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린은 심미연과 눈을 마주치고는 웃으며 심태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유치원 잘 다녀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이모가 태하 많이 보고 싶을 거야.”신하린의 다정한 목소리에 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정작 심태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서운함에 눈가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결국 발을 쾅 구르며 토라진 채 나가버렸다. “태하 많이 화난 거 아니야?” 신하린이 걱정스럽게 묻자 심미연은 피식 웃었다. “당연히 화났지. 너는 태하가 마지막 희망처럼 붙잡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네가 그렇게 단칼에 잘라버렸잖아. 그래도 걱정 마. 태하는 금방 풀려. 살살 달래주면 금방 넘어가.” “그럼 다행이다. 얼른 가서 달래줘.” 신하린은 한심을 내쉬며 안심했다. “아침 먹고 좀 쉬어. 이따가 도진혁 씨 불러서 오라고 할게.” 심미연은 손을 흔들며 병실을 나섰고 문이 조용히 닫히자 병실엔 다시 고요함만 남았다. 간호사 스테이션 앞. 심태하는 간호사들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 반에 진짜 뚱뚱한 친구가 있는데 다들 그 애를 뚱땡이라고 불러요.” “우리 반에는 진짜 예쁜 여자애도 있어요. 반에 있는 남자애들이 다 그 친구를 좋아해요. 어떤 남자애들은 몰래 초콜릿도 줘요.” “그 여자애가 저한테 초콜릿을 줬는데 우리 엄마가 어린이는 초콜릿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초콜릿을 선생님한테 줬어요. 그리고 선생님한테 너무 예쁘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저한테 착한 아이라고 칭찬해줬어요.” 심미연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이 꼬맹이가 유치원에 간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렇게 인기가 많아졌다고?’ “우리 엄마 왔어요. 예쁜 누나들, 안녕히 계세요. 우리 이모 잘 부탁드려요.” 심태하는 통통한 손을 들어 올리며 앙증맞게 손을 흔들었다. 심미연이 막 걸어가자 심태하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너무 예뻐요.” 심미연은 고개를 숙여 그를
심미연이 교장 선생님과 대화를 마친 후 대문을 나서자 마이바흐 한 대가 일부러 그녀의 차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가 차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내려가며 강지한의 냉담한 얼굴이 드러났다.“차 좀 옮겨.” 심미연은 차분히 예의 있게 말했다. “타. 내가 데려다줄게.” 강지한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단호하게 들렸다. 심미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차로 왔어. 혼자 갈 수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심미연은 어젯밤 일이 있고 나면 강지한이 한동안 잠잠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또 다시 나타나다니. ‘정말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네.’“언제 아들 데리고 나랑 같이 살 거야?” 강지한은 그녀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서 마주하며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걸 느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강지한, 너 제정신이야?” 심미연은 그와 대화하는 게 힘들었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도 전혀 듣지 않으니 점점 지치기만 했다. “제정신이지. 너랑 태하가 돌아와서 나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게 뭐가 이상해?” 강지한은 이게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말했잖아. 태하는 내 아들이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같이 사는 건 절대 안 돼.” 심미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강지한이 차를 옮길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걸 보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두 차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 운전석에 앉은 후 바로 엔진을 켰다. 그리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아 차 앞부분이 마이바흐 운전석 문을 향해 돌진했다. 차는 크게 흔들렸고 마이바흐의 차문은 한쪽이 심하게 움푹 들어갔다.강지한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여자는 운전석에 앉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에게
심미연은 그의 반응이 다소 과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도 스스로 너무 놀랐다는 걸 눈치챘는지 급히 감정을 누르고는 심미연에게 물었다. “신 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왜 입원하신 거죠?” 며칠째 신하린과 연락이 닿지 않길래 출장이라도 간 줄 았았는데 설마 병원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미연의 시선이 도진혁의 얼굴에 멈췄다.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심미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통사고가 났어요. 다리가 부러져서 당분간 병원에 있어야 해요.” 도진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다리가 부러졌다니...’‘엄청 아팠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겉으론 괜찮아 보였어요. 그래도... 속은 많이 힘들 거예요.” 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진혁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평소와는 달랐다. 순간적인 반응, 흔들리는 눈빛. 뭔가 이상했다. ‘혹시 하린이를 좋아하는 거야?’ “병원에 가서 직접 봐야겠어요.” 도진혁은 말을 끝내자마자 서류를 안고 황급히 돌아섰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문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미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노트북을 꺼내 도진혁의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클릭 끝에 검색 결과가 뜨자 손이 멈췄다. 도진혁, 진성 최고 재벌가의 아들.심미연은 놀라움에 숨이 턱 막혔다. 그가 서류를 정리하거나 일을 처리할 때 유난히 능숙했던 이유가 그제야 이해됐다. ‘그런데 이런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어떻게 하린이의 비서 자리에 만족할 수 있지?’심미연은 갑자기 예전 이야기가 떠올랐다. 은성이 막 설립된 초기에 신하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말 능력 있는 비서를 뽑았어. 뭐든지 잘하고 서류 처리도 완벽하게 해.’ 그때 신하린이 말한 대로 도진혁은 은성을 하나하나 키워가며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가 회사에
