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5화

Author: 적매화
순간 김단은 가슴이 철렁했다.

나인도 깜짝 놀란 듯 김단과 소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알겠사옵니다.”

나인은 곧장 떠났다.

소한은 김단에게 손짓했다.

“낭자, 가지요.”

김단은 어쩔 수 없이 소한과 함께 입구로 향했다.

오늘따라 궁궐 안의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아무리 걸어도 커다란 궐문이 보이지 않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으로만 나아갔다.

둘 사이에는 신발 밑창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나는 소리만 있었다.

소한의 기억 속엔 언제나 시끄럽게 떠들던 그녀만 있었다.

종일 쉬지 않고 떠들었던 그녀이기에 이런 침묵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결국 참다못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낭자 오라버니의 일은 나도 들었소. 어심이 어지러웠던 것은 사실이나 크게 노여워하시진 않으셨소.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자기를 위로하는 소한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임학의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소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덕빈마마도 진산군댁의 안위를 위해 그리한 것이니 마음에 두지 마시오. 큰 마님 생각도 해야지 않겠소.”

덕빈의 의중도 그녀는 알고 있다.

이런 것은 그녀가 3년 전에 겪었던 고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소한의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단 낭자.”

순간,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3년이나 지난 뒤에도 자신을 불러주는 소한에게 심장이 반응할 줄 그녀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얼른 자기 감정을 억제했다.

소한은 조만간 임원의 낭군님이 될 사람이었고 명목상 그녀와 사돈이 될 사내였다.

그에게 감정을 품어서는 아니 되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소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말수가 준 것이오?”

소한은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싫었다.

그의 질문에는 항상 대답했던 김단이다. 하나, 오늘 김단은 인사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단은 살짝 당황했다. 그녀는 뒤늦게 자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답방에선 대화를 나눌 친구가 없었기에 자연히 말수가 줄었다.

게다가 나인들과 상궁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모함을 당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아무리 변명을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말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점점 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말수가 많아진다 하여 변하는 진실은 없었다.

그해, 중전과 공주자께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연신 말했음에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요 며칠 임학과 임원에게도 수없이 말했었다.

하지만 전부 쓸모없는 짓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김단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소한은 긴장한 눈빛으로 왜소한 몸집의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거대한 벽은 명확한 대비를 이루었다.

거대한 궁궐의 성벽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그는 살짝 후회되었다.

갑작스레 말수가 줄어든 연유를 그도 잘 알고 있다.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처럼 고요한 환경이 적응되지 않았다.

“오늘 취양각에서 불꽃놀이를 한다오. 그 자리이니 오라비와 같이 와서 즐기게.”

취향각의 불꽃놀이.

김단은 살짝 놀란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진산군 관저로 돌아간 날이 28일이었고 오늘이 30일이다.

취향각의 불꽃놀이는 매년 음력 30일에 개최하는데 해시부터 자시까지 진행된다.

화려한 불꽃놀이를 구경하기 위해 가장 좋은 자리를 선점해야 한다. 도성의 사내들은 취향각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선점해둔다.

임학과 소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매년 취향각에서 가장 크고 넓은 방을 예약했다. 술시부터 술잔을 기울이며 불꽃놀이를 즐기다가 각자의 본가로 돌아갔다.

김단도 예전에는 임학과 소한을 따라가 그곳에서 그들과 불꽃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잠시 밝게 빛나던 그녀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김단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불꽃놀이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녀와 관계를 회복할 여지가 있어 보였다.

그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가 좋아하는 매실주도 이미 주문했소.”

예전에 그녀가 좋아했던 매실주를 언급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옵니다.”

김단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차분하게 답했다.

소한은 살짝 풀린 눈빛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그녀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사실 소한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입구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궐문에 다다른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소한이 그녀를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걱정했다.

그녀는 소한에게 인사를 한 뒤 마차에 올라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마차에 채 앉기도 전에 소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도 가져가시오.”

그는 수정과를 건네주었다.

지난번 소한의 마차 안에 있던 수정과였다.

그녀는 의아한 기색으로 그것을 쳐다보다가 건네받았다.

