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혼자 겁먹지 마! 내가 금방 갈게.” 방원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비록 무섭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정말 무서웠다. ‘문밖에 있는 사람이 스승님이 아니라면 그건 분명 변장한 누군가일 테고 그들의 목적은 대체 뭘까?’ “전화 끊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해.” 방원호는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선배, 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와요.” “알았어.”심미연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엔진 소리 덕분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방원호는 심미연이 위험에 처할까 봐 차를 미친 듯이 몰고 있었다. 심미연은 문 앞에서 잠시 서 있던 중 문밖에 있던 남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예전에 본 괴담 영화들이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그 장면들이 유독 생생하게 떠올랐다. 심미연은 자신이 기억력이 좋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났다. 방원호는 오고 나서 건물의 모든 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는 심미연이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심미연의 상태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할 것 같았다. 차라리 조용히 그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내일 다시 생각해 볼래?” 방원호가 조심스레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저는 친구 집에 갈게요. 데려다주세요.” 방원호가 아무리 잘해주더라도 두 사람은 선후배 사이였으니 모든 일에 기댈 수는 없었다. “알았어. 그럼 준비하는 동안 기다릴게.” “잠깐만 기다려줘요. 금방 끝낼게요.” 심미연은 방원호에게 자리를 권한 후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원호는 소파에 앉아 거실을 한번 둘러본 후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문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심미연은 곧 짐을 챙겨 내려왔고 방원호가 핸드폰을 보고 있자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선배, 준
심미연은 눈을 깜빡였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조명 아래 몇 개의 흐릿한 노란 불빛만이 그 넓고 텅 빈 곳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주변에는 각종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쌓여 있고 그 그림자들이 벽에 뒤엉켜 왜곡된 모습으로 비쳤다. 그때 심미연은 온지유를 발견했다. 그녀는 창고 한가운데 서 있었고 빛에 의해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유난히 고독하고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온지유는 심미연을 등지고 있었다. 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쥐어져 있었고 칼날은 약한 불빛 속에서 차가운 빛을 반사하며 칼을 한 번 돌릴 때마다 다가올 폭풍을 예고하는 듯했다.발소리를 듣고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입가에 비웃음이 떠오르며 그 눈빛은 마치 사람의 가장 깊은 두려움까지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심미연, 드디어 왔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난 저 사람들이 날 속이는 줄 알았는데.”심미연은 마음속의 혼란과 분노를 억누르며 온지유를 응시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이를 악물고 내뱉는 것처럼 단호했다. “너 대체 뭐 하려는 거야?” 온지유는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네 할머니랑 함께 있을 수 있게 널 보내주려는 거지. 그 노인네가 혼자 아래에 있으면서 외로웠을 거야. 노인네가 너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넌 당연히 내려가서 같이 함께 있어 줘야지.”외할머니가 언급되자 심미연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앞의 온지유를 노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온지유, 왜 우리 외할머니를 죽게 만든 거야? 할머니는 너랑 아무 원한도 없잖아.” 온지유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몇 걸음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있는 칼은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며 거의 은빛의 빛막을 이루는 듯했다. “그 노인네랑은 원한이 없지만 너랑은 있잖아. 결국 네 존재가 그 노인네를 죽게 만든 거야.” 온지유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멸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네 할머니는 알면 안 되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어. 살려둘 수 없었어. 결국 죽일 수밖에.” 심미연의 몸은 분노로 떨렸지만 그녀는
심미연의 눈빛이 빛났고 온지유를 향해 냉소를 지었다.“강지한 씨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내가 죽어도 그 남자는 날 잊을 리 없고 너랑 결혼하지 않을 거야. 온지유, 인정해! 너는 강지한 씨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람이 너에게 잘하는 건 그냥 네가 과부라서 불쌍해서 그런 거야.”‘과부’라는 두 글자는 온지유를 완전히 자극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굽혀 손에 들고 있던 칼날을 심미연의 심장에 대며 미친 듯이 웃었다. “내가 이 칼을 힘껏 찔러넣으면 내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거야.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강지성 같은 그런 무능하고 쓸모없는 놈과 결혼한 거야.” 칼날은 날카로웠고 그 차가운 느낌이 심미연에게 전해져 그녀는 순간적으로 냉큼 숨을 들이켰다. 온지유가 미쳐버리면 심미연의 운명은 한 마디로 끝이다. 바로 죽음이었다. 심미연은 잠시 감정을 가라앉힌 후 온지유에게 물었다. “너와 강지한 씨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잖아. 그런데 왜 강지성 씨와 결혼 한 거야? 강지성 씨의 죽음도 너와 관련이 있는 거 아니야?” 