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월은 여전히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월백 장의를 걸쳤다. 옷자락이 스칠 때마다 맑은 빛이 도는 듯하여, 사람 자체가 더욱 온화한 옥처럼 보였다.그의 시선이 먼저 김단에게 가 닿았고, 입가에 얕고도 안심시키는 미소를 머금은 뒤에야 침상 위의 우문호로 돌아가, 태연히 몸을 굽혀 예를 올렸다.“둘째 황자 전하를 배알하옵니다.”우문호의 눈매는 매처럼 예리하여, 심월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심공자, 오시기가 제법 느닷없으시군요.”수년 전 약왕곡의 주인 심묵이 황도에 들른 적이 있었으니, 우문호는 심월을 알아보았고 그가 심묵의 유일한 적전 제자란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어제 막 영칠이 나타나 김단을 지켜냈고, 오늘 곧장 심월이 뒤이어 왔다. 이 우연은 지나치게 의도적이지 않은가.우문호의 마음속엔 의혹이 구름처럼 가득했다.심월은 그 예리한 가늠을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한가로이 말을 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화등이 찬란하여 황도의 경치가 드물게 좋더이다. 그래서 영칠을 데리고 거리를 한 바퀴 거닐었지요. 뜻밖에도 변을 마주쳤으나, 다행히 영칠이 재빠르게 대처했습니다.”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는, 시선을 자연스레 김단에게로 돌리며 알맞은 온기의 걱정을 얹었다.“단이, 다치신 데 없으십니까?”김단은 눈매를 가늘게 휘며 고개를 저었다.옆에서 우문호는 그 익숙하고도 다정한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검미가 살짝 일그려졌다.“심공자와 김 낭자는… 구면이었소?”“구면 정도가 아니지요.” 심월의 눈길이 다시 김단에게 내려앉았다. 그 눈빛의 너그러움과 온기가 넘칠 듯했다.“우리 스승님이 생전에 단이에게 의술을 몇 가지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니 단이의 반 스승은 스승님이시고, 저는 자연히 단이의 사형 격이지요.”우문호의 칼 같은 시선이, 담담하고 따스한 심월의 얼굴과 파문 하나 없는 김단의 얼굴 사이를 오갔다.김단이 약왕곡의 지보인 구요현망침을 지닌 이상, 약왕곡과의 인연이 깊다는 것은 그도 익히 아는 바였다
마침 문이 밀려 열렸다.김단이 약 한 그릇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우문호가 깨어난 것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고 담담히 다가왔다.“전하, 깨어나셨사옵니까? 이 약은 하루 더 복용하셔야 원기가 굳어지옵니다.”그녀가 약사발을 내밀었다.우문호는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약은 씁쓸했으나 바싹 마른 목을 적셔 주었다.사발을 내려놓고 그는 김단을 보며 말했다.“수고가 많았소, 김 낭자.”김단은 미소를 띠더니 이내 말했다.“어젯밤 전하께서 열에 들뜨시어 정신이 아득해지시며 잠말을 조금 하셨사옵니다.”우문호의 미간이 스르르 가라앉았다.그의 비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혹 어젯밤 입에 담아선 안 될 말을 했다면 벌써 눈빛에 살기가 어려 들었다.이때 김단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제가 황도에 온 지 오래지 아니하오나 몽설과 몇 차례 마주하고 보니 아이가 참으로 순진하옵니다. 목씨 집안 이 대에는 여식이 오직 그 아이 하나뿐이라 지극히 보호만 받고 자라 세상사 이해와 얽힘을 알지 못하고, 작은 풍파도 견디기 어려울 듯하옵니다. 전하는 분별하시는 분이시니, 어떤 사람과 어떤 마음은 차라리 일찍 미련을 끊어 주심이 옳사옵니다. 공연히 남도 다치고 전하께서까지 상하지 않도록 하심이 좋을 것이옵니다.”우문호의 눈빛에서 살기는 가셨으나, 고개를 들어 김단을 보지는 않았다.지난밤의 흐릿한 기억 조각이 밀려왔고, 무심결에 내뱉은 그 한마디 몽설이 아직 귓가에 맴돌았다.아마도 열에 들떠 정신이 흐려졌던 것이리라.숲속에서 잠깐 스친 그 온기가 마음의 발을 한 자락 걷게 했을 뿐이다.그러나 자신과 목씨 집안은 하늘을 함께 이지 못할 원수요, 자신과 목몽설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김단의 말이 옳다. 갖지 말아야 할 망념은 이참에 뿌리째 꺾어 깊숙이 묻어야 한다.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니, 눈동자는 고요한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수고를 끼쳤소, 김 낭자.”목소리에는 한 겹의 거리감이 비쳤다.그는 몸을 기대어 한숨을 길게
