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옆구리가 회의실 탁자에 찍혀 찌릿한 고통에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아픔을 참지 못해 눈가가 붉어졌다.강지한은 몸을 가까이 밀착시키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무언가 폭발할 듯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너랑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까, 다음 날 네 부모가 사람들을 데리고 호텔 문을 두드렸어. 파파라치 사진까지 들이밀면서 결혼 안 하면 세상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더라.”강지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이 서 있었다.“결혼하겠다고 했더니, 심씨 가문에서 오천만 원짜리 예물을 요구했지. 그 후 3년 동안 내가 심씨 가문 회사에 투자한 돈만 해도 그 이상이야. 네 외할머니 병원비도 내가 절반을 부담해 줬어. 그동안 너는 내 돈으로 편히 살면서, 남편 돌보는 게 그렇게 어려웠나? 아내라면 남편을 위해 요리하고 빨래하고, 일상 챙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그는 냉소적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결혼하고 3년 동안 너 잘 지내왔잖아. 그런데 박유진이 돌아오니까 이혼하겠다고? 그래, 그 사람하고 살고 싶어서 그런 거야? 하지만 난 절대 안 놔줄 거야.”강지한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심미연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우리 일과 박유진은 아무 상관 없어! 내가 이혼하고 싶은 건 그 때문이 아니야. 난 이제 너를 더는 사랑하지 않아! 강지한,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를 놔줘!”그녀는 참아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눈물을 쏟았다.강지한은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도 오히려 비웃음을 흘렸다.“너랑 박유진은 어릴 적부터 죽고 못 살던 사이였지. 그런데 그가 경성을 떠나자마자 날 이용해서 결혼하더니, 이제 박유진이 돌아오니까 나랑 끝내겠다고? 참 뻔뻔하다.”그의 목소리는 더 냉랭해졌다.“너와 네 가족이 강씨 가문에서 누린 게 3년이야. 이혼하면 네 일자리도 없어질 거고, 심씨 가문 회사도 위태로워질 거야. 그래도 이혼할 거야?”그의 눈에는 심미연
‘강지한이 이렇게 거칠게 나오다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심미연의 머릿속에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강지한은 그녀의 태도가 마치 순결한 척하는 열녀처럼 보이자,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심미연,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난 네 남편이야. 내가 널 건드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난 네가 더럽게 느껴져...”그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마음속에는 거대한 파도가 일고 있었다.온지유와 아이까지 가진 그가 이제 와서 자신에게 이러는 것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내려다봤다.“내가 더럽다고? 그 말을 들으니까 더 하고 싶어지는데?”그는 그녀의 귓가로 얼굴을 가까이 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심미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말을 이어갔다.“온지유가 임신 중이라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거라면, 내가 다른 사람을 찾아줄게. 온지유와 닮은 여자로...”그녀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머릿속에 불쾌한 상상이 떠올랐다.강지한과 자신이 함께했던 뜨거운 스킨십을, 온지유와 그가 똑같이 했을 것이라는 상상으로 이어졌다.그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강지한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심미연, 네가 이렇게 관대하니 더 예뻐해 줘야겠는걸...”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바라봤다.심미연은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난 단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득이 될 제안을 하는 것뿐이야.”그녀는 그의 눈을 피했지만, 그 속에는 더 이상 강지한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강지한은 그녀의 태도에 기가 막힌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강지한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으로 그녀를 자극했다. 리듬감 있게, 반복적으로...