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깊게 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낮췄다. “강지한, 여긴 아들 유치원 앞이야. 제발 여기서 이런 짓 그만해. 창피해...” 그녀의 눈빛 속에는 감추기 힘든 증오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강지한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녀는 최소한 체면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강지한은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증오를 보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차갑고 아픈 통증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예전엔 그 눈빛 속에 사랑만 있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부터 심미연은 나를 이렇게 미워하게 된 걸까?’ “나는 태하의 아버지고 네 남자야. 우리가 이렇게 친밀하게 행동하는 게 뭐가 창피하다는 거야?” 강지한은 마치 자신이 미친 사람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심미연이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저 그녀가 자신에게서 물러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가까워질 때마다 그는 심미연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강지한, 여기서 이런 의미 없는 말로 싸우고 싶지 않아. 열 시에 법정에 가야 해. 지금은 서류 정리하러 사무실에 가야 하니까 제발 손 좀 놔.” 오늘 다뤄야 할 사건은 이혼 사건이었다. 자료는 이미 다 준비됐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실수나 빠진 부분이 없는지 점검만 하면 되었다. 그 후 법정에 가서 잠시 숨을 돌리고 피곤하지 않게 변론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랑 얘기하면 싸움이 되고 박유진이랑 얘기하면 다 애정 표현이냐?” 박유진이 오랫동안 심미연과 함께 지낸 사실을 떠올린 강지한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쾌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강지한은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심미연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왜 박유진이 그녀 곁에 있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강지한은 본능적으로 심미연의 턱을 움켜잡고 있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순간, 심미연은 숨이 턱 막
심미연의 눈에는 고집과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강지한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의 팔에 단단히 사로잡힌 채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갔다. 마치 그가 그녀를 자신의 일부로 삼으려는 듯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집착이 느껴졌다. 차창 밖의 세상은 점점 흐려졌고 그녀의 의식도 서서히 희매해져 갔다. 그 순간, 심미연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생각은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었다.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직 죽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순식간에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심미연의 의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강지한은 그녀가 축 처진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걸 보고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심미연, 눈 떠! 지금 장난칠 때 아니야!” 그러나 그가 아무리 불러도, 세게 꼬집어도 그녀는 끔쩍도 하지 않았다. 강지한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주저할 겨를도 없이 그는 곧장 그녀를 뒷좌석에 눕히고 핸들을 움켜쥐며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엑셀을 깊이 밟았다. 앞장선 경찰차가 길을 터주었고 그는 쉴 틈 없이 병원으로 내달렸다. 병원 앞에는 이미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휠체어, 소송 침대, 응급 장비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원장이 급히 뛰어나와 그를 맞이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이건 정말 죄송...”“닥치고 침대부터 가져와.”강지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응급실로 바로 옮겨.” 심미연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의료진이 침대를 끌고 오자 강지한은 즉시 차 문을 열었다.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올려 하얀 침대 위에 눕혔다. 새하얀 시트 위에 누운 심미연의 얼굴은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도화지처럼 창백했다. 입술은 핏기 없이 바싹 말라 있었고 숨결조차 희미해 제대로 숨
“스승님!”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그 한마디를 내뱉으며 주저하지 않고 남자의 앞에 달려갔다. “저 미연이에요. 스승님... 저 기억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스승님이 살아 있었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은 분명 사부의 얼굴이었다. ‘틀림없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절대...’ 남자는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며 목소리 속에 날카로운 분노를 담아 말했다. “비켜 주세요. 제 아내가 기절했어요. 여기서 막고 있다가 제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이 책임질 수 있겠어요?” 심미연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몸이 굳어가는 듯 모든 것이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스, 스승님...” 그 순간, 심미연의 심장은 마치 거대한 북처럼 울려 퍼지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그 남자의 얼굴을 놓칠세라 집요하게 쫓았다. 마치 그 얼굴을 가슴 깊이 새기려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확신했다. 눈앞의 남자, 뚜렷한 윤곽과 깊은 눈빛을 가진 이 얼굴. 한때 그녀가 존경하며 따랐고 그 죽음을 직접 목격했던 사부, 진운혁의 얼굴이었다.기억 속의 장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날, 하늘은 흐릿하고 어두웠다. 마치 하늘마저 비극을 애도하는 듯, 구름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녀는 군중 속에서 사부의 몸이 고층 빌딩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그대로 지켜봤다. 끊어진 줄에 매달린 연처럼 결국 아무 힘 없이 차가운 땅에 내팽겨쳐졌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 군중의 떠들썩한 소리, 그리고 그때 가슴 깊숙이 울려 퍼진 아픈 울음소리가 뒤엉켜 처참한 교향곡을 이뤘다. 그 해, 그녀는 사부의 시신이 하얀 천에 덮여져 장례차에 실려 떠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부가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그런 낙하에 살아남을 리 없었다. ‘그럼 스승님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수많은 의문이 머
