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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Author: 홍피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4 12:24:28

분홍색 슬리퍼에 발을 넣고 안으로 들어가자 태혁은 이재의 캐리어를 그대로 침실까지 끌고 갔다.

전에도 몇 번 와본 집이었다. 소파도 식탁도, 지나치게 정돈된 주방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현관에 벗어놓은 자신의 구두와 태혁의 신발이 나란히 놓인 걸 보고 나니 이상하게 전과 같은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태혁이 침실 바닥에 캐리어를 펼쳤다.

급하게 챙겨온 것치고는 제법 많았다. 출근할 때 입을 옷과 화장품, 세면도구에 충전기까지 들어찬 캐리어를 내려다보던 이재가 웃었다.

“나 진짜 여기 살러 온 것 같아요.”

태혁도 안을 한번 내려다봤다.

“그러네요.”

너무 아무렇지 않게 받아서 이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리 좀 할게요.”

몸을 숙여 셔츠를 꺼내려는데 태혁이 먼저 집어 들었다. 그대로 옷장 문을 열더니 자기 옷을 한쪽으로 밀어 자리를 만들고, 이재의 셔츠를 빈 옷걸이에 걸었다.

“태혁 씨.”

“네.”

“내가 할 수 있는데.”

“알아요.”

그러면서도 재킷까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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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정한 지옥   73화

    “대리님.” 다은의 목소리에 이재가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다은은 대답 대신 창밖을 가리켰다. “우와!”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탄성이 터졌다. 이재도 창밖을 봤다. 통유리 너머로 하얀 눈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리에 닿자마자 녹아 없어지던 것이 어느새 제법 눈에 보일 만큼 많아졌다. 다은은 벌써 휴대전화를 들고 창가로 달려갔다. “첫눈이에요.” “아.” “반응이 왜 그래요?” 이재는 창밖을 한 번 더 봤다. “오늘 운전 어떻게 하지.” “…….” “길 막히겠네.” 다은이 혀를 찼다. “진짜 낭만 없다.” “눈이잖아요.” “첫! 눈이잖아요.” 이재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메일 한 통을 마저 쓰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회의가 하나 있었고, 수정해야 할 보고서가 두 개 생겼다. 첫눈이라고 별일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오후가 저물수록 눈발은 조금씩 굵어졌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즈음에는 맞은편 건물의 불빛 사이로 흰 눈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재가 노트북을 덮고 코트를 입자 다은이 물었다. “대리님 오늘 바로 집 가세요?” “그래야죠.” “첫눈이 온 날인데요?” 이재가 가방을 들었다. “그러니까 더 빨리 가야죠.” “와.” 다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심하다.” 이재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봐요.” “네. 운전 조심하세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탔다. 시동을 켜자 내비게이션에 집까지 40여 분이 찍혔다. 평소보다 10분 정도 더 걸리는 수준이었다. 이재는 잠시 화면을 보다가 기어를 넣었다. 집으로 향하던 차는 두 번째 교차로에서 방향을 바꿨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왠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 큰맘 먹고 본 영화치고 내용은 그저 그랬다. 단지 슬픈 영화라서는 아니었다. 러닝타임 내내 사람을 그렇게 고생시켜놓고 마지막까지 불행한 건 좀

  • 다정한 지옥   72화

    이재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기다리라고 하기에는 미안했고, 기다리지 말라고 하기에는 마음에 남은 게 너무 많았다. 좋아하지 않아서 떠나는 게 아니었다. 그 반대라서 어려웠다. “기다리지 마요.” 태혁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이재는 그걸 보고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한참 뒤 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날 밤은 이상하리만큼 평범하게 지나갔다. 태혁은 거실에서 잤고, 이재는 침대에 누웠다. 처음 이 집에서 잤던 밤처럼 문을 열어두지도 않았다.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잠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이재가 캐리어를 끌고 나오자 태혁은 이미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칫솔도, 화장품도, 옷도 전부 캐리어 안에 들어 있었다. 이재가 신발을 신는 동안 태혁이 손잡이를 가져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재는 말리지 못했다. 복도로 나오자 캐리어 바퀴가 낮게 굴렀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태혁이 버튼을 눌렀다. 둘 사이에 캐리어 하나가 놓였다. 이재는 내려오는 숫자를 바라보다 괜히 옷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태혁이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재가 뒤따라 들어서려는데 태혁은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정말 안 데려다줘도 돼요?” “네. 경호팀이 밑에서 기다린대요.” 태혁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놓았다. “알았어요.” 이재가 안으로 들어섰다. 태혁은 문밖으로 물러났다.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문은 알아서 움직였다. “도착하면…….” 태혁이 말을 멈췄다. 이재가 고개를 들었다. 몇 초쯤 그렇게 서로를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삼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연락해요.” 이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태혁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읽기 어려웠다.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좁아지는 틈 사이로 태혁이 보였

