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묻는 방식은 거침없었고 심미연은 그 질문에 별다른 불쾌감은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이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아직은 너무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사모님이었다. 그 생각에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그때 갑자기 손목이 잡혔고 뒤를 돌아보니 차가운 살기가 가득한 강지한의 눈과 마주쳤다. 심미연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불안함이 엄습했다. ‘강지한은 도대체 왜 찾아온 거야!’ 강지한이 갑자기 그녀를 잡아당기자 심미연은 비틀거리며 몇 발짝 뒤로 밀려갔다. 그 순간 남자는 그녀를 아무도 없는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방원호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이 쾅 하고 닫히며 모든 소리와 외부의 시선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방원호는 손을 뻗어 문을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강지한 씨! 그 사람 내보내세요.” 심미연은 문 바로 뒤에서 몸을 문에 붙인 채 두 손은 강지한에게 위로 들어 올려져 문에 눌려 있었다. 남자의 힘은 너무 강해 마치 옷을 뚫고 그녀의 떨리는 심장까지 닿을 것처럼 느껴졌다. 방원호의 소리가 들리자 심미연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강지한 씨, 뭐 하자는 거야? 빨리 놔줘.” 그녀는 방원호에게 자신과 강지한의 관계가 밝혀지는 걸 원치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고 이제는 다시 과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강지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심미연, 대답해. 임신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떨렸으며 하나하나의 단어가 마치 이를 악물고 내뱉는 듯했다. 그 속에 묻어 있는 절박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이 일을 확실히 알고 싶었다. 심미연의 동공이 잠시 커졌고 그녀는 몰래 깊은숨을 들이쉬며 이 압박감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아니. 강지한, 너 온지유한테 속은 거야!” 그녀가 인정하지 않으면 강지한은 그녀를 더 이상 어쩔 수
[차 돌려! 내가 직접 가서 찾을 거야!] 강지한의 목소리는 마치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하게 들렸다. 각 단어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한 결단이 묻어났다. 심미연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곧장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경멸과 비웃음이 어우러져 있었다. ‘온지유가 일이 생기니까 직접 가서 찾겠다고?’ ‘내가 일이 생기면 온지유와 함께 있어 줬을 텐데.’ ‘사람이 다르니까 이렇게 되는 거구나.’ 강지한이 전화를 끊고 심미연의 조롱 섞인 웃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내가 또 이 여자에게 뭘 잘못했을까?’ 심미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만 풀어줘. 네 여자나 찾으러 가. 무슨 일이 생기면 또 내 탓으로 돌리려고 할 거잖아.” 예전에 그녀는 그런 걸 아주 잘 떠안았다. 온지유는 무슨 일이든 그녀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기 일쑤였다. 강지한은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이미 말했잖아. 온지유와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심미연은 한층 더 비웃으며 말했다. “맞아. 너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지! 이제 우리는 이혼했으니까 더 이상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강지한 씨, 이제 그만하고 나 좀 보내줘.” 그녀가 여기 있으면 방원호가 분명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문밖에서 급박하고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며 방원호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들려왔다. “미연아, 괜찮아? 미연아, 내가 곧 문을 부술 거야. 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강지한은 그 말을 들으며 가슴 속에 쌓인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강지한은 깊은숨을 들이쉰 뒤 터져 나올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심미연을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턱을 거세게 움켜잡아 강제로 자신의 시선과 맞대게 했다. 그의 눈에는 반항할 수 없는 강한 빛이 어려 있었다. “강 부인께서 날 떠나고 아주 잘 지내나 봐. 주변 남자들 하나둘씩 바꿔 가면
다행히 미련을 버렸기에 이제는 이런 말을 들어도 더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방원호는 그녀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빨리 가요. 돌아가서 밥부터 먹어요.” 심미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방원호를 바라봤다. 방원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다시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막 도착했을 때 사모님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네 표정 보니 뭔가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우리한테 숨기려는 거 아니야?” 사모님의 농담 섞인 한마디에 심미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고 그 움직임은 미세했지만 결연했다.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말이다. ‘지금은 절대 말하면 안 돼.’“아니에요, 사모님. 오해하셨어요.” 심미연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이 휘몰아칠지도 모른다는 걸.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신중함은 곧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모님은 그런 그녀를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앉으라고 옆에 있는 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일단 앉아서 밥부터 먹자.”테이블 분위기는 방금의 상황 탓에 어딘가 미묘하게 변했지만 심미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애써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다.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한입씩 넘겼지만 입안에선 음식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힘겹게 삼켜낼 뿐이었다. 식사 도중에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창밖으로 흘러갔다. 머릿속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온갖 위험한 상황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침묵만이 맴도는 어색한 식사가 계속되었다. 식사가 끝난 뒤 사모님은 옆에 두었던 정교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표면은 복잡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오랜 세월이 빚어낸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이건 네 스승님이 생전에