심미연의 몸은 그의 자극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흥분 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신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애썼다.강지한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새로 온 대표이사님이 누군지는 아무도 모른대요. 뭔가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있나 봐요. 하지만 뭐, 굳이 조급해할 필요 없잖아요? 내일이면 직접 볼 수 있을 테니까요!”“사람들 말로는 새 대표이사님께서 이 로펌을 약혼녀에게 선물하려고 인수했다던데요! 여자 친구의 말 한마디 때문에 로펌을 선물하다니, 그분의 약혼녀는 정말 행복하겠어요!”“변호사님도 이렇게 예쁘시니까 나중에 부자 남편 충분히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심미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임현의 말이 맞았다. 그녀도 분명 부자인 남편을 찾았었다. 하지만 그 남편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아, 맞다! 변호사님, 오늘 저녁 홍원각에서 저녁 식사가 잡혔어요. 시간은 6시로 정해졌대요. 수다 떨다가 중요한 걸 까먹을 뻔했네요!”임현의 밝고 긍정적인 태도가 새삼 부러웠다. 로펌에 들어온 지 2년 동안, 그녀는 매일 활기차고 낙천적인 모습을 잃지 않았다.그에 비해 심미연은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음에도 이미 세상의 쓴맛을 너무 많이 봤다. 마음마저 늙어버린 기분이었다.“변호사님, 기분 안 좋아요?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임현은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다.“사람들이 다들 새 대표이사님이 오시면 우리 로펌의 복지와 급여도 올라갈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월급이 두 배로 오르면 정말 최고겠죠!”임현은 마치 꿈꾸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심미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만약 새 대표이사님이 와서 오히려 인원을 줄이고 급여를 줄이면 어쩌려고요...”요즘처럼 경제 상황이 안 좋을 때, 인력 축소와 급여 삭감은 흔한 일이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클 수 있었다.“약혼녀한테 로펌을 선물할 정도면 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겠어요? 설마 급여를 줄이겠어요?”임현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심미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그냥 해본 말이에요. 임현 씨의 말처럼 새 대표이사님이 와서 처음부터 월급 인상을 하는 걸지도 모르죠.”새로운 대표이사님이 오면 가장 먼저 세 가지 일을
“할아버지는 눈치 볼 필요 없으시겠지만, 미연이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할아버지,어머니가 초강수를 두시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강지한은 단지 객관적으로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서류를 나에게 돌려줘! 난 먼저 돌아갈 거야!”강지한의 걱정들은 강준형도 이미 여러 번 생각해 본 것들이었다.“내 말대로 해. 지분을 미연이에게 넘겨라. 그렇게만 하면, 며칠 후 내가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을 작성해 모든 주식을 네게 넘길 테니!”강지한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필요 없습니다. 유언장도 쓰지 마세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는 게 더 중요해요.”강준형은 쓴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내 나이가 여든이다, 지한아. 오래 살았지. 지금 내 소원은 단 하나야. 증손자를 한 번 안아보는 것.”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덧붙였다.“증손녀라도 상관없어. 그런데 너희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 아이가 없는 거냐? 설마 네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임신 이야기가 나오자, 강준형의 얼굴에는 짜증이 서렸다.카톡방에서 친구들이 손주와 증손주 사진을 올리며 자랑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지한이는 건강해 보이는데 왜 아이가 안 생기는 거야?’강지한은 침착하게 대답했다.“미연이가 아직 어리고, 일도 바쁘잖아요. 아이를 가질 여유가 없죠.”그는 심미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와 아이를 가질 이유도 없었다.더군다나 강씨 가문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화목한 가족이 아니었다.사람들의 속마음은 음침했고, 계산적이었으며, 각자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심미연이 아이를 낳는다면 강씨 가문 내의 적대적인 인물들이 아이를 해치려 들 게 뻔했다.강지한은 자신의 아이가 그런 위험을 겪는 건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그는 과거 도망 다니던 자신의 삶을 떠올렸다.‘그 길은 너무 고통스러웠어. 내 아이가 그런 삶을 살게 할 순 없어.’강준형은 한숨을 쉬며 참다못해 말했다.“너는 이노하이브의 총괄 대표인데, 그렇게 돈이 많으면서도 아
