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들린 고함소리에 소한이 멈칫했다.하지만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그뿐만 아니라 머리도 움직이지 않았다.유일하게 검은 눈동자만 문을 향해 천천히 문쪽으로 움직였다.눈에는 서늘한 불쾌함이 비쳤다.마치 자신의 일을 망친 임원이 원망스러운 눈빛이다.임원은 처음 보는 소한의 눈빛에 눈물이 흘러내렸다.임학이 그제야 임원의 뒤에서 나타났다.“안 들어가고 뭐 하는 것이야?”고개를 들자 그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가까운 두 사람의 모습에 임학이 크게 화를 냈다. 그는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그리고 소한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이 짐승 같은 놈!”소한은 주먹을 피하려고 그제야 손을 놓았다.김단은 소한을 저지하던 힘을 빼기 전이라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결국 머리가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걱정해주지 않았다.임학과 소한은 서로 때리기 바빴다.한편, 임원은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다.다행히도 김단은 연약한 아씨가 아니다.넘어졌어도 그저 머리를 어루만질 뿐이다.그녀는 임학과 소한을 한번 바라보았다.여전히 서로를 때리기 바빴다.김단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시비가 얽힌 곳은 가능한 한 일찍 떠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임원의 곁을 지나가자 그녀를 붙잡았다.김단이 눈살을 찌푸렸다.붙잡힌 자신의 팔을 보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이거 놓거라.”이럴 때라면 소한을 찾아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지만 임원이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았다.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똑바로 이야기 해주시오.”김단이 다시 물었다.“뭐?”임원이 갑자기 미친듯이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여기 남아서 똑바로 이야기 해주시란 말입니다!”처량하고 날카로운 소리에 두 사내가 싸움을 멈추었다.그들은 처음 보는 임원의 모습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김단도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이다.그녀는 임원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김단을 뚫어져라
김단은 눈썹을 치켜들었다.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임학을 바라보았다.방금 전 일은 누가 보아도 김단이 수동적이었다.하지만 임 씨 가문의 남매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이때, 소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내 잘못이오, 김 낭자와는 상관이 없소.”그는 모든 잘못을 자신이 떠안으려 하는 태도를 보였다.임원의 눈물이 더욱 거세졌다.“장,장군님..”그녀는 모두 김단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김단이 소한을 유혹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소한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잘못이라 인정하고 말았다.임원은 마음이 칼로 도난질 당하는 것처럼 아팠다.계속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쳤다.“장군께서 누이를 연모하신다면 어찌 말씀을 아니하셨사옵니까? 이 혼인은 본디 누이의 것이옵니다. 소녀가 누이의 혼인을 빼앗았으나, 다시 돌려드릴 수 있사옵니다. 헌데 왜 말을 안하시고, 왜...흑흑흑...”임학은 마음이 아파왔다.서둘러 그녀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그게 어찌 저 계집 것이야? 저 계집이 네 신분을 훔쳤던 것이야! 저 계집의 모친이 생각이 똑바르고, 너와 바꾸지만 않았다면 시골에서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15년 동안 가족한테 사랑받아야 할 사람은 너였다. 소한의 죽마고우 또한 너여야 했다! 그 혼인도 본디 네 것이 아니더냐, 누구한테 다시 돌려준다는 것이야? 은혜도 모르고, 양심도 없는 계집한테 다시 돌려주려고 하는 것이야?”곧이어 다정한 말투로 임원을 달랬다.“뚝,그만 울거라. 이 오라버니가 네 옆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익숙한 말이다.김단은 뇌리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매 장면이 현재 임학의 모습과 완벽하게 겹쳤다.그는 동생을 달랠 때, 항상 그러했다.다정한 말투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또한 동생이 울면 눈물을 닦아주고, 웃긴 표정으로 달래주었다.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임학은 여전했다.그때와 다른 점은 자신이 더 이상 그의 여동생이 아니라는 것이다.사실 임학의 말이 옳다.김단의 15년은 본디 임원의 것이다