김단은 자신의 손에 들린 수정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슴 한편이 찌릿하게 아팠다.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수정과를 몸종에게 건네며 매화당으로 가져가라고 일러준 뒤, 큰 마님이 계시는 안채로 향했다.

큰 마님은 오늘 기력이 좋아 보였다.

“궐에서 돌아오는 게냐?”

김단은 그녀의 곁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며 답했다.

“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다시 말했다.

“덕빈마마께서 소녀에게 잘못을 묻진 않으셨습니다.”

큰 마님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다행이구나. 물에 빠졌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더냐?”

김단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소녀는 괜찮사옵니다. 숙희가 끓여준 영양 차도 마셨고 뜨거운 물에 목욕도 했습니다.”

게다가 수년간 찬물에 빨래를 했던 그녀는 물에 한 번 빠진 거로 고뿔에 걸릴 만큼 연약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큰 마님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손녀딸을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오늘 밤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가느냐?”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Related chapters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16화

    김단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큰 마님을 살펴보았다.자신을 바라보는 큰 마님의 시선에서 소한과 다시 잘되길 바라는 큰 마님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한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큰 마님의 눈에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주상전하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소한가 그녀의 정혼자로 딱 맞았다.하지만 둘 사이의 감정은 오래전에 끝났고 소한의 곁에는 임원이 있었다. 이제 와서 그녀가 끼어들 수도 없었고 둘 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김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조모님, 소 장군께서 임원 낭자에게 줄 수정과를 쇤네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했습니다. 두 사람이야말로 부부의 연이지요. 하오니 더는 그런 생각 마십시오.”큰 마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한탄했다.“아이고! 남녀 사이의 정이 어디 한 번에 끊어지더냐? 난 그저 너희 둘이 전부터 잘 지내왔기에 아쉬워서 그런 것이다.”김단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올렸다.“소녀는 그저 조모님과 함께하고 싶사옵니다. 진심이옵니다.”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다시피 했기에 큰 마님이 이리 아쉬워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둘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더는 소한 때문에 괴롭게 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조모님의 곁을 지키며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어둠이 깃들자 김단은 큰 마님을 모시고 방에서 나왔다. 몸종들은 풍성한 음식을 갖춰놓았고 진산군과 정부인은 진작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단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큰 마님을 발견한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큰 마님은 김단의 부축을 받으며 원탁의 상석에 천천히 앉았다.“모두 자리에 앉게.” 큰 마님은 오늘 유난히 기분 좋아 보였다. 그간 김단의 자리가 계속 비어 있었던 탓에 그녀는 항상 우울했었다. 다행히 올해는 김단도 자리에 있었다. 흥이 난 큰 마님에 부부는 김단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아, 너도 앉거라.”고개를 살짝 끄덕인 김단은 어색하게 자리를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모친의 곁에 앉았지만 지금은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17화

    사실 김단도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그러나 그녀는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었고 알고 있는 친구도 없었기에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었다.게다가 조모님은 아직 여기에 계셨다. 조모님을 홀로 남겨두고 맘 편히 떠날 순 없었다.그렇기에 진산군과 임학이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묵묵히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릇에 닿았다. 이 사달이 난 원인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릇에 있는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임학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먹을 마음이 생긴 것이냐? 진산군댁 첫째 아씨 성정 한 번 맞추기 어렵구나.”김단은 임학을 한 번 쳐다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산군에게 예바르게 말했다. “노여워 마십시오. 의도적으로 도련님께서 집어주신 음식을 피한 것이 아닙니다. 몇 해 전에 몸이 상하면서 비린내가 나는 음식을 먹으면 발진과 아양으로 견딜 수 없었사옵니다. 하여 금일도 음식을 먹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해산물에도 손을 대지 않았사옵니다.”김단의 말에 진산군 일가는 깜짝 놀라 그녀의 앞에 놓인 접시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어떤 해산물도 먹지 않았다.임학은 믿기 어렵다는 듯 말했다.“위병이 나 먹지 못한다면 믿었을 것이다. 한데 네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을 먹고 발진이 났다는 것을 나더러 믿으라는 것이냐? 내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김단은 조용히 옷소매를 거둬 자신의 팔을 보여주었다.매질에 상처가 가득한 팔에는 발진 증세가 보이기 시작했다.“이럴 수가! 어서 의원을 부르거라!”부인이 다급히 외쳤다. 바로 이때, 임원의 기침 소리가 거세졌다.목에 무엇이 걸리기라도 했는지 숨이 가쁘게 기침하는 임원의 모습에 부인은 김단은 뒷전에 두고 임원부터 살펴보았다.그러나 임학의 시선은 여전히 김단의 팔에 향해 있었다. 이런 꼴을 보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그저 가족들에게 체면을 주지 않는 그녀가 얄미워 모질게 말했던 것이다. 생선을 좋아했던 누이의 얼굴에 어느새 발진 증세가 일어나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18화

