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아, 그 사람 가까이 하지 마!]신하린이 무심결에 크게 외쳤다. 그 남자는 이진영의 친구였고 여자를 너무 쉽게 대하는 걸로 유명한 인간이었다. 그가 속한 무리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와 한 번씩은 잠자리를 가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심미연은 예쁜 외모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저 남자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알겠어. 걱정하지 마. 그럼 이만 끊을게.]심미연은 담담하게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죄송하지만 누구시죠?”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에는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심미연 역시 한때는 상류 사회 명문가의 영애였고 경성의 명문가 인물들도 적지 않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심미연 씨가 저를 모르셔도 상관없어요. 제가 당신을 알면 되니까.” 남자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일이 있어서요”심미연은 단정하게 인사한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 그 남자는 한눈에 봐도 좋은 사람일 리 없었다. 그녀는 굳이 그런 사람과 엮일 필요가 없었다. 남자는 반쯤 감은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천천히 훑었다. 입술에 주먹을 대고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미소를 삼키듯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 여자는 반드시 내 손에 넣고 말 거야.’ “뭘 그렇게 음흉한 얼굴로 보고 있어?” 남자는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방금 한 여자를 봤는데 예쁘고 성격도 화끈해. 완전 내 스타일이야.” “넌 만나는 여자마다 똑같은 소리 하잖아. 이제 좀 질리지도 않냐?” “아니. 이번엔 진짜 달라. 완전 다르다고.”남자는 아까 그녀와 나눈 짧은 대화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여자는 기가 셌고 흔히 볼 수 있는 애교 떠는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입고 있던 옷과 액세서리도 가만히 보
육현성이 심미연이 천성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일부러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애초에 로펌과 계약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네? 설마요.”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들도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예요.” 심미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밖에서 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 대표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재빨리 계약서를 가방에 넣었다. 심미연은 그들에게 담담한 눈빛을 보내며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심 변호사님, 이쪽은 육 대표님입니다.” 임현이 다가와 양측을 소개했다. 심미연은 눈을 들어 상대를 바라봤다. 입가에 얕은 미소가 떠올랐다. “육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육현성은 그녀를 보자 눈빛에 싸늘한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것을 감춘 채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웠다. “심 변호사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원래는 내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마주칠 줄은 몰랐다. 예상보다 조금 빨리 만나게 됐다. “앉으시죠.” 심미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내주었다. “제가 다른 로펌 변호사들도 불러놨습니다. 같이 하는 게 어떻습니까?” 육현성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심미연을 바라봤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말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심미연은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리며 옅게 웃었다. “좋죠.” 어차피 천성과 육영 그룹의 협력은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밥 한 끼 같이 먹는다고 손해 볼 건 없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두 명의 변호사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법무 대리인 주제에 진짜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줄 아나?’ ‘젠장!’ 육현성은 뒤를 돌아 문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 심미연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현지원과 주아연이 들어오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연스러운
현지원의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가볍게 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죠.” 예전에 심미연이 리우에 있을 때 그는 그 어떤 재판에서도 심미연을 이길 수 없었다. 심미연이 없다고 해도 온전히 그의 힘으로 온지유의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럼 다음 주 어머니가 아들을 살해한 그 사건으로 법정에서 봅시다.” 심미연은 살짝 웃으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현지원은 잠시 멈칫했다. 그 사건에 대한 준비는 완벽하게 해두었고 당연히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심미연이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아연은 자신감이 넘치는 심미연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크게 부러웠다. 자신도 만약 재벌 가문에서 자랐다면 아마 심미연처럼 당당하게 살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심 변호사님, 술과 음식은 다 준비됐어요, 곧 올겁니다.” 임현은 심미연의 옆에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 주아연은 임현을 보고 본능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임현! 너 어떻게 여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임현이 심미연에게 보인 태도가 너무나도 공손하다는 점이었다. 임현은 경성에서 누구나 알만한 실력 있는 변호사로 언제나 큰 사건만 맡았다. 그녀가 맡은 사건은 항상 승리로 끝났고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임현이 지금 심미연 앞에서 이렇게까지 공경하는 모습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미연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현지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임현은 이제 경성에서 누구나 아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심미연 앞에서 이렇게 겸손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임현 씨도 앉으세요.”심미연이 조용히 말했다. 임현은 심미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심미연의 옆자리에 앉았다.다음은 요청하신 한국 웹소설 스타일로 번역한 내용입니다:다른 두 변호사가 임현 옆에 자리를 잡았다. 곧 술과 음식이 나왔다.
