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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신추아
오늘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맑은 날이었다.

강남과 달리 경성의 겨울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군 채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었다. 정시연은 손에 든 보따리를 힘주어 움켜쥐고 예왕부의 높은 문턱을 넘어섰다.

문지기에게 찾아온 용건을 밝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어멈이 그녀를 맞으러 나왔다. 어멈은 짙은 청색 포를 단정히 차려입고 있었고, 검은 머리는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말끔히 빗어 넘겨 단단히 쪽을 쪘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정시연의 얼굴을 찬찬히 살치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황 어멈이다. 따라오너라.”

황 어멈은 곧장 몸을 돌려 예왕부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이 워낙 빨라 정시연은 뒤처지지 않으려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감히 고개를 높이 들지도 못한 채 황 어멈의 뒤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따랐다.

반듯하게 깔린 청석 길을 지나 정원의 태호석을 쌓아 만든 가산을 돌아서자, 비단띠처럼 길게 굽이치는 회랑이 나타났다. 회랑 옆의 목조 투창에는 섬세하고 복잡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처마 아래에는 등롱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살며시 눈을 들면 멀리 높고 낮은 누각과 정자가 질서 정연하게 펼쳐졌다. 완만하게 이어진 지붕마다 푸른 유리기와가 덮여 있었으며, 치켜 올라간 네 귀퉁이에는 신수가 웅크린 채 부저를 굽어보고 있었다.

정시연에게는 어느 하나도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

예왕부는 그야말로 장대했다. 수많은 뜰과 전각이 끝없이 이어져 한눈에 그 끝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그 안에 발을 들이고 있자니 자신이 티끌처럼 작아진 듯했고, 그만큼 하늘과 땅은 더욱 아득하고 광활하게 느껴졌다.

예전의 정시연은 군주가 주방현에게 하사한 부저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곳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예왕부에 들어와 직접 보고 나니, 주씨 부저의 화려함조차 이곳에는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했다.

몇 개의 문턱을 넘었는지도 잊어버릴 무렵, 앞서 가던 황 어멈이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앞으로 네가 지낼 방이다. 바로 옆에는 주인께서 머무시는 금수당이 있으니 알아 두거라.”

정시연은 앞으로 머물게 될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살림은 단출했지만 필요한 것은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담황색 휘장이 드리워진 나무 침상 곁에는 큼직한 옷장이 놓여 있었고, 방 한쪽의 나무 탁자 위에는 갈아입을 옷 두 벌이 가지런히 마련되어 있었다.

창문은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했다. 얇은 창호지를 통과한 햇살이 방 안 구석구석 스며들어 실내를 환하고 포근하게 밝혔다.

이 방은 주씨 부저에서 보물이와 함께 지내던 곁채보다도 두 배는 넓었다.

“한 달 품삯은 은자 스무 냥이다. 보름마다 이틀씩 집에 다녀올 수 있고. 다만 어린 주인님의 성정이 워낙 까다로우니, 각별히 조심해서 모셔야 할 것이다.”

정시연은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에 은자 스무 냥이라니, 다른 집 유모가 한 해 동안 받는 품삯과 맞먹는 돈이었다. 그만한 삯을 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일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당연히 감수해야 했다.

황 어멈은 물결처럼 촉촉한 정시연의 눈매와 살짝 깨문 붉은 입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목소리에 힘을 주어 경고했다.

“앞으로 왕부에 머무는 동안에는 한시도 네 신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괜한 욕심을 품고 높은 가지에 올라 봉황이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거라.”

정시연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살갑게 대답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예왕부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제게는 크나큰 행운입니다. 저는 그저 어린 주인님을 정성껏 돌보고 싶을 뿐입니다.”

황 어멈은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는 듯 잠시 멈칫했으나,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귀한 분 앞에서는 자신을 소인이라 칭해야 한다.”

“예,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정시연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의 곁을 지키던 어멈에게도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도 굴욕스럽지 않았다.

정시연은 밝고 널찍한 방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에 잔잔한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줄곧 등허리를 짓누르던 거대한 바위도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보물이를 무사히 먹여 살리려면 반드시 유모의 소임을 다해, 이곳 예왕부에 오래도록 머물러야만 했다.

정시연이 보따리를 내려놓자 황 어멈은 곧장 그녀를 옆의 금수당으로 안내했다.

