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민 씨, 나를 좋아한 적 있어요?’그 말에 하승민은 흠칫했다.좋아했었다.그는 일찍이 지서현을 향한 자신의 이질적인 감정을 자각한 순간이 있었다.애틋했고 마음이 흔들렸으며 온전히 소유하고픈 욕망을 느꼈다.그에게는 분명 지서현을 향한 일말의 연정이 존재했다.하지만 그 미미한 감정은 지유나라는 존재 앞에서는 무의미했다.이제 이혼을 목전에 둔 이상, 그는 칼로 내리치듯 매섭고 무정하게 모든 것을 끊어내려 했다.그가 입을 열었다. “지서현, 난 지유나를 사랑해.”그는 지유나를 사랑한다고 했다.지서현의 눈빛이 천천히 죽
하승민을 잃는다는 것이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그녀 스스로도 이 남자의 어떤 점이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전혀 잘해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두 명쯤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를 사랑해보지 않은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하승민을 사랑하고 있었다.그녀의 손에는 그가 준 옥 반지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지서현은 자신이 그를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자신의 오빠야를 잃었다.한편 길가에는 롤스로이스 팬텀 고급 차 한대가 멈추어 서 있었다. 운전석의 하승민은 번쩍이는 앞 유리를 통해 몸을 웅크린 채 길
이혼 후, 하승민과 지서현은 다시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가 지서현에 대한 소식을 접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그녀가 크게 앓았다니.지유나는 즉각 붉은 입술로 조소를 머금었다. 눈에는 의기양양함과 동정, 그리고 조소가 뒤섞여 있었다.“서현이가 오빠한테 아주 그냥 푹 빠졌었나 보네.”지예슬도 지서현을 비웃었다.“서현이 그 조건으로 앞으로 하 대표님 같은 남자는 다시 못 만날 텐데, 생각해 보니 정말 안됐어.”지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승민을 보고는 애교 섞인 투로 말했다.“승민 오빠, 서현이가 아프다는데 전 남편으로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승민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난 이미 그녀와 이혼했으니까 그녀 일은 나에게 알릴 필요 없어.”조 비서는 잠시 멈칫하더니 공손하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조 비서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이때 지유나가 걸어 나왔다. 방금 하승민이 한 말을 모두 들은 그녀는 붉은 입술 끝을 살짝 말아 올렸다. 하승민은 언제나 결단력 있고 신속한 사람이었기에 지서현과의 이혼으로 그 여자를 마음에서 완전히 지웠을 터였다.지금 그의 마음과 눈에는 오직 그녀뿐이었고 그녀만이 그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지
하승민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총장님, 그 천재 후배가 이번 정상 학술 포럼에 참석한다고요?”뭐라고?천재 후배라는 단어가 지유나의 예민한 마음을 정확히 찔렀다. 그녀는 귀를 쫑긋 세웠다.그 신비롭고 차가운 천재 후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가?신윤철은 대답했다.“하 대표, 그 천재 후배는 계속 해성에 있었는데 두 사람 서로 모르고 지냈다니 유감이군. 근데 이제 잘 됐어. 이번에 자네 그 천재 후배가 이번 최고 학술 포럼에 참석하겠다고 하니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됐잖아. 그날 꼭 시간 내어 참석해 주길 바라
이어서 지서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우린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니 늘 신중해야 해요. 조금만 틀려도 큰 착오가 되니까.”그때 임성민은 서 있었고 지서현은 앉아 있었다. 키는 임성민이 지서현보다 컸지만 지서현은 꼿꼿하게 앉아 영롱한 눈빛으로 마치 학생을 가르치듯 그를 훈계했다.임성민은 기가 막혔다.‘감히 자신을 가르치려 들다니? 지가 스승이라고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스승은 오직 C 신뿐이라고!’임성민은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서현을 꾸짖으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됐어요. 임성민
하은지는 곧바로 맞장구쳤다.“우섭 오빠, 유나 언니 말이 맞아. 혹시 그 천재 후배가 뚱뚱하고 못생겼으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가 직접 보면 환상이 와장창 깨질 수도 있어.”지유나와 하은지는 천재 후배를 은근히 깎아내리며 분위기를 몰아갔다.하지만 고우섭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예쁜 여자는 질리도록 봤으니까 재미없어. 그 천재 후배가 평범하게 생겼다고 해도 난 좋아. 결혼해서 우리 가문 유전자 개선도 하고.”지유나는 말문이 막혔고 하은지도 마찬가지였다.고우섭의 마음은 이미 천재 후배에게 푹 빠져 있어서 누가 뭐라 해도
이번 합동 무대는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지유나의 존재감을 덮어버렸다.지유나는 속으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 천재 후배가 너무 부러웠다.그때 하은지가 갑자기 소리쳤다.“저기 봐, 지서현이 왔어!”하승민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오늘 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아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그는 잘생긴 눈을 들어 고개를 들었다.그는 지서현을 보았다.오늘 밤 지서현은 민소매 검은색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원피스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완벽하게 감싸고 있었고 짧은 플레어스커트는 그녀의 아름
다른 여학생이 말했다.“진세윤 아빠가 마약상이라던데?”양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어. 진세윤은 마약상 아들이야. 게다가 엄마는 눈이 안 보이고 중학생 여동생도 하나 있는데 집안 형편이 말도 아니래. 그런데 마약상 아버지, 눈먼 어머니, 공부하는 여동생, 망가진 진세윤. 이런 상황이 오히려 내 도전 의식을 자극하더라. 하하.”양지혜와 주변 여학생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진세윤의 가정을 비웃고 있었다.엄수아는 기분이 상했다. 그녀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예쁜 눈으로 양지혜 일행을 쏘아보았다.“그만 좀 웃으시죠?”엄수아의 갑작스
