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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낮게 내린 밤에
달빛이 낮게 내린 밤에
Author: 신추아

제1화

Author: 신추아
연푸른 배두렁이가 걷히자 매끄럽고 흰 살결이 서늘한 공기 속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방 안에 피워 둔 향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서늘한 물기운이 뒤섞인 침수향이 정시연의 드러난 살결 위를 안개처럼 부드럽게 휘감았다.

그때 어멈의 매서운 시선이 날아들자 정시연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윽고 어멈이 짤막하게 말했다.

“남겨 두거라.”

말을 마친 예왕부의 어멈은 고개를 들어 정시연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녀는 눈을 얌전히 내리깔고 다소곳이 서 있었다. 촘촘하고 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릴 때마다 눈가에 작은 그늘이 드리웠다. 가느다란 눈썹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고, 하얀 치아는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가늘고 여린 몸선은 한없이 부드럽고 유려했다. 좀처럼 보기 드문 미색이었다.

잠시 그녀에게 눈길을 멈추었던 어멈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젖줄도 막힌 데 없이 원활하고 멍울도 없으니, 일차 시험은 합격이다.”

그제야 정시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긴장으로 꼿꼿하게 굳어 있던 등도 조금은 느슨해졌다.

아이를 낳은 지 겨우 석 달.

그런데도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를 집에 두고 예왕부의 유모 자리에 지원한 것은, 그녀에게 당장 은자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예왕부는 시종들을 후하게 대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유모에게 주는 녹봉만 해도 한 달에 스무 냥으로, 황궁에서 받는 액수보다도 많았다.

그만큼 사람을 뽑는 과정도 까다로웠다. 백여 명의 유모 가운데 이차 시험에 오른 이는 고작 다섯뿐이었고, 그중 예왕부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정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나머지 네 명과 함께 밝고 널찍한 침방에 나란히 섰다. 다섯 사람의 앞에는 새하얀 백자 사발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이차 시험에서는 너희의 젖이 어떠한지 살핀 뒤, 주인께서 직접 한 사람을 고르실 것이다.”

어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곁에 선 유모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정시연도 황급히 그들을 따라 배두렁이의 매듭을 풀었다.

잠시 후 그녀가 손을 거두자, 어멈들이 백자 사발을 하나씩 받쳐 들고 병풍 뒤로 옮겼다.

정시연은 멍하니 병풍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저 왕부의 어린 주인님도 보물이처럼 자신의 젖을 잘 먹어 주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왕부의 병풍은 금실 세공에 보석까지 촘촘히 박혀 있었고, 그 위를 뒤덮은 무늬도 화려하고 복잡했다. 그 너머에 누가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옷을 여미고 결과를 기다리거라.”

귓가에 들려온 어멈의 목소리에 정시연은 잠시 멈칫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오랫동안 찬 공기에 살을 드러낸 탓에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겨우 움직여 병풍에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옷을 여몄다.

병풍 뒤에서는 정시연의 고운 자태가 어렴풋이 내다보였다.

가녀린 몸매에 허리마저 한 줌처럼 잘록했다. 창살 틈을 비집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매끄러운 뺨에 내려앉자, 희디흰 얼굴은 금세라도 투명하게 비칠 듯했다.

그 모습은 비를 머금은 푸른 구름과 잔잔한 물 위로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청초하고도 몽롱했다.

병풍 뒤에 앉은 사내는 빛을 등진 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가늘고 긴 봉황 같은 눈매를 반쯤 내리깔았다.

차갑고 준엄한 얼굴은 선이 뚜렷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옥관으로 높이 틀어 올려, 반듯한 이마와 깊은 눈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깨를 짓누르듯 걸친 검은 대창의는 본래도 창백한 얼굴을 더욱 서늘하게 돋보이게 했다.

마치 이른 봄에 불어닥친 매서운 꽃샘추위 같았다.

향로에서는 흰 연기가 하늘하늘 피어올랐다. 주위에 늘어선 여인들은 모두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멈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전하…….”

사내의 앞에는 다섯 개의 백자 사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느 유모를 남기실지 한번 살펴보시지요.”

높은 자리에서 사발들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정시연은 옷고름을 하나하나 단정히 여민 뒤, 예왕부의 쪽문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시험에 통과했으니 사흘 뒤부터 왕부로 나와 일하라는 어멈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겨울 햇살이 몸 위로 포근하게 내려앉자, 모든 일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따스한 볕을 맞으며 멍하니 서 있던 정시연은 문득 주방현의 경성 부임 문서가 도착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인근 고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 사람을 부러워했다. 정시연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은 정씨네 사위가 높은 벼슬에 올랐다며, 그녀 역시 머지않아 고명을 받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훗날 정시연이 일품 고명부인이 되어 금의환향하고 고향 사람들을 보살피게 되면, 그녀를 위한 사당을 세우고 현판을 내걸어 이름을 지방 서적에 남기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주방현 역시 훗날 경성에서 높은 벼슬에 오르면 일품 관리의 의장을 갖추고 금의환향하여 조상께 제사를 올리겠다고 했다. 그때에는 정시연을 푸른 휘장과 은빛 지붕으로 꾸민 사인교에 태워 행렬의 선두에 세우고, 징과 북을 울리며 길을 열어 온 천하 사람들에게 그녀가 자신의 부인임을 당당히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을 들을 당시만 해도 정시연은 자신이 어멈 앞에서 옷을 모두 벗고, 왕부의 유모 자리를 간절히 바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방현을 떠올린 그녀는 추위에 굳은 손으로 옷깃을 천천히 여몄다.

