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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신추아
“보물이는 잠들었느냐?”

주방현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정시연의 곁에 섰다. 아이를 받아 안으려 두 팔을 내밀었지만, 정시연은 나직이 대답만 할 뿐 여전히 보물이에게 시선을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허공을 향해 내민 주방현의 두 손이 어색하게 멈추었다. 늘 품 안을 채워 주던 따스한 체온도, 은은한 젖내도 닿지 않자 가슴 한편이 텅 빈 듯 허전했다.

그는 정시연이 화난 까닭을 알고 있었다. 오늘 군주가 그녀의 옷을 입었으니, 일부러 심술을 부리는 것이라 여겼다.

아무리 아끼는 물건이라 해도 고작 값나가지 않는 낡은 옷 한 벌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신을 이토록 곤란하게 만든단 말인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정시연이 이토록 철없는 여인인 줄은.

그렇게 생각한 주방현은 미간을 단단히 찌푸린 채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 옷은 기껏해야 은자 서너 냥짜리다. 군주께서 탐낼 만한 물건도 아니고, 네 옷인 줄 알고 일부러 입으신 것도 아니야.”

그 말을 들은 정시연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은자 서너 냥.

예전에 그녀가 팔아넘긴 비녀와 팔찌도 하나같이 그만한 값이었다. 그렇게 마련한 은자 서너 냥이 주방현과 주청산의 한 달 학비가 되었다.

그들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느라 패물을 모조리 팔고 나니 정시연에게 남은 것은 이제 그 옷 한 벌뿐이었다.

하지만 주방현의 눈에는 그저 낡고 하찮은 옷에 불과했다. 옷도, 정시연 자신도 이제는 깃털처럼 가벼워져 그의 눈에 들지 못했다.

“군주께서는 하찮게 여기실지 몰라도, 제게는 소중합니다.”

정시연은 눈을 들어 주방현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또렷이 말했다.

흐릿한 촛불이 촉촉한 살구꽃 같은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희뿌연 눈빛은 마치 강남에 하염없이 내리는 안개비처럼 아련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방현의 목울대가 불현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는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듯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 옷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면 내일 사람을 시켜 새것을 사다 주마. 그러니 이제 그만해라. 군주께서 아직 대청에서 저녁을 기다리고 계시니, 우선 가서 시중부터 들거라.”

정시연은 말없이 주방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누런 촛불이 그의 눈동자 위에서 흔들릴수록 그 안에 깃든 조바심과 짜증은 더욱 선명해졌다.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시큰한 아픔이 차올랐다. 커다란 손아귀가 심장을 움켜쥐고 세차게 비트는 듯했다.

정시연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군주를 모시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데, 정녕 저 하나가 없어서 안 된답니까?”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의 부인을 그분 앞에 데려가 종노릇을 시켜야 할 만큼요?”

그 말을 들은 주방현의 눈썹이 사납게 내려앉았다. 깊게 찌푸린 미간 사이로 노기가 번지며 목소리마저 한층 높아졌다.

“시연아, 제발 철 좀 들 수 없겠느냐? 주씨 집안의 앞날은 군주께 달려 있다. 잠시 시중을 드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렵다고 굳이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려는 게야!”

갑작스럽게 터진 고함에 잠들어 있던 보물이의 몸이 움찔했다.

눈을 뜬 아이는 눈앞의 낯선 사내를 보자마자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정시연은 넋을 잃은 채 주방현을 바라보았다.

잔뜩 눈살을 찌푸린 채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 삼 년을 부부로 살았건만, 어쩌면 그녀는 단 한 번도 이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주방현은 자신에게 처자식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니 군주 역시 정시연과 보물이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군주는 그에게 부저를 하사했고, 주청산을 양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조했으며, 수시로 주씨 부저를 찾아와 그와 함께 식사했다. 같은 여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정시연은 또 다른 여인이 고통받는 것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주방현의 거짓에 속은 군주를 그대로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정시연은 품 안에서 우는 보물이를 황급히 달랬다. 아이를 토닥이던 그녀의 입가에 서서히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알겠어요. 준비를 마치는 대로 가겠습니다.”

마침내 정시연이 뜻을 굽히자 주방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줄곧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도 그제야 가라앉았다.

“서두르거라. 대청에서 기다리마.”

