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는 죽는 순간을 정확히 기억했다.
빗길이었다. 한강대교 위 핸들을 잡은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고, 눈앞에는 빗줄기가 벽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핸들을 놓친 건 졸음 때문이 아니었다. '서하가 죽었어.'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사흘 전이었다. 업무차 한성그룹 본사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복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들었다. "윤 회장님 딸 강도 사건 당하셨대" "결혼하신 지 얼마 안 됐다던데" "남편분이 장례 치르셨다더라" 순간 발이 멈췄다. 윤 회장의 딸 대학교 시절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떠나버린 여자 오랫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여자 윤서하 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은 지 벌써 7년이었다. 한성그룹과 계약을 맺으며 회장의 이름을 봤을 때도 일부러 연결 짓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확인했다. 부고 기사를 찾아봤고,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서하였다. 장례식장에도 갔다. 누구에게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저 맨 뒤에 서서 영정 사진만 바라봤다. 사진 속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던 웃음은 아니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때 상주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눈은 부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계산하는 사람 같았다. 문상객이 두고 간 봉투를 흘끗 바라보는 시선 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밀려왔다. 근거는 없었다. 그저 직감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그 직감은 사실이 되었다. 사업을 하며 사람의 뒷면을 읽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그 남자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 보고서를 읽는 동안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결혼 전부터 이어진 외도 결혼 후에도 계속된 관계 공동명의로 변경된 재산 사망 직후 진행된 보험금 수령 절차 그리고 마지막 기록 사망 추정 시각 직전의 통화 내역 상대는 내연녀였다. 강도 사건이라면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보고서를 덮은 뒤에도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날 밤 그는 한강대교 위를 달렸다.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렸다. 머릿속에는 영정 사진 속 얼굴만 떠올랐다. 왜 그렇게 외로워 보였을까. 왜 아무도 몰랐을까 그리고 왜 자신은 끝까지 붙잡지 못했을까 대학교 시절 갑작스럽게 이별 통보를 받았을 때 이유를 알고 싶었다.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혹시 정말 자신을 싫어하게 된 거라면 혹시 자신이 부담이 된 거라면 그래서 물러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배려가 아니었다. 비겁함이었다. 핸들이 미끄러졌다.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붉게 물드는 시야 속에서 마지막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번에는 절대 놓지 않을 텐데.' 다시 눈을 떳을때는 천장이 보였다. 한쪽이 깜빡이는 형광등,좁은 원룸 벽에 붙은 취업 준비 일정표 빨랫줄에 걸린 셔츠 너무도 익숙한 공간이었다. 급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2018년 3월 2일 오전 6시 48분 숨이 턱 막혀왔다. 8년 전이라니!.. 거울 앞에 서보니 스물네 살의 얼굴이 비쳤다. 수염이 거칠게 자라 있었고, 다크서클은 짙었다. 취업 준비에 지친 청춘의 얼굴 전생의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몇 년 뒤 회사를 세우고,투자를 받아 성공을 하게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였을까 정작 가장 소중한 사람 하나 지키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다르다.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면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메모장을 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상승할 종목,성장할 기업,재개발 예정 지역 시장의 흐름 전생의 경험은 이미 지도가 되어 있었다. 펜이 멈췄을 때 결심도 끝나 있었다. 돈을 벌어서 힘을 만들자 그리고 지켜내자 이번에는 반드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새 학기 첫 주 그녀가 학교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죽음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긴장감이었다. 강의실 앞 학생들 사이로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머리,흰 셔츠,청바지 기억 속 그대로였다. 발걸음이 그대로 멈춰섰다. 믿을 수 없었다. 정말 살아 있었다니.. 온몸이 굳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 손끝이 떨려왔다. 하지만 참았다. 그녀는 아직 이별도,죽음도 아무것도 모를테니 이내 시선이 마주쳤고 잠시 멈칫한 그녀가 이쪽을 바라봤다. 그는 애써 평소와 같은 표정을 만들며 손을 들었다. "어, 서하"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작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기억 속 마지막 모습은 영정 사진 속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눈이 웃고 있었다. 따뜻하게 살아 있는 사람처럼 아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겨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오랜만이다." 짧은 인사가 오갔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시 얻은 기분이었다. 아직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를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강한결의 전 재산은 87만 원이었다.장학금에서 생활비를 빼고 남은 돈에 고시원 방을 구하면서 맡긴 보증금 50만 원까지 제외하고 나니, 지금 당장 손에 쥐고 움직일 수 있는 돈은 고작 87만 원뿐이었다.전생에서 중견기업 CEO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남자가 다시 시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한결은 그 돈을 바라보면서도 조급해하지 않았다.