'사람을 착각 했다.'임학이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임원이 그 말에 바로 울음을 멈추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한을 바라보았다.“장군님께서는 누이를 누,누구로 착각 하셨사옵니까?”소한의 눈가가 저절로 찌푸려졌다.알아들을 법한 말을 그녀가 짚어서 따질 줄은 몰랐다.하지만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목격한 임원에게는 확실한 대답이 필요했다.소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방 안의 분위기가 다시 굳어지는 듯했다.이때, 임학이 입을 열었다.“당연히 너라고 착각한 거야! 술에 취해서 몽롱하고, 진산군 댁에서 아씨가 왔다고 하니 김단을 너로 착각 한 것이야!”그는 상 밑으로 소한을 발로 계속 찼다.그리고 표정으로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내 말이 맞소?”소한은 임학을 한번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응.'이라고 대답했다.하지만 그는 장군이다.군의 사람들과 자주 술을 마신 덕에 임학보다 주량이 많기 마련이다.오늘 그가 마신 주량은 몽롱해질 수는 있으나, 사람을 착각 할 정도는 아니었다.어쩌면 술에 취해 난동을 피운 것 일 수도 있다.소한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사실 그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초반에는 참을 수 있었다.하지만 김단이 정암과 혼인을 한다고 하자, 가슴속에 맺힌 떨떠름한 분노는 참을 수 없었다.그는 김단에게 자신을 연모했으면서 왜 정암을 연모하는지 물었었다.그리 쉽게 마음이 변하는 것인가,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들끓어 상 위에 올려진 손을 꽉 쥐었다.임원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았다.방금 전의 비통함은 부끄러움으로 바뀌어 있었다.하지만 임학은 소한의 심정을 정확히 짚어냈다.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다.그리하여 임학이 소한의 심정을 모를리가 없다.자칫하면 임원에게 들킬 것만 같은 소한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소한, 나가서 손님 맞는 걸 도와주게나.”임학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임원이 의아해하며 그를 향해 물었다.“오라버니, 왜 장군님도 데려가시려 하옵니까?”연회 주최자
그 말은 사람을 착각할 리 없다는 뜻이다.그러자 임원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김단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곧이어 입을 삐죽 내밀고는 웃음을 터트렸다.“3년을 궁에서 지내고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임 씨 부인께서 서둘러 혼인을 준비하셨소. 도련님도 참 열정적으로 도와주셨지, 그래, 18살이면 다 큰 것과 다름없소. 하지만 낭자는 어떠하오? 소 장군과 오래전에 약혼을 했을 터인데, 왜 지금까지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오? 3년 동안 좋은 날이 하나도 없던 것이 아닐텐데.”그녀는 임원의 정신을 흔들어 놓았다.두 사람이 혼인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임 씨 부인이 김단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그녀가 김단에게 의사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소한이 임원을 고집했다면 임 씨 부인의 결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오랜 시간 동안 혼인을 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소한의 의사 문제였다.임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동시에 눈물도 같이 떨어졌다.하지만 두 사내가 있을 때 지은 불쌍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다.그리고 김단을 쳐다보았다.마치 흥분한 짐승을 연상케 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누이의 말은 장군님께서 누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뜻이오? 하지만 잊지 마시오. 3년 전, 혼인 문제로 친히 장군님을 찾아뵈었을 때, 장군님은 누이를 버렸소.”김단이 눈살을 찌푸렸다.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낭자의 말이 맞소.”두 사람의 일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자신의 두 발로 소한에게 찾아간 것도 맞고,소한이 그녀를 내친 것도 맞다.하지만 김단에게 전혀 타격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임원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하지만 낭자도 잊지 마셔야 할 것이 있소. 얻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좋은 것이오.”이전에 궁녀들의 대화에서 들은 말이다.오늘날에 임원의 화를 돋우기 위해 아주 적절한 내용이었다.임원은 그녀의 혼인에 관여하기를 좋아하지 않는가,이제는 자신의 혼인이 물 건너 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김단의 당당한 미소에 그녀는 참