정시연은 비록 시골 이정(里正: 조선 시대 지방 행정 조직인 리(里)의 책임자)의 딸로 태어났고 어머니도 수를 놓아 생계를 잇는 여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란 탓에 작은 설움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녀가 절벽 아래에서 주방현을 발견했을 때, 그는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상태였다. 지난 기억을 모두 잃은 데다 다리뼈까지 심하게 다쳐, 오랫동안 몸을 추슬러야 했다.

무거운 것은 들지도 나르지도 못했고,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을 헐떡였다. 심지어 돼지를 잡는 광경조차 무서워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주방현은 아는 것이 많았다.

글을 쓸 줄 알았고, 재미난 이야기도 들려주었으며, 정시연을 앞에 두고 다정한 사랑 시를 읊기도 했다. 인근 마을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도 모두 그가 지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주방현을 존중했고, 정시연 역시 남몰래 그를 연모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정시연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주방현은 사위의 자격으로 상복을 갖춰 입고 장례의 모든 절차를 도맡았다.

아버지의 영전 앞에서 그는 무너져 내리는 정시연을 품에 꼭 안아 주었다.

정시연은 그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주방현은 손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한 방울씩 닦아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다, 시연아. 이제부터는 내가 있는 곳이 곧 네 집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혼인했다.

달과 산천을 향해 맞절을 올리고, 중매와 예를 제대로 갖춘 어엿한 혼례였다.

훗날 기억을 되찾은 주방현은 십 년 전 부인을 잃었으며, 주청산이라는 아이가 하나 있다고 털어놓았다.

정시연은 계모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기꺼이 아이를 데려와 품었고, 가진 은자를 모두 내어 주방현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며 주청산의 의식주까지 살뜰히 보살폈다.

사실 정시연은 고관의 부인이 되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애쓴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 법.

주방현은 삼원급제(三元及第: 과거의 세 단계 시험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하는 것)의 영예를 안은 뒤 이 년간 현령으로 지냈고, 마침내 경성으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다.

경성으로 떠나던 날은 정시연이 보물이를 낳은 지 고작 두 달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기쁨에 겨워 술을 잔뜩 마신 주방현은 마치 그녀의 불안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뜨거운 손끝으로 정시연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진세미를 기억하느냐? 예전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에 나왔던 ‘변심한 남자’ 진세미 말이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다정하게 덧붙였다.

“시연아, 네가 내 목숨을 살려주지 않았더냐. 나는 절대로 진세미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를 떠올리던 정시연은 문득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은 끝내 뺨을 타고 한 방울씩 굴러내렸다.

주방현은 경성으로 부임하며 정시연을 데려갔고, 두 사람은 새로 빌린 집에 짐을 풀었다.

집은 크지 않았고 부리는 시종도 없었지만, 정시연은 혼자서도 집 안을 반듯하게 정돈하며 살림을 알뜰히 꾸려 나갔다.

반면 주방현은 경성의 인맥을 다지고 주청산이 다닐 학당을 알아보느라 날이 갈수록 바빠졌다. 닷새 중 사흘은 얼굴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아졌다.

낯선 경성에는 의지할 사람 하나 없었다. 정시연은 보물이를 품에 안고 텅 빈 집을 지키며, 날이 저물고 사방에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 부군을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림에 지친 밤이면 차갑게 식어 버린 음식을 몇 번이고 내다 버려야 했다.

그러는 사이 보물이는 제 아비의 얼굴마저 낯설어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정시연은 아이를 달래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버지는 오늘 밤에 돌아오실 거야. 우리 보물이 곁에 있어 주러 꼭 오실 거야.”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주방현이 느닷없이 그녀에게 말했다.

“시연아, 조상님께서 돌봐 주신 모양이다. 내가 경성에서 귀인을 한 분 만났는데, 그분이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셨어. 나중에는 사람들 앞에서 청산도 자신의 아이로 인정해 주겠다고 했고.”

주방현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분은 군주시다. 감히 우러러보기도 어려울 만큼 높으신 분이라고!”

군주.