문소영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강지성의 죽음은 의문점이 많았지만 그 뒤에서 모든 일을 조종한 사람은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었다. 당시 강지성과 함께 있었던 사람은 온지유였다. 강지성은 죽고 온지유는 살아남았다. 가장 유력한 범인은 온지유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교통사고 현장에서는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완벽하게 처리되어서 오히려 누군가 조작한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 게 진짜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상황이 너무 이해되지 않았다. 방원호가 찾은 온지유의 범죄 증거들로는 아직 충분치 않은 것 같다. 온지유는 그녀의 말을 듣고 미친 듯이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이 웃음에 맞춰 심미연의 가슴 위로 왔다 갔다 하며 조금만 실수하면 그 칼이 심장에 박힐 수도 있었다. 심미연은 속으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온
심미연은 충격을 받았다. ‘어떤 우연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이지?’ 온지유는 여전히 그때의 기억에 빠져들어 심미연의 표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차 사고는 우연이었고 강지성은 그때 정신이 멀쩡했어. 그 사람은 밖으로 기어 나가려 했고 나는 중앙 대시보드에 놓여 있던 장식품으로 그를 기절시켰어. 내가 차 밖으로 나가고 나서 차가 불타면서 강지성은 재로 변했고 나는 살아남았어. 결국 나쁜 놈은 자신이 한 일의 대가를 받는 거야!”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온지유는 여전히 속이 후련했다.강지성은 겉으로는 온화하고 너그러운 모습으로 보였지만 침대에서는 변태처럼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그녀를 괴롭혔고 울지 못하게 강요했다. 그가 죽고 나서야 그녀는 마침내 해방된 기분이었다. 심미연은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며 그 어떤 동정도 느끼지 않았다. 강지성은 그녀가 선택한 남편이었다. 만약 그가 변태라면 이혼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 강지성이 원하지 않더라도 떠날 방법은 많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장 잔인한 방법을 선택해 그를 죽였다. 그녀에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었다. “심미연, 네 외할머니가 왜 죽었는지 알아? 네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을 알았거든.” 온지유는 손에 든 칼날을 심미연의 목에 대며 말했다. “내가 이대로 한 칼 휘두르면 네가 죽어가면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을 거야. 딱 네 외할머니가 죽기 전 고통스럽게 몸부림친 것처럼 말이야.”순간 심미연의 머릿속에는 외할머니가 몸부림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 심장을 칼로 찔러놓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고 가슴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가슴 속의 분노가 거의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눈앞의 온지유를 천번 만번 찔러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차분함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 온지유가 방심하고 더 많은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아! 맞다. 그거 알아? 너가 가진 그 핑크색 보석
심미연은 놀라서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이미 피할 시간은 없었다. 그때 강한 힘이 그녀의 몸을 세게 밀쳐냈다. 힘이 너무 강해서 그녀는 버틸 수 없었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퍽!” 칼이 살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공기 속엔 짙은 피 냄새가 진동했다.심미연은 급히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박유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가슴에는 칼이 박혀 있었고 온지유는 그 앞에 서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 유진 오빠!” 심미연이 그를 부를 때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미연아, 빨리 도망쳐.” 박유진이 급하게 외쳤다. 온지유는 마치 미친 듯이 변해버렸고 심미연을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온지유는 정신을 차린 후 박유진을 노려보며 눈빛에 피가 어려 있었다. “심미연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왜 구하려는 거예요? 그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다. 하지만 강지한이 위험에 처한다면 그녀는 그의 목숨과 바꿀 정도로 자신을 희생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랑과 생명. 당연히 생명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정말로 상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았다. 그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가치 있어요.” 박유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확고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다행히도 그가 제때 도착해 심미연이 다치지 않게 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온지유는 그런 깊은 감정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심미연이라는 여자가 대체 뭐길래 누군가는 생명을 걸고 구하려는 걸까?’ 정말 질투가 나게 했다. 심미연은 고통을 참으며 바닥에서 일어나 한 걸음씩 박유진에게 다가갔다. “유진 오빠, 내가 데리고 나가 줄게.”온지유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심미연은 운이 참 좋았다. 그녀의 곁