대답이 없자 온지유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남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심미연을 희생해야 한다. “왜 대답하지 않아요? 혹시 심미연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요? 제 핸드폰에 사진이 있어요. 핸드폰을 저에게 주시면 그 사진을 보여드릴게요!” 온지유의 말투에는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이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녀가 도망칠 수 없다면 심미연을 끌어들여 함께 끌고 가야 한다. 도망칠 수 있다면 심미연을 여기서 죽게 해야 한다. 한 몸에 두 목숨이라니. 그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이 심미연을 데려오기만 하면 그녀는 심미연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심미연이 죽으면 그녀를 괴롭혔던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좋아! 한 번 믿어볼게! 가서 손 풀어줘.” 드디어 누군가 입을 열었고 온지유는 기쁨에 벅차 벌떡 일어나고 싶을 정도였다. 너무 좋았다.곧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풀어주었고 손목을 가볍게 풀자마자 바로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어 던졌다. 눈에 들어온 것은 일제히 같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런 생사를 거는 자들이 아닌 것처럼 매우 전문적으로 보였다. 온지유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고 잠금을 풀었다. 그 사람이 뒤를 돌려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틈을 타 급히 강지한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곧바로 삭제하고 그제야 갤러리를 열기 시작했다. 갤러리에는 심미연의 사진이 적지 않았고 대부분 몰래 찍은 것이었다. 심미연과 박유진이 함께 있는 사진도 있었고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사진도 있었다. 이 사진들은 그녀가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 찍게 한 것들이었고 아직 강지한에게 보여줄 적절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탈출 해야만 말할 수 있었다. “이거 보세요.” 온지유는 핸드폰을 건넸다. 남자는 핸드폰을 받아 들고
‘정말 전문적이네.’ ‘그럼 사람을 처리할 때도 이렇게 전문적으로 할까?’ 온지유는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손이 묶였고 누군가가 그녀의 눈을 천으로 가렸다. 순간 그녀의 세상은 암흑으로 변했다. 가슴 속에서 이유 모를 불안이 일었다. ‘이 사람들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이때 귀에 남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한 남자가 주의를 주듯 말했다. “먼저 간다. 너희들은 저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잘 지켜.” 온지유는 속으로 생각했다. ‘심미연이 오기 전까지 내가 도망을 갈 리 없지.’‘난 반드시 심미연이 죽는 걸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그래야 마음이 놓이지.’온지유의 전화를 받은 후 심미연은 서재로 향했다. 금고를 열고 그 안에 강준형이 전해준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조심스레 금고 속에 넣었다. 두 상자가 나란히 놓였을 때 왠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심미연은 잠시 멈칫하며 손끝으로 상자 위를 매만졌다.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며 화면에 낯선 번호가 뜨자 심미연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또 온지유일까?’‘아니야!’ ‘온지유는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계속 전화를 걸어오는 거지?’ ‘혹시 방금 그 전화로 내 위치를 추적하려던 걸까?’ 심미연은 그 생각이 들자 등골에 오싹한 기운이 스쳤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집에 있는 게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 벨 소리가 멈추고 곧바로 다시 울렸다. 심미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냉정하고 감정 없이 흘러나왔다.[무슨 일이야?] 지금 심미연의 머리속엔 온통 온지유가 자신을 해치려는 생각뿐이었다. 강지한과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자기를 지켜야 했다. [기사 보낼게. 본가에 가서 지내.]강지한의 태도는 단호했다. [별일 없으면 끊을게.] 심미연은 그 말만 남기
“먼저 혼자 겁먹지 마! 내가 금방 갈게.” 방원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비록 무섭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정말 무서웠다. ‘문밖에 있는 사람이 스승님이 아니라면 그건 분명 변장한 누군가일 테고 그들의 목적은 대체 뭘까?’ “전화 끊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해.” 방원호는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선배, 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와요.” “알았어.”심미연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엔진 소리 덕분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방원호는 심미연이 위험에 처할까 봐 차를 미친 듯이 몰고 있었다. 심미연은 문 앞에서 잠시 서 있던 중 문밖에 있던 남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예전에 본 괴담 영화들이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그 장면들이 유독 생생하게 떠올랐다. 심미연은 자신이 기억력이 좋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났다. 방원호는 오고 나서 건물의 모든 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는 심미연이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심미연의 상태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할 것 같았다. 차라리 조용히 그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내일 다시 생각해 볼래?” 방원호가 조심스레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저는 친구 집에 갈게요. 데려다주세요.” 방원호가 아무리 잘해주더라도 두 사람은 선후배 사이였으니 모든 일에 기댈 수는 없었다. “알았어. 그럼 준비하는 동안 기다릴게.” “잠깐만 기다려줘요. 금방 끝낼게요.” 심미연은 방원호에게 자리를 권한 후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원호는 소파에 앉아 거실을 한번 둘러본 후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문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심미연은 곧 짐을 챙겨 내려왔고 방원호가 핸드폰을 보고 있자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선배, 준