하승민은 답장하라고 명령했다.지서현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자기가 누군데 명령하는 거지? 회사 사장인가? 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지서현은 다시 한번 무시했다.운전석에 앉은 소문익이 웃으며 말했다.“서현아, 하 대표랑 이혼은 했지만 뭔가 깔끔하게 정리된 것 같지는 않네. 하 대표 그 녀석이 아직 너한테 미련이 남은 것 아니야?”지서현이 대답했다.“글쎄요.”소문익이 말을 이었다.“매장에서 내가 네 허리를 감싸 안았을 때 하 대표 눈빛이 내 손을 잘라버릴 듯하던데. 서현아, 네 가짜 남자친구 노릇하는 것도 쉬
지동욱과 강미화는 예비 사위 C 신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하지만 지예슬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C 신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지예슬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여보세요, C 신?”하지만 차갑고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없는 번호라고?’지예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만 들려왔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지예슬은 곧바로 카톡을 열어
C 신이 여자라고?박경애와 지예슬은 얼어붙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서 물었다.“소문익 씨, 무슨 말씀이세요? C 신이 어떻게 여자예요? 저랑 사귀는 사람인데, 남자라고요!”소문익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저는 C 신과 아는 사이일 뿐만 아니라 친분도 두텁습니다. 제가 여자라고 하면 여자인 겁니다.”지예슬은 충격적인 소식에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요, 소문익 씨. 분명 거짓말이죠!”박경애 또한 믿고 싶지 않았다.“소문익 씨, 지금은 서현이 남자친구라고 해서 그런 말도
지유나도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녀는 지서현에게 도발적인 눈빛을 던진 후 탈의실로 들어가 치마를 입어보았다.곧 지유나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이윤희와 지예슬은 감탄했다.“유나야, 정말 아름답구나!”지유나는 레이스 치마를 입으니 아름다웠지만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허리가 너무 조였던 것이다.방금 탈의실에서도 숨을 꾹 참고 겨우 지퍼를 올렸다.지유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하승민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승민 오빠, 나 예뻐?”하승민은 지유나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윤희가 칭찬을 쏟아냈다.“우리 유나가
지유나는 하승민에게 지서현이 입고 있는 치마를 사달라고 졸랐다.지서현에게 지기 싫은 승부욕은 그녀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지서현에게 주목이 쏠리는 게 싫었던 지유나는 그 치마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했다.사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온천에 갔을 때도 지유나는 지서현의 옷을 빼앗으려 했었다.하승민은 지서현을 바라보았다.그때 소문익이 지서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입을 열었다.“하 대표님, 세상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규칙이죠. 안 그렇습니까?”하승민의 시선은 소문익의 손에 꽂혔다. 아까 소문익이 지서현의 어깨에
지유나, 지예슬, 그리고 이윤희도 마치 따귀를 맞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지서현은 하승민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이제 제 말 믿으시겠죠?”그녀의 맑은 두 눈은 영롱하게 빛났고 소문익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에 하승민의 잘생긴 얼굴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워졌다.‘이 요망한 여자가! 소문익까지 자기 치마폭에 둘러싸다니, 정말 대단한 여자야!’“서현아, 너 쇼핑하러 온 거잖아. 어때? 마음에 드는 원피스 있어?”점원은 곧바로 레이스 원피스를 가져왔다. “이 원피스가 손님께 아주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지서현은 고
소문익이 왔다.지유나 일행은 어제 동연당에서 소문익을 만났었기에 오늘 다시 만나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소문익은 지서현 옆으로 다가왔다.“서현아, 잠깐 전화 받느라 밖에 나갔었는데 무슨 일 있었어? 뭔가 재밌는 걸 놓친 것 같은데.”지서현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렸다.“아니. 타이밍 딱 맞춰서 잘 왔어. 다들 내 남자친구인 당신을 보고 싶어 했거든..”지서현은 소문익에게 눈짓했다.소문익은 바로 눈치채고 지서현의 가녀린 어깨에 팔을 둘렀다.“이분들은?”지서현은 한 명씩 소개했다.“이분은 지씨 가문 어르신, 이윤희 씨, 지
지예슬은 곧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서현아, 부러워할 것 없어. C신은 내 남자친구야. 우리 곧 결혼할 거라고.”지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재산이 열 배로 늘었다며? 그럼 그 돈은 어디 있어? 그 C신이라는 사람이 언제 준다고 했어?”박경애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게...”“말 안 했나 보네요. 돈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C신이 열 배든 백 배든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겠죠. 아까도 말했지만 그 C신이라는 사람은 사기꾼이에요. 알아서들 하세요.”지예슬은 곧바로 화를 냈다. 남자친구가 C신이라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