    갑작스러운 제안에 소한은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그러나 그가 답하기도 전에 임학은 소한에게 주먹을 날렸다.소한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피했다.허공에 주먹을 휘두른 임학의 몸이 술상에 엎어졌고 음식들이 바닥에 떨어졌다.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음식을 들어 소한에게 던졌다.소한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섰다.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미친 것이오?”이것은 취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이런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임학의 옷자락이 어지럽혀있었다.임학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손가락으로 소한을 가리키며 말했다.“원이의 마음에 상처를 줄 시 내 자네를 가만두지 않겠네!”소한은 차가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옷 정리를 했다.“전에도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군.”그때는 김단을 위해 말했었다. 멈칫하던 임학이 말을 이었다.“이제는 원이의 정혼자이니 탐욕 부리지 말게.”“자네가 먼저 제안했소. 난 아무 말도 안 했소.”소한은 차분하게 다른 쪽에 앉았다.임학은 헛웃음을 지었다.“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몇 해인데 내가 자네 속셈을 모를 것 같소? 단이가 그날 수정과를 가져가지 않아 오늘 특별히 챙겨주지 않았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수정과를 원이에게 보냈다네. 단이는 자네에게 마음이 없네. 그만 질척거리시오!”‘내가 질척거려? 먼저 질척거린 게 누구인데.’소한은 마음속 말을 삼킨 채 술잔을 들이켰다.소한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임학은 술병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소한의 뇌리로 상흔과 발진이 얼기설기 자리 잡은 김단의 팔이 스쳐 지났다. 옆 방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얼마 뒤 밖에서 폭발음이 들렸고 불꽃놀이가 시작한 듯 시끌벅적해졌다.사람들은 하늘에 터지는 화려한 불꽃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렀다.두 사람도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았다.창가에 기대 손을 흔드는 여인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불꽃을 즐기는 형체가 두 사람의 시야로 다가왔다.올해의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19화

    이 시점에서 자신을 찾아온 것으로 보아 무슨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자리에서 일어선 김단은 임씨 부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마님, 오셨습니까.”아직도 자신을 마님으로 칭하는 그녀 때문에 임씨 부인은 속상했다.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김단의 손을 맞잡으며 자리에 앉았다.“혼자 울적하게 있을까 봐 이리 와 보았다.”김단은 말없이 자기 손을 빼냈다.임씨 부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큰 마님께서 널 얼마나 아끼셨니, 네가 이 집안 핏줄이 아닌 것을 안 뒤에도 널 가장 어여뻐 하셨다.”김단도 인정한다.누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누가 진심으로 대하는지 그녀는 알 수 있었다.편찮으신 몸으로 중전마마께 간청하여 자기를 빼내온 것만으로 봐도 그녀의 진심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고개를 떨군 김단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녀는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 애썼다.하지만 임씨 부인은 그녀의 진심을 모르는 듯했다.임씨 부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대감이 계셔 말을 아꼈다. 네 조모님께 남은 시일이 얼마 없다.”임씨 부인의 말에 김단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그대로 흘러내렸다.‘조모님 곁을 지킨 지 며칠이나 됐다고…’임씨 부인은 안쓰러운 심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큰 마님을 향한 네 마음도 잘 알고 있다. 하나,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큰 마님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느리라.”김단은 코를 훌쩍이며 답했다.“직언하시지요, 마님.”둘 사이에 묘한 괴리감이 들었다. 김단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들었던 임씨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뒀다.긴 한숨을 내쉰 부인이 다시 말했다.“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어미가 미울지도 모르겠구나. 허나 큰 마님께서도 나와 생각이 같을 것 같구나.”임씨 부인은 물끄러미 김단을 쳐다보았다.“네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이젠 혼처를 찾을 때가 된 것 같구나.”사실 그녀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20화