그가 들었다면 그녀의 여리고 착한 이미지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강지한이 말을 하기 전에 박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 대표님, 죽기 전에 한 가지만 부탁드리죠. 미연이가 평생 무사히 살 수 있도록 지켜주세요.” 그의 심미연은 너무나 가엾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고 지금도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정말로 하늘도 눈 감은 것 같았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박유진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그 소리를 듣고 심미연은 그제야 박유진이 다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강지한과 온지유 사이의 일에만 신경을 썼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심미연은 머리를 살짝 흔들며 급히 머릿속의 생각들을 떨쳐내고 박유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급히 박유진의 넥타이를 풀어 지혈을 시도하며 목이 터지라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강지한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울먹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이 답답했다. 온지유는 가까운 거리에서 강지한의 눈 속에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안 돼!’ ‘절대 이렇게 끝날 수 없어.’ 오랜 시간 동안 그토록 노력해 왔는데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반드시 강지한을 붙잡아야만 했다.심미연은 박유진의 상처를 급히 처리했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박유진의 상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떨리는 입술로 강지한에게 말했다. “강 대표님, 제발 유진 오빠 좀 살려줘. 제발 죽게 하지 마.” 박유진이 자신 때문에 죽는다면 그녀는 평생 죄책감과 자책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런 삶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온지유는 이를 악물고 낮게 속삭였다. “지한 씨, 나 좀 집에 데려다줄 수 있어? 여기 있기 너무 무서워.” 그녀는 강지한이 자신의 말을 따라줄지 아니면 심미연의 말을
“심미연, 왜 멍하니 있어? 빨리 병원에 따라가야지.” 온지유는 강지한이 아직 심미연에게 미련을 두고 있을까 봐 걱정돼 먼저 심미연을 보내려 했다. 심미연은 몸에 가지고 있는 녹음 펜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강지한에게 들킬까 봐 걱정되었고 온지유의 말에 급히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해서든 증거는 반드시 챙겨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박유진을 돌봐야 했다. 박유진은 그녀 때문에 다친 것이었고 그녀는 당연히 그를 돌봐야 했다. “성 비서, 사람 내려놓고 심미연이 혼자 해결하게 놔둬.” 강지한은 심미연을 한 번 쳐다본 뒤 천천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크지 않았지만 심미연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강지한을 돌아보았다.“강 대표님, 그게 무슨 뜻이죠?” 심미연은 화가 치밀어 올라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온지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한 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다시 생각해 보니 강지한은 나타난 이후로 계속 이상했다. ‘어쩌려는 거지?’“이리 와.” 강지한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심미연에게 말했다. “좀 더 가까이 와야 내가 무슨 뜻인지 말해줄 수 있지. 그렇게 멀리 있으면 네 얼굴이 잘 안 보이잖아.” 그녀와 이혼한 후 그는 항상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도 수도 없이 떠올려 왔다. 온지유는 완전히 당황한 기색으로 서둘러 말했다. “지한 씨, 심미연 씨를 불러서 뭐 하시려고. 저 여자가 갑자기 발광이라도 해서 당신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녀는 두 사람이 다시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걸 막아야 했다. 심미연은 강지한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왜? 내 얼굴이 그렇게 보고 싶어서 밤낮으로 그리워했어?” 그녀는 강지한을 자극하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화를 내기만 하면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서 있었다. 주변 공기는 마치 얼어붙은 듯 숨소리조차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온지유는 강지한의 말에 담긴 뜻을 비로소 깨달았고 참을 수 없는 공포와 초조함에 휩싸였다. 그녀는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두 손으로 그의 팔을 꽉 움켜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절박하게 애원하듯 말했다. “지한 씨, 당신은 나랑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언제 할까? 그냥 지금 하자. 어때? 제발 부탁이야. 난 더 이상 누구도 나 때문에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끝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력감이 느껴져 안타깝기도 했다. 강지한의 시선은 심미연과 온지유 사이를 오가다 결국 온지유의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에 멈췄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내가 결혼하자고 한 적이 있었나. 형수님?”그 말투에는 비꼬는 듯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마치 그 일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온지유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강지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 속에 결단의 빛을 비췄다. 심미연도 잠시 멈칫했다. ‘강지한은 온지유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분명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일 거야.’세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시간은 마치 고요하게 멈춘 듯했다.오랜 시간이 지나 온지유는 간신히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근데 그동안 당신은 나한테 너무 잘해줬잖아. 내가 임신했을 때도 당신은 내가 부르면 언제나 달려왔고...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왜 그렇게 잘해준 거야?” 그녀는 늘 강지한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어왔다. 결국 그가 보였던 모든 행동들이 그녀에겐 사랑의 표현처럼 느껴졌으니까. 다만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