육현성과 주아연이 술을 마신 후 심미연은 임현과 다른 두 변호사에게 눈빛을 보냈다. 린만은 단번에 그 뜻을 알아채고 두 변호사와 함께 육현성에게 술을 기울였다.주아연은 방금 현지원이 심미연에게서 차가운 반응을 받은 것을 보고 더 이상 자신이 나서서 분위기를 흐르지 않기로 했다. 순간적으로 분위기는 조금 어색해졌다.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그 어색한 정적을 깨뜨렸다. 심미연은 핸드폰을 꺼내 보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미연아, 어디서 밥 먹고 있어?] 박유진의 목소리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심미연은 위치를 간단히 알려줬다. [술 그만 마셔. 지금 바로 데리러 갈게.] 박유진의 말투에서 그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괜찮아. 집에서 태하랑 놀고 있어. 임현 씨가 데려다 줄 거야.] [나 걱정하지 말고 먼저 밥부터 먹어.]박유진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심미연은 전화를 받을 때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고 목소리도 유난히 부드럽게 들렸다. 주아연은 그 장면을 보며 마음속에서 질투가 치밀어 올랐다. 예쁘고 능력 있는 심미연을 당연히 수많은 남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좋아하는 남자 하나도 찾지 못했다. 육현성은 방금 전 심미연의 대화를 듣고는 궁금한 듯 물었다. “심 변호사님, 결혼하셨나요? 아들은 몇 살인가요?” ‘만약 지유가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도 벌써 아들이 있었을지도 몰라.’ ‘이 모든 게 다 심미연 때문이야.’‘지유는 안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심미연은 왜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거지?’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 “네. 결혼했고 아들도 이제 곧 세 살이에요.” 육현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혹시 그 아들이 강지한의 아들이 아닐까요?” 만약 강지한이 알게 되면 분명 아이을 데려가려고 할 것이다. ‘그럼 심미연은 아들 데리고 다시 강지한에게 돌아가게 되는 걸까?’ “심 변호사님 남편은 무슨 일을
“죄송합니다.”심미연은 급히 사과했다.“이 옷, 2억 원짜리예요. 송금해 주세요.” 남자의 목소리가 차갑게 들려왔다.임현과 다른 두 변호사가 쫓아와 마침 그 말을 들었다. 임현은 재빨리 다가가 심미연을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심 변호사님, 괜찮으세요? 어디가 아프세요?”심미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 “임현 씨, 먼저 송금해 주세요.”그녀는 고량주를 네 잔이나 마셨고 이제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임현은 티슈를 꺼내 그녀의 입술을 닦아주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바로 송금할게요.”그때 남자는 심미연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도화 같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우리가 진짜 인연인가 보네요. 옷값은 됐고 대신 저랑 식사 한 끼 하시죠.”심미연도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나서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2억 원 정도는 제가 쉽게 낼 수 있죠. 임현 씨, 이분에게 송금해 주세요.”‘이 남자, 오늘 건물 아래서 만난 사람 아닌가?’ ‘왜 또 만난 거지? 정말 운이 없네.’“계좌번호 알려주세요.” 임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바로 핸드폰을 꺼내 남자에게 송금할 준비를 했다. 남자는 손을 뻗어 심미연의 팔을 붙잡았다. “돈은 필요 없어요. 대신 이 옷을 집에 가져가서 깨끗하게 세탁해 주세요. 그 후에 다시 돌려주시면 됩니다.” 옷을 돌려줄 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고 그때는 연락처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심미연은 그의 손을 힘껏 뿌리치며 말했다. “저 돈 충분히 낼 수 있어요. 왜 당신 옷이나 세탁해줘야 하는 거죠?”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남자가 말하려는 의도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런 남자는 아예 신경 쓰기도 싫었다. “당신...” 남자가 말을 더 하려는 순간 심미연은 이미 뒤돌아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 앞에 서서 손으로 물을 틀어 얼굴에 물을 뿌렸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혹시 몸이 안 좋으세요? 병원에 데려다 드릴까요?” 남자는 이미 자켓을 벗어 손에 들고 있었다.“괜찮아요. 필요 없어요.” 심미연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맑고 투명한 눈동자 속에서 반박할 수 없는 확고한 빛을 내뿜으며 남자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남자는 미세하게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얼굴 색이 굉장히 안 좋아 보이네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심미연은 차갑게 대답하며 남자의 자켓을 잡고 살짝 당겼다. 자켓이 그대로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당신이 보상은 안 받겠다고 고집하니 옷은 제가 집에 가져가서 깨끗하게 세탁한 뒤 돌려드릴게요.” 심미연은 남자가 임현에게 계좌번호를 주지 않는 이유가 옷을 집에 가져가 세탁하게 한 뒤 그 기회를 빌려 연락처를 얻으려는 의도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차가운 거리감을 풍기지만 결코 무례하지 않다. 그 말에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자는 심미연의 도화 같은 눈동자에 잠시 감탄을 숨기지 못한 채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차가운 분위기는 마치 그녀를 울게 만들고 싶은 충동을 자극했다. 