“사모님께 미리 알려드릴까요?”성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미리 알려준다면, 드레스는 심미연이 직접 고르도록 하면 될 터였다. 게다가 그녀가 직접 고르는 편이 마음에 들 확률이 높았다.강지한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때 가서 내가 직접 말할 거야.”그는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 상황을 직접 지켜보며 구경하는 재미를 놓칠 수는 없었다.‘미리 말해버리면 어떻게 그런 장면을 볼 수 있겠어...’성 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연구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누군가가 큰돈을 주고 새로 개발된 신약을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구매자를 조사해 보니... 사모님이더군요.”강지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외할머님의 병은 매달 지원받는 특수 지원금으로 충분히 치료받고 있지 않나? 필요한 약은 병원에서 바로 처방받으면 될 텐데, 왜 심미연이 직접 약을 사려고 하지?”성 비서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그 신약이 생산량이 적고 효과가 좋아서 늘 품절 상태라고 합니다. 아마 병원에서도 재고를 구하지 못해 사모님께서 직접 방법을 찾으신 것 같습니다.”성 비서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사모님이 자기 돈까지 써가며 약을 구하려고 했다니... 대표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걸 보면 이미 대표님께 크게 실망하신 모양이네...’강지한의 얼굴에는 어두운 기운이 스쳤다.“연구소에 미리 입김 넣어. 심미연에게 약을 사고 싶으면 직접 나를 찾아오라고 말이야.”그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심미연의 외할머니가 살아 있는 한, 심미연은 내 곁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어. 이건 내 손안에 확실히 묶어둘 수 있는 카드야.’다만, 강지한은 심미연에게 느끼는 이 소유욕이 단지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더 깊은 무언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성 비서는 대표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이 일을 보고하지 말았어야 했어. 대표님은 이 기회를 이용해 사모님을 더 옭아매려고 하실 거야.’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강지한은 손에 들
‘하지만 심서연과 심씨 가문이 얽혀 있다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네. 만약 박유진이 아니라면, 새 대표이사님은 도대체 누구지?’그때 누군가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심 변호사님, 얼굴이 왜 그렇게 안 좋아요? 혹시 새 대표이사님 오고 나면 지금 누리던 혜택을 못 누릴까 봐 속상하신 거예요?”심미연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백현지였다.백현지는 심미연과 같은 날 로펌에 입사했지만, 단독으로 법정에 선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주로 맡았던 건 민사 사건 조정 업무뿐이었다.반면 심미연은 뛰어난 성과를 내며 ‘금메달 변호사’라는 별칭까지 얻은 인물이었다.백현지가 심미연을 질투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백현지의 비아냥거림은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심미연이 만약 그 태도에 대해 따져 물으면, 사람들은 오히려 심미연을 비난할 게 뻔했다.평소 그녀를 질투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도덕적 우월감을 내세우며 그녀를 지적할 터였다.그래서 심미연은 백현지를 상대하지 않았다.대부분은 피하거나, 침묵으로 대응했다.그녀가 겁먹어서가 아니었다.‘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받는 건 시간 낭비야. 그리고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도 않아.’하지만 오늘 백현지는 선을 넘었다.“그러니까 몸으로 얻은 혜택은 오래가지 못하는 거야.”백현지는 비아냥거리며 한 발 더 나아갔다.“근데 뭐, 괜찮아. 내일 새 대표이사님 오시면 목표를 바꿔서 새 대표이사님 침대에 올라타면 되잖아? 어차피 남자 한 명이랑 자봤는데, 열 명이랑 자는 건 또 뭐가 다르겠어?”백현지의 말에 주변 사람들 몇이 소리내어 웃었다.심미연은 예쁘고 뛰어난 업무 능력을 가졌지만, 이런 이유로 로펌에서 질투를 받았고,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않았다.이 상황에서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백현지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로펌에 들어왔을 때 심미연만 없었더라면, 내가 지금 이 꼴은 아니었을 텐데. 다 그녀 때문이야! 몇 마디
