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이 멍하니 서 있는 틈을 타 심미연은 마치 질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신하린을 품에 안고 발걸음을 단단히 다잡고 밖으로 내달렸다. 경호원들은 마치 강철로 만든 성벽처럼 일렬로 서서 단단히 사람들로 이루어진 벽을 형성했고 격분한 이진영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다. 이진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마치 분노한 사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심미연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심미연이 경호원들을 여기까지 데려올 정도라면 분명 완벽한 대책을 세운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 손을 대면 심미연의 경호원들이 몰려오면서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주위의 공기가 마치 얼어붙은 듯 고요해지고 심미연과 경호원들의 무거운 발걸음 소이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이진영의 가슴 속에 깊이 파고들며 매 걸음이 전례 없는 좌절과 무력감을 안겨 주었다. 한유나는 한쪽에서 심미연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 기울여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복잡하게 변화하며 질투가 독사처럼 마음속을 감쌌고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심미연은 두려움 없이 당당할 수 있는 걸까?’ 반면, 자신은 마치 쫓겨난 개처럼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심미연은 한유나가 지금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오직 신하린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기만을 생각했다. 그래야 신하린이 더 이상 이진영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될 테니까. 대문 앞에 쌓인 폐허를 보고 신하린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대문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심미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람을 시켜서 굴삭기로 밀어버렸어.” 그녀는 이곳에 올 때 이진영이 신하린을 안고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문이 폐허처럼 변한 모습을 보고 신하린은 마치 심장이 꽉 쥐어진 듯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감을 느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깨달았다. 심미연처럼 좋은 친구를 만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미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도현 씨? 무슨 일이죠?” ‘지난번에 차에서 걷어찼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나?’ “같이 방 잡을려고요. 이 정도면 충분한 이유 아닌가?” 문도현의 느물거리는 목소리에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할 얘기 없으면 끊겠습니다.” 심미연은 정신 나간 사람이랑 엮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문도현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당신 아들 찾고 싶지 않아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미연은 손끝이 떨렸지만 애써 감정을 다잡았다. “무슨 뜻이에요? 내 아들이 당신 손에 있어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녀는 거듭 물었다. “지금 어디예요?”조급한 마음이 앞서 자꾸만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한테 예쁘게 부탁하면 가르쳐 줄 수도 있죠.” 가벼운 웃음이 섞인 장난스러운 말투. 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장난치지 말고. 지금 당장 위치 알려줘요.” “그럼 내 카톡 추가 받아줘요.” 순간, 지난번에 그가 카톡 추가하자고 했을 때 단칼에 거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엔 그걸 핑계로 삼으려는 거였다. “좋아요. 아이만 찾을 수 있다면 추가할게요. 아이디 알려줘요.” 문도현이 키득 웃었다. “내 번호도 저장해 둬요. 다음번에도 안 받으면 가만 안 있을 겁니다.”“알겠어요.” 심미연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이부터 찾고 그다음에 번호를 삭제할 생각이었다. “삭제하지 말고. 알겠죠?” 대답도 하기 전에 마치 속을 꿰뚫어 본 듯한 말이 들려왔다. 심미연은 말없이 침묵했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문도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내 생각이 맞았네요? 당신 나 찾고 나면 바로 번호 지울 생각이었죠? 그런 거라면...” 문도현은 목소리는 한층 낮아지며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당신 아들 다시 못 볼 줄 아세요.” 뇌리를 찌르는 듯한
전화기 너머로 낮고도 깊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심연에서 흘러나온 듯한 묵직한 울림이었고 단 한 마디만으로도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을 풍겼다. “이제 믿겠어요?” 순간 심미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에 쥔 핸드폰이 한순간에 뜨겁게 달아오른 것만 같았고 목을 조여오는 듯한 압박감에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주변의 공기는 얼어붙었고 들려오는 건 오직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와 멀리서 간간이 울려 퍼지는 자동차 엔진 소리뿐이었다. “지금 당장 추가할게요.” 심미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바삐 움직였고 거의 반사적으로 ‘친구 추가’버튼을 눌렀다. “번호도 저장해요. 헷갈리게 만들지 말고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삭제하지 마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저음으로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묘하게 날카로운 위협이 섞여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한순간이라도 틈을 보이면 그대로 덮쳐올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또 다른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가 거쳐 온 여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고 직접 손에 쥐고 싶어진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는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면 언젠가는 그녀도 자신에게 마음을 열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여자는 결국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니까. 심미연은 급히 연락처 목록을 열어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남자의 속셈이 무엇인지 몰라도 지금은 순순히 따르는 게 최선이었다. 망설임 없이 번호를 저장한 뒤 곧바로 캡처를 떠서 그의 카톡으로 전송했다.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그녀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슴속 불안과 초조함이 얽혀드는 가운데 시간은 더더욱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카톡 알림음이 적막을 깨듯 울려 퍼졌다. 문도현이 보낸 메시지는 단 하나. [실시간 위치 공유.] 정확한 좌표가 찍힌 지도
