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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다정한 지옥: Chapter 1 - Chapter 10

14 Chapters

1화

강태혁.분명 아는 이름 같기는 했다.문제는 대체 어디서 아는 이름인지 죽어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거였다.“제 손님이라고요?”―네. 1층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계세요.수화기 너머로 안내 데스크 직원이 친절하게 대답했다.이재는 모니터 한쪽에 띄워둔 사내 메신저를 확인했다. 오늘 예정된 외부 미팅은 없었다.애초에 있을 리가 없었다.입사한 지 이제 나흘.한국에 돌아온 지도 고작 열흘이었다.그런 사람을 회사까지 약속도 없이 찾아올 인간이라면 둘 중 하나였다.아주 가까운 사이거나.아주 눈치가 없는 사이거나.강태혁이라는 이름은 안타깝게도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무슨 일로 오셨대요?”―따로 말씀은 안 하셨어요. 성함만 전달해달라고 하셨습니다.“아, 네. 내려갈게요.”전화를 끊고 속으로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봤다.강태혁.역시 모르겠다.한국을 떠난 지 십 년이었다.그동안 잊은 사람이 한둘도 아니었고, 굳이 기억하며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은 더 많았다.그중 하나겠거니 했다.적어도 그 사람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로비는 한산했다.점심시간이 가까워진 탓인지 오가는 직원도 많지 않았다. 이재는 외부 손님 전용 라운지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누구든 얼굴을 보면 기억나겠지.라운지 창가에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검은 정장.길게 뻗은 다리.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다만 남의 회사 로비치고는 지나치게 편해 보였다.이재는 걸음을 늦췄다.저런 인간을 알았던가.그때였다.기척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시선이 마주쳤다.아.알았다.동시에 속이 뒤집혔다.이재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화장실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칸막이 문을 열고 변기를 붙잡자마자 헛구역질이 터졌다.“욱…….”나오는 것은 없었다.아침에 마신 커피 한 잔이 전부였으니 당연했다.그런데도 몸은 자꾸만 무언가를 뱉어내려 했다.심장이 뛰었다.손끝이 떨렸다.그리고 아주 잠깐.냄새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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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십 년 전과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이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비슷한 사건.굳이 무엇과 비슷한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강태혁이 십 년 만에 자신을 찾아와 할 만한 이야기는 하나뿐이었으니까.“……어떻게 비슷한데요?”“주거 침입입니다.”태혁이 말했다.“둘 다 성림동에서 발생했고, 범인은 신분을 속여 피해자의 집에 들어갔어요.”이재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첫 번째는 사흘 전. 집주인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서 별다른 피해 없이 끝났고.”“두 번째는요?”“어제.”짧은 대답 뒤로 침묵이 붙었다.“피해자가 다쳤습니다.”빨대 끝을 만지작거리던 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많이요?”“죽을 정도는 아니었어요.”그나마 다행이었다.그렇게 생각한 순간 태혁이 덧붙였다.“죽이려고 한 건 맞지만.”이재는 방금 전의 생각을 곧바로 취소했다.빨대를 내려놓았다.“그래서 십 년 전이랑 비슷하다는 거예요?”“현재까지는.”“주거 침입이라서?”“그것만은 아니고요.”“그럼요?”태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또 저 침묵이었다.아까부터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데 아주 재주가 있었다.“범인은 검침원을 사칭했습니다.”검침원.듣는 순간 익숙한 단어가 머릿속 어딘가에 걸렸다.이재는 애써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그런 수법, 흔하지 않아요?”“흔하죠.”순순히 인정하는 대답에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이재가 미간을 좁혔다.“성림동에 도둑이 드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닐 테고요.”“그렇죠.”“그럼 별로 비슷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태혁이 이재를 바라봤다.“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뭔데요?”“확인 중이에요.”이재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확인도 안 된 걸 가지고 저한테 오신 거예요?”“네.”망설임 없는 대답이 더 황당했다.“왜요?”태혁은 대답 대신 물었다.“언제 귀국했어요?”