백현지는 심미연의 말에 얼굴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참지 못한 그녀는 심미연에게 달려들어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려 했다.“닥쳐! 헛소리하지 마!”그녀가 소리쳤다.심미연은 몸을 살짝 틀어 공격을 피하고, 바로 손을 뻗어 백현지를 밖으로 밀쳐냈다.“제가 헛소리를 하는지 아닌지는 CCTV를 보면 알 수 있겠죠?”심미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오늘 이 자리에서 백현지를 제대로 제압하지 않으면, 앞으로 로펌의 모든 사람이 나를 깔보고 짓밟으려 들겠지. 그건 절대 안 돼.’그때 누군가가 맞장구를 쳤다.“백 변호사님이 헛소리라고 하셨으니, CCTV 확인하러 가야죠! 확인하면 진실이 나오겠죠?”순식간에 분위기가 고조되며 사람들이 하나둘씩 소리를 높였다.“그래요! 다 같이 가서 확인해 봐요!”“백 변호사님, 가시죠.”주변의 부추김에 백현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CCTV를 확인하면 모든 게 드러날 거야... 현지원도 곤란해질 게 뻔해. 그럴 순 없어!’심미연은 백현지의 변하는 표정을 보고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백 변호사님, 안 가시나요?”그녀는 백현지가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백현지는 입술을 깨물며 버티다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심 변호사님, 당신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예요!”그러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기세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백현지가 사라지자, 심미연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주변을 둘러봤다.예쁜 눈빛으로 사람들을 가볍게 훑은 뒤 부드럽게 말했다.“여기 계신 분들, 각자 자리로 돌아가셔야죠? 아니면 다른 가십거리가 궁금한 건가요? 어쩌면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오히려 사람들을 더 움츠러들게 했다.잠시 후, 사람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남긴 채 하나둘 흩어졌다.심미연은 차분하게 탕비실로 들어갔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복잡했다.‘새로 오는 대표이사님은 어떤 사람일까? 성격이 까다로우면 일하기 정말 힘들 텐데...’그녀
지금까지 현지원은 백현지에게 언성을 높여 본 적조차 없었다.현지원은 짜증이 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답답한 듯 말했다.“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만약 새로 온 대표이사님이 우리 중 한 명을 해고하려 한다면, 네가 날 유혹한 거라고 주장해. 그날 사무실에서 있었던 게 처음이었다고 말하고.”백현지는 현지원의 말에 충격을 받아 눈물조차 멈췄다.“뭐라고?”‘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내가 알고 있던 책임감 있고 의지가 되던 그 사람이 맞아? 아닐 거야.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현지원은 냉정하게 이어 말했다.“넌 어차피 수습일 뿐이잖아. 아직 정식으로 법정에 서 본 적도 없고, 로펌을 떠난다고 해도 네 미래엔 아무 영향도 없을 거야. 하지만 내가 품행 문제로 해고당하면, 이후에 변호사로서 설 자리를 잃는다고. 네가 직장을 잃으면 내가 널 먹여 살릴 수 있지만, 내가 직장을 잃으면 네가 나를 먹여 살릴 수 있어?”현지원의 간절한 눈빛은 그녀를 설득하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는 백현지가 늘 자기가 하는 말을 믿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백현지의 눈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그동안 나한테 수습 변호사로도 잘하고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와서 나를 희생시키고 네가 살겠다고?”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에는 분노와 실망이 가득했다.“내가 상사 유혹했다는 더러운 꼬리표를 달고 법무법인 리우를 떠나면, 내 변호사 경력은 끝이야!”‘변호사를 못 하면, 그다음엔 내가 뭘 할 수 있지?’현지원은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끊었다.“내가 심미연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왜 말을 안 듣고 괜히 나서서 이런 꼴을 당하냐고! 넌 항상 생각 없이 행동해서 문제를 만들어.”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왜 이렇게 멍청한 여자를 처음에 끌어들여서 내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거지?’백현지는 충격과 분노로 얼굴이 굳은 채 물었다.“지금 그게 할 말이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그날 네가 굳이 로펌에서 같이 야근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