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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Author: 적매화
김단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큰 마님을 살펴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큰 마님의 시선에서 소한과 다시 잘되길 바라는 큰 마님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한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큰 마님의 눈에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주상전하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소한가 그녀의 정혼자로 딱 맞았다.

하지만 둘 사이의 감정은 오래전에 끝났고 소한의 곁에는 임원이 있었다.

이제 와서 그녀가 끼어들 수도 없었고 둘 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

김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모님, 소 장군께서 임원 낭자에게 줄 수정과를 쇤네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했습니다. 두 사람이야말로 부부의 연이지요. 하오니 더는 그런 생각 마십시오.”

큰 마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한탄했다.

“아이고! 남녀 사이의 정이 어디 한 번에 끊어지더냐? 난 그저 너희 둘이 전부터 잘 지내왔기에 아쉬워서 그런 것이다.”

김단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올렸다.

“소녀는 그저 조모님과 함께하고 싶사옵니다. 진심이옵니다.”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다시피 했기에 큰 마님이 이리 아쉬워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둘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더는 소한 때문에 괴롭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조모님의 곁을 지키며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어둠이 깃들자 김단은 큰 마님을 모시고 방에서 나왔다.

몸종들은 풍성한 음식을 갖춰놓았고 진산군과 정부인은 진작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단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큰 마님을 발견한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큰 마님은 김단의 부축을 받으며 원탁의 상석에 천천히 앉았다.

“모두 자리에 앉게.”

큰 마님은 오늘 유난히 기분 좋아 보였다. 그간 김단의 자리가 계속 비어 있었던 탓에 그녀는 항상 우울했었다. 다행히 올해는 김단도 자리에 있었다.

흥이 난 큰 마님에 부부는 김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아, 너도 앉거라.”

고개를 살짝 끄덕인 김단은 어색하게 자리를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모친의 곁에 앉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자리에 임원이 앉아 있었다.

이마에 붕대를 감은 임학은 말없이 진산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어제 일로 그녀와 말을 섞지 않았다.

둥그런 원탁에는 그녀의 자리만 비어 있었다.

그녀의 왼쪽에는 임학이, 오른쪽에는 임원이 앉아 있었다.

큰 마님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둘 사이에 앉았다.

진산군 부부는 근래에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가끔 임원이 기침할 때마다 모두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렸다.

임학은 말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김단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챈 진산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임학을 가볍게 쳤다.

“네 누이에게 음식 좀 챙겨주거라.”

진산군이 나서서 둘 사이를 풀어주려 했다.

임학은 물고기 한 점을 집어 김단의 그릇에 놓았다.

“네가 잘 먹던 것이다.”

임학은 한마디 했다.

진산군 부부와 큰 마님은 흐뭇한 얼굴로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김단은 자기 앞에 놓인 물고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화목하게 웃고 있는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임학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다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자신을 용서한 줄 알았던 김단이 자기가 집어준 음식을 놔둔 채 다른 것을 먹는 것을 발견한 임학은 마음이 속상했다.

하지만 조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소동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애써 감정을 절제했다.

한참이 지난 뒤 큰 마님은 피곤하다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는 큰 마님을 발견한 김단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큰 마님은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마저 먹거라. 이 늙은이는 많이 먹지 못한다. 너라도 나 대신 많이 먹거라.”

김단은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큰 마님은 김단과 진산군 부부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길 바랐다.

비록 친딸은 아니지만 그들의 손으로 키웠고 키운 정이라는 게 있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감정도 쌓일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큰 마님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임학은 그녀의 그릇을 빼앗아 갔고 부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짓이오!”

부인은 술잔을 기울이는 진산군의 안색을 살폈다.

진산군은 말없이 김단을 쳐다보았다.

“네 생모는 핏덩이 같은 널 이곳에 15년이나 뒀다. 그동안 우리는 너를 잘 먹이고 잘 키웠다. 우리 부부는 널 금이야 옥이야 키웠어. 네 오라비도 널 끔찍이 아꼈지. 네가 원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게 가져다줬다.”

진산군의 말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점점 굳었다.

부인은 김단의 눈치를 한 번 살피더니 진산군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대감, 왜 그리 말씀 하십니까?”

기침을 하던 임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혹여 진산군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겁났다.

진산군은 부인에게 답하는 대신 김단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3년 전 일은 우리 잘못이다. 하나, 이미 지난 일이지 않으냐? 네가 세답방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나도 안다. 15년간 이 집에서 누렸던 호사를 보답한다고 여기면 안 되겠더냐?”

임학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김단을 무시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마음을 풀기 위해 한 말이다.

김단은 말없이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진산군은 실망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돌아온 뒤로 네 어미는 눈물로 밤을 지새웠고 원이는 너를 찾아가 사죄도 했다. 네 오라비가 충동적으로 굴긴 했으나 널 괴롭힌 나인들을 찾아가 복수를 했다.”

“우리는 어떻게든 네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애썼다. 한데 왜 이리 뻣뻣하게 구는 것이냐? 이곳에 남기 싫다면 당장 짐을 챙겨서 나가거라! 말리지 않을 테니!”

“대감!”

임씨 부인이 절박하게 외쳤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그만하시지요!””

“아버님 말씀이 맞다.”

김단의 그릇을 원탁의 중앙에 놓은 임학이다. 임학이 집어준 음식에 손대 안 댄 것을 모두가 알아차렸다.

부인은 다소 실망한 얼굴로 김단을 바라보았다.

‘어찌 이리도 고집을 부리는 것이냐? 그깟 음식 한 입 먹는 게 그리도 어렵더냐?’

임학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머물기 싫으면 그만 나가거라. 아무도 말리지 않을 것이다. 너 때문에 우리까지 얼굴을 붉혀야 하겠느냐! 따지고 보면 잘못은 네 생모가 했고 우리는 네게 아무 빚도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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