여기엔 어쩐 일이세요!”그녀는 진운혁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저... 정말 스승님 맞으세요?”진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야.”심미연은 결국 참았던 감정이 터져 소리 내 울었다.“다시는 못 뵐 줄 알았어요...”“바보 같은 녀석, 울지 마. 너한테 전할 말이 있어.”그 말에 심미연은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말씀하세요, 스승님!”진운혁은 곧장 문소영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날이 선 칼 두 자루 같았다.“문 여사님, 저 기억하죠?”문소영은 놀라운 침착함으로 말했다.“아뇨.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몇 년 전에 그쪽이 서연아를 죽이려고 사주한 그날, 제가 그 현장을 목격했었습니다.”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