    김단과 명정대군과 아는 사이였다.덕빈과 임씨 부인은 오랜 친우였기에 어릴 적부터 두 여인의 아이들은 함께 놀면서 컸다. 하지만 신분이 고귀했던 명정대군과 아무리 친하게 지냈다고 할지 언정, 그들 사이에는 높고 낮음이 존재하고 거리감이 있었다.훗날 학업에 열중해야 했던 명정대군은 궐밖으로 나오는 빈도수가 점점 줄었고 그들의 만남도 줄어들었다.그녀는 세답방에서 명정대군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다만 무수리의 신분이었던 그녀는 많은 나인들 뒤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인사밖에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대군도 그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덕빈의 옆에 명정대군이 앉아 있었다. 정갈하게 옷을 갖춰 입은 명정대군은 우아했다. 워낙 키가 컸던 탓에 앉은 키도 덕빈보다 훨씬 컸다.이목구비가 뚜렷했던 명정대군은 주상전하를 닮았다. 눈매는 덕빈을 닮아 온화하면서 부드러웠다.그는 연민이 어린 시선으로 김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김단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처럼 느껴졌다.“일어나시오.”덕빈은 바닥에 엎드려 인사하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낭자의 모친께서 어제 서신을 도내왔다오.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꺼낸 것이 늦은 감은 있구려. 내 미리 알았더라면 그날 낭자가 왔을 때 좀 더 이야기를 나눠을텐데.”김단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남들 눈에는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사실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김단에게 인정을 베푸는 덕빈의 모습에 임씨 부인은 기분이 좋았다. 김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명정대군에게 임씨 부인이 화색을 띠며 말했다.“대군자가께서 점점 준수해지고 비범해지십니다.”명정대군은 임씨 부인에게 가볍게 목례했다.“장모의 농이 지나치군.”장모라는 호칭에 임씨 부인은 그들의 관계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덕빈과 임씨 부인은 눈을 마주쳤고 둘 사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오갔다.그러나 김단은 이해되지 않았다.덕빈은 그녀가 진산군의 수양딸인 것을 알고 있다.세답방에서 3년 간 무수리로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21화

    아마도 들려오는 냉랭한 목소리가 익숙한 탓인지, 김단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황급히 뒤로 두 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서두르는 바람에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했다.다행히도 명정대군이 민첩하게 반응해 그녀를 끌어당겼다.하지만 명정대군이 끌어당기는 탓에 두 사람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고 멀리서 봤을 때, 마치 명정대군이 김단을 안은 것처럼 보였다.소한의 원래 맹렬했던 눈동자는 김단의 팔을 꽉 잡은 명정대군의 손에 내려앉았고, 어두운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김단은 머리를 흔들면서 왠지 모르게 찔린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찔릴게 뭐 있어?자신은 소한과 이미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설령 관계가 있다 해도 그저 명목상의 '친척'일 뿐이다. 따라서 그녀가 누구와 함께 있든, 무엇을 하든 그것은 소한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아마 소한은 아무렇지도 않을 텐데, 괜히 자기 혼자만 마음이 혼란스러워진 것이었다!김단은 깊은 숨을 들어마시고, 마음속 쓸데없는 생각을 가라앉지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소한에게 인사를 올렸다.“소 장군님.”명정대군도 소한을 바라봤다.“소 장군, 또 궁에 들려 복명하러 왔소?”'또' 자에는 약간의 괴상함이 은은하게 물들어 있었다.소한의 시선은 드디어 명정대군의 손에서 떠나 명정대군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가갔다.“요즘 당우리 주위에 산적들이 창궐해서 현지 관려들이 몇 번이나 토벌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여 주상전하께서 저를 불러 대책을 상의한다고 하십니다.”이 일은 명정대군뿐만 아니라 김단도 들었던 소문이다.전에 세답방에 있을 때부터 나인들이 얘기한 걸 들었다.듣기로는 당우리에 있는 산적들은 일반 산적들과 달리 일찍 전쟁터에서 내려온 장병들로 구성된 사람들이라 훈련도 잘되어 있고 능력이 탁월해서 일반 관병들이 대처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정예 군대를 투입해도 쉽게 승리하지는 못할 것이라 한다.이 일을 생각하자, 김단의 안색은 자기도 모르게 무거워졌다.이때 그녀의 곁에는 명정대군의 지극히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걱정하지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22화