그 말을 남긴 주방현은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

대청으로 돌아온 주방현은 부저의 숙수에게 군주의 저녁상을 올리라 일렀다.

날은 어느덧 어둑하게 저물고 있었다. 시종들이 말없이 음식을 나르는 사이, 옥쟁반과 그릇이 맞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주방현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군주를 바라보며 이유 모를 초조함에 휩싸였다. 그러던 중 정시연이 구슬발을 걷고 단아한 자태로 대청에 들어서자,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군주 역시 정시연을 발견하고 모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붉은 봉선화 물을 들인 손을 가볍게 흔들며 그녀를 가까이 불렀다.

“이리 오너라. 이제부터는 내 곁에 머물며 시중을 들도록 하거라.”

주방현의 몸이 순간 굳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정시연을 바라보았다.

문 앞에 서 있던 정시연도 잠시 걸음을 멈추었으나,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상 앞까지 걸어갔다. 허리를 반듯하게 숙여 예를 올린 그녀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말했다.

“군주, 저는 군주의 시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정시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 이후로는 주씨 부저의 하루 세끼도 더는 차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옥젓가락을 들고 있던 군주의 손이 미세하게 멈추었다. 금세 얼굴빛이 달라진 그녀가 싸늘한 눈으로 정시연을 바라보았다.

좀처럼 화를 드러내지 않던 군주였으나, 지금은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과 같은 위압감이 흘렀다.

주방현의 표정도 굳었다. 그가 황급히 입을 열려는 순간, 정시연의 나직하면서도 굳센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제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군주께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주는 턱을 느릿하게 치켜들더니 뜻밖에도 가볍게 웃었다.

“마침 잘되었구나. 나 역시 오늘 정 어멈에게 할 말이 있었으니.”

정시연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군주는 느긋하게 젓가락을 움직여 백자 접시에 놓인 교자 하나를 집었다. 한입 베어 물더니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눈살을 찌푸리고는, 남은 반쪽을 다시 그릇에 내던졌다.

딱, 하는 소리가 정적을 가르자 듣는 이들의 눈꺼풀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군주는 차갑게 웃으며 정시연의 고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 어멈도 생김새는 제법 곱구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내 곁에서 상을 살피는 시녀가 되기 싫다니 굳이 억지로 시킬 필요는 없겠지.”

그녀는 마치 크나큰 은혜라도 베푸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다음에 예왕부의 마부에게 시집보내 주마. 성실한 사내이니 살림에도 보탬이 될 테고, 훗날 네 보물이도 자라면 왕부에 들어와 청소하는 계집종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군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유난히 힘을 주어 덧붙였다.

“그러면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닐 필요도 없겠지. 지금처럼 제 할 일인 음식 장만조차 잊는 일도 없을 테고!”

군주의 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정시연의 숨결이 점차 느리고 무거워졌다.

주방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정시연의 목소리가 한발 앞서 울렸다.

“보물이는 타고난 팔자가 가여운 아이입니다. 헌데 제가 살아 있는 한, 그 아이를 남의 집 계집종으로 보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본디 성정이 유순해 좀처럼 남과 다투지 않던 정시연이었으나, 이번만큼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자리에 꼿꼿이 선 모습에서는 무엇 하나 양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기가 배어 나왔다.

군주는 정시연이 대꾸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헌데 종의 딸은 종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고는 의아한 눈길로 주방현을 바라보았다.

“방현 공자, 정 어멈이 어째서 이토록 화를 내는 것입니까? 제가 무슨 말이라도 잘못했나요?”

군주는 살짝 웃으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설마 네 딸도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주방현의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시연은 고요히 주방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반응을 지켜보는 동안 마음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허망함만 차올랐다.

가슴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어느새 깊은 못 아래로 가라앉은 듯 고요했다.

자신이 당한 수모 때문이 아니었다.

보물이에게 이토록 무정한 아비가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비통했기 때문이다.

보물이의 아버지는 장원급제하여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오라비는 군주의 양자로 들어가 회시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두 사람의 앞날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런데 보물이는 어떠한가.

비좁고 외진 곁채에 몸을 붙인 채, 훗날 왕부의 마당이나 쓸 계집종으로 내몰릴 처지였다.

세상에 이보다 우스운 일이 또 있을까.

정시연은 천천히 눈을 들어 군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자 한 자에 무게를 실어 또렷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군주의 조상님들도 모두 군주였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대청 안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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