30분 뒤, 임학과 소한이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하지만 방 안에는 김단 혼자 앉아 있었다.임학이 당황하며 물었다.“원이는?”김단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찻잔에 차를 부었다.“갔습니다.”“어디를 간 것이야?”임학이 물었다.하지만 김단은 어깨를 들썩거릴 뿐이었다.“제가 임 낭자 뱃속에 사는 회충도 아닌데,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네 이년!”김단의 태도에 임학은 화가 났다.하지만 오늘 연회의 목적은 김단의 혼인이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다.“손님들 거의 다 도착했네, 연회도 곧 시작될 것이야. 할 일이 없거든 남아서 보고 가거라.”임학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서둘러 자리를 떴다.김단은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발걸음을 옮겼다.소한의 곁을 지나려 할 때, 그가 막아섰다.“무슨 말을 한 것 이오?”낮은 목소리에 그녀를 경계하는 것 같은 말투가 섞였다.방금 전 술에 취해 그녀를 대했던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김단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소한은 그녀가 임원에게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그는 김단을 잘 아는 것일까, 아니면 임원을 잘 아는 것일까.하지만 김단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맞춰 보시지요.”말을 끝내고 밖으로 향했다.밑 층에는 사람들이 꽉 찼다.그들은 명단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하지만 예상한대로 서자 또는 방탕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진정한 후계자 중, 몰락한 가문의 양녀와 혼인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임학은 이 사실을 알고 그들을 초대한 것이다.김단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사실 그녀도 명문세가의 공자와 혼인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리하여 대가족의 장남 또는 서자만 초대 했다면 그저 넘어갔을 것이다.하지만 초대받은 사람 중에 변절자도 많았다.임학은 김단에게 변절자가 어울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또한 도덕과 지식도 없어도 신분이 비슷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상대가 아무리 변절자 여도 상관없었다.김단은 설움을 억누르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이유가 무엇일까,소한은 알 수 없었다.한편, 옆에 있던 임학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다.곧이어 밑 층의 모서리로 향해 시선을 옮겼다.그 모서리에는 한 사내가 앉아 계속 위층을 보고 있었다.임학과 눈이 마주치자 신호를 받은 것처럼 정암을 불렀다.“이봐, 이리 좀 와봐!”김단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곧이어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서화청이었다!그녀를 물에 빠뜨려 죽일 뻔한 사람이다.임학에게 뺨을 내려쳐 경고를 했던 터라, 그를 불러들일 줄은 몰랐다.김단은 눈살을 찌푸렸다.곧이어 임학을 노려 보았다. 그는 따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그저 밑 층을 바라보며 모른 척하기 바빴다.이때, 정암이 서화청에게 다가갔다.서화청이 갑자기 자신의 음식을 정암에게 끼얹었다.다행히도 정암의 반응이 빨라 옷에 조금 묻고 나머지는 바닥에 쏟아졌다.그 바람에 사람들의 시선이 정암에게 집중되었다.김단은 긴장하며 밑층을 바라보았다.“감히 피해?”서화청의 목소리가 들렸다.“심부름꾼 주제에 감히 피하려고 들어?!”소란스러운 소리에 관리자가 서둘러 다가갔다.미소를 지으며 서화청에게 계속 사과를 했다.“서 공자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방금 온 아이라 이곳의 법도를 다 알지 못한 탓이옵니다. 대인배이신 공자께서 오늘 회주를 보아 한 번쯤은 눈 감아 주심이 어떠하옵니까?”관리자는 연회의 회주를 특별히 언급했다.서화청이 체면을 구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하지만 그야말로 회주의 명을 받고 연기를 하는 사람이었다.서화청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좋소, 그럼 바닥에 쏟은 음식 모두 주워 먹으시게.”정암을 향한 말이었다.하지만 정암은 종사관이다.전쟁에서 생과 사를 오가는 사람이 쉽게 굴복할리 없다.이때, 관리자가 대답했다.“예, 제가 하겠습니다.”그가 무릎을 꿇으려 하자 정암이 눈살을 찌푸렸다.서둘러 관리자를 들어 올렸다.
