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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그 기획서는 내가 썼다

Penulis: POTO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9-04 17:44:24

발표 화면 첫 장에 백나리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루미에르관 재개장 전략, 총괄 백나리.’ 그 아래 펼쳐진 건 내가 반년 동안 만든 기획서였다.

나는 회의실 문을 열었다.

“발표 중입니다.”

나리가 웃으며 나를 막았다. 브랜드사 임원들과 태림 경영진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알아요. 제 기획서를 발표 중이니까.”

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채야, 나가서 얘기해.”

“이 자료를 나리 씨에게 줬어요?”

“회사 자료야. 누가 발표하든 프로젝트가 살아야 해.”

“누가 만들었는지도 회사에는 중요하지 않나?”

명희가 차갑게 끼어들었다.

명희는 직함 없는 내가 공을 주장한다며, 메모를 완성한 사람은 나리라고 잘라 말했다.

나리는 화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형님 조언이 일부 들어간 건 맞아요. 그래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일부?”

“하지만 브랜드 구성, 수익 구조, 공간 콘셉트는 제가 다듬었어요.”

나는 리모컨을 집어 네 번째 장을 띄웠다. 예상 객단가, 회전율, 임차 수수료가 복잡하게 얽힌 표였다.

“그럼 이 숫자 설명해 봐요.”

“지금요?”

“당신이 완성했다면서요.”

나리는 목을 가다듬었다.

“루미에르의 프리미엄 고객을 반영한 예상치예요.”

“어떤 예상치죠?”

“그건 세부 실무라 담당팀이—”

“연간 매출 칸에 월 매출 승수가 들어가 있어요. 일부러 남겨 둔 오류예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

나는 브랜드별 회전율의 소수점도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원본을 훔친 사람이 검산했는지 보려고 남긴 표시였다.

해외 브랜드 임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 지금 수익 전망은 틀렸다는 겁니까?”

“오류를 바로잡은 원본은 제게 있습니다. 계약 조건은 오히려 더 안정적입니다.”

“그 원본을 공유해 주시겠습니까?”

“저작자와 책임자를 먼저 명확히 해 주시면요.”

임원이 나리에게 영어로 같은 질문을 건넸다. 나리는 통역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다 건우에게 한국어로 되물었다.

“지금 자료를 달라는 뜻이죠?”

“손익 기준을 누가 검증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영어로 답하자 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작성자라면 산식의 가정도 설명할 수 있겠군요.”

나는 브랜드별 최소 보장액을 최근 삼 년 평균이 아닌 불황기 하단값으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수정본의 이익은 낮지만 손실 가능성도 절반이었다.

나리가 얼굴을 붉혔다.

“갑자기 영어로 말해서 사람 망신 주는 게 목적이에요?”

“질문한 분의 언어로 답했을 뿐이에요.”

건우는 내 설명보다 나리의 당황한 표정을 먼저 살폈다.

그의 턱이 굳었다.

“회의를 협상장으로 만들지 마.”

“이미 남의 이름을 붙인 순간 협상장이 됐어.”

“당신은 공식적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없어.”

“공식 직함이 없으면 내가 쓴 문장이 다른 사람 것이 돼?”

“아내로서 도운 걸 회사 성과라고 주장하는 건 곤란해.”

그 말이 가장 정확하게 나를 베었다. 아내이기 때문에 밤을 새우는 건 당연했고, 아내이기 때문에 이름을 요구하는 건 탐욕이 됐다.

금세 그녀의 기세가 돌아왔다.

나리는 내 자료를 참고했을 뿐, 최종 기획의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고 우겼다.

“그럼 마지막 장의 표식도 설명할 수 있겠네요.”

나는 화면을 확대했다. 공간 배치도 구석에 아주 작은 초승달 세 개가 겹쳐 있었다.

“이게 뭔데요?”

“모른다는 답, 기록해 둘게요.”

그 표식은 어머니가 루미에르 도면마다 남긴 손그림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본떠 원본 파일에만 넣었다. 나리가 가져간 버전에도 있었지만 의미까지 훔치지는 못했다.

명희가 회의를 중단시켰다.

“오늘 발표는 여기까지 하지. 건우, 네 아내부터 데리고 나가.”

나는 회의록 담당자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방금 제기한 오류와 저작권 이의를 원문 그대로 남겨 주세요.”

“대표님 승인 없이는 어렵습니다.”

“그 거부도 회의록에 남기세요.”

담당자는 건우의 눈짓을 받고 회의록을 덮었다.

복도로 나온 건우는 내게서 리모컨을 빼앗았다.

“왜 매번 사람들 앞에서 일을 키워?”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지운 건 당신들이야.”

“나리는 책임질 직함이 있어. 당신은 없고.”

“직함을 주지 않은 사람도 당신이야.”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마지막 기대처럼 물었다.

“내가 썼다는 걸 정말 몰랐어?”

건우는 내가 자료를 조금 도운 건 알지만 전부 썼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내 말은 증거가 아니고?”

“감정적으로 나오지 마.”

나는 웃었다. 눈물보다 웃음이 먼저 나오는 날도 있었다.

내게는 원본 생성 시각과 수정 이력, 접속 기록, 나리가 고치지 못한 오탈자가 모두 있었다.

그 증거들은 이미 세 곳에 나눠 보관해 뒀다.

건우의 눈빛이 변했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오래된 외장 저장장치를 꺼냈다. 파일의 최초 버전부터 매일의 수정본, 어머니 도면을 스캔한 날짜까지 별도 보관돼 있었다.

그중 나리에게 넘어간 파일 하나를 열었다. 작성자 정보가 지워진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 사십이 분이었다.

수정 계정의 소유자는 백나리가 아니었다.

최명희 부회장 전용 비서실 계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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