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김단은 명정 대군 빈소에 찾아가 절을 한 뒤, 덕빈궁으로 향했다.김단을 쳐다보는 덕빈궁 나인들의 눈빛은 의미심장했지만 김단은 그저 못 본 척 지나갔다. 덕빈궁 침실 밖에 선 김단은 인사를 올린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덕빈은 방 안에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나인 한 명이 덕빈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한걸음 앞으로 다가간 김단은 무릎을 꿇은 뒤, 인사를 올렸다.“소인, 덕빈 마마께 인사를 올립니다.”김단의 인사에도 덕빈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단은 덕빈이 깨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한참동안 기다리다가 덕빈이 여전히 대꾸가 없자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마마, 삼가 고인의 명복을…”김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덕빈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달려와 김단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네까짓 게 지금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넌 분명 명정 대군을 안전하게 데리고 오겠다고 나에게 약조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아들은 죽었는데 넌 아직 살아있는 거야? 말해! 왜 넌 살아있는 거냐고!”덕빈이 붉어진 눈시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김단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명정 대군께서 목숨 걸고 소인을 지키셨기에 소인이 이렇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네가 그딴 헛소리로 문무백관을 속이고 전하까지 속였지만 설마 나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덕빈은 자신의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목숨 걸고 지켰다는 김단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김단의 멱살을 확 잡더니 언성을 높였다.“네가 내 아들을 죽인 거지? 내 아들이 너를 때리고 괴롭혔다고 기회를 엿보다가 죽인 게 확실해! 천박한 년! 내 오늘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야!”말을 하던 덕빈은 김단을 바닥에 확 쓰러트린 뒤 주먹으로 김단을 마구 때리기 시작
나인들은 빠르게 물러났고 나가면서 방 문도 굳게 닫았다.순간, 침실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그제야 김단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소인이 명정 대군을 보았을 때, 명정 대군은 산적들에게 갖은 고문을 당한 뒤였습니다. 온몸에 상처가 많았고 명정 대군께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산적들에게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습니다.”김단은 진실을 원하는 덕빈에게 사실대로 얘기했고 조용히 듣고 있던 덕빈은 그때 당시의 상황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이 아팠다.하지만 조금 전에 목숨 걸고 김단을 지키다가 살해됐다는 말보다는 지금 김단이 한 얘기가 더 믿음이 갔다.김단은 덕빈의 팔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덕빈은 여전히 영혼을 빠져나간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마마, 혹시 이 궁 안에 있었던 정아라는 궁녀가 기억나십니까?”정아?덕빈의 머릿속에 늘 환한 미소를 짓던 해맑은 여자애가 떠올랐다. 정아는 궁 안에서 일하던 궁녀였지만 나중에 명정 대군이 그 아이를 한양 서쪽에 데리고 갔다.불안한 마음에 덕빈은 재빨리 고개를 들고 김단을 쳐다보았다.“네가 정아 그 아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겁에 질린 덕빈의 표정에 김단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내각에서 무술 실력이 뛰어난 내시 한 명을 소인에게 보내주었고 그 내시는 소인과 함께 명정 대군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 내시는 손쉽게 산적들을 전부 죽여버렸지만 명정 대군을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자는 정아를 위해 복수를 선택했습니다.”김단의 말에 덕빈은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그럼 내각에서 보낸 내시가 명정 대군을 살해했다는 뜻인가? 하지만 내각에는 전부 전하의 사람들이잖아!이때, 김단이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덕빈 마마, 이게 바로 인과응보 아니겠습니까?”만약 명정 대군이 예전에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학살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명정 대군은 덕빈과 무사히 상봉했을 것이다.한편, 덕빈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니야. 넌
김단은 심장이 철렁했다. 김단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덕빈이 그녀의 팔목을 덥석 잡더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어제 류 나인에게 민간 시장에 가서 제사에 쓰일 물건을 사오라고 시켰거든. 그런데 네가 오늘 이렇게 궁까지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내가 너에게 영혼 결혼식을 시켜 내 아들 곁에 생매장할까 봐 두려운 거로군?”숨을 크게 들이마신 김단은 잡힌 손으로 덕빈 얼굴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주며 대답했다.“맞습니다. 소인의 목숨이 한없이 천한 건 맞지만 소인도 죽는 게 두렵습니다.”김단의 거친 손이 덕빈의 얼굴에 닿자 덕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덕빈은 여인의 손이 이렇게까지 거칠 줄 몰랐으며 그녀 곁을 지키는 나인도 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김단은 되레 덕빈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어갔다.“돌아가신 분은 사정이 너무 딱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마마께서 소인의 뜻을 이해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명정 대군은 덕빈의 유일한 아들이자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상대였다. 하지만 명정 대군이 죽은 지금, 덕빈에게 급선무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상대를 다시 찾는 것이고 후궁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다.궁 안에서 눈치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덕빈은 김단의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돌아서서 곁에 놓인 이불 위에 몸을 뉘였다.김단은 덕빈의 몸 위에 담요를 살짝 덮어준 뒤, 품에서 땅문서를 꺼냈다.“마마, 이건 마마께서 전에 소인에게 선물로 하사하셨던 땅문서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소인은 이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없을 것 같아서 마마께 다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덕빈은 고개를 살짝 돌려 땅문서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사한 물건을 도로 거두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명정 대군을 잃은 덕빈이 궁중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이 필요한 일이 많을 것이다.한참동안 고민하던 덕빈은 결국 땅문서를 받았