어쨌든 그녀는 심미연을 믿었다. 믿지 못한 건 자신이었다. “자, 이제 앉아서 다시 얘기해 봅시다.” 심미연은 커피잔을 들고 숟가락으로 천천히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임현은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심미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에 들어갔다. 한참이 지난 후 논의를 마친 두 사람은 임현이 자료를 정리한 뒤 사무실을 나섰다. 심미연이 경성을 떠난 지 거의 4년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법정에서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면 모두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임현은 심미연의 두터운 인맥을 보며 자신이 처음 법정에 섰을 때의 긴장된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손끝까지 떨릴 정도로 너무 긴장했었다.심미연은 임현을 자리에 앉혔다. 곧 재판이 시작되었다. 법정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양측 변호사들이 날카로운 언어로 치열하게 맞섰다. 두 차례의 격렬한 변론 끝에 결국 판결이 내려졌다. 두 명의 피고는 고의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행위로 고의 살인죄가 성립된다고 판시되었다. 임현은 그 판결을 듣고 나서 긴장 속에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심미연은 자료를 정리한 후 일어나 가방을 챙기며 밖으로 향했다. “변호사님, 잠깐만요.” 임현이 급히 뒤따랐다. 두 사람이 법정을 나서자 갑자기 한 남자가 옆에서 달려들며 돌진해왔다. “네가 내 아들을 평생 감옥에 처넣었어. 이 악랄한 년, 죽여버릴 거야.”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임현을 밀쳐내며 몸을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남자가 쥐고 있던 칼이 그녀의 팔을 스치며 옷을 찢고 그 아래 피부를 깊게 긁으며 길고 선명한 상처를 남겼다. 순식간에 피가 쏟아져 팔을 적셨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발을 들어 남자를 향해 힘껏 차며 그를 밀어냈다. 남자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손에서 칼이 떨어지며 큰 소리로 굴러갔다. “변호사님, 다치셨어요.” 임현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스러
임현은 심미연의 팔에 난 상처가 있는 옷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다치셨어요. 오늘 밤은 그냥 안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만약 몸에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가서 처리만 해주세요.” 심미연은 의사이기에 이런 작은 상처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럼 바로 가서 처리할게요.” 임현은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었지만 심미연이 그렇게 말하자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임현이 나간 후 심미연은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몸이 무겁고 지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는 딸을 보았다. ‘태영아.’그녀는 애타게 딸을 부르며 달려갔다. 심미연은 필사적으로 딸을 쫓았지만 아이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결국 그 순간에 눈이 번쩍 뜨이며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뜬 심미연은 익숙한 환경이 눈에 들어왔고 그와 함께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킨 뒤 일어나서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몸 속에서부터 편안함이 밀려왔다.사건 자료를 잠시 살펴보다가 박유진의 전화가 걸려왔다. [미연아, 가정부가 지금 오고 있어. 시간 되면 집에 잠깐 들러줘. 난 5분 후에 긴급 회의가 있어서 갈 수 없어.]박유진의 목소리에는 미안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최근 이노하이브가 바렐 그룹과의 모든 협력을 취소하면서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급격히 늘어났다. [오빠 먼저 일 봐. 나 마침 집에 가려고 했어. 가는 길에 태하도 데려올게.] 심미연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 네 시가 다 되어 가니 잠깐 정리하고 유치원에 가서 아이를 데려오면 될 것 같았다. [미연아, 미안해. 오늘 저녁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아마 그건 어려울 것 같아. 어머니께 음식 준비해달라고 할게.] 심미연은 그의
