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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우담
“먼저 올라갈게요.”

정하준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최명희는 가슴팍을 눌렀다.

정윤범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성격은 꼭 당신 닮아서 이제 곧 서른인데, 또래 친구들은 벌써 결혼해서 애도 다 낳고 살잖아. 쟨 병원 밖으로만 나가면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온통 병원 생각뿐이야.”

“흥, 나 닮은 게 어때서?”

최명희가 눈을 흘기며 남편을 째려봤다.

“오늘 밤은 서재에서 자요. 나도 올라갈 거니까.”

최명희가 막 계단을 올라가려던 그때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정하준이 맞은편에서 내려왔다.

“엄마, 병원에서 급하게 수술 들어간대요. 나 먼저 갈게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현관문이 열리고 정하준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식탁에 남은 정윤범이 손바닥으로 식탁을 세게 내리쳤다.

“봐! 이게 당신 아들이야. 집에 온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인사도 없이 그냥 나가버리잖아. 누가 저런 애랑 결혼하고 싶겠어?”

“소리 좀 지르지 마요.”

최명희는 귀를 후벼 파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 혼자만의 아들이에요? 당신 아들은 아니고? 하준이도 환자한테는 책임감 있잖아요.”

...

밤 11시 반, 정하준은 병원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복도에서 유유히 걸어오던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가 반갑게 그에게 달려와 얼굴을 비볐다. 정하준은 익숙한 손길로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주방에서 물 한 컵을 들이켜고는 바로 서재로 향했다.

아침에 급히 나가느라 창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 바람이 들어와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과 자료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묵묵히 허리를 숙여 하나씩 정리했다.

요즘 집중해 보는 건, 배에 거대 종양처럼 나타나는 이상 부종 사례였다.

병력들을 한참 들여다보느라 눈이 아파오고 피로가 쌓였다. 그는 안경을 벗고 콧대를 눌러봤지만 피로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오전에 노지성이 보낸 메시지가 아직도 읽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장나연이라고 예전 2반 애 있잖아. 걔한테 물어봤거든. 강보람이랑 제일 친했는데, 걔도 연락 안 된대.]

정하준은 짧은 메시지를 오래 바라봤다.

‘가장 친한 친구도 연락이 안 된다고?’

그는 예전에 쓰던 SNS 계정을 열었다. 그 안엔 졸업 후 방치해둔 동창 단체방이 남아 있었다. 총 48명이었고 대부분은 실명으로 계정을 설정해두었지만 여섯에서 일곱 개 정도는 닉네임뿐이라 누가 누군지 알기 어려웠다.

강보람은 이미 오래전에 그를 차단해버렸기에 그 단서는 여기에 있을지 몰랐다.

정하준은 닉네임만 있는 계정 하나하나에 친구 추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명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 하준이 맞지? 반갑다야.]

[우리 요즘도 가끔 모여. 너도 한번 나와.]

다정한 인사와 함께 은근한 간 보기. 하지만 셋 다 강보람은 아니었다.

이튿날 아침 나머지 셋도 문자가 왔다. 역시나 모두 그녀가 아니었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회색 프로필 사진의 마지막 계정이었다.

정하준은 그 회색 계정을 한참 바라보다가 눌러 들어갔다.

공개된 프로필은 거의 비어 있었지만 사진은 어딘가 촌스럽고 풋풋한 소녀의 이미지였다. 지금 이 시대 감성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 계정이 강보람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던 중에도 그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친구 추가 요청은 수락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보냈고 이번엔 세 가지 질문이 함께 떴다.

[왜 나를 추가하려는 거죠? 당신 누구예요? 무슨 일이죠?]

[나 정하준이야. 너 강보람 맞지?]

그 순간 옆에 있던 동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 선생님, 오늘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시네요? 여자 친구 기다리세요?”

근처에 있던 여의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은근한 시선들이 쏟아졌다.

병원 내에서 정하준은 늘 화제였다. 특히 얼마 전, 병원장 딸과의 소개팅을 단칼에 거절한 일은 직원들 사이에서 꽤 오랫동안 회자되기도 했다.

여의사들의 고백도, 여간호사들의 조심스러운 도시락 공세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정하준은 말 그대로 철벽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방금 농담을 던졌던 남자 의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용히 자리에 돌아갔다.

...

서이담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예전에 쓰던 SNS 계정을 열었다가 정하준의 친구 요청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녀는 너무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정하준은 며칠 전부터 그녀의 SNS에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방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이담은 그 친구 요청을 못 본 척 넘겼다. 하지만 그 일주일 동안 정하준은 틈만 나면 휴대폰을 들여다보곤 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그녀의 SNS를 열어봤다. 친구 요청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는 쉬는 시간마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고 강보람의 프로필 사진은 늘 회색으로 떠 있었다. 마치 이 계정을 더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면 강보람이 정말 죽은 건 아닐까.

