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 왜 멍하니 있어? 빨리 병원에 따라가야지.” 온지유는 강지한이 아직 심미연에게 미련을 두고 있을까 봐 걱정돼 먼저 심미연을 보내려 했다. 심미연은 몸에 가지고 있는 녹음 펜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강지한에게 들킬까 봐 걱정되었고 온지유의 말에 급히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해서든 증거는 반드시 챙겨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박유진을 돌봐야 했다. 박유진은 그녀 때문에 다친 것이었고 그녀는 당연히 그를 돌봐야 했다. “성 비서, 사람 내려놓고 심미연이 혼자 해결하게 놔둬.” 강지한은 심미연을 한 번 쳐다본 뒤 천천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크지 않았지만 심미연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강지한을 돌아보았다.“강 대표님, 그게 무슨 뜻이죠?” 심미연은 화가 치밀어 올라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온지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한 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다시 생각해 보니 강지한은 나타난 이후로 계속 이상했다. ‘어쩌려는 거지?’“이리 와.” 강지한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심미연에게 말했다. “좀 더 가까이 와야 내가 무슨 뜻인지 말해줄 수 있지. 그렇게 멀리 있으면 네 얼굴이 잘 안 보이잖아.” 그녀와 이혼한 후 그는 항상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도 수도 없이 떠올려 왔다. 온지유는 완전히 당황한 기색으로 서둘러 말했다. “지한 씨, 심미연 씨를 불러서 뭐 하시려고. 저 여자가 갑자기 발광이라도 해서 당신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녀는 두 사람이 다시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걸 막아야 했다. 심미연은 강지한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왜? 내 얼굴이 그렇게 보고 싶어서 밤낮으로 그리워했어?” 그녀는 강지한을 자극하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화를 내기만 하면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서 있었다. 주변 공기는 마치 얼어붙은 듯 숨소리조차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온지유는 강지한의 말에 담긴 뜻을 비로소 깨달았고 참을 수 없는 공포와 초조함에 휩싸였다. 그녀는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두 손으로 그의 팔을 꽉 움켜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절박하게 애원하듯 말했다. “지한 씨, 당신은 나랑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언제 할까? 그냥 지금 하자. 어때? 제발 부탁이야. 난 더 이상 누구도 나 때문에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끝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력감이 느껴져 안타깝기도 했다. 강지한의 시선은 심미연과 온지유 사이를 오가다 결국 온지유의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에 멈췄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내가 결혼하자고 한 적이 있었나. 형수님?”그 말투에는 비꼬는 듯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마치 그 일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온지유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강지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 속에 결단의 빛을 비췄다. 심미연도 잠시 멈칫했다. ‘강지한은 온지유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분명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일 거야.’세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시간은 마치 고요하게 멈춘 듯했다.오랜 시간이 지나 온지유는 간신히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근데 그동안 당신은 나한테 너무 잘해줬잖아. 내가 임신했을 때도 당신은 내가 부르면 언제나 달려왔고...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왜 그렇게 잘해준 거야?” 그녀는 늘 강지한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어왔다. 결국 그가 보였던 모든 행동들이 그녀에겐 사랑의 표현처럼 느껴졌으니까. 다만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심미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무진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유진 도련님이 지금 위험합니다.” 이대로 계속 미루면 정말로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심미연은 가슴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박유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강지한에게 돌아가 예전처럼 살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럼 밖에 던져버려.” 강지한은 얼굴을 차갑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시선을 옆으로 흘려보내며 심미연의 창백한 얼굴을 엿본 그는 잠시 마음 한편에서 안쓰러운 생각이 스쳤지만 그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 그가 바로 그라는 사람의 방식이었다. “좋아. 약속할게.” 심미연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그녀는 강지한이 오늘 반드시 그녀를 압박해 동의하게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박유진을 절대로 구하지 않을 것이다. 눈앞에서 박유진이 죽어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온지유는 온 힘을 다해 거의 울부짖듯 외쳤다. 심미연은 그녀를 쳐다보며 모진 말을 덧붙였다. “내가 말했지? 강지한 씨는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넌 계속 이 사람이 널 사랑한다고 우겼잖아. 진짜 사랑했다면 벌써 너랑 결혼했을 거야.”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는 일을 온지유는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모른 척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강지한은 반쯤 좁혀진 눈으로 심미연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 여자가 화풀이 상대를 찾는 데는 정말 능숙하네.’“강지한 씨, 내가 다 약속했잖아. 빨리 성 비서님께 사람 데리고 가게 해.” 심미연은 강지한에게 급하게 말했다. 자신을 희생하고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지 못하면 안 되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강지한의 깊고 어두운 눈빛은 마치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처럼 빛났다. 그가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에는
