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몸이 안 좋으세요? 병원에 데려다 드릴까요?” 남자는 이미 자켓을 벗어 손에 들고 있었다.“괜찮아요. 필요 없어요.” 심미연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맑고 투명한 눈동자 속에서 반박할 수 없는 확고한 빛을 내뿜으며 남자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남자는 미세하게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얼굴 색이 굉장히 안 좋아 보이네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심미연은 차갑게 대답하며 남자의 자켓을 잡고 살짝 당겼다. 자켓이 그대로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당신이 보상은 안 받겠다고 고집하니 옷은 제가 집에 가져가서 깨끗하게 세탁한 뒤 돌려드릴게요.” 심미연은 남자가 임현에게 계좌번호를 주지 않는 이유가 옷을 집에 가져가 세탁하게 한 뒤 그 기회를 빌려 연락처를 얻으려는 의도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차가운 거리감을 풍기지만 결코 무례하지 않다. 그 말에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자는 심미연의 도화 같은 눈동자에 잠시 감탄을 숨기지 못한 채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차가운 분위기는 마치 그녀를 울게 만들고 싶은 충동을 자극했다. 남자의 시선은 너무 뜨겁고 노골적이었다. 심미연은 불쾌감을 느끼며 눈썹을 찡그렸다.시선을 살짝 돌려 임현을 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이분의 전화번호를 남기세요. 나중에 연락하기 편하게요.”그 말은 마치 이번 상황을 끝내고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남긴 듯했다. “알겠어요.” 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심미연은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심미연이 떠나는 뒷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의 눈 속에 피어오르는 소유욕은 마치 어두운 물결처럼 끓어오르며 눈 밖으로 넘쳐흐를 듯했다. 그의 주먹은 저도 모르게 꽉 쥐어졌다가 다시 천천히 풀렸다. 마치 무언가를 참으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서 오직 심미연
공기 중에 억눌린 듯한 통증의 신음이 들렸다. 강지한은 그녀가 이렇게 강하게 반응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얼굴이 아픔으로 일그러졌지만 여전히 손목을 놓지 않았다. 그저 힘이 자연스레 풀리기 시작했다. 심미연은 그 틈을 타서 몸을 비틀며 강지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손목에 선명한 붉은 자국이 남았고 그녀의 하얀 피부와 더욱 대비를 이뤘다. 몇 걸음 물러서며 강지한과 안전한 거리를 두고 차가운 눈빛으로 한 마디 한 마디 정확하게 끊어 말했다. “강지한, 너 정신과 가서 치료받아. 여기서 미친 짓 하지 말고.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내 일에 너는 상관 없어.” 강지한은 거칠게 자켓를 잡아 거의 심미연의 손에서 자켓을 빼앗으려는 듯 폭력적으로 당겼다. 그 행동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이 섞여 있었다. 그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너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 경성에서 소문난 쓰레기야. 걔가 자고 간 여자는 한 줄로 세운다 해도 모자라.”심미연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팔에 외투를 걸친 채 차분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강지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강지한, 네가 뭔데? 내 수호신이라도 되? 아니면 내 도덕 심판자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네가 참견할 자격 없어.” 주위의 공기가 서서히 굳어버린 듯 두 사람 사이의 기운이 강하게 충돌하며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만들어갔다 주변 사람들의 소음은 점점 사라지고 그들 사이의 날카로운 긴장감만 남았다. 강지한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주먹을 꽉 쥔 채로 그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심미연, 너는 내 아들의 엄마야.” 심미연은 냉소를 흘리며 그 말에 맞서 대답했다. “내 아들은 당연히 내 남편의 아들이지. 너는 그냥 내 전남편일 뿐이야.”“왜? 이제 남의 자식 아빠 역할이라도 하고 싶어?”“심미연, 다시 내 아들에게 다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게 한다면 나도 더 이상 가만 있지 않을 거야.” 강지한의 손이 심미연을 꽉
강지한의 눈빛은 폭풍 전의 먹구름처럼 깊고 억제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날카롭고 단호했으며 심미연을 엘리베이터의 차가운 벽면으로 몰아넣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심미연의 등은 차가운 금속에 닿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갑작스런 한기 속에서 자신을 조금씩 침식해 가는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너...”그녀는 입을 열려 했으나 분노와 충격에 떨리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놓아줘.” 한 마디 한 마디가 억지로 밀어내듯 나왔다. 저항과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녀의 발버둥을 무시한 채 손으로 심미연의 얼굴을 단단히 감싸며 강제로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한때 부드럽기만 했던 그의 눈빛은 이제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노, 억울함, 그리고 미세하게 보이는 고통이 섞여 있었다. 강지한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숙여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맞댔다. 심미연은 이 갑작스러운 키스에 잠시 멍해졌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팔을 힘껏 휘둘러 강지한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그 한 대는 그녀의 모든 억울함과 치욕이 담겨 있었다. 강지한의 얼굴에 강하게 떨어져 또렷한 붉은 자국을 남겼다. “너 정말 비겁해.” 그녀는 거의 울부짖듯 그 말을 내뱉었다. 눈가가 붉어졌고 눈물은 넘칠 듯 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참았다. 강지한은 얼굴을 감싸며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노려봤다. “예전엔 밤마다 같이 자달라고 졸랐잖아. 맨날 먼저 와 입 맞추려고 했고. 근데 이제는 입도 못 맞춰? 네가 빠질 정도로 박유진이 나보다 더 잘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심미연은 그가 이렇게 저열한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분노에 몸이 떨렸다. “강지한, 너 진짜 구역질 나.” 그가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의 과거를 꺼내 그녀를 모욕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너무 역겨웠다.강지한은 몸에서 냉기가 흘러나오며 차갑게 말했다.
