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강한결의 전 재산은 87만 원이었다.
장학금에서 생활비를 빼고 남은 돈에 고시원 방을 구하면서 맡긴 보증금 50만 원까지 제외하고 나니, 지금 당장 손에 쥐고 움직일 수 있는 돈은 고작 87만 원뿐이었다. 전생에서 중견기업 CEO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남자가 다시 시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한결은 그 돈을 바라보면서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시원 책상 위에 노트를 펼쳐놓고 날짜부터 적어 내려갔다. 2018년 3월 펜끝을 잠시 멈춘 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숫자를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비트코인은 지금 바닥에 가깝다.» 전생의 자신은 비트코인을 너무 늦게 알았다. 주변에서 투자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가격이 상당히 오른 뒤였고, 뒤늦게 조금 사들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2018년 3월, 비트코인은 800만 원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앞으로 더 떨어질 예정이었고,연말에는 400만 원대까지 내려가고, 그 뒤로 긴 침체기를 보내다가 2020년 말부터 다시 무섭게 치솟기 시작한다. 그리고 2021년 수천만 원을 넘어 8천만 원대까지 올라간다. 머릿속에서 숫자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계산이 이어졌다. 87만 원으로 지금 당장 비트코인을 사 봐야 큰 의미는 없었다. 가진 돈을 전부 넣어도 0.1개가 채 되지 않으니, 지금 필요한 건 비트코인을 사는 일이 아니라 비트코인을 살 수 있는 돈을 만드는 것이었다. 한결은 노트의 다음 줄에 천천히 적었다. «첫 번째 수는 주식. 안전하게 종잣돈을 만든다.» 전생에서 사업을 하며 쌓은 경험은 지금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 어떤 바이오 기업이 임상 3상 결과를 발표하는지, 어느 게임사가 해외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는지, 어떤 플랫폼이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는지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일이 언제쯤 주가에 반영될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일이 전생과 똑같이 흘러간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사소한 변수 하나가 시장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었지만, 남들이 몇 년 뒤에 알게 될 정보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리했다. 한결은 펜을 내려놓지 않은 채 다음 계획을 적었다. «6개월 안에 1억.» 계산대로라면 가능했다. 1억을 만든 뒤 비트코인이 바닥을 찍는 시점에 들어가고, 2020년 말부터 상승세가 시작되면 일부를 현금화해 다시 부동산과 스타트업에 나눠 투자한다. 돈이 돈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속도가 달라질 것이다. '3년이면 충분해.' 그렇게 생각하던 손이 문득 멈췄다. 노트 한가운데 적혀 있는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윤서하. 한결은 한동안 그 이름을 바라봤다. 돈이 목적은 아니었다. 돈은 그저 힘이었다. 서하를 지킬 수 있는 힘이고, 최정호와 오수빈의 손에서 그녀를 빼낼 수 있는 힘이면서, 언젠가 한성그룹과 파트너가 되어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설 수 있는 위치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다. 전생에서는 그 힘을 너무 늦게 얻었다. 서하가 죽은 뒤에야 자신에게 충분한 힘이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때는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하가 죽기 전에 갖는다. 한결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노트를 천천히 덮었다. 이번 생에서는 절대로 늦지 않을 생각이었다. --- 같은 시간, 캠퍼스에는 따뜻한 봄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오전 수업을 마친 서하는 도서관으로 향하다가 문득 걸음을 늦췄다. 전생의 자신이라면 사람이 가장 적은 구석 자리를 찾아 들어갔을 것이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것도 싫었고, 괜히 눈에 띄는 것도 두려워서 늘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만 골랐다. 그런데 오늘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햇빛이 조금 강하게 들어오는 자리였고,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도 그대로 보였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별것 아닌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서하에게는 꽤 큰 변화처럼 느껴졌다. 책을 펼치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고,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손가락이 멈췄다. [아빠] «서하야, 미정이한테 들었다. 이번 주 못 온다고? 시험기간이면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보자.» 한동안 메시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먼저 연락해 온 적이 있었던가. 전생에서는 집에 오라는 말도, 언제 올 거냐는 말도 대부분 새엄마를 통해 전해졌다. 아버지는 늘 바빴고, 서하 역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처음으로 거절했으니까.'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으니 아버지는 자신이 언제든 새엄마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움직이면 된다. 서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전화를 들고 천천히 답장을 적었다. [나] «아빠, 다음 주 토요일 괜찮으세요? 아빠랑 둘이 밥 먹고 싶어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손끝이 괜히 떨렸다. 둘이. 새엄마도 없고, 이복동생 준혁이도 없이 아버지와 자신만 함께하는 식사였다. 전생의 서하에게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5분쯤 지났을 때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고, 화면을 확인하자 짧은 답장이 떠 있었다. «그래. 좋다.» 겨우 두 글자였다. 그런데 그 짧은 말이 이상할 정도로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서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업에만 몰두하면서 가족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고, 그 빈자리를 새엄마가 채우도록 내버려두었던 것뿐일 수도 있었다. 전생에는 그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지만, 이번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다가가면 된다. --- 일주일 뒤 토요일. 강남의 조용한 일식집 안쪽 룸에서 부녀가 마주 앉았다. 