어두운 밤, 문도현의 모습이 희미하면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의 얼굴은 약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더욱 단단해 보였고 그 눈 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숨겨져 있었으나 그것들이 곧바로 복잡한 감정으로 굳어졌다. 유리창 너머,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그 순간, 심미연은 문도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임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숨기지 않은 가식 없는 관심 그 자체였다. 시간이 이 순간에 마치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매 초마다 늘어나는 듯했다. 결국 문도현이 손을 들어 창문을 다시 두드리며 심미연을 불렀다. 심미연은 정신을 차리고 깊게 숨을 쉬며 천천히 창문을 내렸다. 차 안으로 문도현의 낯선 기운이 섞인 바람이 들어왔다. “왔어요? 대담하시네요.” 문도현은 심미연이 혼자 온 것을 보고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마음속으로는 심미연의 용기에 대한 감탄이 있긴 했지만 그가 내뱉은 말은 여전히 도발적이고 귀찮게 들렸다. 심미연은 차를 안정적으로 멈추고 차 문을 열었다. 긴 다리를 내딛고 이어서 몸을 날렵하게 차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 아래, 그녀의 모습은 가로등 불빛에 의해 길게 드리워졌다. “문도현 씨, 이제는 제 아들을 데려갈 수 있나요?” 심미연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문도현을 향한 눈빛은 마치 두 자루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심장을 겨냥하는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었고 단지 눈앞의 남자를 평범한 사람처럼 대했다. 문도현은 피식 웃으며 심미연에게 다가가 귀에 가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이렇게 잘생겼는데 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으세요?” 말을 마친 후, 그는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심미연의 뺨을 가볍게 스쳤다. 그 행동은 경솔하고 무례함이 가득했다. 심미연은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지며 그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그녀는 문도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그 사람의 손에 있기에 그녀는 그와의
“왜요? 무서운 건가요?”앞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두운 밤공기 속에서 더욱 깊고 오싹하게 들렸다. 심미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앞에 있는 남자에게 돌진했다. 그녀의 충동적인 행동에 문도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열정적이네요. 내 품에 안기고 싶었어요?” 문도현은 쾌활하게 웃으며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손을 뻗어 그녀를 가볍게 품에 안고 붉어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 여자는 정말로 자극적이었고 조금만 건드려도 언제든지 반응할 것 같았다. “이거 놔요!”심미연은 그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심미연 씨, 지금 내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나중엔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문도현의 목소리는 갑자기 무겁고 진지해졌다. 그의 말은 마치 심미연이 그와 잠자리를 갖지 않는 것이 인생에서 놓칠 수 없는 기회인 것처럼 들렸다. 심미연은 그의 말에 더 이상 참지 않고 힘껏 그를 밀쳐냈다. “경성에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른 여자나 찾아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문도현 같은 남자와 하룻밤 관계를 맺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관계는 명예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건강에 치명적인 위험을 안겨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지금은 당신한테만 관심 있다고요. 다른 여자는 상관없어요.” 문도현은 여자들을 자주 만나지만 그렇다고 모두와 자는 건 아니다. 그의 말에 심미연은 잠시 멍해지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예요?”심미연의 목소리에는 어이가 없다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내가 왜 너랑 잠자리를 가져야 돼?’‘사람을 뭐로 보고... 정말 어이없네.’ “그렇게 생각해도 나쁘진 않죠.” 문도현은 달빛에 비친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이 은밀하게 빛났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붉어지고