심미연은 두 사람과 계약서를 작성한 뒤 각각 지문을 받았다. 임현이 떠난 후 도진혁은 사람들과 함께 준비한 물건들을 들고 도착했다. 세면도구, 침구류, 두 사람의 일상 용품, 속옷부터 외출복, 신발까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몇 개의 큰 상자에 가득 담긴 물건들이 그들 앞에 놓였다. 두 사람은 그 많은 물건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심 미연 씨,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두 분, 방은 정하셨나요? 이제 방을 정리해 주세요. 저는 여섯 시에 외출해야 합니다.” 심미연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고마움을 표하며 방으로 향했다.물건을 배달한 사람이 떠나자 도진혁은 문 앞에 서서 심미연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심미연은 심태하를 내려다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태하야, 이제 매트에서 놀아도 될까?” 심태하는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고 매트로 뛰어갔다. 심미연은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본 후 도진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요?” 그녀는 아마 신하린에 관한 질문일 거라고 짐작했다.“신 대표님의 다리... 언제 의족을 장착할 수 있을까요?” 도진혁이 말을 꺼낼 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신하린이 병상에 누워 무기력하게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서 억누를 수 없는 아픔이 밀려왔다. “최소 6개월 후예요. 그때까지 하린이의 몸 상태가 충분히 회복되어야 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어요.” 심미연은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그의 괴로움, 그의 고통... 그의 모든 감정을 심미연은 하나하나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그럼 신 대표님은 언제 퇴원할 수 있나요?” 도진혁이 다시 물었다. “대략 보름 정도요.” 하지만 그건 신하린의 상처 회복 상황에 달려 있었다. “저한테 후배가 있는데 예전에 다국적 기업에서 회장님 비서로 일했었습니다. 그를 우리 회사로 초빙하려고 하는데 심 대표님께서 괜찮다고
잠시 후 신하린은 정신을 차리며 급히 소리쳤다. “도진혁,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놔! 안 놔?” 하지만 도진혁은 놓을 생각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하린아, 나 너 좋아해.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네가 날 밀어내도 난 끝까지 널 지킬 거야. 평생 곁에서 돌볼 거야.”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신하린은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완전히 얼어붙었다.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며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야?”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리고 더듬거렸다. 그녀는 이제 한쪽 다리조차 잃은 몸이었다. 사람이라기엔 비참하고 귀신이라기엔 너무 처연해 누구든 피하기만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와서 좋아한다고 평생 곁에 있겠다고 말하다니.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헛소리 아니야. 난 널 좋아한 지 오래됐어. 처음 널 봤을 때부터... 그때부터 이미 널 좋아했어.”도진혁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린아, 나한테 널 돌볼 기회를 줘. 네 옆에 있게 해줘. 응?” 그와 신하린의 첫 만남은 학교에서였다. 그날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반했다. 그래서 그녀가 은성을 창립할 때 평범한 비서 자리가 자신의 능력에 비해 너무나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능력과 인맥으로는 절대로 이제 막 시작한 작은 회사의 대표 비서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함께한 3년 넘는 시간 동안 도진혁은 아무도 모르게 신하린을 도와왔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모습까지 묵묵히 지켜봤다. 그저 그렇게 평생 곁에서 바라만 보다가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가 모든 걸 바꿔버렸다. 신하린이 다리를 잃었다고 해서 그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어릴 때 그녀는 부모에게 일억 원에 팔렸었다. 그 상대는 끝없이 변태적인 늙은 남자였다. 그날 밤 그녀는 정신을 잃고 그 남자의 집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몇 주 동안 그는 그녀에게 끝없는 고통을 주었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망칠 기회를 찾아 간신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 가족도 심지어 값진 물건 하나조차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투신 자살을 결심하고 모든 것을 끝내기로 했다.이 세상에서 그녀가 미련을 둘 사람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심미연에게 구해졌다. 심미연은 그녀에게 먹고 자는 것부터 학교까지 모두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그림도 가르쳐 주었다. 그 후 그녀는 사람들에게 일러스트를 그려주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 돈을 조금씩 모아 졸업 후에는 자신만의 작업실을 열었다. 심미연은 그녀에게 단순한 친구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이 모든 걸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오직 심미연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었다.[하지만 난 이제 완전히 쓸모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에게 짐이 될 순 없어. 그리고 난 도진혁을 사랑하지 않아.] [도진혁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했지만 나는 그동안 겪은 일들로 마음이 이미 상처투성이야. 그런 내가 어떻게 다시 사랑을 믿을 수 있겠어.]심미연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신하린이 깨어난 이후로 너무 차분해져서 심미연은 그녀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지금 이 전화를 받고 나서 신미연은 갑자기 마음이 놓였다. 신하린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미연아, 나 이제 어떡해야 할까?] 신하린이 말을 마친 후 마지막으로 심미연에게 물었다. 심미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정말로 아무 감정도 없는 거야?] 어쩌면 신하린이 자신도 모르게 그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