한성그룹의 회장이자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대기업 총수인 윤태주는 5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막상 딸과 단둘이 앉으니 평소의 위압적인 모습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몇 번이나 흘렀다. 먼저 말을 꺼낸 것도 그였다. "밥은 잘 먹고 다니냐?" "네. 잘 먹어요." "수업은…… 할 만하고?" "재밌어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전생에도 비슷한 대화는 나눴다. 하지만 그때는 늘 누군가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새엄마는 자연스럽게 준혁의 이야기를 꺼냈고, 서하에게 필요한 것을 부탁하거나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곤 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아버지와 딸이 서로의 마음을 이야기할 기회는 사라졌다. 오늘은 둘뿐이었다. 서하는 식탁 아래에서 손을 꼭 맞잡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서웠다. 이 말을 꺼냈다가 또 외면당하면 어떡하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아빠." "응." "나 아빠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윤태주의 젓가락이 멈췄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아빠는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순간 식탁 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보였고, 서하의 손끝도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아빠가 미정 여사 아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필요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30년 동안." 실제로는 스물두 살이었다. 하지만 전생의 시간까지 모두 합치면 그녀에게는 정말 30년처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 엄마를 잃고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믿으면서 살아온 세월과 새엄마의 눈치를 보며 동생에게 밀려나던 시간, 조금만 더 착하게 굴면 언젠가는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까지 모두 가슴속에 쌓여 있었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올라오자 목이 뜨거워졌다. 윤태주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짧은 한마디였다. 서툴고 부족한 사과였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끝내 듣지 못했던 말. 그토록 듣고 싶었던 한마디가 이제야 자신의 앞에 놓였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지만, 서하는 애써 참으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울지 않기로 했다. "아빠." "응." "다음에도 둘이 밥 먹어요." 잠시 숨을 고른 뒤 조금 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자주요." 윤태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붉어진 눈가가 그날따라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 같은 시각, 고시원 작은 방에서는 한결이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87만 원이 전부였던 주식 계좌에는 어느새 다른 숫자가 떠 있었다. +23%. 107만 원을 넘어선 금액을 확인한 그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일주일 만에 20만 원이 불어났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돈일지도 몰랐지만, 한결에게는 분명한 시작이었다. 화면을 끄고 노트를 펼친 뒤 다음 계획을 적어 내려갔다. «4월 — 실적 발표 예정 게임사 5월 — 정부 정책 수혜 2차전지 관련주 하반기 — 비트코인 추가 하락 연말 — 저점 매수» 전생의 기억은 그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모든 일이 정확하게 똑같이 흘러갈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시장의 흐름과 기업의 성장 시점, 그리고 수많은 사건이 발생할 시기를 이미 한 번 경험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리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이번에는 주식 종목보다 훨씬 중요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2020년 한성그룹 전생의 한성그룹은 중국 시장 투자 실패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한결이 운영하던 중견기업이 긴급 자금을 투입하면서 그룹을 위기에서 끌어냈고, 그 일을 계기로 윤태주 회장의 신뢰를 얻었다. 그것이 훗날 파트너 계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더 많은 자본을 확보한 뒤 한성그룹이 위기에 빠졌을 때 단순히 도움을 주는 수준을 넘어, 그룹의 운명을 바꿀 만큼 강력한 파트너가 될 것이다. 그렇게 윤태주의 신뢰를 얻으면 자연스럽게 한성그룹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박미연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최정호가 언제 서하에게 접근하는지 오수빈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전생에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늦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서하에게 손을 뻗는 순간부터 하나씩 잘라낼 생각이었다. 한결은 노트 마지막 줄에 짧게 적었다. «서하는 내가 지킨다.»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니 고시원 창문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화려한 빌딩의 불빛을 보고 있으니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잠들었을까 오늘도 아무것도 모른 채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아직은 몰라도 된다. 죽음의 진실도, 최정호와 오수빈의 음모도, 자신이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도 그 모든 것은 자신이 감당하면 된다. 이번에는 그녀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도록 매일 밤 아무 걱정 없이 잠들 수 있도록 그리고 8년 뒤에도, 그보다 더 먼 미래에도 살아 있을 수 있도록 한결은 노트북을 닫고 천천히 불을 껐다. 고작 87만 원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돈이었지만,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온 그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첫 수익은 20만 원 아직 작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한결은 어둠 속에서 눈을 감으며 조용히 생각했다. 87만 원으로 시작한 두 번째 인생 아직 갈 길은 멀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강한결의 전 재산은 87만 원이었다.장학금에서 생활비를 빼고 남은 돈에 고시원 방을 구하면서 맡긴 보증금 50만 원까지 제외하고 나니, 지금 당장 손에 쥐고 움직일 수 있는 돈은 고작 87만 원뿐이었다.