    김단은 마음속으로만 이렇게 생각하고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는데 이는 소한이 보기에는 묵인의 뜻이었다.몸 뒤에 주먹을 꽉 잡은 채, 그는 김단을 차가운 눈빛으로 봤다.“탐라성은 저 멀리 남쪽에 있고, 풍토와 인심도 한양이랑 차이가 매우 큰 것으로 알고 있소, 낭자 정말 잘 생각했소?”김단은 소한이 그녀에게 탐라의 날씨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는 것으로 생각해, 다소 진지하게 말했다.“대군자가께서 탐라의 겨울은 한양처럼 이렇게 춥지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아주 춥지 않은 한, 저는 잘 적응할 수 있어요.”그녀는 정말 추위를 많이 탄다.두 손을 물속에 담그고 있는 시린 한기도, 겨울밤 문밖에 갇혀 있는 그 차가움도 그녀는 다시는 겪어보고 싶지 않았다.소한은 김단의 이 말에 목이 메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김단을 노려보며 눈에는 한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그래서 김단이 소한을 쳐다보지 않더라도 강렬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소한은 화가 났다.왜 화가 난걸 가?명정대군한테 시집가기 때문인가?그럴리가 없어!그는 그녀가 혼인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았던가?그녀가 시집가야 그도 쉽게 임원과 혼례를 치를 수 있지 않겠는가?아, 그렇구나,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 그는 그녀가 시집을 너무 잘 갔다고 화내고 있었던 것이다.세답방에 들어가 3년 동안이나 노비로 일한 그녀가 언젠가 대군자가께 시집가서 대군빈이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김단은 사실 이처럼 천박한 생각으로 소한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소한의 노여움은 정말 엉뚱했다.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머리를 들고 소한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어쨌든, 난 더 이상 소 장군의 길을 막지 않을 겁니다. 소 장군은 응당히 기뻐해야 하지오”여기 서서 자기에게 눈치를 주는 대신에!소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이때 그의 손에 무엇인가가 쥐어졌다면 이미 재가 되었을 것이다.그러자 명정대군은 뭔가 생각난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23화