덕빈이 명정 대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라 한 것은 그저 인사만 하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그래서 김단은 예를 갖춰 물러난 뒤 한쪽으로 가서 명정 대군을 위해 지전을 태웠다.영당 밖의 두 명의 어린 환관이 이 광경을 보고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김 낭자가 명정 대군을 향한 정이 매우 깊구먼! 오늘 아침에도 왔었는데, 지금 또 왔네.” “맞아. 아까 명정 대군 관을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지는 거 봤어? 정말이지, 안타깝네!” "어휴… 예로부터 다정함은 부질없는 원한만을 남기는 법이지… 헉! 소, 소인 소 장군님을 뵙습니다!”소한의 표정은 차가운 얼음과 같이 얼어붙은 듯 싸늘했다. 그는 두 눈으로 두 환관을 훑어보았고, 목소리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궁궐 법도에서 주인을 함부로 평하라고 가르치더냐?”두 명의 어린 환관은 깜짝 놀랐다. 김 낭자는 주인이라고 모실 정도가 아니지 않나?하지만 소한의 싸늘한 모습을 보고는 몹시 당황하였고,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 소인, 감히 그러지 못하옵니다. 부디 소 장군님께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소 장군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직접 들어가 벌을 받거라!”두 명의 어린 환관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알아서 순순히 떠났다.소한은 그제서야 영당 안으로 들어갔다.명정 대군에게 향을 올린 후, 그는 김단 곁으로 걸어갔다.기척을 느낀 김단은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며 퉁명스레 말했다. “소 도련님, 정말 거만하시는군요.”방금 전의 소란을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그녀의 모습을 보던 소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영문 모를 불쾌감에 휩싸였다. 이에 그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비꼬듯 말했다. “김 낭자께서는 명정 대군께 정말 정이 깊으시군요.” “…” 김단은 그제야 손에 든 지전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소한을 바라보았다.분명 지전을 태우는 연기에 눈이 매워진 것일
“대군 생전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말에 주상은 순간 멈칫하였다.주상이 정말 이 일을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본 김단은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소한이 먼저 예를 올리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만부당합니다. 김 낭자는 단지 명정 대군과 혼약을 맺은 사이일 뿐, 미망인의 신분으로 장례를 치르게 한다면 분명 좋지 않은 말이 나올 것입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만약 김 낭자가 정말 미망인의 신분이 되면 조선의 풍속에 따라 3년간은 다시 혼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소한의 말을 듣고 나서야 주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말이 옳소. 서원 공주, 함부로 그런 제안을 하지 마시오.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을 때 해를 입는 것은 황실의 체면이오.”그러자 서원은 볼을 부풀며 주상의 어깨에 기대어 어리광을 부렸다. “공주는 그냥 한번 말해 본 것입니다!”주상에게는 서원 공주 외에는 딸이 없었기에, 당연히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매우 어여삐 여기며 서원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하지만 그는 서원 공주가 김단을 바라볼 때 원망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바라봤다는 걸 보지 못했다.그녀의 싸늘한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비록 미망인의 신분으로 장례를 치를 수는 없더라도, 김 낭자의 목숨은 어쨌든 대군이 구한 것이니, 소복을 입고 상여를 치르는 것이 지나친 일은 아니겠지요?”서원 공주는 김단을 백성들 앞에 나서게 하려고 작정한 것이 분명했다.황후가 이어서 입을 열었습니다. “덕빈 슬하에는 명정 대군 한 명뿐인데, 그 대군이 김 낭자를 구하려다 돌아가셨으니, 김 낭자께서 대군을 배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리하면 덕빈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입니다.”이 말을 들은 주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소. 내일 발인 때, 김 낭자는 서원이 말한 대로 함께 가도록 하시오!”서원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소복을 입고 상복을 갖춰 입어야만 한다.김단은 가슴이 답답한 게, 꽉 막힌 것 같았다. 하지만
김단은 이를 인정했다. 그녀도 서원 공주를 시켜 임원을 상대하게 하려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손을 빌려 죽이려던 것은 아니었다.하물며, 그 옷은 원래 그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김단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 옷가게는, 이미 덕빈 마마께 돌려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옷은 자네 것이지!” 서원 공주는 호통을 쳤다. “이 공주가 다음 날 사람을 시켜 이미 다 알아보았소! 그 옷은, 소한이 자네 치수에 맞춰 주문한 것이오!”김단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그것은 천잠사로 만든 옷으로, 3, 5년이 되어도 한 벌 나오기 힘든 옷인데……소한이, 그녀에게 준 것이라고?멍해 있는 김단의 모습을 본 서원 공주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이내 호통을 쳤다. “여기서까지 가식 떨지 마시오! 