문턱을 넘어 들어선 금수당은 정시연이 상상했던 것처럼 금빛으로 휘황찬란한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탁 트인 뜰이 시원하고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뜰에는 겨울인데도 꽃과 나무가 울창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고, 어딘가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까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정시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눈앞으로 뿔 달린 양 한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소운에서 들여온 양은 온몸이 눈처럼 새하얬고, 뿔 끝은 살짝 안으로 말려 있었다. 등 뒤에는 정교하게 만든 나무 수레가 매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옥으로 빚어 놓은 듯 곱고 귀여운 사내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손에 든 대나무 채찍으로 양을 재촉하며 뜰 안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녹색 옷을 입은 시종이 혼비백산하여 쫓아왔다.

“도련님, 조금만 천천히 가세요! 오늘부터 도련님을 모실 유모가 오기로 했단 말입니다!”

아이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볼을 잔뜩 부풀렸다. 화가 난 듯 양의 엉덩이에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누가 유모 따위를 보내 달랬느냐?”

이어 잔뜩 못마땅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어멈들은 하나같이 못생겼단 말이다. 밤에 등불을 들고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면 얼마나 무서운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이 더욱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 앞에는 문가에 서 있던 정시연이 있었다.

새하얀 그림자가 삽시간에 눈앞으로 달려들자 정시연은 놀라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 쳤다. 그제야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아이가 황급히 고삐를 힘껏 잡아당겼고, 양은 정시연과 부딪치기 직전에 가까스로 멈추었다.

뒤따라오던 시종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서둘러 아이의 곁으로 달려온 그녀는 정시연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반짝이며 달래듯 말했다.

“도련님께서 워낙 까다로우시긴 해도, 이번에 오신 유모는 이렇게 고우시잖아요. 하나도 무섭지 않으시죠?”

도련님이라고?

정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의아한 눈으로 양 수레에 앉아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선명한 남빛의 비단 단령을 입고, 목에는 순금으로 만든 장명쇄를 걸고 있었으며, 새까만 머리카락은 정수리 양쪽에 조그맣게 묶여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빼어난 얼굴이었다. 아이 역시 포도알처럼 크고 동그란 눈을 뜬 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정시연을 올려다보았다.

얼핏 보아도 세 살은 되어 보였다.

그런데 이만큼 자란 아이에게도 유모가 필요한 것일까?

정시연의 의아한 시선을 느낀 아이는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홱 돌렸다.

“싫다. 아무도 나를 따라다니면서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는 대나무 채찍을 힘겹게 휘두르며 양을 움직이려 했다.

“유모를 들이느니 차라리 양을 몇 마리 더 사 주거라. 나는 돼지도 키우고 싶단 말이다. 전부 이 뜰에서 기를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양은 더 이상 아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아이는 뜻대로 되지 않자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곁에 선 민취를 돌아보며 사납게 말했다.

“나는 정말 유모 같은 건 필요 없다! 한 사람이 더 와서 나를 감시할 바에는 너도 저 여자와 함께 나가 버리거라!”

그 말을 들은 민취는 입술을 깨물었다. 곤란한 얼굴로 정시연의 뒤에 서 있던 황 어멈을 올려다보았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오신 분도 도련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네요. 어쩔 수 없지요.”

황 어멈은 정시연을 곁눈질하며 속으로 복이 없는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막 돌아가라고 말하려던 찰나, 곁에 서 있던 정시연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소박한 흰 치맛자락을 가볍게 나부끼며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희고 가느다란 손을 내밀어 손수건을 살랑살랑 흔들며 양을 향해 다정히 말했다.

“이리 오렴. 내게로 와.”

아이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둥글고 도톰한 턱을 자랑스럽게 치켜들었다.

“내 아만이는 절대로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이 길게 울었다.

“메에.”

이내 네 발굽을 가볍게 움직여 뒤에 매인 나무 수레를 끌고 정시연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청석 바닥을 두드리는 발굽 소리가 뜰 안에 맑게 울려 퍼졌다.

정시연은 고요히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입가에는 자그마한 보조개가 피어났다.

그녀가 몇 걸음 더 물러나 다시 손짓했다.

“아만?”

양은 정시연을 따라 얌전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그녀의 곁에 이르자 스스로 머리를 들이밀고 혀를 내밀어 손바닥을 핥았다.

“메에.”

양 수레에 앉아 있던 배한설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정시연을 빤히 바라보던 아이가 물었다.

“아만이가 왜 네 말을 듣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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