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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신추아
“방자하다!”

“무엄하구나!”

두 사람의 호통이 동시에 대청을 울렸다. 하나는 군주의 뒤를 지키던 어멈의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주방현의 것이었다.

어멈이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주방현이 험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정시연에게 다가가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그대로 밖을 향해 끌고 갔다.

정시연은 그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지 못해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그렇게 대청 밖 회랑까지 끌려 나온 뒤에도 주방현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고, 꽉 붙들린 손목에서는 뼈가 시릴 만큼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

“정시연, 감히 군주께 그따위로 말하면 어떡하느냐?”

주방현이 억누르지 못한 분노를 터뜨리듯 매섭게 쏘아붙였다.

“지금이야 군주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겠지만, 밖에서 그런 무례를 저질렀다가는 몽둥이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

그는 지금껏 정시연에게 이토록 큰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대청 안에 있는 이들까지 한마디 한마디를 똑똑히 들을 만큼 목소리가 컸고,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이 마치 사람들 앞에서 벌이는 한바탕 우스운 광대극처럼 느껴졌다.

정시연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제가 군주를 만날 일이나 있었겠습니까?”

주방현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멈칫했다. 이내 목소리를 낮춘 그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네가 이토록 위아래도 모르고 날뛰면 너 하나만 화를 입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 벼슬길까지 망치게 된단 말이다!”

그의 말은 잘게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숨을 들이쉴 때마다 정시연의 살 속으로 촘촘히 파고들었다. 그녀는 잔뜩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을 노려보는 사내를 싸늘한 눈으로 마주 보았다.

경성에 들어온 지 겨우 한 달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눈앞의 사내는 예전의 주방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시연은 문득 가볍게 웃었다.

“보물이는 당신 딸이 아닙니까? 정말 자기 딸을 남의 집 계집종으로 보내고 싶은 겁니까?”

입가에 걸렸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주방현,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에요?”

한없이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 한마디 한마디는 주방현의 가슴을 묵직하게 두드렸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마치 정시연을 달랠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나 버린 사람 같았다.

“군주께서도 그저 말로만 그러신 것이다. 설마 정말로 보물이를 계집종으로 보내시겠느냐?”

주방현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깊이 좁혔다.

“너는 시골에서 자라 경성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니 이런 웃음거리를 만드는 게야. 앞으로는 주씨 부저에만 머물고 밖에 나가지 말거라. 괜히 귀한 분의 심기라도 거슬렀다가는 어쩌려고 그러느냐.”

정시연은 그가 붙들고 있던 손목을 세게 뿌리쳤다. 그러나 주방현의 매서운 목소리가 곧바로 뒤를 쫓았다.

“당장 들어가 군주께 사죄하고, 얌전히 곁에서 시중을 들거라!”

정시연은 눈을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싫습니다.”

주방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경성에는 권세와 신분을 지닌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분수를 모르고 제멋대로 구는 정시연의 성정을 계속 내버려 두었다가는, 언젠가 시신조차 온전히 거두지 못할 화를 입을지도 몰랐다.

“네가 군주께 사죄하지 않으면 화를 입는 것은 보물이다.”

주방현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지금 보물이의 목숨을 담보로 고집을 부리겠다는 것이냐?”

그의 말이 한마디씩 정시연의 가슴에 못처럼 박혔다.

귓속에서 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정시연은 번쩍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군주의 협박인지, 주방현의 협박인지 이제는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주방현은 지금 보물이의 목숨을 빌미로 그녀를 위협하고 있었다.

정시연은 넋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주방현에게 다시 손목을 붙잡혀, 반쯤 끌려가다시피 군주의 앞에 선 뒤였다.

손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주방현은 천천히 상 앞으로 돌아가 군주의 곁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피며 입을 열었다.

“군주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 어멈이 예법도 모르고 위아래도 분간하지 못하기에 제가 엄히 꾸짖었습니다. 이제 군주께 사죄를 올릴 것입니다.”

“그래요?”

군주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살짝 치켜들고 미소 띤 얼굴로 정시연을 바라보았다.

주방현의 시선 역시 줄곧 그녀에게 붙박여 있었다. 정시연의 귓가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끊임없이 맴돌았고, 눈앞에는 해맑게 웃는 보물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문득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참기 어려운 신물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정시연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한없이 느리게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군주. 제가 일부러 그런 것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날카로운 호통이 떨어졌다.

“군주님 앞에서는 자신을 소인이라 칭해야 하거늘. 어미 된 네 행실이 이러하니 딸인들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느냐!”

군주의 뒤에 서 있던 어멈이 눈을 부릅뜨고 정시연을 노려보았다. 군주는 여전히 미소만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 아래 감춰진 주방현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펴졌다. 그러나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정시연은 허리를 굽힌 채 꼼짝하지 않았다.

이를 너무 세게 악문 탓인지 앞니가 삐걱거리는 듯했다. 무언가가 산과 바다를 뒤엎을 기세로 밀려와 그녀를 짓누르고, 그대로 삼켜 버리려는 것만 같았다.