어차피 앞날은 길게 펼쳐져 있으니 그에게는 아직 많은 기회가 있다. 그는 속으로 서두를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했다. 그러고 나서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안 돌아온다면 구연궁에서 살면 돼. 네 결정 존중할게.” 심미연은 잠시 멍해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눈앞에 있는 강지한은 가짜일까?’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온지유는 마음속 절망이 파도처럼 몰려와 그녀를 삼키듯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단지 외부인일 거로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이미 깊숙이 빠져들어 버렸고 이제는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그녀는 허탈하게 두 사람의 꼭 쥔 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때 자신이 나아가게 했던 믿음은 이 순간 폭발하듯 무너졌고 남은 건 끝없는 공허함과 씁쓸함뿐이었다. 마치 공간 전체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얼어붙은 듯 시간마저도 이 순간 유난히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공기 중에는 긴장감과 복잡한 감정이 엉켜 있어 숨이 막힐 듯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답답함이 감돌았다.강지한과 심미연의 대치 그리고 온지유의 침묵 속 절망이 하나의 강렬하고 가슴을 울리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 장면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저도 모르게 가슴을 아프게 했다. 온지유의 손끝은 분노와 결단으로 떨고 있었다. 그녀는 급하게 몸을 숙였고 바닥에 놓인 어두운 빛 속에서 차가운 광채를 내뿜는 단검을 보았다. 그 칼날은 마치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마음처럼 차갑고 결연하게 빛났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두 눈은 불처럼 붉게 타올랐다. 모든 증오를 이 순간에 담아내려는 듯 그녀는 힘껏 손을 잡아당겼고 단검이 손에 꽉 쥐어졌다. 칼날은 심미연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고 공기 속에는 진한 화약 냄새가 가득했다. 그 긴장감은 마치 하나의 바늘이 떨어져도 폭발할 듯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순간 강지한의 손이 철갑처럼 온지유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 힘이 너무 강해 온지유의 손이 떨리며 그로 인해
강지한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온지유를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비 오던 날 네가 나랑 우리 어머니를 살려줬던 일로 이미 몇 년 동안 보상할 건 다 보상해 줬다고 생각해. ”강지한의 말투는 아주 담담했다.그리고 심미연은 처음으로 강지한의 입에서 ‘어머니’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다.또한 강지한은 온몸이 굳은 채 아까부터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대체 비 오던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그러다가 문득 강준형이 그녀에게 줬던 그 상자가 떠올랐다.‘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지?’갑자기 한번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날 결혼식 날 밤에 왜 미연 씨를 버리고 나한테 왔어?”온지유는 여기서 포기하기 싫었다.여태껏 힘들게 버텨왔는데 이제 와서 순순히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이때 심미연이 강지한을 빤히 바라보았다.결혼식 날 밤에 강지한이 밤새 돌아오지 않아서 지금껏 그가 회사에서 야근한 줄 알았는데 3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그날 밤에 온지유랑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날 무슨 일이 있었을까?’생각하던 와중에 강지한은 심미연을 내쫓으며 다급히 말했다.“너도 빨리 병원에 가봐. 혹시나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자세히 검사해 보고.”심미연은 차가운 그의 눈빛과 마주쳤지만 그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전혀 알아보기 힘들었다.“빨리 가!”강지한은 또다시 그녀를 재촉했고 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강지한과 온지유는 지금 할 말이 많을 텐데 제삼자인 그녀가 있으면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콕콕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밖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에 강지한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온지유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우리 형이 변태란 사실은 나도 진작에 알고 있었거든? 그날 밤에 우리 형이 널 때렸다고 전화했을 때도 난 네 말을 믿었어. 하지만 너를 찾아갔던 건 단지 그때 나를 구해줬던 일이 생각나서였지 아니면 절대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거야.”어렸을 때