김단은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정암을 저지하고는 자신이 직접 음식을 집어 들었다.그는 깜짝 놀랐다.서둘러 김단을 저지하려고 할 때,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김단이 집어 든 음식을 서화청의 입에 구겨 넣은 것이다.서화청은 깜짝 놀라 뒷걸음을 쳤다.하지만 이미 얼굴은 음식에 엉망진창이 되었다.호조판서네 서자인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다.서하청은 크게 분노했다.“감히 나에게 손을 대? 무엄하도다! ”“이제 네 고모할머니도 못 알아보는 거냐!”소리가 크지는 않았다.하지만 모두가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한양에서 서하청에게 고함을 지를 수 있는 여인은 많지 않다.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김단에게 집중되었다.예전이라면 서하청은 김단을 피해 달아났을 것이다.하지만 김단과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서하청은 한참을 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진산군 관저의 아씨 아니십니까.”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리고 정암을 한번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낭자, 잠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임학에게서 정암을 혼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그리하면 김단이 더 이상 끼어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를 무시했다.“꺼지시오.”서하청은 멈칫했다.아무리 서자 신분이라 할지어도 이러한 태도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어릴 때, 임학에게 맞지만 않았다면 그를 무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김단이 체면을 구기자 그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하지만 좋게 그녀를 타일렀다.“김 낭자, 할 말이 있으면 좋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하지만 김단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서하청이 아무런 연고도 없이 정암에게 시비를 걸리 없다.또한 정암이 연고도 없이 자신의 주선 연회 자리에 나타날 리 없었다.십중팔구 모두 임학과 소한이 저지른 짓이 분명했다.하지만 우연하게도 그녀는 서하청에게 오랜 원한을 품고 있었다.“공자 같은 사람과는 할 말이 없나이다.”서하청은 그녀의 대
이때, 주위 사람들이 말을 더했다.“그러니까 말이오. 진산군 관저의 체면을 생각해서 온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올 생각도 안 했소이다!”“나도 어머니가 부추기는 바람에 온 것이오.”“사실 저런 계집은 내 취향이 아니오.다만 진산군 관저 때문에 참가 한 것이오.”“결국에는 양녀가 아닌가, 어머니도 반대하실 게 분명하지.”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김단을 손가락질했다.한편, 위층에 있던 임학과 소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임학은 난간을 꽉 잡았다.그는 김단의 눈빛을 보고 일을 망쳤다고 생각했다.정암은 분노가 들끓었다.김단 마저도 그의 팔이 딱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그가 충동적인 짓을 저지를 까봐 걱정이 되었다.서둘러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정암은 자리에 얼어붙었다.이런 상황에 자신에게 따스하게 미소를 지을 줄은 몰랐다.미소는 마치 부드러운 물을 연상케 했다.그의 분노도 사르르 녹아 버렸다.하지만 김단이 그럴수록 마음이 아파왔다.결코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하지만 왜 그녀가 모든 것을 참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정암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리고 살의에 가득한 눈빛으로 서하청을 노려 보았다.꽉 쥔 주먹은 딱딱,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하지만 김단은 담담하게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곧이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들의 비난은 세답방 궁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나쁜 년', '진산군 관저가 버린 년','아무도 원하지 않는 년' 같은 말은 너무 많이 들어 귀가 간지러울 지경이다.처음에는 화가 나서 궐 사람들을 때리기도 했다.하지만 결국 나인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말았다.그리고 서서히 그들의 말이 사실처럼 느껴졌다.세답방에 들어간 후로 진산군 댁에서는 편지 한 통도 없었다.김단은 그제야 자신이 버림받은 양녀라는 것을 깨달았다.더 이상 자신을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하지만 사실이기에 화를 낼 필요가 없다.서하청은 김단이 미소를 지