남자의 시선은 너무 뜨겁고 노골적이었다. 심미연은 불쾌감을 느끼며 눈썹을 찡그렸다.시선을 살짝 돌려 임현을 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이분의 전화번호를 남기세요. 나중에 연락하기 편하게요.”그 말은 마치 이번 상황을 끝내고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남긴 듯했다. “알겠어요.” 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심미연은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심미연이 떠나는 뒷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의 눈 속에 피어오르는 소유욕은 마치 어두운 물결처럼 끓어오르며 눈 밖으로 넘쳐흐를 듯했다. 그의 주먹은 저도 모르게 꽉 쥐어졌다가 다시 천천히 풀렸다. 마치 무언가를 참으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서 오직 심미연
공기 중에 억눌린 듯한 통증의 신음이 들렸다. 강지한은 그녀가 이렇게 강하게 반응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얼굴이 아픔으로 일그러졌지만 여전히 손목을 놓지 않았다. 그저 힘이 자연스레 풀리기 시작했다. 심미연은 그 틈을 타서 몸을 비틀며 강지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손목에 선명한 붉은 자국이 남았고 그녀의 하얀 피부와 더욱 대비를 이뤘다. 몇 걸음 물러서며 강지한과 안전한 거리를 두고 차가운 눈빛으로 한 마디 한 마디 정확하게 끊어 말했다. “강지한, 너 정신과 가서 치료받아. 여기서 미친 짓 하지 말고.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내 일에 너는 상관 없어.” 강지한은 거칠게 자켓를 잡아 거의 심미연의 손에서 자켓을 빼앗으려는 듯 폭력적으로 당겼다. 그 행동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이 섞여 있었다. 그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너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 경성에서 소문난 쓰레기야. 걔가 자고 간 여자는 한 줄로 세운다 해도 모자라.”심미연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팔에 외투를 걸친 채 차분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강지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강지한, 네가 뭔데? 내 수호신이라도 되? 아니면 내 도덕 심판자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네가 참견할 자격 없어.” 주위의 공기가 서서히 굳어버린 듯 두 사람 사이의 기운이 강하게 충돌하며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만들어갔다 주변 사람들의 소음은 점점 사라지고 그들 사이의 날카로운 긴장감만 남았다. 강지한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주먹을 꽉 쥔 채로 그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심미연, 너는 내 아들의 엄마야.” 심미연은 냉소를 흘리며 그 말에 맞서 대답했다. “내 아들은 당연히 내 남편의 아들이지. 너는 그냥 내 전남편일 뿐이야.”“왜? 이제 남의 자식 아빠 역할이라도 하고 싶어?”“심미연, 다시 내 아들에게 다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게 한다면 나도 더 이상 가만 있지 않을 거야.” 강지한의 손이 심미연을 꽉
강지한의 눈빛은 폭풍 전의 먹구름처럼 깊고 억제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날카롭고 단호했으며 심미연을 엘리베이터의 차가운 벽면으로 몰아넣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심미연의 등은 차가운 금속에 닿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갑작스런 한기 속에서 자신을 조금씩 침식해 가는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너...”그녀는 입을 열려 했으나 분노와 충격에 떨리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놓아줘.” 한 마디 한 마디가 억지로 밀어내듯 나왔다. 저항과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녀의 발버둥을 무시한 채 손으로 심미연의 얼굴을 단단히 감싸며 강제로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한때 부드럽기만 했던 그의 눈빛은 이제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노, 억울함, 그리고 미세하게 보이는 고통이 섞여 있었다. 강지한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숙여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맞댔다. 심미연은 이 갑작스러운 키스에 잠시 멍해졌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팔을 힘껏 휘둘러 강지한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그 한 대는 그녀의 모든 억울함과 치욕이 담겨 있었다. 강지한의 얼굴에 강하게 떨어져 또렷한 붉은 자국을 남겼다. “너 정말 비겁해.” 그녀는 거의 울부짖듯 그 말을 내뱉었다. 눈가가 붉어졌고 눈물은 넘칠 듯 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참았다. 강지한은 얼굴을 감싸며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노려봤다. “예전엔 밤마다 같이 자달라고 졸랐잖아. 맨날 먼저 와 입 맞추려고 했고. 근데 이제는 입도 못 맞춰? 네가 빠질 정도로 박유진이 나보다 더 잘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심미연은 그가 이렇게 저열한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분노에 몸이 떨렸다. “강지한, 너 진짜 구역질 나.” 그가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의 과거를 꺼내 그녀를 모욕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너무 역겨웠다.강지한은 몸에서 냉기가 흘러나오며 차갑게 말했다.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