“네?”“한국에 언제 들어왔냐고요.”뜬금없는 질문이었다.이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대답했다.“열흘 전이요.”태혁은 말이 없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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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카페 유리문 너머로 윤이재가 멀어졌다.신호등 앞에 멈춰 서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태혁은 시선을 거뒀다.테이블 위에는 거의 손대지 않은 커피 두 잔이 남아 있었다.하나는 이재의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자신의 것이었다.태혁은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밍밍했다.얼음이 녹을 만큼 오래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저 잘 살고 있어요.이재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보셨잖아요.봤다.십 년 만에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돌아섰고, 한참 뒤에야 나타났다.눈가가 붉어져 있었다.그런 사람이 잘 살고 있다고 했다.잘 사는 것과 괜찮은 것은 다른 문제였다.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했으면 분명 싫어했을 테니. 아니, 이미 제 등장을 충분히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태혁은 잔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재중 전화 두 통.같은 번호였다.곧바로 전화를 걸었다.상대는 신호가 한 번 가기도 전에 받았다.―팀장님, 어디세요?“가는 중.”―병원으로요?“어.”―피해자가 아까부터 자꾸 뭐가 생각난다고 해서요. 담당 형사를 찾습니다.태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뭔데.”―그걸 팀장님한테 직접 말하겠답니다.“십 분.”전화를 끊고 카페를 나섰다.윤이재 생각도 거기까지였다.적어도 당장은.***병실 문 앞에는 같은 팀 형사 박준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태혁을 발견하자마자 벽에서 등을 뗐다.“빨리 오셨네요.”“상태는?”“괜찮습니다. 오전보다 훨씬 나아요.”태혁은 병실 안을 들여다봤다.두 번째 사건의 피해자는 침대에 기대앉아 있었다.목에는 옅은 멍이 남아 있었고, 오른쪽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태혁이 들어가자 피해자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아, 형사님.”“그냥 계세요.”태혁은 침대 옆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뭐가 생각나셨다고요?”“별것 아닐 수도 있는데…….”“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피해자는 잠시 머뭇거렸다.“그 사람이 집에 들어왔을 때요.”태혁이 수첩을 꺼냈다.“네.”“좀 이상했어요.”“어떤 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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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첫날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업무 중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발신자를 확인했다.강태혁이 자신의 번호를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입국 날짜까지 알아낸 사람이었다. 연락할 필요가 생긴다면 휴대폰 번호쯤은 진작 알아뒀을 것 같았다.오전에는 카드사였고, 점심 무렵에는 택배 기사였다.오후 네 시쯤 걸려온 모르는 번호는 보험 광고였다.“괜히 받았네.”이재는 번호를 차단하고 휴대폰을 내려놨다.그날은 더 이상 전화가 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에는 확인해야 할 자료가 책상에 세 개나 쌓여 있었다.휴대폰 따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윤 대리님, 잠깐만 봐주실 수 있어요?”김다은이 노트북을 들고 다가왔다.입사 3년 차 사원. 이재보다 세 살 어린 후배였다.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는 회장 딸이라는 사실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인사 한번 하는 데 온몸을 다 쓰던 사람이기도 했다.요 며칠은 조금 나아졌다.조금.“뭔데요?”“부산 쪽에서 보내준 실적 자료요. 아무리 봐도 숫자가 안 맞아서.”“봐봐요.”다은이 옆으로 노트북을 밀었다.호텔별 객실 가동률과 부대시설 매출을 합산한 자료였다. 이재는 화면을 내리다가 한곳에서 손을 멈췄다.“여기 기준 월이 다르네요.”“어디요?”“객실은 7월인데 F&B가 6월이에요.”다은이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잠시 뒤 작은 탄식이 나왔다.“아…….”“그래서 안 맞았나 봐요.”“저 이거 십오 분 동안 봤는데.”진심으로 허탈한 얼굴이었다.이재가 웃었다.“십오 분이면 그래도 양호하네요.”“위로해주시는 거예요?”“네. 나름.”다은이 작게 웃었다.이재는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객실이랑 F&B 둘 다 7월 기준으로 다시 요청해요. 