어수선한 생각을 억지로 거두어 들인 김단은 다시 영칠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이 참화가 무엇에서 비롯된 일인지 아시겠습니까?”영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뢰려 하던 참이옵니다. 모 선생 쪽에서 들어온 전갈로는, 오늘의 자격은 당국 세자가 꾸민 자들이옵고, 표적은 우문호라 하였사옵니다.”그러하다면 소한은 그야말로 재앙에 휘말린 셈이었다.김단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또한 기이합니다. 밤에 화등을 보러 나가자는 일은 우리끼리 갑자기 정한 일인데, 당국 세자 쪽이 어찌 알았겠습니까?”가면 아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우문호 곁에 세자 쪽 사람이 섞여 있사옵니다.”이에 김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을 겨눈 것이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오늘 호랑이군에게 암문을 남겨 두었습니다. 누가 찾아오는지 살펴보십시오.”“예.” 영칠이 짧게 응한 뒤 눈빛을 번뜩이며 재빨리 그늘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바로 그때 우달이 문을 다급히 열었다. “김 낭자! 속히 우리 전하를 보아 주시오!”김단의 미간이 다시금 내려앉았다. 그녀는 곧장 우달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다시 우문호를 마주했을 때, 그는 침상에 반듯이 누워 눈을 굳게 감고 있었고, 얼굴에는 불그스름한 비정상의 열기가 번지고 있었다.곁에 서 있던 목몽설이 김단을 보자 다급히 말했다. “종자, 어서 와 보세요, 둘째 황자께서 오래도록 열이 내리지 않아요!”김단은 목몽설의 흐트러진 쪽지를 힐끗 보고는 우달을 향해 말했다. “수고로우시나, 사람을 시켜 목 낭자를 씻게 하시고, 다시 사람을 붙여 댁으로 모셔 주시옵소서. 전하 쪽은 제가 맡겠사옵니다.”아녀자가 우문호와 함께 밖에 나갔다가 이런 몰골로 돌아온 것을 남의 눈에 띄게 둘 수는 없었다. 잘못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목몽설에게 불필요한 구설이 따를 터였다.우달은 목몽설을 한번 훑어보고, 오늘 내내 전하를 보살핀 공을 떠올리며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목 낭자, 이리 오시지요.”목몽설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끝내 근심 가득한 눈길로 김단
얼마가 흘렀는지, 목몽설의 목소리는 피로에 젖어 점점 낮아지고 우문호의 의지도 한계에 다다르려 했다. 그때 멀리서 어슴푸레한 함성이 연달아 일며 횃불의 일렁임과 함께 밀림의 어둠을 꿰뚫었다.“전하—!”“목 낭자—!”“둘째 황자 전하—!”목몽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에 벼락처럼 환희가 터졌다.그녀가 우문호의 어깨를 흔들었다. “우문호! 들리오? 사람이 왔소! 우린 살았소!”곧장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 두 팔을 크게 저었다. “여기다! 우린 여기 있소!”그 목소리에는 울음이 엷게 배어 있었다.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자의 공포와, 간신히 목숨을 건진 기쁨이 함께 실려 있었다.우문호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불빛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가까워졌다. 흐릿한 시야에, 감격으로 물기 어린 목몽설의 눈동자가 놀라우리만치 밝게 빛났다. 그는 입가를 아주 미미하게 끌어올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한 듯했으나, 몰려드는 흑암과 피로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둘째 황자 관저.쇠뇌살이 소한의 몸을 꿰뚫었다. 김단은 재빠르게 지혈하고 약을 발랐다. 한 시진이 지나서야 간신히 피를 멎게 했다.소한은 오늘 막 약탕욕을 마친 터라 본디도 기력이 허했는데, 이처럼 큰 상처까지 입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소한의 종이처럼 창백한 안색을 바라보며 김단의 찌푸린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김단의 등 뒤로 한 그림자가 내려섰다. “약왕곡의 주인.”그제야 김단이 정신을 가다듬고 영칠을 한번 바라보며 물었다. “그 아이는 무사합니까?”“탈 없이 이미 댁으로 돌려보냈사옵니다.” 영칠은 사실대로 아뢰었으나 시선은 소한의 얼굴에 꽂혔다. 곧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약왕곡의 주인께 벌을 청하옵니다.”김단은 영칠이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조금만 일찍 나섰더라면 소한이 다치지 않았으리라 여긴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다가가 손을 내밀어 영칠을 일으켜 세우고 물었다. “소한이