김단, 자네도 이제 이 공주가 소한을 점찍어 두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눈치껏 물러나야 할 것이오!”이에 김단은 즉시 서원 공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공주 마마,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만약 그 옷이 정말 소 장군님께서 소인에게 주신 것이라면, 소인이 행한 것은 하나 밖에 없사옵니다. 이는 바로 사죄입니다!”서원 공주는 다소 의아했다. “사죄?”김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 일에 대한 사죄입니다.”3년 전, 눈앞에서 그녀가 억울한 누명을 쓰는 것을 보면서도 옆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이제 와서 죄책감을 느꼈던 것일까?이에 그 귀한 옷을 가져와 배상한 것이다!서원 공주는 김단이 누명을 썼던 일은 알지 못했지만, 당시 소한이 옆에 서서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다만 훗날, 소한은 분명…서원 공주는 김단을 보며 물었다. “자네, 모르는 것이오?”김단은 서원 공주가 무엇을 물어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무엇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정말 모르는 것이었다!서원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얼굴의 노기가 사라지고, 오히려 약간의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아니오. 어
김단이 별당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난 후였다.자신의 방에 들어선 그녀는 힘없이 옆에 있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서원 공주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했던 말뿐이었다.그녀는 이제서야 지난 3년 동안 임원이 진산군 댁으로부터 얼마나 보호받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이전에도 그녀가 세답방 궁녀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때, 임씨 가문 사람들은 임원을 궁 대문 안으로조차 들여보내지 않았다!마치 그녀가 세답방으로 벌을 받으러 간 것도 진산군 댁을 위한 경종으로 쓰기 위한 것처럼, 그들은 궁궐의 사람이나 일이 조금이라도 임원과 연관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것이다.그래서 그들은 꼬박 3년 동안 그녀에게 아무런 소식도 묻지 않았던 것이다…우스운 것은, 그녀가 진산군 댁으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임씨 부인이 득달같이 그녀를 지난 3년 동안 그들이 맹수굴처럼 여겼던 궁궐로 데려갔다는 것이다…이런 생각이 들자,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쓰디쓰고 씁쓸했다.그녀는 사실 견딜 수 있었다. 3년간의 무관심을 겪은 후, 그녀는 진산군 댁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깨달았기 때문이다.단지 유일하게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것은, 바로 대비라는 두 글자였다.임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대하는 것과 임원을 대하는 것이 하늘과 땅만큼 달랐고, 15년 전과 현재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그녀는 부모님의 사랑과 형제들의 총애를 느껴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한때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졌었다.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가족을 가졌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햇빛을 보았었다.그래서 지금, 차갑고 음습하며 끝없이 어두운 곳에 누워 해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녀의 마음이 괴로워진 것이다……원래 그녀에게 향했던 따스한 햇살이, 이제는 모두 임원을 향해 비추고 있었다.어떻게 달갑겠는가?당연히 달갑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이제 그녀는 그저 외부인일 뿐인데……그러고 있는 와중, 숙희
그녀는 흰 소복 차림을 하고 발인 행렬의 맨 뒤를 따라갔다. 가는 내내 많은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단순히 배웅만 하는 것으로도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는데, 만약 소복을 입고 상주 노릇까지 해야 했다면…김단은 차마 더 상상할 수 없었다.발인 행렬을 한양 밖까지 이어가고 나서야 김단은 몸을 돌려 돌아갔다.돌아오는 길에도 백성들은 여전히 그녀를 곁눈질했지만, 다행히 김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오히려, 다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적어도 명정 대군의 일에 대해서는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그러고 있을 때, 누군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낭자.”김단은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정암이었다.그녀는 이내 미소로 화답하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정암에게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정 종사관 나리를 뵙습니다.”정암은 황급히 공수하며 답례했다. “김 낭자께서 이리 과하게 예를 갖추지 않으셔도 됩니다.”그의 손짓에, 김단은 그의 손에 들린 다과를 보게 되었다. “이것은, 혹시 저에게 주시려는 것입니까?”정암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수줍어하는 기색이었다.두 손으로 다과를 김단 앞에 내밀었다.김단은 손을 내밀어 받긴 하였지만, 이내 의아해하며 말했다. “정 종사관 나리,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째서 며칠 동안 계속 이것을 저에게 보내시는 것입니까?”그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정암은 약간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그저, 며칠간 김 낭자께서 분명 마음이 심란하실 거라고 생각해, 좋아하는 것을 좀 드시면 마음이 좀 나아지실까 해서 그랬습니다.”김단은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정암의 목적이 이렇게 순수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단지 그녀의 기분을 좀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라니?눈앞의 순박한 사람을 보며 김단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도리어 입을 열고 말했다. “정 종사관 나리,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다과를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이 말을 들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