“내 아들은 어디 있어요?” 심미연의 표정은 심각했다. 문도현은 일반적인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그와 엮인다는 건 곧 크게 골치 아픈 일을 떠안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심미연은 그를 최대한 피하려고 애썼다. “당신 아들은 방 안에 있어요. 들어가서 찾으면 됩니다.” 문도현은 미소를 띤 채 심미연을 바라보았다. “그 방에 들어갈 용기 있어요?” 심미연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아들이 안에 있으니 누가 뭐래도 들어갈 거예요!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요.” 문도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럼 내가 속인 거면 어떻게 할 건데요?” 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런 짓 못 해요.” 그녀는 이미 사람들을 불러놓았다. 만약 자신이 한 시간 내에 이 집을 떠나지 않으면 굴착기를 보내 문도현의 집을 밀어버릴 테니까. 그때가 되면 관계는 완전히 틀어질 수밖에 없다. 심미연의 자신감에 찬 표정을 보고 문도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그녀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나무 계단은 어두운 불빛 아래서 쿵쿵 소리를 내며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듯했다. 2층 복도.발을 디디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심미연을 소름 끼치게 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작은 그림자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 속도는 마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처럼 빠르고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충격을 안고 있었다. 문도현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자신의 뒤로 잡아당기며 그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 그림자는 거의 충돌할 듯 가까워졌으나 그 직전 멈춰서 빠르게 몸을 돌려 그들 앞에 서게 되었다. “엄마, 왔어요? 평생 엄마를 다시 못 볼 줄 알았어요...” 심미연은 급히 문도현을 밀쳐내고 아이 앞에 섰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보자 심미연은 가슴이 먹먹하고 심장이 쪼여 오는 듯했다.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그녀는 그 말을 끝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울지 마
“안 돼요.” 심태하의 작은 얼굴은 진지해지며 큰 눈을 치켜뜨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엄마는 아빠랑만 있어야 해.’ “이 녀석, 벌써 은혜를 잊었냐? 누가 너를 구해줬지?” 문도현은 강지한과 똑같은 아이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심미연과 함께 한다면 심태하는 결국 그를 아빠라고 부르게 될 거다. 그때 강지한은 아마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하며 입꼬리가 점점 더 교활하게 올라갔다. 이 아이디어는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알아요. 아저씨가 저를 구해준 건. 하지만 그건 저와 아저씨의 일이고 엄마와는 아무 관계 없어요.” 심태하는 빠르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는 절대로 엄마가 문도현과 함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그는 이미 선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았다. “네가 꽤 똑똑하구나. 그렇게 관계를 확실히 구분하다니. 그럼 말해봐, 내가 널 구해준 거 어떻게 고마워 할 거야?”문도현은 심태하를 놀리기 위해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다. “제가 크면 알게 될 거예요.” 심태하는 진지하게 말했다. 마치 어른처럼 그는 말하는 모든 것들이 깊이 생각한 결과였다. 문도현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놀랐다. ‘이 아이는 참 대단해.’ ‘세 살짜리가 이렇게 큰 말을 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네.’ 심미연은 그의 말을 듣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커서 정말로 문도현을 기억할지, 그때가 되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저를 안 믿는 건가요?” 심태하는 문도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금은 불편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야.” 문도현은 고개를 흔들며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네 양 아빠가 되어줄까? 이렇게 하면 우리는 절대 헤어지지 않겠네.” 그는 갑자기 이 길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심태하의 양 아빠가 되면 그들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좋아요.” “안 돼요.” 어머니와 아들이 동시에 말했다. 심미연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심태하는
“엄마, 아파요.” 아들의 목소리에는 섬세한 억울함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마치 따스한 바람처럼 그녀의 마음 속 먹구름을 강제로 걷어낸 듯했다. 심미연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흐릿했던 시선이 아들로 집중되었다. 아들의 어린 얼굴에는 불안과 궁금함이 가득했다. “미안해. 엄마가 너무 생각에 잠겨 있었어.” 심미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고 급히 꽉 쥔 주먹을 풀며 아들을 위로하려 애썼다. 하지만 마음속의 혼란은 거세게 밀려들어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그녀의 아들, 심태하. 그 예리한 눈빛은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는 심미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작은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상태가 이상해요. 뭔가 걱정되는 일이 있죠? 나한테 숨기고 있는 거 있어요?” 심미연은 깜짝 놀라며 아들이 그녀의 이상을 이렇게 빠르게 알아챌 줄은 몰랐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그 무형의 압박감은 마치 거대한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해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빛은 흐려지고 적당한 핑계를 찾으려 애썼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심태하는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심미연의 손을 잡았다. 그의 작은 손은 아직 어렸지만 그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은 마치 겨울날 햇살처럼 심미연의 마음을 살짝 흔들었다. “엄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엄마 곁에 있을 거예요. 우리가 함께 이겨낼 거예요. 그죠?” 심미연은 코가 시큰해지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아들을 꽉 안으며 혈육의 온기와 힘을 느꼈다. 이 순간, 그녀는 의지할 곳을 찾은 듯했다. 모든 불안과 긴장이 그 따뜻한 가족애 앞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폭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녀는 강해져야 한다. 아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 말 속에는 알아채기 힘든 묵직함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