심미연은 눈을 깜빡였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조명 아래 몇 개의 흐릿한 노란 불빛만이 그 넓고 텅 빈 곳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주변에는 각종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쌓여 있고 그 그림자들이 벽에 뒤엉켜 왜곡된 모습으로 비쳤다. 그때 심미연은 온지유를 발견했다. 그녀는 창고 한가운데 서 있었고 빛에 의해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유난히 고독하고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온지유는 심미연을 등지고 있었다. 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쥐어져 있었고 칼날은 약한 불빛 속에서 차가운 빛을 반사하며 칼을 한 번 돌릴 때마다 다가올 폭풍을 예고하는 듯했다.발소리를 듣고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입가에 비웃음이 떠오르며 그 눈빛은 마치 사람의 가장 깊은 두려움까지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심미연, 드디어 왔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난 저 사람들이 날 속이는 줄 알았는데.”심미연은 마음속의 혼란과 분노를 억누르며 온지유를 응시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이를 악물고 내뱉는 것처럼 단호했다. “너 대체 뭐 하려는 거야?” 온지유는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네 할머니랑 함께 있을 수 있게 널 보내주려는 거지. 그 노인네가 혼자 아래에 있으면서 외로웠을 거야. 노인네가 너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넌 당연히 내려가서 같이 함께 있어 줘야지.”외할머니가 언급되자 심미연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앞의 온지유를 노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온지유, 왜 우리 외할머니를 죽게 만든 거야? 할머니는 너랑 아무 원한도 없잖아.” 온지유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몇 걸음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있는 칼은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며 거의 은빛의 빛막을 이루는 듯했다. “그 노인네랑은 원한이 없지만 너랑은 있잖아. 결국 네 존재가 그 노인네를 죽게 만든 거야.” 온지유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멸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네 할머니는 알면 안 되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어. 살려둘 수 없었어. 결국 죽일 수밖에.” 심미연의 몸은 분노로 떨렸지만 그녀는
심미연의 눈빛이 빛났고 온지유를 향해 냉소를 지었다.“강지한 씨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내가 죽어도 그 남자는 날 잊을 리 없고 너랑 결혼하지 않을 거야. 온지유, 인정해! 너는 강지한 씨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람이 너에게 잘하는 건 그냥 네가 과부라서 불쌍해서 그런 거야.”‘과부’라는 두 글자는 온지유를 완전히 자극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굽혀 손에 들고 있던 칼날을 심미연의 심장에 대며 미친 듯이 웃었다. “내가 이 칼을 힘껏 찔러넣으면 내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거야.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강지성 같은 그런 무능하고 쓸모없는 놈과 결혼한 거야.” 칼날은 날카로웠고 그 차가운 느낌이 심미연에게 전해져 그녀는 순간적으로 냉큼 숨을 들이켰다. 온지유가 미쳐버리면 심미연의 운명은 한 마디로 끝이다. 바로 죽음이었다. 심미연은 잠시 감정을 가라앉힌 후 온지유에게 물었다. “너와 강지한 씨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잖아. 그런데 왜 강지성 씨와 결혼 한 거야? 강지성 씨의 죽음도 너와 관련이 있는 거 아니야?” 문소영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강지성의 죽음은 의문점이 많았지만 그 뒤에서 모든 일을 조종한 사람은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었다. 당시 강지성과 함께 있었던 사람은 온지유였다. 강지성은 죽고 온지유는 살아남았다. 가장 유력한 범인은 온지유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교통사고 현장에서는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완벽하게 처리되어서 오히려 누군가 조작한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 게 진짜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상황이 너무 이해되지 않았다. 방원호가 찾은 온지유의 범죄 증거들로는 아직 충분치 않은 것 같다. 온지유는 그녀의 말을 듣고 미친 듯이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이 웃음에 맞춰 심미연의 가슴 위로 왔다 갔다 하며 조금만 실수하면 그 칼이 심장에 박힐 수도 있었다. 심미연은 속으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온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박시훈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수술복을 입은 심미연을 단번에 알아봤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맑고 빛나는 눈동자는 도저히 다른 사람과 헷갈릴 수 없는 것이었다. “날 좀 밀어줘.” 박시훈이 간병인에게 다급히 말했다. 간병인은 곧장 그의 휠체어를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를 이어 강준형도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심미연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미연아, 상황이 어때?” 강준형의 목소리엔 감추지 못한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그때 박시훈의 시선이 다시금 심미연에게로 향했다. “당신 의사예요?”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직이 말했다. 세계 최고 해커, 그리고 의사. 그녀가 가진 아우라는 더없이 눈부셨다. 박시훈은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상태가 조금 위중해요. 지금은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심미연이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준형이 가장 궁금해할 말이었다.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고 일부러 마지막 문장을 강조했다. “그래... 다행이구나.” 강준형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심미연의 손을 꼭 잡았다. “미연아, 정말 고맙다. 수고 많았어.” 심미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 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강지한은 그녀를 구해준 적이 있다. 이제 그녀가 그를 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할아버지, 강지한이 깨어나면 병원에서 바로 연락드릴 거예요. 지금은 먼저 집에 가 계세요.” 심미연은 그의 머리 위로 보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며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시려왔다. 몇 년 만에 다시 본 강준형은 이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미연아, 혹시 아이 좀 데려와서 나한테 보여줄 수 있겠니?” 그는 줄곧 강지한이 그녀와 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그