김단은 맹영지를 소하가 있는 곳으로 보게 하였다.허나 맹영지는 반응이 느리고,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 소하를 바라보지 않았다.“소하라고 하는 사내입니다. 기억하십니까?”김단은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허나 소하의 이름을 들어도, 맹영지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이러한 그녀의 모습에 소하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이리 상황이 좋지 않을 줄은 몰랐소.”김단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소하 오라버니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하여 낭자를 보살 피겠나이다.”곧이어 소하의 시선이 김단을 향했다.찌푸린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사실 그는 맹영지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눈앞의 감회는 그저 오늘날과 이전의 다름에서 온 것이라 말할까,마음에는 김단의 안위만 생각하고 있으니, 다른 생각 하지 말라고 말할까.헌데 만일 그녀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면, 할 말이 없지 않은가.소하는 여러 생각에 휘잡혔다.허나 생각했던 말은 내뱉지 않았다.“중전 마마께서 낭자와 맹 낭자를 처소로 들이시는 것은, 분명 다른 생각이 있으실 것이오. 그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김단이 고개를 저었다.“사실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나이다.어쩌면 맹 씨 집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어찌 되었든 간에, 낭자가 중전의 처소로 들어갔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과 같소. 항상 조심해야 하오.”“소하 오라버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제게는 오라버니께서 가르쳐 주신 방도가 있지 않사옵니까.”그녀의 말에 소하가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돌을 은침으로 대신하여, 민대부를 반나절 동안 아우성치게 하지 않았소.”“반나절이라니요, 반 시진도 가지 못했나이다!”김단은 소문이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소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그래도 큰 인물이 되지 않았는 가.”“스승이 잘 가르쳐 준 덕분입니다.”김단은 서로 치켜세우는 상황에 웃음을 터트렸다.“중전 마마께서 기다리
해가 서쪽 하늘에 기울 무렵, 김단이 맹영지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갔다. 경씨가 옆에 서있었다.그의 얼굴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허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전하가 김단에게 맹영지와 함께 궁으로 들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는 가.만일 대군께서 한양에 계셨다면 막을 수 있었을 터, 한낱 마부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궁궐은 워낙 넓고, 궐 안의 금군 중에는 무예가 뛰어난 자들이 넘쳐 난다.더하여 내각에는 임금을 지키는 호위들이 따로 존재한다.자신이 몰래 궁에 들어가 낭자를 지키려 든다면, 날이 밝기도 전에 역적이라 오해를 받아 온몸이 찢길지도 모른다.김단은 경씨의 표정을 보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경씨 도령, 염려하지 마시 옵소서. 제 몸 하나는 제가 잘 챙길 수 있사옵니다.하물며 소하 오라버니는 금군의 총령이니, 만일 무슨 일이 생기게 되어도 도움을 청할 수 있나이다.”경씨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부디 조심하시오.”경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숙희가 붉은 눈가를 한 채로 입을 열었다.“아씨, 노비는 궁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옵니까?”숙희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그저 김단과 함께 궁으로 들어가고 싶었다.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줄 수 없다 하여도 자신이 뒤집어쓸 수 있지 않은가.허나 김단은 만일 하나 일이 생겨도, 숙희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저 작은 의녀에 불과해.중궁전에 거처하면서 내 몸종까지 데려간다 하면, 중전의 사람을 꺼려 한다면서 입을 놀릴 것이야.”숙희는 어렴풋이 그저 둘러대는 것일 뿐이라 느껴졌다.허나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궁 안의 규칙이 수도 없이 많은 탓에,진정 구설수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은 가.혹여 자신이 아씨를 해할 수도 있지 않은가.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숙희는 참을 수 밖에 없었다.뜬 눈으로 김단이 맹영지와 함께 궁궐 문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양쪽으로 큰 성벽이 둘러쌓여 있어,알 수 없는 압박감에 맹영지가 긴장을 했다.그녀의 두 손은 김단의 팔을 꼭