목몽설은 제자리에서 잠시 멍해 있다가, 우문호의 말에 일리가 있다 여겨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곁에 말없이 주저앉았다.이곳은 죽은 듯 고요하고 냉기가 서려 있었다.우문호의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고, 의식은 아스라히 끊겼다 이어지며, 한기와 고열에 잔 떨림이 일었다.목몽설은 잠깐 머뭇이다가 마침내 천천히 몸을 기울여, 자신의 체온으로 그의 식은 몸을 덥혔다.“우문호… 자지 마시오… 잠이 들면… 다시 못 깨어나오…”우문호는 눈꺼풀이 천근만근 내려앉은 채 흐릿하게 응답했다.목몽설은 겁이 났다. 그가 자신의 곁에서 숨이 멎을까 두려웠다.생각 끝에 결국 말을 꺼냈다. “우문호, 이야기… 듣겠소?”우문호는 그녀가 잠들지 못하게 흥미를 돋우려 함을 알아차리고, 다시 흐릿하게 “음…” 라고 대답했다.이윽고 목몽설의 목소리가 서서히 흘렀다. “내가 언제부터 길눈이 어두운 자인 줄 알았는지 아시오?”말이 떨어졌으나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문호가 듣고 있음을 알았다. “세 살 적에, 제 집 안마당에서도 길을 잃은 적이 있소. 참말이오, 거짓이 아니오. 몸만 한 번 돌렸을 뿐인데, 그새 어디서 왔는지 순식간에 까마득해졌지.”우문호는 여전히 응답하지 않았다.목몽설은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뒤로 어머님이 날 데리고 날마다 목가를 돌며 길을 익히게 하셨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목가는 너무 넓어. 열다섯이 되어서야 겨우 구석구석을 다 익혔거든. 그래도 가끔은 또 헤매더라.”이 말을 들은 우문호가 비로소 흐릿한 의식 속에서 반응했다.“그럼 어찌… 자네가… 길눈이 어두운 자란 걸… 잊었소?”그의 답이 들리자 목몽설은 순식간에 기운이 났다. 적어도 이렇게 말을 걸면 효험이 있었다.“그게 왜냐면, 나는 바깥길을 나설 때면 늘 마차를 탔거든. 자네 관저에 갈 적에도 앞잡이가 늘 길을 이끌었지. 목가 안에서도 올해는 그다지 길을 잃지 않았었고. 그러니 문득 떠올리지 못한들, 죄가 되겠소?”이 대답에 우문호는 끝내 미소를 비쳤다.그래, 과
우문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눈앞의 그림자가 하도 가냘퍼, 자칫 힘을 조금만 주어도 금세 꺾일 듯하였다.그런데도 감히 그를 업고 사람을 구하러 가겠다 하다니. 우스웠으나, 두 손은 어느새 목몽설의 어깨에 올려져 있었다.사내의 무게가 얹히자 목몽설은 이를 악물고 낮게 탁 내뱉으며 온몸의 기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큰 우문호를 끝내 등에 업어 올렸다.다만 너무도 무거웠다.그녀는 비틀비틀 걸음을 떼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속으로는 욕설이 치밀었다. 겉으로는 여윈 사람처럼 보이면서 어찌 이리 무거운가. 전생에 돼지였던가.물론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숲은 우거지고 칠흑같이 어두웠다. 초라한 달빛만이 발아래의 울퉁불퉁한 흙길을 겨우 비추었다.목몽설은 무거운 우문호를 업은 채 깊고 얕은 발자국을 번갈아 남기며 숲속을 헤쳤다.땀이 금세 이마와 등줄기를 흥건히 적셨고, 거친 숨소리는 적막한 숲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울렸다.우문호는 열에 들떠 의식이 오락가락했다.흐릿한 시야에, 땀과 흙으로 얼룩진 목몽설의 옆얼굴이 비쳤다. 몇 가닥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었고, 굳게 다문 입술과 눈빛에는 거의 고집에 가까운 강단이 어려 있었다.사실 그녀는 그를 버리고 혼자 갈 수도 있었다.설령 그가 죽는다 해도 모른다 둘러댈 구실은 얼마든지 있었다. 길이 엇갈려 놓쳤다고, 정황을 알지 못했다고.그런데 왜, 그는 그녀의 등에 업혀 있는가.말로 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감각이, 마치 잔잔한 물웅덩이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차갑고 혼탁하던 그의 심연에 가느다란 물결을 퍼뜨렸다.그러나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를 즈음, 목몽설은 문득 떠올렸다. 자신이 길눈이 어두운 자라는 사실을.무가에서 십수 년을 살면서도 이따금 길을 헤맸는데, 하물며 지세가 복잡한 이 어두운 숲에서야 오죽하랴.사방의 나무는 모양이 다들 비슷하고,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만 맴도는 듯하였다.초조와 절망이 넝쿨처럼 가슴을 죄었다.“내려… 내려 주거라…”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