    소한을 한 번 비웃으려 했던 명정대군은 이내 안색이 변했다.이를 본 소한은 가볍게 눈썹을 치키며 나지막한 말투에 약간 조롱의 의미를 담았다.“그녀는 모르고 있나 봐요. 그럼, 이게 바로 백성들이 말하는 사기 결혼이 아닙니까?”“네 이놈!” 명정대군은 고함을 치면서 소한을 뚫어지게 봤다.“소한, 공훈 몇 개 세워 아바마마 면전에서 총애를 받는다고 해서 내 머리를 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오. 네까짓 게 이 대군 일까지 상관할 자격이 없소!"“대군자가 이렇게 노발대발할 필요는 없사옵니다.”소한의 입가에는 웃음이 흘렀지만, 눈빛에 맴도는 경멸함은 마치 명정대군의 존엄마저 발밑에 깔아놓는 것 같았다.그리고 명정대군도 이미 이전의 그 온화하고 따뜻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잘생긴 이목구비는 심지어 약간 비뚤어져 보이는 듯 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어조는 으스스하게 말했다.“설사 사기를 친 결혼이라고 한들? 소한, 당신도 속이지 그래. 낭자가 아직도 당신을 상대할 것 같소?”소한의 검고 침울한 두 눈동자는 그 순간 살인할 것 같은 기색을 띠고 미소도 따라서 입가에 굳어졌다.그러고는 명정대군이 코웃음을 지으며 득의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하여튼, 임단은, 아니, 김단이지. 본 대군이 꼭 대군빈으로 맞이할 테니, 소 장군은 앞으로 비난을 사지 않도록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겠소.”이렇게 말하고는 옷소매를 뿌리치고 나가 홀로 어화원에 남겨진 소한 온몸의 한기는 홍매 몇 송이도 떨어지게 했다.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앉은 김단은 시종 말을 하지 않았다.임씨 부인은 그녀를 보면서,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두 3년 전의 김단이다.3년 전, 김단은 조용히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마차 안에서도 끊임없이 재잘거려서, 매번 궁궐에 들어갈 때마다 어머니인 그녀는 김단이 말을 잘못할까 봐 신신당부해야 했다.그러나, 요즘의 김단은 입에 금을 박아 놓은 듯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그래서 그녀는 김단의 말을 들으려면 말거리를 잘 생각해야 했

Latest chapter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83화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82화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81화

    김단은 며칠 동안 정성을 다해 맹영지의 상태를 호전시켰건만 민태훈의 갑작스러운 악행으로 인해 그간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맹영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해독제를 찾는 일도 어려워질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영의정 저택에 더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곁에 있던 몸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맹가 사람들에게 전하거라. 내가 맹영지를 데려가겠다고 말이다.”몸종은 놀란 눈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지금 맹영지를 민대감한테서 떨어뜨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나 김단이 그녀를 데려가겠다는 사실을 민가 사람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김 의원님께서 몰래 모셔가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김단은 냉정하게 대답했다.“네가 도와준다 한들 민가 사람들에게 들키게 된다면 너의 신분으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서 민가 사람들을 불러오거라. 누구든 상관없다. 내가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몸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예.”얼마 지나지 않아 맹영지의 뜰은 소란스러워졌다. 조정에서 전하와 정무를 논의 중인 영의정 대감을 제외하고 민가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였다.특히 민태훈은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와 김단에게 따지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안에서 날아온 은침이 그의 허벅지를 정확히 찔렀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지며 신음을 토했다.민가의 큰 마님은 몇몇 마님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착하였다.맹영지의 뜰에 도착한 그녀가 본 장면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손이 땅에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즉시 분노를 터뜨리며 지팡이로 땅을 세차게 내리쳤다.“어디 이런 무례한 의원이 다 있단 말이오? 감히 우리 영의정 저택에서 사람을 해치다니! 이 자를 당장 붙잡거라! 내가 직접 궐에 데려가 이 무엄한 짓이 누구의 명령인지 따져 물을 것이다!”영의정 저택의 병사들은 즉시 명령에 따라 방으로 돌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방 안에서 또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80화

    김단은 다시금 영의정 저택을 찾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맹영지를 문병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서원공주한테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탓이었을까?김단이 몇 차례 영의정 저택에 들렀음에도 불구하고 민태훈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김단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전에 맹영지 방에서 나오는 그를 마주치게 되었다.김단은 무의식중에 얼굴빛이 굳어졌다. 그 바람에 마땅히 올려야 할 예까지 잊고 말았다. 민태훈은 그런 김단의 무례한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김 의원은 공주님을 모시더니 자기 위치를 잊은 것이오? 어찌 본관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는단 말이오?”김단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민 대감을 뵙습니다.”민태훈은 코웃음을 치더니 발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그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김단은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속에 품었던 우려가 결국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맹영지는 침대 구석에 웅크린 채 두 팔로 어깨를 감싸안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생기를 잃었고 옷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김단은 섣불리 다가갔다가 맹영지를 놀라게 할까 두려워 선뜻 가까이 가지 못했다.그때 맹영지의 몸종 하나가 탕약 한 사발을 들고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맹영지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손에 든 약그릇을 떨어뜨리고 말았다.그 소리에 맹영지는 격렬하게 반응하며 소리쳤다.“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제발…”몸종은 그 자리에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맹영지를 안아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며 몸종을 때리고 할퀴었다.이 광경을 본 김단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들어 맹영지한테서 몸종을 떼어내고 그녀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켜 버렸다.그러자 몸종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모두 다 소인의 불찰입니다. 큰 며늘 아씨께서 과자를 드시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엌으로 가 준비를 하던 참이었는데 그 사이에 대감님께서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79화