심미연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강지한은 자신을 구하려다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 순간, 이지연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보스를 죽이려고 해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 밤 그 대형 교통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대형 트럭을 이용해 그녀를 노렸고 때마침 강지한의 차량이 그 사이에 끼어들면서 그가 대신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차량이 폭발했다면 강지한이 그 안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사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연아?” 말이 없던 심미연을 걱정한 강준형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전화를 끊은 줄 알고 불안해졌는지 목소리엔 떨림이 섞여 있었다. “지금 바로 갈게요.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제가 꼭 강지한 살려낼게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꼭 쥔 채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장 안으로 들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핸드백과 폰을 챙겨 계단을 내려섰다. 그녀는 몰랐다. 서재 문 앞에 조용히 서 있던 박유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박유진의 눈빛은 텅 빈 허공을 떠돌 듯 쓸쓸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이 누구인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야만 했다. 강지한이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켰다면 그녀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아마 오늘 구청이 문을 열었더라도 심미연은 박유진과 그곳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박유진은 마음이 아프지 않은 척 조용히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당연한 거야. 나라도 갔을 거야.’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그건 위로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속이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했다. 잠시 후, 그는 조용히 서재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지만 화면 속 글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직 한 사람, 심미연. 지금 그 순간에도 그녀만이 그의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
‘강 할아버지’라는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뜨는 순간, 박유진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강지한의 할아버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는 건 분명 강지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지한이 심미연을 구하려다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녀가 당연히 그를 찾아갈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미연아, 갑자기 급한 회의가 생각났어. 먼저 전화 받아. 난 서재에서 회의 좀 하고 있을게.” 박유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 또한 신중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흔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레 말하려 애쓰는 듯했다. 심미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응. 다녀와. 나도 통화 좀 할게.” 박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통화 끝나면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푹 쉬어. 알았지?” “응. 오빠도 회의 끝나고 푹 쉬어.”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박유진은 언제나 그녀에게 따뜻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몇 번이나 외면하고 져버렸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럼 난 먼저 갈게.” 그는 그녀의 체온을 놓치기 아쉬운 듯 한동안 손끝을 망설였지만 결국 손을 놓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예전에 박유진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미연이와 결혼하고 싶다면 그 아이를 절대 놓치지 마라.’ 하지만 만약... 심미연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하는 건 박유진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불편해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그에겐 견딜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서재 문이 조용히 닫히자 심미연은 곧장 안방으로 향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아까 걸려온 전화를 다시 눌러 받았다. “미연아, 나야. 혹시 내가 깨운 건 아니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하구나.” 강준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지쳐 있었고 그 안엔
강지한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박시훈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뉴스 봤어. 네 카이엔이 폭발했다길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네가 무사하니까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 “그 대형 트럭, 당장 확인해. 전부 조사하고 운전자는 반드시 찾아.” “알겠어. 지금 바로 확인해볼게.”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박시훈의 표정도 금세 굳어졌다. “조금만 기다려. 바로 연락할게.” “응. 최대한 빨리.” 강지한은 단호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치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심미연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2층 서재로 향했다. 노크를 하려던 순간, 가방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잠시 망설인 끝에 그녀는 전화를 먼저 받았다. “보스, 큰일 났어요. 누가 보스를 죽이려고 해요.” 이지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대로 귀에 박혔다. 심미연의 머릿속엔 낮에 있었던 사고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 대형 트럭. 정말 자신을 노리고 달려든 게 맞았던 거다. 만약 그 카이엔이 없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연 씨, 천천히 말해봐요.”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최대한 침착하게 반응했다. ‘도대체 누가 날 죽이려는 거지?’ ‘온지유?’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온지유는 지금 그녀 손에 있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다. “저도 방금 들었어요. 육현성 씨가 누군가랑 통화한 녹음이 있었는데 거기서 보스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어요.”이지연은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말을 쏟아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봤어요?” 육현성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온지유까지 그녀 손에 있는 상황이니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말한 그 목소리는 육현성이 아니었다. 그게 더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