오히려 고시원 책상 위에 노트를 펼쳐놓고 날짜부터 적어 내려갔다.2018년 3월펜끝을 잠시 멈춘 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숫자를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비트코인은 지금 바닥에 가깝다.»전생의 자신은 비트코인을 너무 늦게 알았다.주변에서 투자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가격이 상당히 오른 뒤였고, 뒤늦게 조금 사들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는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2018년 3월, 비트코인은 800만 원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앞으로 더 떨어질 예정이었고,연말에는 400만 원대까지 내려가고, 그 뒤로 긴 침체기를 보내다가 2020년 말부터 다시 무섭게 치솟기 시작한다.그리고 2021년수천만 원을 넘어 8천만 원대까지 올라간다.머릿속에서 숫자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계산이 이어졌다.87만 원으로 지금 당장 비트코인을 사 봐야 큰 의미는 없었다. 가진 돈을 전부 넣어도 0.1개가 채 되지 않으니, 지금 필요한 건 비트코인을 사는 일이 아니라 비트코인을 살 수 있는 돈을 만드는 것이었다.한결은 노트의 다음 줄에 천천히 적었다.«첫 번째 수는 주식.안전하게 종잣돈을 만든다.»전생에서 사업을 하며 쌓은 경험은 지금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어떤 바이오 기업이 임상 3상 결과를 발표하는지, 어느 게임사가 해외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는지, 어떤 플랫폼이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는지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일이 언제쯤 주가에 반영될지도 기억하고 있었다.물론 모든 일이 전생과 똑같이 흘러간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사소한 변수 하나가 시장의 흐름
그는 죽는 순간을 정확히 기억했다.빗길이었다.한강대교 위 핸들을 잡은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고, 눈앞에는 빗줄기가 벽처럼 쏟아지고 있었다.하지만 핸들을 놓친 건 졸음 때문이 아니었다.'서하가 죽었어.'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사흘 전이었다.업무차 한성그룹 본사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복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들었다."윤 회장님 딸 강도 사건 당하셨대""결혼하신 지 얼마 안 됐다던데""남편분이 장례 치르셨다더라"순간 발이 멈췄다.윤 회장의 딸대학교 시절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아무런 설명도 없이 떠나버린 여자오랫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여자윤서하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은 지 벌써 7년이었다.한성그룹과 계약을 맺으며 회장의 이름을 봤을 때도 일부러 연결 짓지 않았다.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결국 확인했다.부고 기사를 찾아봤고,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서하였다.장례식장에도 갔다.누구에게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그저 맨 뒤에 서서 영정 사진만 바라봤다.사진 속 그녀는 웃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알던 웃음은 아니었다.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그때 상주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남편눈은 부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무언가를 계산하는 사람 같았다.문상객이 두고 간 봉투를 흘끗 바라보는 시선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밀려왔다.근거는 없었다.그저 직감이었다.하지만 며칠 뒤 그 직감은 사실이 되었다.사업을 하며 사람의 뒷면을 읽는 법을 배웠다.그래서 그 남자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보고서를 읽는 동안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결혼 전부터 이어진 외도결혼 후에도 계속된 관계공동명의로 변경된 재산사망 직후 진행된 보험금 수령 절차그리고 마지막 기록 사망 추정 시각 직전의 통화 내역상대는 내연녀였다.강도 사건이라면 설명되지 않는 것
차가웠다.아스팔트가 왼쪽 뺨에 닿아 있었다.눈앞은 흐릿했다. 번진 가로등 불빛 사이로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강도그제야 상황이 떠올랐다.배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을 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다.아...이대로 정말 죽는 건가?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전화해야 하는데죽어가면서도 남편 걱정을 하고 있었다. 늦게 들어오면 밥이 식을 텐데 문자를 보내려던 참이었다.그 문자 하나 보내지 못한 것이 마지막 미련이었다.참 한심했다.시야가 점점 좁아졌다.서울의 3월 밤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가로등 불빛마저 천천히 사라졌다.그리고 완전한 어둠---눈을 떴다.하얀 천장이 보였다.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곰팡이가 핀 익숙한 천장몸을 일으켰다.좁은 원룸 책상 위에 쌓인 전공서적,벽에 붙어 있는 강의 시간표,침대 옆 협탁 위의 낡은 휴대폰모든것이 이상했다.휴대폰을 집어 들었다.2018년 3월 2일 금요일 오전 7시 12분숨이 턱 막혔다.거울 앞으로 다가갔다.스물두 살의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통통한 뺨,다크서클 하나 없는 피부,염색하기 전의 검은 머리 한동안 거울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에 주저앉았다.방금 전까지 죽어가고 있었다.그런데 지금은 8년 전 대학생 시절의 원룸에 앉아 있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칼이 몸을 파고들던 감각도, 차가운 아스팔트의 냉기도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죽음은 분명했다.---기억이 밀려왔다.잊고 싶었던 과거까지 전부 처음 만난 건 회사 선배였다."넌 회장 딸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너라서 좋아."그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었던 그녀는 그 말에 모든 걸 걸었다.결혼식 날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새어머니는 축복 대신 비웃음을 보냈고, 남자는 괜찮다고 말했다.둘만 행복하면 된다고,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결혼 후 반년쯤 지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귀가는 늦어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