정시연은 군주처럼 높은 신분의 귀인은 이야기 속에서나 들어 보았을 뿐이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앞으로 어떤 말이 이어질지 두려워 차마 묻지 못했지만, 한껏 들뜬 주방현은 그녀의 기색도 살피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갔다.

“앞으로는 그분 명의의 부저로 들어가 살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나와 청산의 앞날도 더없이 밝아지겠지.”

정시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분의 부저로 들어간다고요……? 그럼 저는요?”

정시연은 지금도 그 순간의 차갑고 온기 없는 두 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잠시 후, 주방현이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도 우리와 함께 갈 수 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부저에서 일하는…… 어멈이라고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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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빛이 낮게 내린 밤에   제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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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빛이 낮게 내린 밤에   제26화

    정시연은 다급히 곁채로 달려갔으나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어찌 된 일인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그때, 이웃방에 머물던 오 어멈이 뜰로 들어왔다. 그녀는 보물이가 다른 처소로 옮겨 갔다며 새로 머무는 곳을 알려 주었다.정시연은 오 어멈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별채로 향했다.도착하고 보니 새로 옮긴 곳은 예전의 곁채보다 훨씬 넓었다. 정시연은 문틀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주씨 부저의 침실이 이토록 넓고 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처음 알았다.자신이 머물던 비좁고 어두운 곁채와는 무엇 하나 닮은 구석이 없었다.새로 들인 유모도 아이를 정성껏 돌보고 있었다.정시연이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자, 막 젖을 먹은 보물이가 이 유모의 품에 안겨 입가로 보글보글 거품을 내뿜고 있었다.문 앞에 망연히 서 있는 정시연을 발견한 이 유모가 잠시 멈칫했다. 이내 정시연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다정하게 웃었다.“보물이의 친어머니시지요?”이 유모는 품 안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보물이가 어찌나 순한지 몰라요. 저는 여태껏 이렇게 손이 안 가는 아이는 처음 봤답니다. 밤에도 울지 않고 웃기만 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정시연의 코끝이 찡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몸 옆으로 늘어뜨린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지만, 빗물에 젖은 몸을 모두 닦기 전까지는 감히 아이를 안지 않았다.물기를 말끔히 닦은 뒤에야 정시연은 조심스럽게 보물이를 품에 받아 들었다.곧바로 아이의 옷을 들춰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피부에 발진 하나 없이 깨끗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보물이도 어머니를 알아보았다.아이는 짧고 통통한 두 팔을 힘차게 흔들며 정시연을 향해 까르르 웃었다. 아직 이 하나 돋지 않은 말간 잇몸이 환히 드러났다.이 가엾은 아이는 무엇이 그리도 좋아 늘 웃기만 하는 걸까.정시연은 보물이를 가슴 깊이 끌어안은 채 팔을 가볍게 흔들어 달랬다. 말랑하고 통통한 뺨이 젖을 찾으며 가슴께를 이리저리 파고들었

  • 달빛이 낮게 내린 밤에   제25화

    아마 밖에서 적잖이 고생하다가 여비마저 떨어져 더는 버티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리라.그렇다면…… 이번에는 주인도 쉽사리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가랑비는 여전히 처마 끝을 두드리며 맑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강희는 서둘러 우산을 펼쳐 들고 빠른 걸음으로 주방현의 뒤를 따랐다.그때 앞서가던 주방현의 발걸음이 갑자기 멎었다.훤칠한 몸이 주씨 부저 대문 앞에 우뚝 멈춰 섰다.주방현은 멍하니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정시연이 기름종이 우산을 받쳐 든 채 빗속에 서 있었다.그는 정시연이 집을 나간 뒤 보름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으리라 여겼다. 행색도 초라하기 짝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정시연에게서는 초라한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곱고 아름다워 보였다.가느다란 몸으로 우산을 받쳐 든 그녀가 고개를 들어 주방현을 바라보았다. 촘촘한 빗줄기가 드리운 장막 너머로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강남의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온 듯했다.멀리서 주방현을 발견한 정시연이 성큼 다가와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기름종이 우산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차가운 빗방울이 이마 위로 내려앉았다. 물방울은 눈썹뼈의 부드러운 선을 타고 흘러 속눈썹 끝에 맺혔다.빗물이 광대뼈를 훑고 지나가자 젖은 피부가 희미하게 빛났다. 도톰한 두 뺨은 물기를 가득 머금고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처럼 탐스러웠다.이내 빗방울은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려 가느다란 목덜미를 지나 옷깃 속으로 스며들었다. 젖은 소매는 팔뚝에 달라붙어 가녀린 선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우산도 없이 비안개 속에 서 있는 정시연의 모습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과 꼭 닮아 있었다.안개비가 자욱하던 산비탈 아래에서, 그녀가 우연히 쓰러진 그를 발견했던 바로 그날과.주방현은 넋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느릿하게 뛰는 소리만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한 번. 그리고 또 한 번.그때 정시연의 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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