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진은 장혜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며 마음속으로 의아함을 느꼈다. ‘오태진의 아내라니. 미연이는 대체 어떻게 이 여자를 알게 된 걸까?’ 오태진은 경성에서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었고 그의 아내가 이렇게 심미연과 친한 사이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태진은 아내를 극진히 아낀다는 소문도 자주 들었다. 심미연과 장혜윤이 이렇게 편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둘은 가까운 사이임이 분명했다. ‘내가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미연이가 다른 사람에게 억울하게 당할 일은 없겠어.’ 박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뒤 병원을 떠났다. 신미연은 장혜윤과 함께 병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응급실의 문이 열렸다. 장혜윤은 수술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급히 일어나 달려갔다. 하지만 의사는 그녀의 손에 병상 사망 통지서를 쥐어주며 서명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갑게 덧붙였다. “아이를 구할 수 없습니다.” 장혜윤은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심미연은 핸드폰을 꺼내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지한은 병원에서 강상미와 함께 있던 중 심미연의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그는 심미연을 보자마자 바로 물었다. “안에 있는 환자랑 무슨 관계야?” 심미연은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고 강지한은 곧장 의사들에게 그녀를 응급실로 데려가 수술을 맡기라고 지시했다. 심미연은 응급실에 들어가자마자 빠르게 수술복을 갈아입고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리고 수술대 위에 익숙한 얼굴을 보고 심호흡을 내쉬었다. ‘역시나 나윤미 맞네.’ 장혜윤은 응급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며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오태진과 결혼한 후 그녀는 주변 사람들과 멀어졌고 고위 간부 아내들 사이에서는 너무 어린 자신이 어울리지 않아 그곳엔 발도 들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나윤미와 가장 가까이 지내며 의지해왔기에 나윤미는
심미연은 아름다운 도화 눈으로 강지한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예전에 우리가 부부였을 때도 한 번도 날 신경 쓴 적 없잖아.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닌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설마 네 딸 수술을 나한테 맡기려고 하는 거야?” 애초에 그녀는 강상미의 수술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건 ‘심미연’이 아닌 명의로서 하려던 계획이었다. 강지한은 그녀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히고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정말 너한테 상미 수술을 부탁하고 싶다면?” 그래도 한때는 그의 아내였던 사람이다. 어차피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면 정체불명의 명의보다는 차라리 심미연이 나았다. 그날 명의는 얼굴을 꽁꽁 싸맨 채 강상미를 진찰했고 강지한은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진찰하는 동안엔 아예 그를 내보내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지만 최근 박시훈에게 명의의 연락처를 알아보라고 했음에도 끝내 알아내지 못하자 그는 점점 명의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심미연이 강상미의 수술을 맡아준다면 굳이 명의를 찾아야 할 이유도 없어졌다. 이미 지급한 계약금 정도는 포기해도 상관없었다. “네가 이노하이브 지분 15%를 나한테 넘기겠다고 하면 한 번 고려해볼 수는 있어.” 심미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동의하면 임현 씨에게 계약서 초안을 준비하게 할 거야.” 강지한은 예전에 임현에게 소송을 맡겼던 일이 떠오르며 잠시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심미연, 너 천성 로펌의 변호사인 걸 왜 나한테 미리 말해주지 않았어?” 그는 심지어 이 여자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냥 내 웃음거리를 보고 싶었던 건가?’“네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내가 왜 내 일에 대해 너한테 말해야 돼? 네가 나한테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잖아?”심미연은 그의 말을 단호하게 되받아쳤다. ‘이 남자, 아직도 내가 예전
“안 데려다줘도 돼. 필요 없다고 했잖아.” 심미연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를 지나쳐 앞쪽으로 걸어갔다. 강지한은 그녀를 재빨리 따라잡아 손목을 꽉 잡았다. “심미연,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가는 건 위험해. 그것도 몰라?” 게다가 이 여자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는 게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내 일에 간섭하지 마.” 심미연은 짜증이 나서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강지한, 제발 좀 귀찮게 하지 마! 우린 이미 이혼했잖아. 왜 아직도 이러는 거야?” 강지한의 행동은 심미연을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녀의 거절이 계속되자 강지한은 얼굴에 민망한 기색이 떠올랐다. “심미연, 난 그저 널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은 것뿐이야. 아무 뜻도 없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알아 들었겠지?’“안 데려다줘도 된다고 했잖아. 강지한, 사람 말 못 알아듣는 거야?” 심미연은 강지한의 말에 조금도 겁먹은 기색 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예전의 강지한은 그녀에게 관심도 없었는데 이제는 꼼짝없이 그녀에게 들러붙어 매일같이 그녀를 쫓아다니는 모습이 심미연에게는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은 얼굴이 굳어졌다. “심미연, 내가 너 생각해서 이렇게 하는 거잖아. 뭐가 불만이야?” 그는 분명 그녀에게 잘해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강지한은 심미연을 마주할 때마다 힘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엔 내 말이라면 다 듣던 여자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그냥 내가 불만이 많은 걸로 하자.”심미연이 말을 끝내자마자 손목이 잡히고 귀에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가자.” 따뜻한 손길이 손바닥을 통해 퍼져 나가며 그녀의 몸 속까지 온기가 전해지듯 점점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심미연은 돌아서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빠, 왜 여기 있어?” “계속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박유진은 그녀를 품에 끌어당기며 부드럽게 말했다.
