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한, 내 아들을 유치원에서 데려간 건 무슨 뜻이야?] 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강지한의 이런 행동은 단번에 그녀의 화를 폭발시키기 충분했다. [내 아들이기도 해. 내가 그 아이를 데려가는 게 왜 안 되는 거지?] 강지한은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여유롭고 담담하게 되물었다.유치원에서 병원으로 가는 길 그는 이미 확신을 했다. 이 아이가 바로 그의 아들이라는 걸. 너무 똑똑하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그와 너무 닮았다. 강지한을 결정을 내렸다. 우선 아들을 자신 곁에 데려다 키운다면 심미연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내가 말했잖아. 태하는 네 아들이 아니라고.]심미연은 마음이 점점 더 가라앉았다. 강지한의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친자 검사를 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만약 강지한이 지금 애를 데리고 친자 검사를 한다면...’그 생각에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태하가 나한테 한마디라도 할 수 있게 해줘. 그래야 내가 마음이 놓일 거야.]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심미연이 강지한이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을 때 아들의 부드럽고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어디 있어요? 빨리 나 데리러 와요. 금방 병원에 도착했어요.] 병원이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심미연의 온몸은 얼어붙은 듯 굳어졌고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정말 아무리 대비하고 대비해도 강지한이 아들을 빼앗아간 이 한 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엄마, 빨리 데리러 와요. 무서워요.]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절대 따라가지 마. 꼭 기억해.] 그녀는 아들의 머리가 충분히 똑똑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 말라는 걸 하면 그는 반드시 그것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 [엄마, 알겠어요. 빨리 데리러 오세요.] 심태하는 말을 마친 후 바로 전화를 끊었다. 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서둘러
강지한과 심태하는 혈연 관계가 있긴 했지만 사실상 그들의 첫 번째 공식적인 만남이었다. 강지한은 여전히 심태하에게 낯선 존재였고 심태하는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동생 만나러 데려가줄게. 이제 우리랑 같이 살자. 우리 집은 네 집이기도 해.” 강지한은 그를 안아 올리며 그가 반응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심태하, 아빠랑 엄마 그리고 동생이랑 같이 사는 거 싫어?” 심태하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제가 만약 싫다고 말하면 저를 집에 돌려보내줄 거예요?” 강지한은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안 돼.” “그럼 당신은 독재자잖아요.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데 왜 물어보는 거예요?” 심태하의 작은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 강지한은 눈을 좁히며 그를 쳐다봤다. ‘이 녀석, 반응도 빠르고 말도 잘하네.’ ‘정말 신기하게도 심미연과 똑같아.’심태하는 강지한의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첫 만남인데 혹시라도 그가 자신에게 손을 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강하게 반박하면 결국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겁이 났다. 심태하는 무서운 마음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강지한은 심태하를 안고 계단을 올라 강상미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강상미는 작은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강지한이 병실에 들어갔지만 강상미는 전혀 깨지 않았다. 심태하는 병상 옆으로 다가가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녀를 보았고 그제야 그날 만났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굴에 있던 불쾌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가 동생을 아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묻어 있었다. 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너희가 아는 사이였어?” 심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아요.”“그럼 이제 너와 상미는 남매가 된 거야. 상미랑 같이 살면 재미있지 않겠어?”
“동생아, 일어났어?” 강상미의 목소리를 들은 심태하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강지한을 밀어내며 말했다. “빨리 내려줘요.” 심태하는 강지한이 과거에 심미연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강지한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더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강지한은 허리를 굽혀 심태하를 병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둘이 잠깐 놀아.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그 말을 끝내고 그는 돌아서서 방 밖으로 나갔다. 강지한은 일부러 두 아이를 남겨두고 혼자 나갔다. 그가 생각하기에 두 아이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될 것이고 그때부터는 서로 끊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질 거라고 믿었다. 강지한은 두 아이가 친남매처럼 서로 의지하며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관계라면 두 아이가 싸우거나 갈등을 일으킬 걱정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밖으로 나온 강지한은 곧바로 의사 사무실로 향했다.병실 안에서 두 아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거야? 왜 병원에 있어?” 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궁금한 마음을 그대로 물었다. ‘전에 두 번 만났을 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왜 갑자기 병원에 있는 거지?’“난 아주 심한 병에 걸렸어. 엄마가 말했어. 아마 죽을 수도 있다고...” 강상미는 심태하의 손을 꽉 잡고 슬픔이 묻어나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심태하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자세를 고쳐 세우며 말했다. “너 아프면 우리 엄마가 치료해줄 거야. 내가 엄마한테 말해서 널 꼭 치료하게 할 거야.” 그의 목소리엔 자랑이 묻어 있었다. “앞으로 우리 엄마의 사랑을 반으로 나눠줄게. 괜찮지?” 강상미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좋아.”“혹시 핸드폰 있어?” 심태하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있어. 왜?” 강상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엄마한테 전화하려고. 잠깐만 빌려줘.”