“지한 씨, 거기 서!”온지유는 강지한의 등 뒤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너무 격분한 나머지 가슴의 상처가 벌어지면서 또다시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그리고 순간 하늘이 핑하고 돌더니 그대로 쓰러졌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 오전이었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나른했다.“누구 없어요? 저 목말라요.”목소리도 이미 다 잠겨 있었는데 아마 어제 너무 크게 소리 지른 탓인 것 같았다.이때, 간호사가 링거가 가득 걸린 밀차를 밀고 들어왔다.“물 주세요!”온지유는 간호사에게 대뜸 소리쳤다.하지만 그녀는 들은 체도 안 하고 수액을 갈아주고 체온을 재줬다.그 모습에 온지유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녀의 뺨을 때리려고 팔을 높게 들었다.“목이 마르다는 말이 안 들려요? 물 좀 달라고요!”간호사가 그녀의 모습을 힐끔 보고는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았다.그리고 수액 바늘을 거칠게 뽑더니 다시 새로운 것으로 갈아줬다.“자꾸 움직이시면 바늘이 다른 곳을 찔러 다시 꽂아야 하는 수가 있어요.”사실 온지유도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하여 간호사가 주삿바늘을 들고 그녀의 손에 십여 개의 바늘구멍을 찔러 손등에 멍이 드는 것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간호사는 그녀에게 새로운 수액을 달아준 뒤 거들떠보지도 않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온지유는 저 따위 간호사한테도 무시당하는 자신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그리고 나중에 다 나으면 꼭 본때를 보여주리라 다짐했다.오후에 문소영이 병문안 왔다.온지유는 그녀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물었다.“어머니, 혹시 저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시면 안 돼요?”순간 문소영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그녀에게 다가와 뺨을 내리쳤다.“나쁜 계집애, 감히 그런 더러운 수법으로 날 속여?”모든 사실을 안 문소영은 지금 당장에라도 온지유를 죽여버리고 싶었다.온지유는 뱃속의 아이가 강지성이 예전에 정자를 냉동 보관했다가 그 정자로 시험관 임신이 성공했다고 말했는데 자기 아들이 죽었는데
“먼저 어머니 핸드폰을 저한테 주세요.”온지유는 혹시나 문소영이 지금도 녹음할 것 같아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온지유, 선 넘지 마!”문소영은 화가 난 나머지 이를 악물고 말했다.“제가 너무하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온지유는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뒤에서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빨리 주세요.”문소영은 그녀의 성화에 핸드폰을 꺼내 옆에 내려놨다.“됐지?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온지유는 말없이 그녀의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보았고 인내심이 바닥난 문소영은 또다시 그녀를 재촉했다.“빨리!”이때, 온지유가 그녀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는데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문소영이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안돼!”“어머니는 무조건 방법이 있을 거라 믿어요.”온지유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빨리 가서 준비부터 하세요. 그리고 늦어도 내일은 제가 여기서 나가야겠어요.”강지한이 절대 이대로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하여 가능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안전할 것 같았다.“만약 지한이가 날 막는다면 나도 더 이상 너를 도와줄 방법이 없어.”문소영은 여전히 강지한을 두려워했다.만약 그가 대놓고 자신과 맞서 싸운다고 하면 결과는 아주 참담할 게 뻔했다.그렇다고 해서 고작 온지유 때문에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건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요. 아무튼 저한테는 결과만 알려주시면 돼요.”온지유의 눈빛은 소름 돋을 정도로 살벌했다.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경성을 벗어나야 했다.“온지유, 선 넘지 말라고 했지!”문소영은 사실 온지유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어디가 아파서 입원했는지 몰랐다.어쨌든 어제저녁의 일은 이미 강지한 쪽에서 비밀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입단속을 시켰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지금 당장 가서 준비해야 할 거예요. 시간이 없어요!”온지유는 또다시 문
“아니. 미연이는?”“사모님은 지금 병실에 계십니다.”“오늘 모든 스케줄은 다 취소해 줘. 난 병원에 가봐야겠다.”성무진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결국에는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강지한은 지금 모든 일의 1순위가 다 심미연일 만큼 순애보가 되었다.성무진이 떠난 뒤 강지한은 빠르게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부랴부랴 사무실에서 나왔다.그리고 차를 병원 주차장에 세워두고 차 안에서 담배 두 대를 태운 뒤에야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VIP 병실 앞에 도착해서도 그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침대에는 박유진이 눈을 꼭 감고 온몸에는 수많은 줄을 달고 누워있었는데 옆에 기기에서는 끊임없이 소리가 나고 있었다.그리고 심미연은 그의 옆에서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엎드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강지한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졌다.만약 그때 박유진이 올 줄 알았다면 진작에 그가 막아설 거란 사실을 눈치채야 했는데.그러면 온지유가 미친 사람처럼 칼을 휘두르지도 않았을 것이다.강지한은 성큼성큼 심미연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그녀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었다.누군가의 손길에 심미연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는데 눈앞의 사람이 강지한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차갑게 물었다.“여긴 왜 왔어?” 금방 깨어난 탓인지 목소리는 나른했다.“널 데려가려고.”강지한은 당당하게 여기에 온 목적을 말했다.심미연이 다른 남자를 돌봐주는 게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야.”심미연은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여기에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집사람들을 부르면 되잖아. 아니면 간병인이라도 불러줄게.”강지한은 심미연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나랑 집에 가자.”강지한은 요즘 집에 혼자 있는 게 너무 괴로웠고 그녀가 없으면 그곳은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강지한 씨, 난 그저 당신 곁으로 돌아간다고만 했지 다시 예전처럼 부부로 지내겠다는 뜻은 아니었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