“황공하옵니다, 마마.”향 하나를 다 피우고 나서야, 김단은 중전의 처소를 떠났다.그리고 서아름을 살피기 위해, 복화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서아름은 처음 만났을 때 보다 많이 말라 있었다.안색도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허나 자신의 나인 앞에서는 이따금 지친 기색을 보였다.마치 나인에게 곧 죽을 사람처럼 행실 하곤 했다.다행히도 나인은 눈치가 없었다.하루 종일 놀기만 하고, 서아름을 살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그 덕에 서아름도 마음이 편했다.김단을 보자 서아름이 서둘러 그녀를 배웅했다.“의녀께서 오셨나이까! 어서, 안으로 들이시옵소서!”김단은 서아름에 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물을 따라 주었다.“다 의녀의 덕분이옵니다. 근래에 걸음걸이도 훨씬 가벼워졌나이다!”사람의 몸은 아프지 않아야, 건강하다는 것을 인지 할 수 있다.낮에는 정신이 또렷하고, 밤에는 편히 잘 수 있었다.허나, 김단의 안색이 그녀와 반대로 어두웠다.“오늘 날, 전하께서 중전 마마를 옆에 두시고 숙원 마마의 상태에 대해 여쭈셨나이다.소신은 전하께 마마의 몸이 연약하지만,아이는 무탈하다 아뢰었사옵니다.”서아름이 움찔했다.그녀는 덕빈을 오랜 시간 시중을 든 사람이다.어찌 김단의 뜻을 모를 수 있는 가.자신은 살지 못하지만, 아이는 살 수 있다는 뜻이다.서아름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이만 무탈하면 돼옵니다. 소인은 그저 덕빈께 아이 하나만 남겨두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아이만 무탈하면, 제 미천한 목숨 하나가 중요하겠나이까.”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그녀는 서아름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아이와 그녀의 목숨은 똑같은 것이라고.사람의 목숨에는 신분이 없듯이, 미천한 목숨이라는 것은 없다.더하여 귀식환 제조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제조에 성공만 하면, 서아름을 궁에서 떠나 새로운 삶을 보낼 수 있었다.허나 김단은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귀식환 제조를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실패로 돌아간다
김단은 중전의 뜻을 금방 알아챘다.중전이 서아름을 해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 뱃속의 아이 때문이었다.만일 김단이 아이가 무탈하다 말했다가, 훗날 서아름이 아이와 함께 목숨을 잃게 되면, 임금이 그녀를 의심할 것이 뻔하다.중전은 김단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김단은 시선을 거두었다.고개를 숙인채, 자신의 발만 쳐다보며 말했다.“중전 마마께서 내려주신 귀한 보약 덕에, 숙원 마마의 태아는 무탈 하옵니다. 숙원 마마께서 끝까지 버텨내신다면, 태중의 용태는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옵니다!”김단의 말에도 중전의 살기 서린 눈빛은 여전했다.허나 임금은 만족한 듯, 미소가 짙어졌다.그는 뒤를 돌아 중전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손을 잡고는 다정하게 말했다.“다 중전 덕분이오.”중전은 살기 서린 눈빛은 온데간데 없고,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임금의 칭찬에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주상께서 후궁의 일을 신첩에게 맡기셨으니, 어찌 주상의 근심을 덜어드리지 않겠사옵니까.”“잘하셨소!”곧이어 임금은 몸을 뒤로 옮기더니, 중전의 귓가에 속삭거렸다.중전이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기다리고 있겠나이다.”“하하하, 알겠소.”임금은 그제야 손을 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짐은 아직 정사가 남았소, 자네는 중전 곁에서 말동무를 해주시오.”뒷부분은 김단을 향한 말이었다.김단은 예, 라 대답하며 임금을 배웅했다.임금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중전이 김단을 바라보았다.쌀쌀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보아하니, 의녀는 주상의 총애를 받아 자신의 주관이 뚜렷 해지셨소.”중전의 말투에 김단의 심장이 철렁했다.김단은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부디 중전 마마께서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소신은 마마를 위함이었나이다.”그녀의 말에 중전이 코웃음을 쳤다.그제야 천천히 물어보았다.“말해 보시오.”“부디 마마께서 깊이 헤아려 보시옵소서. 전하께서 후손을 이토록 중히 여기시거늘, 만일 소신이 숙원 마마의 태중이 위태롭다 아뢰
임금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수고가 많았다.”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전이 입을 열었다.“전하, 신첩 또한 의녀가 수고가 많다 생각하옵니다. 영지를 돌보시는 것도 벅차신데, 궁중의 후궁들까지 살펴야 하시니 말이옵니다. 차라리 영지를 신첩의 처소로 옮겨 이곳에서 돌보게 하는것이 어떠하옵니까? 의녀는 본디 평양 대군의 관저에 임시로 거처 중이시고, 그런 곳에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 체면상 온당치 않은듯하여 감히 아뢰옵니다.”평양 대군 관저에 김단은 손님에 불과하다.어찌 손님이 손님을 데려갈 수 있단 말인 가.하물며 맹 씨 집안의 자녀가 평양 대군 관저에 머무는 것에 대해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임금도 같은 생각이다.맹영지를 중전의 처소에 머물게 하는 것이, 평양 대군의 관저에 머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중전은 맹영지의 친 고모이며, 처소에서 병을 돌보는 것이 수월하지 않은가.허나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허나 맹 가의 계집은 이 자만 알아본다 하지 않았소? 만일 이곳으로 옮겨,소란을 피우게 된다면 중전의 병세를 더욱 악화 시킬지도 모르오.”임금은 중전을 걱정하고 있었다.다정한 말투에 중전의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염려하지 마시 옵소서. 의녀도 처소로 옮겨와 머물면 되지 않겠나이까.”맹영지가 알아보는 사람이 김단 뿐 이라면, 김단을 중전의 처소에 머무르게 하면 되지 않는가.그녀의 말에 김단의 얼굴이 굳어졌다.중전의 자신의 제안이 마음에 들은 모양이다.“그리하면 의녀도 수고를 덜 하겠지 않나이까.”임금도 중전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곧이어 김단을 향해 물었다.“자네는 어찌 생각하는 가?”김단은 내키지 않았다.궁중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허나 김단은 공주의 사람이다.공주와 중전이 같은 편이니, 중전의 제안을 감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곧이어 절을 하고 말했다.“중전마마의 각별한 보살핌에 몸둘바를 모르겠나이다.”그녀의 대답은 다른 자가 듣기에는,중전의 제안에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옆에