전생에서 중견기업 CEO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남자가 다시 시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한결은 그 돈을 바라보면서도 조급해하지 않았다.오히려 고시원 책상 위에 노트를 펼쳐놓고 날짜부터 적어 내려갔다.2018년 3월펜끝을 잠시 멈춘 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숫자를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비트코인은 지금 바닥에 가깝다.»전생의 자신은 비트코인을 너무 늦게 알았다.주변에서 투자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가격이 상당히 오른 뒤였고, 뒤늦게 조금 사들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는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2018년 3월, 비트코인은 800만 원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앞으로 더 떨어질 예정이었고,연말에는 400만 원대까지 내려가고, 그 뒤로 긴 침체기를 보내다가 2020년 말부터 다시 무섭게 치솟기 시작한다.그리고 2021년수천만 원을 넘어 8천만 원대까지 올라간다.머릿속에서 숫자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계산이 이어졌다.87만 원으로 지금 당장 비트코인을 사 봐야 큰 의미는 없었다. 가진 돈을 전부 넣어도 0.1개가 채 되지 않으니, 지금 필요한 건 비트코인을 사는 일이 아니라 비트코인을 살 수 있는 돈을 만드는 것이었다.한결은 노트의 다음 줄에 천천히 적었다.«첫 번째 수는 주식.안전하게 종잣돈을 만든다.»전생에서 사업을 하며 쌓은 경험은 지금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어떤 바이오 기업이 임상 3상 결과를 발표하는지, 어느 게임사가 해외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는지, 어떤 플랫폼이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는지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일이 언제쯤 주가에 반영될지도 기억하고 있었다.물론 모든 일이 전생과 똑같이 흘러간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사소한 변수 하나가 시장의 흐름
그는 죽는 순간을 정확히 기억했다.빗길이었다.한강대교 위 핸들을 잡은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고, 눈앞에는 빗줄기가 벽처럼 쏟아지고 있었다.하지만 핸들을 놓친 건 졸음 때문이 아니었다.'서하가 죽었어.'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사흘 전이었다.업무차 한성그룹 본사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복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들었다."윤 회장님 딸 강도 사건 당하셨대""결혼하신 지 얼마 안 됐다던데""남편분이 장례 치르셨다더라"순간 발이 멈췄다.윤 회장의 딸대학교 시절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아무런 설명도 없이 떠나버린 여자오랫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여자윤서하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은 지 벌써 7년이었다.한성그룹과 계약을 맺으며 회장의 이름을 봤을 때도 일부러 연결 짓지 않았다.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결국 확인했다.부고 기사를 찾아봤고,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서하였다.장례식장에도 갔다.누구에게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그저 맨 뒤에 서서 영정 사진만 바라봤다.사진 속 그녀는 웃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알던 웃음은 아니었다.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그때 상주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남편눈은 부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무언가를 계산하는 사람 같았다.문상객이 두고 간 봉투를 흘끗 바라보는 시선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밀려왔다.근거는 없었다.그저 직감이었다.하지만 며칠 뒤 그 직감은 사실이 되었다.사업을 하며 사람의 뒷면을 읽는 법을 배웠다.그래서 그 남자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보고서를 읽는 동안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결혼 전부터 이어진 외도결혼 후에도 계속된 관계공동명의로 변경된 재산사망 직후 진행된 보험금 수령 절차그리고 마지막 기록 사망 추정 시각 직전의 통화 내역상대는 내연녀였다.강도 사건이라면 설명되지 않는 것
차가웠다.아스팔트가 왼쪽 뺨에 닿아 있었다.눈앞은 흐릿했다. 번진 가로등 불빛 사이로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강도그제야 상황이 떠올랐다.배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을 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다.아...이대로 정말 죽는 건가?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전화해야 하는데죽어가면서도 남편 걱정을 하고 있었다. 늦게 들어오면 밥이 식을 텐데 문자를 보내려던 참이었다.그 문자 하나 보내지 못한 것이 마지막 미련이었다.참 한심했다.시야가 점점 좁아졌다.서울의 3월 밤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가로등 불빛마저 천천히 사라졌다.그리고 완전한 어둠---눈을 떴다.하얀 천장이 보였다.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곰팡이가 핀 익숙한 천장몸을 일으켰다.좁은 원룸 책상 위에 쌓인 전공서적,벽에 붙어 있는 강의 시간표,침대 옆 협탁 위의 낡은 휴대폰모든것이 이상했다.휴대폰을 집어 들었다.2018년 3월 2일 금요일 오전 7시 12분숨이 턱 막혔다.거울 앞으로 다가갔다.스물두 살의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통통한 뺨,다크서클 하나 없는 피부,염색하기 전의 검은 머리 한동안 거울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에 주저앉았다.방금 전까지 죽어가고 있었다.그런데 지금은 8년 전 대학생 시절의 원룸에 앉아 있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칼이 몸을 파고들던 감각도, 차가운 아스팔트의 냉기도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죽음은 분명했다.---기억이 밀려왔다.잊고 싶었던 과거까지 전부 처음 만난 건 회사 선배였다."넌 회장 딸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너라서 좋아."그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었던 그녀는 그 말에 모든 걸 걸었다.결혼식 날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새어머니는 축복 대신 비웃음을 보냈고, 남자는 괜찮다고 말했다.둘만 행복하면 된다고,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결혼 후 반년쯤 지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귀가는 늦어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