    김단은 여전히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모를 것이다.세상 사람들은 남의 고통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의 불행 앞에서도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것이겠지.그때 소정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도련님을 걱정하고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진산군 댁의 의원과 그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을 리 없잖아요.”김단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뭐 어떻게 되었든, 도련님께서는 낭자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방금 약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잠결에 부르는 이름도 낭자였거든요. 예전에는 사이좋은 남매였는데...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도련님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피를 나눈 사이인데 꼭 이렇게 멀어져야만 하나요?” “소정원 낭자.”김단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결 단호하고 날이 서 있었다.생각보다 묵직한 음성에 소정원은 당황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김단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허리춤에서 작은 손목 염주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것은 소한 장군님의 물건입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그분에게 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이 염주는 그녀가 시간 날 때마다 손수 꿰어 만든 것이었다. 소정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이게 정말 소한 오라버니의 것이 맞나요? 제 기억으로는 큰 오라버니도 비슷한 염주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서요.”김단은 작게 눈썹을 찌푸릴 뿐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소정원이 다시 물었다.“그런데 한이 오라버니 물건을 왜 낭자가 가지고 있는 겁니까?”그 물음에는 짙은 의문과 약간의 의심이 담겨 있었다.김단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낭자,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오. 제 실수로 소한 장군님의 염주를 끊어버렸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손수 꿰어 만든 것일 뿐이오.”소정원은 그제야 고개를 끄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78화

    소정원은 순간 당황했다. 김단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산군 앞에서 친히 임학에게 약을 먹이라니...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보여줘라는 뜻 아닌가?그녀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으나 무의식적으로 약그릇을 받아들고 있었다.김단은 몸을 돌려 진산군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진산군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도련님을 깨운 건 소정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진산군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게 정말이냐?”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임학과 소정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그럼 너희 둘은...”소정원의 두 뺨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고 임학에게 약을 먹이던 손마저 긴장으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부자연스러운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는 임학의 눈에는 따스함이 서려있었다. 그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자 소정원의 얼굴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장면을 말없이 바라보던 김단과 진산군은 눈치껏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그러나 밖으로 나온 진산군의 얼굴빛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보다 못한 김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이제 눈을 뜨셨고 거기에 좋은 인연까지 맺게 되셨으니 기뻐해야 할 일 아닙니까?”현재 진산군의 집안 사정을 헤아려봤을 때 혼인과 같은 경사로 액운을 풀 수만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진산군의 미간에는 여전히 주름이 깊게 잡혀있었다.“소정원 낭자가 싫다는 게 아니다. 다만 너도 알지 않느냐? 우리 집안은 소씨 가문과 이미 두 번이나 혼례를 맺으려다 결국...”그는 임학과 소정원도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김단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번은 다릅니다. 그 두 번의 혼사는 모두 거짓이었잖아요.”애초에 김단과 소하의 혼사는 거짓된 약조에 불과했다. 허울뿐인 인연인데 어찌 아름다운 결말이 따를 수 있겠는가?진산군은 김단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마침내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77화