“소인…… 일부러 말대꾸한 것은 아닙니다.”

가느다란 등이 속절없이 떨렸다.

몸속의 뼈마디가 하나씩 주방현의 손에 꺾이고, 산산이 부서진 채 거듭 짓밟히는 듯했다. 그와 함께 온몸을 흐르던 피까지 조금씩 차갑게 식어 갔다.

한동안 침묵하던 군주가 비로소 웃음 띤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 시녀가 될 마음이 있느냐?”

군주는 마치 크나큰 은혜라도 베푸는 듯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정 어멈은 아이까지 낳은 몸이니, 본래라면 예왕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계집종조차 될 자격이 없단다.”

그녀는 주방현을 바라보며 천진하고 발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헌데 나는 그런 것까지 일일이 따지지 않을 것이다.”

정시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군주의 얼굴에 어려 있던 미소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때 귓가로 주방현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주께서 이토록 너그러이 받아 주시니, 당연히 군주의 곁에서 정성을 다해 모실 것입니다.”

군주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 어멈이 저를 잘 모신다면, 훗날 보물이도 제 아이의 시녀로 삼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허드렛일을 하는 계집종까지는 되지 않아도 되겠지요.”

말을 마친 군주는 주방현을 향해 수줍은 미소를 보냈다.

주방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연근 한 점을 집어 군주의 그릇에 올려 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정시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넋이 통째로 빠져나간 듯 두 눈은 아무것도 담지 못한 채 멍하니 굳어 있었다.

군주의 뒤에 서 있던 어멈이 못마땅한 투로 명령했다.

“멍하니 서 있지만 말고 군주의 더러운 옷을 가져가 빨거라. 내일은 아침상을 차린 뒤 다시 와서 시중을 들고.”

그제야 정시연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느릿한 걸음으로 대청에서 물러났다.

어느새 하늘에는 밝은 달이 높이 떠 있었고, 흰 구름이 달빛을 감싼 채 유유히 흘러갔다. 그 풍경은 눈물 어린 정시연의 눈 속에서 조각조각 흐려졌다.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었다.

정시연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곁채를 향해 걸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주방현은 점점 더 먼 곳으로 밀려났다.

*

정시연이 곁채로 돌아왔을 때는 안채의 지시를 받은 오 어멈이 이미 와 있었다.

오 어멈은 군주의 더러운 옷가지를 모두 정시연의 뜰로 가져다 놓은 뒤,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에는 내가 빨래를 하고 네가 음식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어찌하여 그 많은 일을 모조리 네게 떠넘긴다더냐?”

오 어멈은 자신의 며느리와 비슷한 또래인 정시연의 창백한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내가 이 뜰에서 대신 빨아 주마. 네가 빨았다고 하면 누가 알겠느냐.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찬물에 손을 담갔다가 산후병이라도 들면 큰일이다.”

한숨을 내쉰 오 어멈은 나무통을 들고 물을 길으러 가려 했다.

그 순간 정시연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정시연은 품속을 뒤져 잘게 부서진 은자 몇 조각을 꺼냈다. 여기저기서 조금씩 모아 둔 것으로, 모두 합하면 은자 석 냥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은자를 오 어멈의 손바닥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붙드는 듯 그 손을 꽉 움켜쥐었다.

“어멈, 혹시 며느리께 보물이를 맡아 달라고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 달에 은자 석 냥씩 드리겠습니다.”

오 어멈은 손바닥에 놓인 은자 조각을 내려다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정시연은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아이 둘을 함께 돌보셔도 보물이는 손이 많이 가지 않을 거예요. 워낙 순한 아이고, 벌써 쌀죽도 먹을 줄 압니다.”

오 어멈은 놀란 눈으로 정시연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이제 겨우 석 달 된 아이에게 벌써 쌀죽을 먹였단 말이냐?”

그녀의 목소리에는 책망이 묻어났다.

“시연아, 어찌 그리 모질 수가 있느냐! 세상에 너처럼 모진 어미는 내 처음 본다!”

정시연은 잠시 굳어 있다가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입가에 서글픈 웃음이 번졌다.

“저도 밖에 나가 일자리를 구해야 하니까요.”

오 어멈은 한동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러다 이내 나름대로 사정을 짐작했다.

정시연은 얼굴과 자태가 눈에 띄게 아름다운 데다 젊은 과부였다. 그런 까닭에 여주인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이 세상에서 여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고단했다.

하물며 의지할 곳 없는 과부의 삶은 오죽하겠는가.

“네가 나를 이토록 믿어 주니 부탁을 들어주마. 밤이 되면 아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다주렴.”

오 어멈은 연민 어린 눈으로 정시연을 바라보다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보물이를 품에 안았다.

보물이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오 어멈의 품에 안겨 뜰을 떠날 때까지도 칭얼거리기는커녕 울음 한 번 터뜨리지 않았다.

정시연은 뜰 한가운데 서서 고개를 숙인 채 꼼짝하지 않았다.