카지노 매출도 같은 기준인지 확인하고.”“알겠습니다.”노트북을 챙기던 다은이 덧붙였다.“감사합니다, 윤 대리님.”“다은 씨.”“네?”“나한테 말할 때마다 그렇게 긴장 안 해도 돼요.”“제가요?”본인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이재가 다은을 잠시 봤다.“지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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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 건 퇴근 직전이었다.이재는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윤이재 씨.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번호가 뜰 때마다 떠올렸던 목소리였다.막상 잊고 있으니 왔다.“강태혁 씨?”―네.“제 번호도 알아냈네요.”―네.당연하다는 투였다.입국 날짜까지 알아낸 사람이었다. 연락할 필요가 생겼다면 휴대폰 번호쯤은 진작 알아뒀을 것이다.“무슨 일이세요?”―지난번에 확인해보겠다고 했던 거.이재의 손이 멈췄다.―확인했습니다.며칠 동안 제법 멀어진 줄 알았던 일이 그 한마디로 다시 가까워졌다.“그래서요?”―잠깐 봅시다.“오늘요?”―네.이재는 시간을 확인했다.“지난번 그 카페에서 봐요. 몇 시쯤 오실 수 있는데요?”―바로요.“……벌써요?”―근처라서.통화가 끊겼다.이재는 까맣게 변한 화면을 잠시 내려다봤다.이럴 거면 처음부터 근처에 있다고 하지.여전히 설명은 필요한 만큼만 하는 사람이었다.***카페에 들어서자 강태혁이 보였다.지난번과 같은 자리였다.재킷은 옆에 벗어두었고, 셔츠 소매는 두어 번 걷혀 있었다.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서류철이 놓여 있었다.이재는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일찍 왔네요.”“근처에 볼일이 있었습니다.”태혁이 휴대폰을 내려놨다.그제야 이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이 두 개라는 걸 알아챘다.태혁 앞에는 커피. 그리고 제 앞에는 처음 보는 잔 하나.“이거 뭐예요?”“캐모마일.”“제 거예요?”“아니면 제 앞에 뒀겠죠.”이재가 그를 봤다.“제가 이거 마신다고 했어요?”“안 했죠.”“그런데 왜 시켰어요?”태혁은 서류철을 열었다.“늦었잖아요.”“그래서요?”“카페인 먹고 잠 못 자면 피곤하니까.”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이재는 제 앞에 놓인 잔을 내려다봤다.제법 멋대로였다.“저 잘 자는데요.”“다행이네요.”정작 시켜놓은 사람은 별 관심도 없다는 얼굴이었다.이재는 캐모마일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그래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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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다음 날은 평소보다 퇴근이 늦었다.다음 주 경영회의에 올라갈 자료에서 숫자 하나가 틀어진 탓이었다.문제를 발견한 건 다은이었다.“대리님.”모니터 너머로 빼꼼 얼굴을 내민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저희 망한 것 같은데요.”“얼마나?”“……조금 크게?”이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다은의 모니터에는 월별 객실 매출이 떠 있었다. 전월 대비 실적이 이유 없이 크게 튀어 있었다.“어디까지 봤어요?”“원천 데이터는 맞아요. 취합하면서 틀어진 것 같은데…….”이재가 마우스를 받아 파일 몇 개를 넘겼다.문제는 생각보다 금방 보였다.전월 데이터 일부가 이중으로 잡혀 있었다.“여기.”“찾으셨어요?”“네.”다은이 모니터 가까이 몸을 당겼다.몇 초 뒤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살았다.”“아직이요. 데이터 다시 돌려야 돼요.”표정이 곧장 죽었다.“지금부터요?”이재가 시계를 봤다.오후 여덟 시 사십 분.내일로 넘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아침에 다시 붙잡힐 일이라면 지금 끝내는 편이 속 편했다.“한 시간 안에 끝내죠.”“역시 대리님밖에 없어요.”“한 시간 넘으면요?”다은이 잠깐 고민했다.“그때는 조금 미워할게요.”“조금이면 괜찮네요.”결국 조금 미움받을 시간은 생겼다.수정된 데이터를 다시 돌리고 보고서에 들어간 숫자까지 전부 맞춰본 뒤에야 이재는 모니터 전원을 껐다.열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옆자리에서는 다은이 가방을 챙기며 기지개를 켰다.“내일 아침의 제가 오늘의 저를 엄청 싫어하겠죠?”“오늘의 다은 씨가 사고 쳤으니까 감수해야죠.”“대리님까지 왜 그래요.”“저도 피해자잖아요.”“아.”다은이 억울해할 명분을 잃었다.이재가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은은 말을 걸 때마다 묘하게 허리를 세웠다.회장 딸과 같은 팀.그 사실 하나가 사람을 꽤 불편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요 며칠 사이에는 적어도 농담 한 번 할 때마다 표정부터 살피는 일은 없어졌다.이재로서는 그쪽이 훨씬 편했다.사무실을 나서자 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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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강태혁은 이재가 내려준 자리에서 몇 걸음 걸어 자기 차 앞에 섰다.