방금 운동을 마친 정하준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온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연한 회색 반팔 티셔츠는 땀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고 복근은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턱을 약간 들어 올린 채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었다. 땀이 오똑한 콧등을 타고 흘러내리다 날카로운 턱선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심장은 거칠게 뛰었고 도파민 분비 덕분에 잠시 생각을 지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강보람이 죽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

또 한 번 진료가 끝나고 찾아온 점심 휴식 시간.

정하준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새로운 SNS 계정을 하나 만들었다.

혹시 아직 살아 있고 이 계정을 사용 중인데 단지 그를 피하려는 건 아닐까.

그는 문득 옛날 강보람과 헤어졌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물건을 택배로 보내왔고 다시는 그 어떤 연결 고리도 남기지 않았다.

정하준은 친구 요청을 보내며 세 가지 질문에 답을 남겼다.

[왜 나를 추가하려는 거죠? 당신 누구예요? 무슨 일이죠?]

그 질문들이 지겨워진 그는 그냥 간단히 썼다.

[기성우.할 말 있어서.]

기성우는 고2 18반 체육부 부원으로 농구를 잘해서 학교에서 꽤 인기가 많았던 인물이었다.

정하준은 예전에 강보람이 장나연과 함께 기성우에게 러브레터를 건네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날 오후, 강보람의 뺨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피부가 하얀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었고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속눈썹 너머로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장나연의 팔짱을 끼고 깡총깡총 뛰었다.

고작 러브레터 하나 준 거였는데, 그렇게 기뻐할 일인가?

정하준도 알고 있었다. 기성우 이름을 도용해 친구 요청을 보낸 건 분명 옳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충동을 참지 못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냥 저질러버렸다.

만약 그녀가 수락한다면 적어도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정하준의 마음속에는 뽑히지 않은 가시 같은 감정이 있었다.

씹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언제든 염증이 되어 도져버릴 수 있는 그런 감정.

그 가시는 벌써 7년 동안 그의 몸속에 박혀 있었다.

정하준은 올해 막 귀국한 참이었다.

7년 동안 그는 강보람을 몇 번 꿈에서 본 적이 있었다.

대학교 4학년, 유학을 앞두고 그녀를 호텔로 불렀다. 하룻밤 내내 온종일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날의 강보람은 무척 순응적이었다.

애초에 그녀와 사귄 건, 의도하지 않은 사고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중독된 것처럼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정하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성적인 면에서 다소 특이한 취향이 있었다. 침대보다는 다른 공간을 선호했고 무엇보다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면 유독 자극을 느꼈다.

강보람은 뚱뚱했지만 그는 운동으로 다져진 키 187의 건장한 남자였고 그녀를 안아 드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정하준은 출국을 앞두고 그녀에게 카드를 하나 건넸다.

그 안엔 4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강보람이 그 돈을 받았을 때 정하준은 꽤 기뻤다.

평소 강보람은 자신이 주는 걸 잘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3년 동안 교제하며 이것저것 많이 사줬지만 그녀는 늘 사양했고 ‘안 받으면 버릴 거야’라는 말을 해야 그제야 마지못해 받았다.

그날도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온몸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하준이 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갖고 너 쓰고 싶은 데 써.”

강보람은 말 잘 듣고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유학길에 올랐고 출국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무렵 최명희가 전화를 걸어왔다.

“택배가 하나 왔는데, 네 이름으로 된 거야.”

정하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놔두세요.”

출국하고 처음 2주, 그는 현지 적응을 제대로 못 해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온몸에 기운이 없고 머릿속은 늘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다.

그 사이 강보람에게 연락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녀 역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문자 한 통조차 없었다.

둘은 3년이나 사귄 사이였지만 그녀는 원래 말수가 적었다. 먼저 연락을 해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몸이 좀 나아졌을 즈음 정하준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깜짝 놀랐다. 메시지 수신이 차단되어 있었다. 그는 차단당했다.

정하준은 어릴 적부터 뭐든 잘해왔고 무엇 하나 실패란 걸 몰랐던 인생이었다.

원하면 어떤 여자든 가질 수 있었고 굳이 강보람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었다.

정하준은 이렇게 생각했다.

‘유학 간 것뿐인데,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토라질 일인가?’

그래서 그때 그녀가 유난히 착하고 순하다고 느껴졌던 걸까.

그는 어이없으면서도 어딘가 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몇 달이 흘러 그가 귀국한 설날 즈음. 그 택배는 여전히 그의 서재 한켠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택배 상자 위에는 ‘정’이라는 글자만 쓰여 있었다.

정하준은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미간이 씰룩거렸다. 상자를 열면서 숨이 턱 막혀왔다.

강보람이 보낸 택배였다. 그것도 아주 큰 상자 하나.

그의 가족은 그의 물건을 함부로 열어보지 않기에 이 택배는 반 년 가까이 서재에 방치되어 있었다.