강지한은 심미연이 자신에게 손을 댈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자 간신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여자가 남자의 입술을 닦아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강지한의 눈은 혈안이 되어 붉어지고 온몸의 피는 끓어오르며 가슴속에서 뚫인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심미연은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했었잖아.’ ‘도대체 어떻게 변할 수 있지?’ ‘아니야. 심미연이 변한 게 아니야. 박유진이 심미연을 강제로 데리고 있는 거야.’ ‘그래. 그게 맞아.’ 그때 성무진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셔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강지한은 그 말에 반응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심미연, 돌아와. 가지 마. 널 보내지 않을 거야.” 성무진은 강지한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며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랐다. 그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예전엔 대표님이 사모님을 떠나고 싶어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애절하게 잡으려 하다니. 무슨 의미일까요?’ ‘어떤 사람은 한 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인데...’ ‘대표님처럼 똑똑한 분이 왜 그런 걸 못 깨닫는 걸까요?’“성 비서, 빨리 아래로 내려가서 심미연을 데려와. 상미가 갑자기 호흡이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해. 어떻게 된 건지 와서 봐 달라고 해.” 강지한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손을 휘저으며 급하게 말했다. 성무진은 거절할 수 없어 어쩔수 없이 대답했다. “그럼 대표님은 병실로 돌아가셔서 쉬세요. 제가 바로 심미연 씨를 쫓아가겠습니다.” “빨리 가. 심미연이 떠나지 못하게 해.” “알겠습니다.” 성무진은 급히 말을 마친 뒤 서둘러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성무진은 계속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이 이렇게 변했다는 건 심미연 씨에게 마음이 생긴 걸까?’ ‘하지만 심미연 씨는 분명 대표님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대표님이
‘심미연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강지한의 반문에 성무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불필요한 말을 꺼냈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강지한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예전엔 대표님이 심미연 씨를 원하지 않으셨던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지금은 심미연 씨에게 버림받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걸까?’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강지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먼저 들어가. 내일 오전 회의는 네가 진행해. 난 회사에 나가지 않을 거야.” 성무진은 짧게 대답한 뒤 병실을 빠져나갔다. ‘심미연 씨가 다시 나타난 이후로 대표님은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아.’성무진이 떠난 후 강지한은 흡연실로 향했다. 그 시간대의 흡연실은 뜻밖에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러 남자들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앉아 있었고 공기는 자욱한 연기로 가득했다. 강지한은 문 앞에서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본 한 남자가 자연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내밀며 말했다. “형님, 같이 태웁시다.” 강지한이 그를 흘끗 쳐다보자 그 남자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지난번에 한 대 빌려 가셨잖아요? 또 담배 안 가져오셨을까 봐 챙겨뒀습니다.” 강지한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더니 오히려 그에게 한 개비를 건넸다. “제가 드릴게요.” 남자는 순간 눈앞의 담배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 개비의 가격이 자신의 며칠 치 밥값에 맞먹는 담배였다. 그는 슬쩍 자신이 내밀었던 담배를 다시 집어넣고 강지한이 준 담배를 공손히 받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형님, 굳이 허세 부릴 필요 없어요. 아껴 쓰세요.”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강지한에게 손을 뻗으며 말을 걸었다. “형님, 저도 한 대만요.” 그 남자는 비싼 담배라 구경만 했지 피워 본 적은 없었다. 강지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남자의 얼굴을 스쳐 보더니 말없이 담배
강지한은 고상한 눈빛으로 말을 건 남자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마치 구역질 나는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의 입꼬리에는 비웃음이 번지며 천천히 올라갔다. “심미연은 내 여자야. 너희 그 더럽고 추악한 생각은 접어둬. 감히 남의 여자를 탐내려고 해?” 강지한의 눈빛에서 위험한 불꽃이 번뜩였다. 마치 바로 그 순간 상대를 태워버릴 듯한 위협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모두가 그의 강렬한 기세에 압도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천박한 자들이 심미연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뭐, 뭐라고요...” 그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름다운 여자가 바로 저 사람의 여자라니. 그래서 이 남자가 이렇게 화가 난 거였구나.’ 다른 남자가 그의 아내를 그렇게 더럽히려 했다면 그도 죽을 힘을 다해 싸웠을 것이다. “끌어내.” 강지한이 차갑게 명령했다. 경호원들이 남자들을 하나씩 잡아끌어 내자 그들은 강지한이 얼마나 강력한 인물인지 실감했다. 이렇게 많은 경호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분명히 대단한 인물일 거라 짐작했다. ‘망했다.’ ‘입을 가볍게 놀리지 말았어야 했어! 큰일을 벌였네.’ 강지한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정신을 차리고 담배불을 끄며 공허한 마음으로 비어 있는 흡연실을 빠져나갔다. 