  • 다정한 지옥   71화

    태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이상하게 길었다. “십 년 전부터 의심했습니다.” 이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십 년 전부터요?” “네.” “그때부터 아빠가 표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네.” 대답은 짧았다. 이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걸 확신하게 된 건 언제예요?”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며칠 전입니다.” 며칠 전. 이재는 가만히 태혁을 바라봤다. “그럼 내가 세림호텔 얘기 물어봤을 때는요?” 태혁의 시선이 멈췄다. “그때도 이미 확인한 뒤였어요?” 잠시 후 대답이 돌아왔다. “……네.” 차 안에서 자신이 물었다. 왜 하필 우리 호텔일까요. 그때 태혁은 확인할 게 있다고 했다. 확인되면 말해주겠다고. 그보다 전에는 서진우의 아버지가 세림호텔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자신이 먼저 알아냈다. 그때도 물었다. 지금도 아무 연결이 없느냐고. 태혁은 다시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이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그때 다시 확인하고 있다고 한 건…….” “김현석하고 현재 사건이 어디까지 연결돼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는 뜻이었어요.” “아빠가 서진우의 표적이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요.” “……네.” 이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은 차분했다. “왜 말 안 했어요?” 태혁의 입술이 굳었다. “김현석 쪽도 더 확인해야 했고, 지금 사건과 어디까지 연결되는지 확실하지 않았어요.” “그게 다예요?” 대답이 없었다. 이재가 그를 바라봤다. “내가 알면 힘들까 봐요?” 태혁은 끝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 이재는 그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말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도 그렇게 말했어요.” “…….” “내가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태혁의 표정이 굳었다. “아빠는 오늘 나한테 거짓말했어요.” 서진우가 자신을 찾아오겠다고 직접 연락했다는 걸 숨긴 채, 몰랐다고

  • 다정한 지옥   70화

    출근하자마자 메일함을 열던 이재의 손이 멈췄다. 새벽에 들어온 메일 하나가 읽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제목은 없었다. 발신자는 김현석이었다. 태혁에게 몇 번이나 들어 이미 익숙해진 이름이었다. 이재는 메일을 열었다. [십 년 전, 서진우는 당신 아버지에게 직접 연락했습니다. 미리 찾아가겠다고까지 했는데, 왜 그날 당신의 어머니가 죽었을까요.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세요.] 짧은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어제까지 자신이 찾아낸 것들 위로 마지막 한 조각이 떨어졌다. 이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 회장실에서 마주 앉은 윤정호는 이재가 서진우의 이름을 꺼내자 예상했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진우 아버지, 세림호텔에서 일했죠?” “……어떻게 알게 됐니. 강 형사가 말하던?” “제가 찾았어요.” 정호의 시선이 이재에게 머물렀다. “사고 난 것도 알고 계셨죠?” “알고 있었다.” “자료를 보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재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봤다. “당시에 그 사고를 조용히 정리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 정호의 표정이 굳었다. “그중에서도 승계 구도 제일 위에 있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이재야.” “아빠였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는 회사가 먼저였다.” 부정은 아니었다. “사고 하나로 회사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어.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렇게 정리하신 거예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한 거다.” 정호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이재를 바라봤다. “그게 결국 너한테까지 돌아올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겠지.” 이재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서진우가 우리 집에 온 것도 그 일 때문이었던 거죠.” 정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경찰에서도 지금은 그렇게 의심하고 있다더구나.” “그럼 서진우가 사람들을 죽인 것도…… 아빠 때문인 거예요?” “그것까지 전부 내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 정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 다정한 지옥   69화