    그 기억은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김단 역시 그 일을 떠올렸다. 그날 임학은 소정원의 치맛자락에 붙은 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어 김단을 챙겨주지 못했었다.김단은 그것도 모르고 등불회장 한가운데서 임학을 찾아 헤맸고 결국 소한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 때문에 김단은 오랫동안 임학에게 서운함을 품고 있었다.왜 말도 없이 사라졌냐고 여러번 따져 물었지만 임학은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감정이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소정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그때부터였습니다. 도련님만 떠올리면 괜히 웃음이 나고 그러더군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임학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깜짝 놀란 그녀는 즉시 은침을 꺼내 임학의 두정혈에 찔렀다.은침의 자극이 신경을 자극하자 임학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정원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임학 도련님...”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중상을 입고 막 깨어난 임학은 눈꺼풀을 드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그는 가장 먼저 소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자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임학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는 미약하게나마 소정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그 모습을 본 소정원은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깨어나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임학은 말할 기운이 없어 대답하지 못했지만 시선은 어느샌가 김단에게로 옮겨졌다.그녀는 침대 곁에 앉아 있었기에 소정원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방금 전 꿈속에서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그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마른 목구멍에서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단아...”“방금 깨어났으니 말을 아끼세요.”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임학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얘기했다.“저는 약을 달이러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76화

    그러다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김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큰 아가씨, 소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소 아가씨? 소정원을 그러는 것일까? 김단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김단은 긴가민가하며 문을 열었고 마당에는 어린 시절 자신의 경쟁자였던 소정원이 서 있었다.두 사람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임학 때문일 것이다. 김단은 조심스레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사실 일찍 오고 싶었는데 오라버니들이 말리셨습니다. 임학 도련님의 상태가 너무 위중해서 제가 와봤자 방해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에야...”그녀는 말을 흐리며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다시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임학 도련님은… 지금은 어떠세요?”김단은 살짝 웃으며 얘기했다.“맥박은 안정되었고 상처도 서서히 아물고 있소.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깨어나질 않소.”그 말을 들은 소정원의 이마가 즉시 찌푸려졌다. 김단은 그녀가 임학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김단은 부드럽게 말했다.“도련님을 좀 봐주시오. 나는 물 한 잔 가져오겠소.”김단이 찻잔을 들고 물을 따르는 순간 소정원의 외침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김단 낭자! 어서 와서 보세요!”갑작스럽게 들리는 큰 목소리에 김단은 놀라 물을 흘리고 말았다.하지만 김단은 물 따위는 신경 쓸 틈도 없이 황급히 침대 옆으로 뛰어갔다.김단은 임학에게 무슨 큰일이 생긴 줄 알았다.하지만 소정원은 임학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보세요. 도련님께서 울고 계십니다.”임학의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김단은 그가 혼수상태에 빠졌기에 자신이 했던 말은 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하지만 그의 눈물을 보니 어쩌면 김단이 방금 전에 했던 모든 말들, 즉 그를 향한 분노와 원망,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들이 그의 가슴을 울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정원은 어리둥절해하며 나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775화

    그는 소한의 거침없는 기질이 가끔 부러울 때도 있었다.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편할까?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자신이 소한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소한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삼일 뒤, 김단은 평소처럼 임학의 상태를 보기 위해 진산군 댁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승이 임학의 맥을 짚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스승님, 어떻습니까?”그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독은 이미 다 해독되었고 맥도 안정적이오. 그래서 호흡도 고르고 안색도 며칠 전보다 훨씬 좋아졌소. 그런데 이상하오. 이쯤 되면 일어나야 하는 게 정상인데 말이지...”김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진맥해보았을 때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깨어나야 할 시점인데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임학을 바라보며 스승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모습을 본 김단은 조심스레 물었다.“스승님께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신가요?”그는 김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예전에 약왕곡 주인께서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소.”그의 목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이어졌다.“만약 어떤 이가 스스로 죽음을 간절히 바란다면 아무리 육신이 다 나았다 해도 정신은 죽음의 문턱에 머물러 있다고 했소. 우리가 온 힘을 다해 끌어내려 해도 본인이 거부하면 방법이 없다는 뜻이오.”지금 임학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김단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그녀의 시선은 다시금 임학의 얼굴로 향했다.까무잡잡한 피부와 앙상한 빰이 병사의 길을 걸었던 그의 지난 세월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화려한 옷을 입고 도련님이라는 소리를 듣던 진산군 댁의 장남은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왔다.“낭자, 잠시 이 아이를 봐주시오. 나는 약로의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