김단의 미소를 보아도, 맹 씨 부인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맹 씨 집안의 안주인이 되어서, 어찌 김단의 속과 겉이 다르다는 것을 모를 수 있겠는 가.비록 미소를 짓는 모습이 온화하기 그지없지만, 자칫하면 그들을 물어 집안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었다.또한 김단의 뒤를 봐주는 자들은, 감히 그들이 거들떠도 보지 못하는 인물들이 아닌가.오늘 김단은 말리려고 하지도 않았다.오히려 맹 씨 집안의 체면을 고려하여, 그녀가 맹영지를 데려가지 않은 것이다.이러한 생각에 맹 씨 부인은 답답함을 느꼈다.허나 김단을 향해 미소를 짓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맹 씨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김단의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곧이어 숙희가 김단의 곁으로 다가갔다.목소리를 낮추고는 물었다.“맹 아씨의 친 모친이옵니다. 어찌 친 딸을 해하겠나이까, 혹여 아씨께서 너무 깊게 염려를 하신 것이 아니옵니까.”“내가 그 생생한 본보기가 아니더냐.조금만 생각하면 알게 되는 법이지.”김단은 말하면서 맹영지에게 시선을 돌렸다.맹영지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금색의 계화 꽃잎이 떨어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숙여 자신의 치마를 바라보았다.만일 맹 씨 부인이 ‘맹영지의 상황이 이리 심각할 줄 몰랐다’ 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김단이 직접 맹영지를 맹 씨 집안의 마차로 올려 보냈을 지도 모른다.자신의 피가 흐르는 친 자식을, 어찌 사, 오 년 동안 상황을 몰랐던 것일까.마치 그녀가 세답방에 버려지고, 삼 년 동안 어떠한 안부도 묻지 않는 그 자들과 같은 모습과 같았다.허나, 정승댁은 세답방이 아니다.맹영지는 노비가 아닌 그저 댁의 맏며느리가 되기 위해 정승댁으로 향한 것이다.어찌 친부모가 되어 아무것도 모를 수 있겠는 가.더하여 중전이 독이 맹 씨 집안의 소행이라 의심을 품고 있는 중이다.오히려 정승댁이 맹 씨 집안보다 더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겉으로는 물러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 수 앞을 보아 맹영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한
맹 부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손을 거두고 두려운 표정으로 맹영지를 바라보았다.“어찌 이럴 수 있으십니까?”무언가 떠오른 것 마냥 김단을 향해 바라보았다.“의녀, 영지가..”김단은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곧이어 맹영지의 곁으로 다가갔다.“다 나았나이다.”그녀의 한 마디에 맹영지는 천천히 진정을 되찾았다.두려운 눈빛이 점차 평온해졌다.맹 씨 부인은 이러한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곧이어 김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낭자께서는 소인만 알아볼 수 있으십니다. 다른 이들이 다가간다 하여도,밀쳐 내실 겁니다. 부인도 똑같이 밀쳐 내실 것이옵니다. 제 몸종도 낭자에게 긁혀 손에 상처를 입었나이다.”김단의 말이 끝나자마자, 숙희가 맹 씨 부인에게 손을 보여 주었다.어제 맹영지에게 긁혀 생긴 상처였다.다행히도 김단의 설득 아래,맹영지는 드디어 숙희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그제야 그녀의 시중을 들게 해 주었다.김단의 말에 맹 씨 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오늘 데려 가지 못한다는 뜻이옵니까?”“아니옵니다.”김단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소인은 그저 맹 낭자께서 이곳에 계시는 게 나을 듯 하옵니다. 허나, 낭자께서는 맹 씨 집안의 자식이 아니 옵니까. 부인의 뜻을 따르겠나이다.”데려 가는 것이 결코 좋지 않다는 뜻이다.현재의 맹영지의 상황으로 보아, 억지로 데려 가는 수 밖에 없었다.부모가 되어 어찌 자식에게 좋지 않은 선택을 한단 말인 가.맹 씨 부인은 어찌 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대감이 맹영지를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했었다.허나 이 상황에 평양 대군 관저의 문을 나갈 수 있다 한들,맹영지가 소리치는 모습에 다른 이들이 소문을 퍼트릴 수 있다.잠시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의녀께서는 높은 의술을 가지고 계시라 믿나이다. 혹여 영지를 잠재울 수 있는 수가 있사옵니까?”‘잠’ 이라 했지만, 사실 기절을 시킬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그리해야 조용히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김단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인에게 약은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