    태혁은 잠시 김현석을 바라봤다. “뭘 모른다는 겁니까.” “십 년 전에 자기 집에서 왜 사람이 죽었는지.” “서진우가 윤정호 회장을 노렸다는 뜻입니까.” 김현석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내려다봤다. “진우 아버지가 세림호텔에서 일했던 건 아시죠.” “압니다.” “사고 난 것도.” “네.” 김현석의 시선이 다시 올라왔다. “알고 계셨네요.” 태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요.” “서진우가 윤정호 회장한테 원한을 품은 것도 알고 있었습니까.” “네.” “그래서 찾아간 겁니까.” “찾으러 간 겁니다. 집을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확한 주소를 몰랐습니다. 성림동에 산다는 것만 알았어요. 그래서 시설 점검 기사로 위장해서 집집마다 돌아다닌 겁니다.” 십 년 전 수사 기록이 머릿속을 스쳤다. 부유층 주택가. 시설 점검을 핑계로 문을 열게 한 뒤 벌어진 살인. 서로 아는 사이도,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재산과 거주 지역을 제외하면 피해자들 사이에서 끝내 공통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무작위라고 생각했다. “그럼 앞에 죽은 사람들은 뭡니까.” 김현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죽이려고 들어간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 “첫 번째 집에서 들켰습니다. 진우가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고, 신고하려고 했어요.” 태혁의 시선이 굳었다. “그래서 죽인 겁니까.” “네.” 짧은 대답이 떨어졌다. 김현석은 한동안 테이블만 바라봤다. “그다음부터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윤정호를 찾는 건 멈추지 않았고, 정체를 들키거나 신고하려는 사람이 생기면 죽였어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마지막 말에서 아주 조금 느려졌다. “그때부터는 저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말릴 생각은 있었습니까.” 김현석의 시선이 멈췄다. “있었습니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없었습니다.” 태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십 년

  • 다정한 지옥   68화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태혁에게 연락이 왔다. [내려와요.] 이재는 모니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오전부터 띄워두었던 문서 제목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경영진 보고. 자신의 아버지, 윤정호. 그리고 십 년 전 자신이 살아남았던 그 집. 하지만 더 찾아보지는 않았다. 김현석의 차가 범행 현장 근처에서 확인됐고, 경찰은 영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쪽에서 답이 나올 차례였다. *** 차는 회사 건너편에 서 있었다. 이재가 조수석에 타자 태혁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요.” 안전벨트를 매는 동안에도 전화가 한 번 울렸다. 태혁은 화면만 확인하고 시동을 걸었다. “바빠 보여요.” “좀.” 차가 도로로 들어섰다.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이재도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았다. 태혁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린 건 신호에 걸렸을 때였다. 이번에는 바로 받았다. “어.” 준호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태혁의 표정이 달라졌다. “나왔어?” 잠시 뒤 그가 시간을 확인했다. “알았어. 바로 갈게.” 통화를 끊은 태혁이 말했다. “영장 나왔어요.” 이재가 그를 돌아봤다. “바로 가요?” “네.” “김현석한테?” 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이 조용해졌다. 이재는 잠시 앞을 바라보다 말했다. “잡아요.” 태혁의 시선이 잠깐 이재에게 향했다. “꼭.” 신호가 바뀌었다. 태혁이 다시 앞을 보며 대답했다. “네.” *** 태혁의 집에 도착하자 이재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태혁은 평소처럼 현관 앞까지 함께 올라왔다. 문을 열던 이재가 돌아봤다. “조심해요.” “알았어요.” “끝나면 연락하고.” “네.” 태혁은 이재가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곧바로 돌아섰다. *** 김현석이 사는 곳은 오래된 빌라였다. 골목 안쪽에 들어선 건물 앞에 준호가 먼저 와 있었다. 태혁이 차에서 내리자 준호가 다가왔다. “차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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