‘우울증은 거의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강지한을 마주할 때마다 발작이 일어날까?’ 심미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강지한과 자주 마주할수록 언젠가는 자신이 목숨까지 위협받게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강지한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린 아들이 있어. 네가 도망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야.”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심미연, 이제는 순순히 내게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박유진은 앞으로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테니까.” 그의 말은 비웃음을 품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농담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미연은 그의 말을 듣자 얼굴이 굳어졌다. “남자답게 앞에 나서서 직접 해. 뒤에서 비겁하게 움직이지 말고.”차가운 목소리 속에 날 선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게 번뜩였고 단단히 다문 입술은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박유진의 회사에서 벌어진 일들이 강지한의 손에 의해 조종된 것임을 그녀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강지한이 직접 그런 말을 꺼낸 순간, 심미연의 속에서는 끓어오르는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신이라도 된다고 착각하는 거야? 오만하기 짝이 없네.’ “내가 남자라는 건 너도 잘 알잖아?”강지한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지만 그 속에는 억누른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내가 직접 손 쓰게 만들지 마. 계속 건드리면 더 이상 참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그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그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강제로 되돌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이 강지한의 방식이었다. 심미연은 강지한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한 번 해봐. 네가 날 어떻게 끝낼 수 있을지 지켜볼게.”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강지한의 협박을 단호히
심미연은 책상 위의 서류를 재빨리 정리했다. 필통 속의 펜들이 그녀의 손길에 맞춰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마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듯한 긴박한 배경음처럼 들렸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재빠르게 집어 들고 가방을 챙겨 급히 밖으로 향했다. 그녀의 동작에는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심미연이 문 앞에 도달해 손을 뻗어 문을 열려던 순간, 문이 가볍게 열리며 임현이 나타났다. 그녀는 자료 더미를 안고 바쁜 모습이었다. 심미연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급한 일인가요?” 급한 일이 아니면 시간이 없었다. 임현은 급히 심미연 앞에 다가오며 손에 든 서류를 가볍게 흔들었다. 마치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는 듯했다. “심 변호사님, 그 도시를 뒤흔든 자식 살해 사건에 새로운 단서가 나왔어요. 우리 시골로 가서 다시 조사를 해볼까요?” 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네. 시골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이렇게 하죠. 임현 씨가 먼저 다른 직원 몇 명과 함께 가서 조사를 시작하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조심해서 움직이세요.” 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심 변호사님, 걱정 마세요. 제가 처리할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다은 씨의 이혼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다은 씨가 제공한 증거는 부족해서 새로운 중요한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건이 진전을 보지 못할 거예요.” 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했다. “먼저 시골로 가서 조사를 시작하세요. 이다은 씨의 사건은 제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게요.” “임현 씨, 제가 지금 가봐야 해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그녀는 급히 말을 마친 후 곧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심미연은 성무진의 말 속에서 피하는 듯한 뉘앙스를 느끼며 마음속 불안감이 점점 더 커졌다. ‘강지한이 도대체 태하를 데려가서 뭘 하려는 걸까?’ “당신은 강지한의 비서잖아요. 강지한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요? 지금 장난해요?” 심미연은 아들이 걱정돼 목소리가 날카롭게 떨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성무진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결국 한숨을 내쉬며 아무 말 없이 전화를 급하게 끊었다. 그는 강지한의 결정을 막을 힘이 없었다. 오직 심미연에게 미안함 마음만을 느꼈다. 강지한이 심미연을 돌려놓으려는 시도가 잘못된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그런 말을 강지한에게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심미연을 더 멀리 밀어내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었다. 4년이 지났지만 강지한의 성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심미연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호음에 당황하며 사방의 정적이 점점 더 숨 막히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의 머릿속엔 아들과 함께 보냈던 즐거운 순간들이 떠올랐다. 