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함께 자리에 앉았다.“오늘 왜 갑자기 나를 만나려고 한 것이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임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사실 김단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는 약간 걱정하였다.김단이 임원의 일을 알고 갑자기 자신을 찾은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그녀가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그녀가 평양원군과 알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분명 어색할 터였다.잘 모르는 사람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확실히 불편할 것이다.이에 그는 김단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비록 그 역시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아무리 희박하더라도 그는 이러한 가능성에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싶었다!김단은 임학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제가 다른 술은 잘 못 마셔서 매실주 한 병만 시켰습니다.”임학은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네가 매실주를 가장 좋아하다는 건 알고 있다. 나중에 사람을 시켜 두어 병 보내주마!”말을 마친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매화당으로 보내줄까?”매화당은 이미 그가 그녀를 위해 되찾아 두었다!김단은 임학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척 창밖을 바라보았다.해는 이미 졌고, 하늘은 밤이 되기 전의 푸르스름한 남색을 띠고 있었다.밝은 별 몇 개가 하늘에 걸려 있었다.김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풍경이 정말 좋습니다. 한눈에 한양 절반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네가 좋다면 이 오라버니는 취향각 전체를 사서 너에게 줄 수도 있다. 매일 와도 좋고, 여기서 살아도 된다!”이어서 그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단아, 평양원군은 결국 남이지 않느냐, 네가 그 자의 집에서 살면 남들이 분명 욕할 것이야!”임학은 그녀를 평양원군 저택에 살게 하는 것보다 취향각을 사서 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김단은 창밖을 향한 시선을 돌려 임학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임학은 김단이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는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늘 나를 찾은 것도 결국 그 일 때문이었구나.”말하면서 그는 김단을 바라보며 약간 실망한 말투로 말했다. “어머니가 편찮으신 건 알고 있느냐? 내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물은 적이 있느냐? 네가 나를, 우리 집안을, 그리고 어머니가 너를 명정대군에게 소개했던 사실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단아, 그분은 열 달 동안 배 아파하시며 거의 목숨을 걸고 너를 낳아준 어머니 시다! 어떻게 그리 매정하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게냐?”말을 마친 임학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마치 부족하다는 듯 술병을 가져와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원이는 스스로 돌아온 것이다. 나도 그날 그 아이를 봤을 때도 매우 놀랐다. 거지 차림에 온몸은 더러웠고, 네가 예전에...”임학은 무의식적으로 김단이 세답방에서 나왔을 때보다 훨씬 비참했다고 말할 뻔 했다.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김단의 모습은 임원의 거지 차림보다 확실히 나았다.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궁녀 복장을 하고 궁녀처럼 꾸며졌기 때문이었다.그렇기에 보기에 깨끗하고 단정해 보였던 것이다.하지만 그 단정한 옷 아래에는 수많은 흉터가 뒤섞여 있었다. 이는 3년 간 그녀가 겪었던 모든 고난에 대한 증거였다.김단은 입을 다문 채 임학을 바라보았고,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임학은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돌아오는 길에 많은 수모를 겪었다. 심지어 누군가에 의해 더럽혀져 순결을 잃었다고 하였다! 나는, 나는 도저히 눈뜨고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별장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사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날 밤, 그 아이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았었단다. 동래 관아에서 도장을 찍어 보낸 서신이었으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어 있었다. 임원은 사망한 것이
“하하” 김단은 웃음을 터뜨렸다.임학은 결국 미간을 찌푸렸다. “왜 웃는 것이냐?”“두 분이 너무 위선적이라 웃는 것입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환자를 낯선 곳으로 보내 낯선 사람들이 돌보게 하였으면서, 뻔뻔하게 부인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시지 않습니까!”김단은 목소리가 싸늘해졌고, 임학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만약 도련님이 어느 날 깨어났는데 주변의 모든 것이 낯설게 변해있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지 생각해본 적 있으십니까? 도련님 같은 남성도 당황할 텐데, 하물며 부인은 환자시지 않습니까!”순간 임학은 비로소 깨달았다.그의 동공이 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김단은 계속 꾸짖었다. “어의는 두 분에 대해 도저히 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말을 섞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고도 뻔뻔하게 제 앞에서 효자 흉내를 내시는 겁니까!”임학은 벌떡 일어섰다.그는 두 눈으로 김단을 쏘아보았고, 가슴은 격하게 두근거렸다. 크게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조차 떨려왔다. “지금 당장 어머니를 모셔와야겠다!”말을 마친 그는 밖으로 나갔다.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도 가겠습니다!”그녀는 임원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임학은 김단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러는 것이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하지만 어쨌든 그녀가 나타나 어머니가 그녀를 보게 된다면, 어머니의 상태가 훨씬 좋아질지도 모른다!이에 임학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단을 데리고 별장으로 갔다.별장은 성동에 위치했다.마차가 별장 앞에 멈춰 섰을 때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별장 대문 앞에는 희미하게 빛을 내는 노란색 등불 두 개가 걸려 있었고, 앞의 계단만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임학이 앞으로 나서 대문을 두드렸다.곧 하인이 나와 문을 열었다.임학인 것을 확인한 하인은 황급히 허리를 굽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임학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어머니와 원이는 어디 있느냐?”“도련님, 아씨께서는 지금 마님을 목