마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 마음이 텅 비어 있었다.같은 시각, 심미연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에 계란 하나를 들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박유진의 얼굴 위에 굴리고 있었다. 그녀의 집중된 다정한 표정은 주변의 공기마저 부드럽게 만드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 심미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박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급격히 긴장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미연아, 감기 걸린 거야? 왜 갑자기 재채기한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심미연의 작은 변화 하나하나가 그의 마음을 흔드는 듯했다. 심미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공기 중에 불꽃이 튕기는 듯한 긴장감과 뜨거움이 교차했다. 박유진의 숨이 가빠지며 눈빛에는 갈망과 확고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심미연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마치 그녀를 뼛속까지 담아두고 싶은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으며 마치 오랫동안 목마른 사막의 여행자가 간절히 물을 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애절하고 기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연아, 언제 나랑 결혼할 거야?” 심미연은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과 행동에 놀라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귀에 들릴 듯했다. 그녀는 이 순간, 자신의 세계가 뒤집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박유진의 숨결이 그녀를 감싸며 숨이 막힐 듯했지만 그 따뜻함과 안전감을 갈망하는 마음도 함께 밀려왔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려 했다.박유진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고 그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나는 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그냥 우리 관계가 좀 더 확실했으면 좋겠어. 이렇게 같이 살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한테 뭐라고 할까 봐 걱정돼.” 심미연은 박유진의 깊은 눈을 응시하며 가슴속에서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마치 그 소리가 귀로 들릴 정도로 강하게 울리며 점점 빨라져 거의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심미연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금세 붉어졌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입술이 마른 채로 살짝 다물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용기를 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 먼저 혼인 신고하러 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긴장된 채로 두 손을 꼬며 힘을 줘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마음속에서는 불안과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박유진과 부부로서의 삶을 잘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부부 사이의 갈등이 커질까 봐 두려웠다. 그런 결혼 생활은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박유진은 그 말을 듣고 눈빛이 잠깐 흔들
심미연은 정신을 차리고서야 얼굴이 달아오른 걸 깨달았다. “나 먼저 전화 받을게.”박유진은 아쉬운 기색이 스쳤지만 조용히 손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먼저 받아.” 심미연은 순간 미안한 감정이 스쳤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도진혁의 다급함이 묻어나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큰일 났어요! 신 대표님이... 사라졌어요!] 그 말은 마치 묵직한 망치로 심미연의 가슴을 내리치는 듯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으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떨며 핸드폰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뭐라고요? 무슨 소리예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자세히 말해봐요!] 심미연은 몰아치는 불안을 애써 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신 대표님이 갑자기... 새우찜이 먹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급히 포장하러 다녀왔거든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까... 대표님이 안 계셨어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CCTV를 확인하려 했는데...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CCTV가 고장 나 있었어요.] 도진혁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책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순간, 서늘한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차갑고 날카로운 불안이 척추를 타고 전신을 휘감았다.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 [일단 경찰에 신고하세요. 저도 바로 갈게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긴장과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도진혁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자 심미연은 저도 모르게 온몸이 떨렸다. 차가운 불안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심장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박유진을 꽉 끌어안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최대한 또렷하게 말했다. “오빠... 하린이가 사라졌어. 미안해... 나 지금 당장 병원에 가봐야 해.” 심미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