상자를 열자 정하준은 멍하니 굳어버렸다.

그 안에는 그가 강보람과 사귄 3년 동안 그녀에게 선물했던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3년간 그녀에게 보낸 모든 이체 내역을 모아 한 장의 카드로 만들어 함께 보내왔다.

그리고 물건마다 포스트잇이 하나씩 붙여져 있었다.

[2021년 3월 15일, 학교 앞 편의점]

[네가 나한테 준 아이스크림]

심지어 밥을 사준 것, 커피 한 잔, 호텔 숙박비까지 모두 날짜와 장소, 금액이 적혀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돈이 정확히 책정되어 상자 안에 깔끔하게 분류돼 있었다.

정하준이 준 선물 중 가장 고가였던 건 명품 가방 네 개, 팔찌 하나, 목걸이 하나, 손목시계 하나였고 약 1억 4천만 원 정도였다. 그런데 전부 새것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메거나 착용한 적 없었다.

값싼 물건들도 있었다. 생필품, 밥 한 끼, 간식 하나...

정하준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참을 수 없던 그는 상자를 거칠게 걷어찼다.

안에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고 그 사이에서 사용하지 않은 콘돔 두 박스가 굴러 나와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 순간 마치 그를 한심하다는 듯 비웃는 것 같았다.

강보람은 더는 어떤 연결 고리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참 깔끔하게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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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준은 소파에 앉아 집안 곳곳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그가 앉아 있는 소파는 매우 아담했지만 푹신하고 느낌이 좋았다. 거실도 크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따뜻함이 풍겨 나왔다.탁자 위에는 꽃 한 송이가 든 투명한 꽃병이 놓여 있었고 티비에는 서하율이 붙여둔 갖가지 모양의 스티커가 있었다.서하율은 강아지들을 안방으로 보낸 후 스케치북을 들고 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정하준의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며 물었다.“아저씨, 과일 먹을래요?”정하준은 그다지 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잠깐만 기다려요.”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곧바로 냉장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들고 서이담에게 과일을 꺼내 달라고 했다.“자, 여기.”서하율은 사과를 건네받은 후 곧장 거실로 달려와 정하준에게 건네주었다.정하준은 아주 잠깐이지만 서이담의 남편이 그간 어떤 곳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았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그는 시선을 들어 부엌에 있는 서이담을 바라보았다. 서이담은 끓고 있는 물은 바라보며 한 손을 들어 목을 스트레칭 했다.그러다 더운지 외투를 벗고는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일 때마다 매끈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정하준은 그 모습을 보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매우 시원하고 단 사과였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입안이 매우 쓰게 느껴졌다. 단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는 어느 순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서하율은 정하준의 뒷모습을 보며 깜짝 놀란 듯한 얼굴로 서이담을 불렀다.“엄마, 아저씨 갔어요.”서이담도 알고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으니까.정하준을 위해 끓였던 차는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다.서이담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찻물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컵에 따랐다. 그러고는 거실로 와 딸의 옆에 앉았다.“엄마, 아저씨는 왜 갑자기 가버린 거예요?”서하율이 조금 서운한 얼굴로 물었다.“아마 급한 일이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5화

    아파트 주민들 중 진재현과 서이담의 결혼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동네방네 떠벌릴 정도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젊은이들은 이해해 줄지 몰라도 나이 든 어르신들은 만날 때마다 혀를 차며 혼을 낼 게 분명했다.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되는대로 흘려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부부 사이를 자꾸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은 그저 한 귀로 흘려들었다....드디어 집 앞에 도착했다.서하율은 지금 이 상황이 꼭 게임처럼 재밌는지 서이담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서이담도 그런 아이를 향해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자, 이제 내려와.”그녀는 아이와 함께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늘 이렇게 다시 웃게 되었다.정하준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를 안은 채 6층을 올라왔는데도 그는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서이담은 문을 연 후 현관에서 슬리퍼로 갈아신었다.정하준은 평온한 얼굴로 현관에 발을 들였다가 무언가를 보고는 금방 표정을 굳혔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가지런히 놓여있는 남자용 슬리퍼였다. 그것도 새것이 아닌 이미 신은 흔적이 있는 슬리퍼였다.서이담네 집의 신발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서이담의 신발부터 어린애 신발, 그리고 남자의 신발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정하준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서이담은 결혼을 한 유부녀고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정하준은 꼭 누군가가 그의 비도덕적인 마음과 황당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아프게 찔러대는 것 같았다.아기 고양이처럼 안겨 오던 서하율도, 그가 손을 잡고 억지로 끌고 왔던 서이담도 모두 그의 것이 아닌 다른 남자의 것이었다.정하준은 순간, 서이담과 서하율이 모두 자신의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정하준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이내 슬리퍼를 무시하고 양말만 신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서이담은 정하준이 설마 안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기에 조금 벙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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