“임 낭자, 오랜만이군요.”김단의 차디찬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임원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임학 곁으로 다가섰다.“오라버니…”비록 김단에 대한 증오가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지만 지금 이 순간 김단의 등장이 그녀의 목을 죄어왔다.임학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지만 평소처럼 임원을 달래주지 않았다.대신 시선은 다시 김단에게로 향했다.열다섯 해를 남매로 지내오며 쌓인 미묘한 감정들이 한순간에 퍼져나갔다.김단은 망설임 없이 집안으로 들어섰다.병풍 뒤로 들아가자 어린 몸종 하나가 허둥지둥 임씨 부인에게 옷을 입히고 있었다.그 몸종은 김단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화려하고 고귀한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 평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마님께서 곧 옷을 다 입으십니다.”김단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임씨 부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임씨 부인은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고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겁에 질려 있었는데 김단도 그토록 연약하고 무기력한 표정은 처음 보았다.진산군 댁의 뒷문에서 마주쳤을 때도, 임씨 부인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도 이런 표정은 아니었다.김단은 천천히 욕조 안의 물을 손끝으로 만져보았다.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자 김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이를 지켜보던 몸종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온몸이 굳어버렸다.혹시라도 화를 입을까 싶어 황급히 임씨 부인을 병풍 밖으로 모셨다.다른 몸종들도 한곳에 모여 조심스럽게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었다.임씨 부인의 평온한 얼굴을 확인한 임학은 안도하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어머니!”그 다급한 외침에 임씨 부인은 마치 깊은 꿈에서 깨어난 듯 고개를 들었다.“학이?”“어머니! 저예요!”임학는 두 손으로 임씨 부인의 어깨를 잡으며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어머니, 괜찮으세요?”임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임학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나… 나 집에 가고 싶어… 나 좀 데려가 줘…”“네, 어머니. 제가 곧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임원이
그럴듯한 변명이었다.그러나 임학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그는 차디찬 목소리로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그렇다면 욕조에 가득한 찬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오? 어머니께서는 연세도 많으신데 가을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 찬물로 목욕을 시킨다고? 어머니를 병들게 하려고 한 것 아니오?”“아닙니다. 아닙니다.”임원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다급히 해명했다.“찬물은 사람의 혈자리를 자극해서 정신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찬물로 목욕하면 어머니 병에 도움이 될 거라고. 보세요 오라버니. 덕분에 오늘 어머니께서 오라버니를 알아보지 않았습니까?”임학은 순간 멈칫하며 어머니를 돌아보았다.임씨 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학아...”임학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녀의 말이 맞았다.한동안 자신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녀가 지금은 확실히 자신을 알아보았다.분노로 가득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리며 혼란과 죄책감이 뒤엉켜 버렸다.“그래서… 낭자가 한 짓이 모두 어머니를 위한 것이오? 어머니를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단 말이오?”더 이상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임원은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당연히 어머니를 위해서지요! 오라버니, 제가 평소에 얼마나 어머니를 신경 쓰고 모셨는지 아시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오해를 하시는 거예요?”임원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얼굴에 남은 선명한 손자국이 그녀의 눈물과 더해져 더욱 불쌍함을 자아냈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임학은 죄책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혹시 내가 막무가내로 몰아 붙인 건 아닐까?그때 임씨 부인은 임원의 울음소리에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녀는 임원의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말했다.“왜 우느냐? 누가 널 괴롭혔느냐? 울지 말거라.”임원의 흐느낌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김단에게로 돌렸다.어쩐지 이 모든 일이 김단의 잘못 같았다.김단이 욕조의 물이 차갑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김단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임원과 임학 사이의 끈끈한 우애는 그녀에게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다.그러기에 그들이 앞으로 어떤 연극을 벌이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지금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하나, 임씨 부인의 목에 남은 상처였다.비록 이제 더 이상 임씨 부인을 ‘어머니’라 부를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15년 동안 낳아 기른 사람이다.임학의 말대로, 임씨 부인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그녀를 낳았다.그렇게 힘들게 자신을 낳아준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한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에게 학대당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 가해자가 3년 동안 자신을 대신했던 가짜라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김단의 차가운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임씨 부인의 옷깃 아래로 드러난 상처 자국이 보였다.