심미연은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누가 뭐라고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내린 결정이지. 하지만 오늘 분명히 말할게. 온지유가 거기서 나올 수 있다면 난 다시 온지유를 그곳에 집어넣을 수 있어. 난 충분히 그런 능력이 있거든.” 그녀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온지유가 사람을 죽이고 무죄로 풀려 난다고?’‘절대 그럴 일은 없어.’강지한은 눈을 반쯤 감고 위협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물었다. “심미연, 무슨 뜻이야?” 심미연은 한 걸음 물러나며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 딱 그 뜻이야.” “그게 말이 돼?”강지한은 분노에 차서 말했다. 온지유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는 면회를 가본 적이 없었고 온지유를 빼낼 일은 더더욱 없었다. ‘이 여자가 또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말이 안 되겠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녀는 그에게 평생 온지유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온지유가 감옥에서 겪는 모든 고통은 그에게 반드시 돌아갈 응보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심미연은 빠르게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강지한은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갔다. 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차갑게 말했다. “따라오지 마.” ‘이 남자가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나랑 같이 집에 가자.” 방금 심미연에게서 술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는 그녀가 혼자 돌아가는 게 걱정되었다. 심미연은 눈을 좁히며 그를 쳐다보았다. “강지한, 너 미쳤어?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 같이 집에 가자는 건 무슨 소리야?”‘이 남자는 왜 이렇게 끈질기게 따라붙는 거야.’‘우리가 집에 같이 돌아갈 사이야?’“너 술 마셨어. 같이 집에 가자.”그녀의 집엔 박유진이 있으니 그는 절대 그녀의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나 술
‘그깟 강지한 곁으로 돌아가서 뭐 하게.’“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누가 들으면 내가 강지한한테 아직 미련이라도 남은 줄 알잖아요.” 헛소문 퍼지게 할 일은 절대 할 수 없다. 임현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앞으로 절대 그런 말 안 할게요.” 이런 말을 하는 건 한 번이면 충분했다. “잠깐 눈 좀 붙일게요. 도착하면 깨워줘요.”“네. 편히 주무세요.”심미연을 몸을 살짝 틀어 더 편한 자세를 찾고는 외투를 여미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심미연이 탄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서야 강지한은 시선을 거뒀다.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떼려는 순간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숙여보았다. 얼룩이 묻어 축축하게 젖은 자켓 한 벌이었다.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발끝으로 외투를 걷어 차 버렸다. 옷의 헐렁한 밑단이 밖으로 길게 삐져나와 있었다. 그 시각, 어딘가의 어두운 방 안. 남자는 손에 든 와인 잔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깊고 붉은 와인이 잔 벽을 따라 유리처럼 미끄러지자 희미한 조명이 깔린 공간에선 독한 술 향과 함께 서늘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놓인 핸드폰을 바라봤다. 눈동자에 스친 발신자 정보를 확인한 뒤 무심하게 전화를 받았다. [강 도련님, 우리 쪽 사람들이 강지한 도련님의 차를 따라붙었습니다. 바로 처리할까요?] 남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는 말없이 손에 든 와인 잔을 들어 남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씁쓸한 액체의 온기가 식도를 지나 심장까지 내려앉자 남자의 눈빛은 더욱 깊고 싸늘해졌다. [필요 없어.] 전화가 끊기고 방 안은 다시 싸늘한 적막에 잠겼다. 남자는 텅 빈 와인 잔 안에 남아 있는 핏빛 잔여물을 잠시 바라보더니 천천히 웃었다. [강지한, 좀 더 살려둘게.] 그의 목소리는 낮고 느릿했다. [네가 가진 모든 걸 하
박유진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만약 육현성이 먼저 너한테 합작하자고 접근하면 그땐 진짜 조심해야 할 거야.” 육현성이 몇 년 동안 어떻게 육영 그룹을 여기까지 키워왔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머리가 나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괜찮아. 난 걱정 안 해.” 육영 그룹과의 계약만 유지하면 천성의 수익이 1년에 수십억 원에 달할 것이다. 설령 육현성이 일부러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거라는 걸 알면서도 육영 그룹과의 합작을 원했다. “그래. 걱정할 필요 없어. 육현성은 절대 너한테 손 못 댈 거야.” 박유진은 겉으로는 담담하게 심미연을 안심시켰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육현성은 온지유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심미연을 곤한하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마음 놓고 웃는 그녀에게 다시 상처를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맞아.”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집 문을 열자마자 작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엄마, 왔어요? 보고 싶었어요.” 귀여운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심태하가 품에 안겼다. 심태하는 애교를 부리며 작은 팔로 박유진의 다리를 먼저 꼭 안았다. 박유진은 허리를 굽혀 심미연을 내려놓았다. 심미연은 아이를 와락 안으며 심태하의 말투를 따라배우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엄마도 우리 태하 너무 보고 싶었어.” 박유진은 이 모습을 보며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둘 다 똑같은 애기라니까.’가정부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이 그저 부러웠다. 심미연은 아이와 함께 매트에서 레고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박유진은 해장국을 끓이러 주방으로 향했다. 가정부가 일을 하려 하자 그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직접 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가정부들은 그저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두 명의 가정부가 일을 하려 들자 박유진은 조