그녀는 강지한과 원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미 그들은 적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아직 서로 날을 세우며 정면으로 맞서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그냥 다음에 고소해요. 오늘은 빨리 와서 저 집에 데려가요. 저 정말 그 사람이랑 조금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 너무 싫어요.] 심태하는 강지한이 항상 굳은 얼굴을 하고 있고 말투도 딱딱해서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싫었다. ‘엄마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어.’ [태하야, 버릇없이 굴지 마.] 심미연의 목소리가 단호해지며 눈에 띄게 불쾌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엄마, 난 정말 그 사람이 싫어요.] 심태하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가 강지한을 싫어하는 건 어쩌면 그동안 조사한 자료 때문일지도 몰랐다. 강지한과 직접 만나기 전부터 이미 선입견이 있었고 여기에 강지한의 차가운 태도가 더해지자 더욱 싫어지게 된 것이다. 아이들의 세계는 단순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다.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싫어도 겉으로 티를 내면 안 돼. 더군다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건 더더욱 안 돼. 알겠지?] 심미연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알았어요. 엄마, 그럼 빨리 와요. 운전은 천천히 하시고요. 안전이 제일 중요해요.] 심태하는 마치 어른인 양 당부했다. 심미연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전화를 끊은 심태하는 핸드폰을 강상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우리 엄마 곧 올 거야. 핸드폰 돌려줄게. 고마워.” 강상미는 핸드폰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심태하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오빠는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 그녀도 오빠의 엄마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심미연은 낮게 스포츠카를 몰고 마치 사냥감을 쫓는 날렵한 맹수처럼 밤의 어둠을 뚫고 질주해왔다. 타이어가 도로와 마찰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자 그 소리가 적막했던 밤의 공기를 단숨에 갈라놓았다.
“심미연, 나를 화나게 하는 결과가 어떤지 너도 잘 알 텐데.” 강지한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심태하가 그의 곁에 있다면 심미연은 결국 그를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 관계가 깊어지면 그녀는 그에게 서서히 끌리게 될 것이고 결국 그에게 다시 완전히 빠져들 거라고 확신했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며 냉소를 흘렸다. “결과가 어떻든. 내 아들은 내가 데려가.” “강지한, 내가 태하를 데려가는 걸 계속 막으면 지금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 말과 함께 심미연은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꺼내 112를 눌렀다.떠난 이 3년 동안 심미연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과거처럼 강지한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그녀는 그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강지한은 그녀의 핸드폰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신고하지 마. 내 딸이 놀라면 어떻게 할 거야?” 그 말에 심미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그 입가엔 냉소 어린 웃음이 번졌다. “자기 딸이 놀랄까 봐 걱정한다고? 그럼 네가 갑자기 내 아들을 데려가려고 할 때 그 애가 무서워하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심미연은 핸드폰을 다시 넣었다.결국 강지한은 여전히 이기적이었다. 강지한에게는 강상미가 딸이고 심태하는 심미연의 아들로 두 사람을 확실히 구분 짓고 있었다. 그가 심태하를 강제로 데려간다면 그 아이는 절대로 제대로 자라지 못할 것이다. 강지한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 “그 애가 겁을 먹을까? 나한테 반항할 때 그 입이 얼마나 빠른지 알아?” ‘그 녀석, 겁도 없이 큰소리만 치는데 어떻게 겁을 먹겠어.’ 심미연은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씩 웃었다. ‘태하 그 입, 변호사로 딱이겠어.’바로 그때 방 문이 갑자기 열렸다. “엄마, 드디어 왔어요.” 심태하가 병실에서 뛰쳐나와 빠르게 심미연의 품에 안겼다. “엄마, 너무 보
“엄마, 만약 동생을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들어서 그런거면 제가 그 돈 다 낼 수 있어요. 저 돈 진짜 많거든요.” 심태하는 손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과장스럽게 말했다. 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말해.” 만약 강지한이 자신이 사백억을 날린 게 세 살짜리 꼬맹이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아마 피가 거꾸로 솟아 기절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심태하에게 그 돈을 다시 토해내라고 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강지한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니까. “아! 깜빡했어요.” 심태하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그는 정말로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 나쁜 아빠는 이 말을 듣지 못했다.강지한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작은 목소리로 오갔기에 정확히 들리진 없었지만 어쩐지 자기 흉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심태하는 심미연의 손을 끌고 병상 앞으로 다가갔다. 