오 어멈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정시연은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보물이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가는 당장 달려가 붙잡고 놓아주지 못할 것 같았다.

꾹 감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온몸에 서늘한 한기가 번졌지만, 그녀는 굳은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아 낸 뒤 뜰 한쪽에 쌓인 더러운 옷가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것을 빨라는 명령을 따르는 대신, 정시연은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 짐을 꾸렸다.

가진 것이 얼마 없었기에 보따리를 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고 가벼운 보따리는 뿌리내릴 곳 없이 물결을 따라 떠도는 부평초처럼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무엇 하나 챙겨 가지 않은 채 소리 없이 주씨 부저를 떠났다.

이제 정시연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예왕부의 어린 주인님을 정성껏 모시고 삯을 받아, 자신의 보물이를 무사히 먹여 살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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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시연은 다급히 곁채로 달려갔으나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어찌 된 일인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그때, 이웃방에 머물던 오 어멈이 뜰로 들어왔다. 그녀는 보물이가 다른 처소로 옮겨 갔다며 새로 머무는 곳을 알려 주었다.정시연은 오 어멈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별채로 향했다.도착하고 보니 새로 옮긴 곳은 예전의 곁채보다 훨씬 넓었다. 정시연은 문틀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주씨 부저의 침실이 이토록 넓고 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처음 알았다.자신이 머물던 비좁고 어두운 곁채와는 무엇 하나 닮은 구석이 없었다.새로 들인 유모도 아이를 정성껏 돌보고 있었다.정시연이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자, 막 젖을 먹은 보물이가 이 유모의 품에 안겨 입가로 보글보글 거품을 내뿜고 있었다.문 앞에 망연히 서 있는 정시연을 발견한 이 유모가 잠시 멈칫했다. 이내 정시연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다정하게 웃었다.“보물이의 친어머니시지요?”이 유모는 품 안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보물이가 어찌나 순한지 몰라요. 저는 여태껏 이렇게 손이 안 가는 아이는 처음 봤답니다. 밤에도 울지 않고 웃기만 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정시연의 코끝이 찡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몸 옆으로 늘어뜨린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지만, 빗물에 젖은 몸을 모두 닦기 전까지는 감히 아이를 안지 않았다.물기를 말끔히 닦은 뒤에야 정시연은 조심스럽게 보물이를 품에 받아 들었다.곧바로 아이의 옷을 들춰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피부에 발진 하나 없이 깨끗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보물이도 어머니를 알아보았다.아이는 짧고 통통한 두 팔을 힘차게 흔들며 정시연을 향해 까르르 웃었다. 아직 이 하나 돋지 않은 말간 잇몸이 환히 드러났다.이 가엾은 아이는 무엇이 그리도 좋아 늘 웃기만 하는 걸까.정시연은 보물이를 가슴 깊이 끌어안은 채 팔을 가볍게 흔들어 달랬다. 말랑하고 통통한 뺨이 젖을 찾으며 가슴께를 이리저리 파고들었

  • 달빛이 낮게 내린 밤에   제25화

    아마 밖에서 적잖이 고생하다가 여비마저 떨어져 더는 버티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리라.그렇다면…… 이번에는 주인도 쉽사리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가랑비는 여전히 처마 끝을 두드리며 맑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강희는 서둘러 우산을 펼쳐 들고 빠른 걸음으로 주방현의 뒤를 따랐다.그때 앞서가던 주방현의 발걸음이 갑자기 멎었다.훤칠한 몸이 주씨 부저 대문 앞에 우뚝 멈춰 섰다.주방현은 멍하니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정시연이 기름종이 우산을 받쳐 든 채 빗속에 서 있었다.그는 정시연이 집을 나간 뒤 보름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으리라 여겼다. 행색도 초라하기 짝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정시연에게서는 초라한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곱고 아름다워 보였다.가느다란 몸으로 우산을 받쳐 든 그녀가 고개를 들어 주방현을 바라보았다. 촘촘한 빗줄기가 드리운 장막 너머로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강남의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온 듯했다.멀리서 주방현을 발견한 정시연이 성큼 다가와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기름종이 우산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차가운 빗방울이 이마 위로 내려앉았다. 물방울은 눈썹뼈의 부드러운 선을 타고 흘러 속눈썹 끝에 맺혔다.빗물이 광대뼈를 훑고 지나가자 젖은 피부가 희미하게 빛났다. 도톰한 두 뺨은 물기를 가득 머금고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처럼 탐스러웠다.이내 빗방울은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려 가느다란 목덜미를 지나 옷깃 속으로 스며들었다. 젖은 소매는 팔뚝에 달라붙어 가녀린 선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우산도 없이 비안개 속에 서 있는 정시연의 모습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과 꼭 닮아 있었다.안개비가 자욱하던 산비탈 아래에서, 그녀가 우연히 쓰러진 그를 발견했던 바로 그날과.주방현은 넋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느릿하게 뛰는 소리만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한 번. 그리고 또 한 번.그때 정시연의 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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