속눈썹이 길게 떨리고 작은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워 보였다. 여자의 품에 있는 작은 아이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박유진의 눈빛은 깊고 부드러워 심미연과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무한한 사랑의 바다 속에 부드럽게 감싸는 듯했다. 그러나 이 평온한 순간은 갑작스러운 핸드폰 진동에 의해 깨졌다.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 불현듯 밀려온 폭풍처럼 모든 평화를 어지럽히며 다가왔다. 그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눈속의 사랑을 지우고 심각함으로 바꾸었다. 그럼에도 심미연을 한 번 더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아쉬움과 결단이 가득했다. 그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의 모든 움직임은 간과할 수 없는 침착함과 힘들 드러냈다. 화면이 켜지고 그 눈부신 파란 빛이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와 밝은 빛을 번갈아 비췄다. 그는 화면에 대고 말했다. “무슨 일이야?” 그의 목소리는 낮고 힘있었다. 마치 일부러 눌러서 깊은 잠에 빠진 심미연과 아이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전화 너머에서 비서의 목소리는 긴급 경고음처럼 급하고 초조했다. “대표님, 큰일입니다. 회사 내부 네트워크가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공격당했어요. 지금 시스템이 거의 마비 상태로 상황이 매우 위급합니다.” 박유진은 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리며 눈빛이 날카롭고 침착하게 변했다. 마치 이 위기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는 짧게 한 마디만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조사해.” 그가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 순간 상업계의 엘리트다운 결단력과 냉정함이 다시 돌아왔다.같은 시각 이노하이브 역시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건물 전체가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기술 부서의 구석구석마다 긴장감과 바쁨이 감돌고 있었다. 키보드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며 마치 급박한 북소리처럼 사람들의 긴장된 신경을 자극했다. 화면에 나타나는 코드들이 파도처럼 흘러가며 기술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 이 끝없는 숫자의
강지한의 차가운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성 비서, 지금 당장 그 사람과 연락해. 빨리 오게 해.” 성무진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바로 그 사람이 제공한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그와 동시에 심미연의 핸드폰도 울리기 시작했다. 심미연은 눈을 떴고 박유진의 부드러운 시선과 마주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녀는 금방 정신을 가다듬었다. “왜 잠들었는데 깨우지 않았어?” “너무 편안하게 자고 있어서 깨우기 좀 그랬어.” 박유진은 부드럽게 말했다. “먼저 전화 받을게.” 심미연은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보스, 이노하이브 네트워크가 공격을 받았어요. 그들이 거액의 돈을 주고 보스에게 처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받아들일 건가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분명히 흥분했다. [얼마나요?] [그들은 가격을 우리가 정하라고 했어요.] [좋아요. 그럼 한 200억으로 하죠.] 심미연이 한 200억이라고 가볍게 말하자 박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심미연이 전화를 끊자 박유진의 웃고 있는 모습에 얼굴이 붉어지며 머리카락을 쓸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집에 해커 두 명이나 있는 걸 깜빡했어. 바렐 그룹 네트워크도 지금 마비 상태인데 시간 괜찮으면 좀 처리해줄 수 있어? 답례는 한 200억으로 할게.” 박유진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빠 회사의 네트워크도 공격당했어?” 심미연은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는 강지한이 그녀를 불쾌하게 만든 일이 있었기에 일부러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 오빠의 회사는 또 어떻게 된 일일까?’“아까 비서가 전화로 회사 네트워크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공격을 받아서 처리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고 해. 일단 상황 좀 봐줄 수 있을까?” 심미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하 안고 먼저 방에 가 있어. 난 서재로 가서 처리할게.” 박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미연은 일어나서 계단을 올라갔다. 박유진은 심태하를 안고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