강상미는 커다란 눈망울로 점점 가까워지는 심미연을 바라봤다. ‘응?’ ‘이 아줌아... 왠지 낯이 익은 것 같아...’“상미야, 이리 와. 우리 엄마 소개해줄게.” 심태하가 강상미의 손을 잡아 심미연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우리 엄마 진짜 대단한 변호사야. 의술도 할 줄 알아. 엄청 멋지지?” “상미야, 어서 엄마라고 불러봐.” 심미연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이 꼬맹이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엄마...” 강상미는 조심스럽게 불렀다.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순진하게 반짝이는 눈망울. ‘엄마의 눈이 그 예쁜 언니랑 너무 닮았어.’ ‘하지만 이 아줌마는 그 언니가 아니야.’ 그 생각이 떠오르자 강상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나도 예쁜 언니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는데...’ 조금 서운했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눈앞의 엄마가 더 좋을 것 같았다. ‘오빠 엄마니까... 분명 나도 많이 사랑해
심미연은 깊게 한숨을 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후 강지한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했다. “분명히 말했어. 태하는 네 아들이 아니라고.” 심태하는 그녀의 아들이었다. 강지한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친자 확인하러 가면 되겠네.”강지한은 속에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심미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거의 불이 나올 정도였다. ‘이 여자는 아이가 생부인 나를 아빠로 인정하지 않게 하면서 외부인 박유진을 아빠로 인정하라고 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네.’“너는 자격 없어.” 심미연은 허리를 굽혀 심태하를 안아 올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 사람 말 듣지 마. 넌 엄마의 아들이지. 그 사람 아들이 아니야.” 심태하는 엄마의 목을 꽉 안고 부드럽게 말했다. “엄마, 저 알아요.” 심태하는 자신이 엄마의 아들이자 강지한의 아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눈앞의 그 나쁜 아빠가 예전에 바람을 피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비록 ‘바람’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몰랐다. 심미연은 품에 안은 아들을 더 꼭 안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지한은 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서도 아이가 상처받을까 걱정하지 않았다.“엄마, 우리 빨리 가요. 그 사람하고 멀리 떨어져서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심태하는 엄마의 목에 얼굴을 부드럽게 비비며 마치 부드러운 강아지처럼 말했다. “엄마 말 잘 들을 게요. 이제 슬퍼하지 마세요. 네?” 그는 지금 눈앞의 그 남자가 너무 싫었다. 그는 절대 그 남자가 자신의 아빠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 이제 가자.” 심미연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애써 참으며 심태하를 꼭 안고 돌아섰다. “엄마, 저도 엄마랑 같이 갈래요.” 그녀의 다리가 갑자기 붙잡혔고 뒤에서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미연은 즉시 발걸음을 멈추고 병상에 누워 있는 어린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어린 아이가 눈물을
심미연은 눈썹을 찡그린 채 강지한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 그녀는 강지한이 아들을 숨기려고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지금은 강지한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정말 두 아이 앞에서 얘기할 생각이야?” 강지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미소가 번졌다.심미연은 그를 한 대 쳐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강지한, 너 미쳤어?” ‘도대체 왜 이렇게 정신없는 말을 하는 거지?’ “그럼 나가자.” 강지한의 낮고 강한 목소리가 압박감을 내뿜었다. 심미연은 결국 돌아서서 심태하에게 말했다. “엄마 잠깐 나갔다 올게. 여기서 기다려. 절대 다른 곳 가지 마. 알았지?” 심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엄마 가보세요.” 그렇게 심미연은 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강지한은 딸의 얼굴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작은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딸의 몸 상태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했다. “상미는 오빠랑 같이 놀고 있어. 아빠 금방 돌아올게. 알았지?” 그는 강상미에게 유난히 다정하게 말했다. 이 어린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고 조용히 냈다. “아빠, 아줌마를 화나게 하면 안 돼요. 안 그러면 상미는 아빠를 안 볼 거예요.” 강상미는 부드럽게 말하며 방금 전 아줌마의 눈물로 붉어진 눈을 떠올렸다. 그 모습이 마음속 깊은 곳을 눌러왔고 답답하고 괴롭게 느껴졌다. “알겠어.” 강지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심미연 그 여자, 지금 완전히 벽을 쌓아버린 상태야. 내가 좀 더 강하게 나오지 않으면 그 여자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을 거야.’“엄마 화나게 하지 않으면 내가 엄마 설득해서 동생의 병 고치게 할게요.” 심태하는 강지한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비록 그는 엄마를 어떻게 설득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두었지만 그래도 그 나쁜 아빠랑 조건을 하나는 걸어야 했다. 강지한은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