순간 임원은 크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임학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급히 다가가 임씨 부인을 일으켰다.그는 조심스럽게 임씨 부인의 옷깃을 당겨 확인해 보았다.선명하게 남아 있는 시퍼런 멍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임학의 심장이 마구 뛰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분노가 치밀어 오른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임원을 노려보았다.그는 끝까지 이성을 붙잡으려 애쓰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설명해 보시오.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것이오?”임원은 마치 죄인처럼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는 급히 무릎을 꿇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했다.“오라버니… 저도 몰라요! 어머니 목에 그런 상처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어머니가 스스로 그런 거 아닐까요?”그때였다.임씨 부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다급하게 임학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그런 것이다. 내가 스스로 한 거야. 원이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니 화내지 말거라.”임학은 혼란스러웠다.상처를 감싸고 두둔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그때 임원은 다시 흐느끼며 울먹였다.“오라버니, 제가 얼마나 힘들게 돌아왔는지 알잖아요. 아버지와 어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 울부짖는 목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오라버니!”임원이 간절하게 불렀지만 임학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만이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둘 중 누가 임 씨고 누가 김 씨인지부터 분명히 하시오!”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내리꽂히자 임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임학은 망설임 없이 임씨 부인을 부축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김단은 무릎 꿇고 땅에 주저앉아 있는 임원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낭자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소.”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동래는 생활하기 적합한 곳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그런데도 돌아오는 것을 선택하다니...김단은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임원의 몸이 눈에 띄게 들썩였다.이럴 리가 없는데.현실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임학 앞에서 불쌍한 척 연기하면 그가 반드시 자신에게 새로운 신분을 마련해 줄 거라고 믿었었다.진산군 댁의 울타리 안에서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굶주리며 사는 일은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비단옷과 진수성찬은 아닐지라도 먹고 입는 것만큼은 걱정할 필요 없을 거라 확신했는데...이 상황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그녀의 생각과 계획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현실에 절망감만이 감돌았다.임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깊은 원망이 서려 있었다.“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 것이오? 내가 행복해지는 게 그리도 싫소?”김단은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반문했다.“그럼 낭자는 왜 할머니를 죽였소?”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내가 할머니를 죽였다고? 무슨 헛소리하는지 모르겠소. 할머니는 어차피 죽을 몸이었소. 내가 아니더라도 이번 여름을 넘기지 못했을 거란 말이오.”하지만 김단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졌다.“하지만 할머니는 분명 평온하게 떠나실 수 있었소. 낭자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김단은 임원을 가차 없이 나뭇간에 가두라고 명령했다.그 한마디에 저택에 모여 있던 몸종들과 하인들은 숨을 죽였다.그들은 김단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위압감과 기세만으로도 그녀가 이곳에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임원은 줄로 단단히 묶인 채 나뭇간으로 끌려갔다.김단은 일렬로 서있는 몸종들과 하인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띠었다.“아마도 너희는 저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소개해 주지. 저 낭자는 얼마 전 동래로 유배를 당했던 진산군 댁 아가씨다.”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유배형을 받은 죄인이 다시 수도에 나타나는 것은 대역죄에 속한다.세상 물정을 모르는 자들이라 하여도 이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공포에 사로잡힌 이들 중 하나가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아가씨,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는 그런 중죄인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저희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김단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말했다.“그러니 더욱 잘 지켜야지. 만약 저 낭자가 도망이라도 치게 된다면 그 낭자의 죄뿐만 아니라 내 할머니를 죽인 죄까지 모두 너희에게 덮어씌울 것이다.”그 말에 몸종들과 하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꼭 지켜볼 겁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아. 앞으로 며칠 동안은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너희들이 잘 지켜야 한다. 만약 임 도련님께서 오신다면 절대 풀어주지 말고 나를 찾아오라 전하거라.”“예, 아가씨! 꼭 명심하겠습니다!”사람들의 굳은 맹세를 듣고서야 김단은 만족스럽게 등을 돌렸다.그렇게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기다림에 지친 임학은 직접 평양 관저로 찾아왔다.그때 김단은 최지습을 위해 전장에 나설 짐을 꾸리고 있었다.이틀 후면 전장으로 떠나는 그를 위해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때 하인 하나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