건물 입구 한쪽에 비스듬히 붙어 있는 검은 세단.주차선은 없었다.불법 주차였다.형사가 불법 주차라니.급하게 올라오느라 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처박아둔 결과였다.태혁은 운전석 문을 열면서 한 번 뒤를 돌아봤다.이재의 차는 이미 진입로 끝을 돌아 사라진 뒤였다.―안 타요?차 있는 데까지 태워주겠다는 뜻이었다.바로 위라고 말했으면서 결국 얻어탔다.태혁은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휴대폰을 거치대에 올리려다 잠시 멈췄다.통화 기록 맨 위에 이름이 남아 있었다.윤이재.먼저 전화한 건 처음이었다.―숨이…….그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손 하나 들어왔을 뿐이었다.그 순간 이재는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갔다.태혁은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거치대에 꽂았다.로비에서 이재를 만났을 때는 상태만 봤다.다친 곳이 있는지.호흡은 돌아왔는지.혼자 운전해도 되는지.그게 전부였다.적어도 그때는.그런데 지금 와서 이상하게 다른 게 남았다.조금 전 운전석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얼굴.겁을 먹은 뒤라 평소보다 더 창백했을 것이다.그래도 유난히 희었다.검은 머리 아래로 드러난 작은 얼굴은 아무 말 없이 있으면 꽤 여린 인상이었다.눈 밑에 작게 찍힌 점 하나까지 눈에 들어올 만큼.그러다 눈을 들면 인상이 달라졌다.―진짜 재수 없어.그 말을 할 때도 얼굴은 여전히 희었는데 눈에는 제법 힘이 돌아와 있었다.그래서 운전해도 되겠다고 판단했다.그것까지는 합리적이었다.문제는 그 뒤였다.사람 얼굴을 왜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지.태혁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시동을 걸었다.마침 휴대폰이 울렸다.박준호였다.“왜.”―팀장님, 어디세요?“가는 중.”―아까 전화했는데 안 받으셔서요.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습니다.“용건.”준호는 익숙하다는 듯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첫 번째 피해자 쪽 CCTV 추가 확보했습니다. 통화기록도 왔고요.“자료 정리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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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다음 날 아침, 이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어젯밤 지하주차장에서 거의 주저앉았던 사람치고는 상당히 멀쩡한 출근이었다. 잠은 설쳤고 속은 비어 있었지만, 화장을 하고 머리를 정돈하고 사원증까지 목에 걸고 나니 어제의 난리는 제법 남의 일처럼 보였다.사회생활이란 게 원래 그랬다.죽을 것 같아도 다음 날 아침에는 멀쩡한 얼굴로 회의 자료를 넘겨야 했다.“대리님, 어제 말씀하신 거 수정했어요.”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다은이 노트북을 들고 따라붙었다.이재는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화면을 받아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숫자만 반듯하게 늘어서 있던 객실 매출 비교표에 지역 행사 종료에 따른 단체 수요 감소, 프로모션 비중 변화, 예약 채널별 평균 단가까지 제법 꼼꼼한 분석이 붙어 있었다.시키면 잘했다.그리고 한 번 알려준 건 두 번 틀리지 않았다.그 정도면 입사 3년 차에게 기대할 수 있는 꽤 괜찮은 장점이었다.“잘했네요.”다은이 눈을 들었다.“진짜요?”이재도 화면에서 눈을 뗐다.“왜요. 못 믿겠어요?”“아뇨. 그냥…….”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기분 좋아서요.”그렇게까지 좋아하니 괜히 더 칭찬해주고 싶어졌다.“여기 채널별 비중만 그래프로 하나 추가해요. 나머지는 이대로 보내도 될 것 같아요.”“네.”다은이 노트북을 받아 들더니 잠깐 머뭇거렸다.“대리님.”“네?”“제가 커피 사드려도 돼요?”“갑자기요?”“기분 좋아서요.”이재가 잠깐 웃었다.“비싼 거 마셔도 돼요?”다은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너무 비싼 건 말고요.”“가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계산대 앞에서는 자기가 카드를 내밀 생각이었다.시킨 일을 제대로 해온 데다 칭찬 한마디에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금 기특했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손에 든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Chloe.[You alive?] (살아 있어?)이재의 입꼬리가 먼저 움직였다.뉴욕의 시간은 아직 어제였다.시계를 보니 퇴근을 마치고 팀원들끼리 맥주라도 한잔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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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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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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