아들이 강지한에게 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빨리 태하를 찾아야 해.’ 결심을 굳힌 심미연은 즉시 전화를 걸어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마친 후 그녀는 다시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 “태하 위치를 바로 추적해서 나에게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보스.”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차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곧 차 시동을 걸고 길을 떠났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지만 여전히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차가 멀리 가지도 않았을 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화를 받자 급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스, 큰일이에요. 태하의 위치를 추적할 수 없어요. 상대방이 신호를 차단했어요.” 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차분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이제 강지한이 아들과 함께 사라진다고 말한 것이 진심인 것 같았다. ‘내가 키운 아들을 강지한이 뭔데 마음대로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에 냉기가 흘렀다. ‘이 자식이 감히 나에게 반항하다니.’ ‘대단한 배짱이군.’ 임혜자는 강지한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불안해했다. ‘큰일 났다.’ ‘도련님이 화나셨어.’ ‘이제 작은 도련님이 또 어떤 처벌을 받을지 걱정이네.’ 강상미는 아빠에게서 퍼지는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걱정스러운 마음에 서둘러 심태하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오빠, 나랑 손 잡아.” 심태하는 강상미를 한 번 쳐다본 후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강지한에게 끌려왔던 기억이 떠오르며 강상미의 손을 가볍게 밀어내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당신들이랑 친하지 않아요. 손 대지 마세요.” 그 후, 심태하는 고개를 들고 강지한을 바라보며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강 대표님, 정말 못되었네요. 엄마와 제 선의를 이렇게 이용할 수 있다니. 앞으로 엄마랑 저는 상미에게 다시는 잘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의 어린 마음속에는 세상이 아직 아름다웠다. 하지만 강지한을 만나면서 점점 세상의 추한 현실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아직 너무 어렸기에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찼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났고 강지한에게 속았다고 느꼈다. 이제 그는 다시는 강지한의 말을 믿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오빠, 그러지 마.”강상미는 그의 말을 듣고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심태하는 동생이 이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그도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굳게 다짐했다.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안 돼.’ ‘나의 약함을 보여줄 순 없어.’ 엄마가 늘 말했었다. ‘밖에서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해.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너를 괴롭히지 않아.’ 강지한은 딸이 우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어두워졌고 심태하를 향한 눈빛은 날카롭게 변했다. “심태하, 여동생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상미에게
임혜자는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도련님이 화가 나셨군.’ ‘작은 도련님도 정말 고집이 세다.’ ‘아버지와 아들이 참 닮았네.’ 심태하는 목이 점점 더 조여오며 숨이 가빠졌다. 작고 귀여운 얼굴이 점차 푸르고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 같았다. 간신히 입을 열어 강지한에게 살려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이미 마음속 깊이 깨닫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부탁을 해도 강지한은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는 자신이 죽으면 엄마가 얼마나 슬퍼할지를 떠올렸다. 그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덜 아프게 느껴졌다. 임혜자는 뒤에서 초조하게 따라가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혹시 도련님이 실수로 작은 도련님을 더 조여버리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녀가 심태하를 살려 달라고 부탁한다고 해도 강지한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임혜자는 매우 난감하고 마음이 불안했다. 다행히 그리 긴 거리는 아니었다. 임혜자의 걱정 속에 강지한은 심태하를 소파에 던져놓았다. 심태하는 소파에 쓰러지자마자 계속해서 기침을 내뱉었다. 임혜자는 아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것을 보고 급히 돌아서서 물 한 컵을 가득 채워 그에게 건넸다. 그녀는 물컵을 아이의 입에 가져다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도련님, 물 좀 드세요.” 하지만 심태하는 얼굴을 돌리며 거절했다. “괜찮아요. 필요 없어요.” 아이의 눈은 붉어져 있었고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보였다. 그 모습은 정말로 안쓰러웠다. 강지한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며 강상미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이 자식, 정말 고집이 세네.’ ‘이 상황에서 사과할 생각은 안 하고 버티기만 하네.’그는 이 아이가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강지한이 식당으로 들어가자 임혜자는 급히 물컵을 테이블에 놓고 심태하를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작은 도련님, 괜찮아요. 도련님은 절대 작은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