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운영 담당자가 보낸 답장은 짧았다. 두 건은 설치 전 취소, 한 건은 일정 조정 중. 나머지 한 건은 체험을 마쳤으나 회수 지연.
채이는 네 줄 중 마지막 줄의 색을 지웠다. 고객 불편은 여전히 남았지만, 체험 완료 숫자가 잘못됐다고 말할 근거는 아니었다. 남은 세 줄에는 확인한 담당자와 회신 날짜를 적었다.
민재가 화면을 보고 물었다.
“그럼 스무 건 중 세 건이 잘못된 거네요?”
“이 표본에서는 그래요. 전체가 이 비율이라는 뜻은 아니고요.”
“퍼센트로 계산하면 안 되는 거죠?”
“계산할 수는 있어도 지금 보고할 숫자는 아니에요. 전체를 봐야죠.”
채이는 스스로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숙부의 회사라는 이유로 작게 만들지도, 그동안의 불편한 감정 때문에 크게 만들지도 말자.
업체 보고서의 청구 기준을 찾자 ‘체험 완료 건당 십만 원’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전체 청구 수량은 삼천 건이었다. 채이는 삼억 원이 적힌 합계 칸을 잠시 바라봤다. 지금 확인한 세 건을 전체의 잘못으로 늘려 읽으면 안 됐다.
그녀는 합계 칸에 표시하지 않았다. 대신 ‘완료 기준 확인 요청’이라고 적은 메모를 붙였다. 은정이 자료를 받아들었다.
“잘했어. 어제 네 건이라고 했다고 억지로 네 건 맞출 필요 없어.”
“회수 지연은 안내 개선안에 따로 반영하려고요.”
“그렇게 해. 실적 오류 확인하고 고객 문제 고치는 건 같이 가도 파일은 구분해두고.”
현수가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운영 쪽 담당자랑 내가 통화할게. 취소 상태가 언제 전달됐는지도 봐야 하니까.”
채이는 자료를 넘겼다. 일을 설명한 뒤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자신이 다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버릇이 먼저 손목을 당겼지만, 이번에는 펜을 놓았다.
점심 이후 유성컴퍼니의 회신이 들어왔다. 모집 캠페인과 실제 운영 시스템의 기준 시점이 달라 일부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완료 기준에 대한 질문에는 분명한 답이 없었다.
은정은 채이를 불러 메일을 함께 읽었다.
“기준 시점이 다르다는 설명만으로 끝내긴 어려워. 보고서 제출 전에 취소된 건도 있으니까.”
“네. 취소일과 제출일 나란히 적어뒀어요.”
“추가 원자료는 내가 요청할게. 너는 이걸로 숙부에게 개인 연락하지 마.”
채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은정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네가 불편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회사가 물어야 할 질문을 네가 조카로 묻지 말라는 뜻이야.”
그 말을 듣자 미처 이름 붙이지 못했던 불안이 정리됐다. 숙부에게 전화하면 공적인 질문도 언제든 버릇없는 조카의 트집으로 바뀔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오늘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안내 개선안은 금요일에 보자.”
채이는 자리로 돌아와 수정 화면을 열었다. 신청 버튼 위에 추가 설치비가 생길 수 있는 조건을 넣고, 완료 안내 아래에 회수 신청 링크를 붙였다. 고객이 알아야 할 정보를 넣는 일은 누가 숙부인지와 상관없었다.
유나가 의자 뒤로 몸을 기울였다.
“이 문장 너무 딱딱해. ‘추가 비용 발생 가능’ 말고 ‘이런 경우 설치비가 더 들어요’ 어때?”
채이는 두 문장을 나란히 써봤다.
“좋다. 조건 그림도 여기 붙이면 되겠다.”
“봐. 결혼했어도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유나의 농담에 채이가 웃었다. 하루 종일 굳어 있던 턱이 그제야 풀렸다.
***
집에 들어서자 볶은 양파 냄새가 났다.
도진은 주방 조리대 앞에서 포장을 뜯고 있었다. 포장 용기에는 근처 식당 이름이 찍혀 있었다. 채이가 다가가자 그가 먼저 말했다.
“만들었다고 하려던 건 아닙니다.”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표정이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채이는 웃으며 손을 씻었다. 넓은 식탁 가운데 따뜻한 음식이 두 그릇 놓였다. 저녁을 같이 먹겠다고 표시한 날인데 자신은 생각보다 늦었다.
“기다리셨어요?”
“십오 분 정도요.”
“다음에는 먼저 드셔도 되는데.”
“오늘은 기다리고 싶었습니다.”
채이는 물잔을 채우다 잠깐 멈췄다. 그런 말을 업무 보고처럼 담담하게 하니까 오히려 답하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음식 이야기만 했다. 채이는 양파가 달다고 했고 도진은 매운 소스가 따로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그가 소스를 전부 넣으려 하자 채이가 숟가락으로 절반을 덜어주었다.
“처음엔 이만큼만요. 이거 꽤 매워요.”
그는 한입 먹고 곧바로 물을 마셨다. 채이는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눌렀다.
“말씀하신 대로 하길 잘했군요.”
그가 인정하자 결국 웃음이 났다. 식사가 끝나갈 때 도진이 물었다.
“오늘 많이 힘들었습니까?”
채이는 바로 아니라고 하려다 젓가락을 놓았다.
“조금요. 가족하고 일이 겹치는 걸 발견해서.”
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채이는 회사 자료를 꺼내지 않았다. 고객 정보도, 미확인 숫자도 식탁으로 가져오지 않았다.
“유성컴퍼니 자료에 확인할 부분이 있어요. 팀장님께 냈고 운영 쪽이랑 확인 중이에요. 숙부 회사라는 것도 말씀드렸고요.”
도진은 한동안 그녀를 봤다.
“윤 대리가 직접 가족을 상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팀장님이 업체 연락은 맡아주셨어요.”
“필요하면 제가…….”
그가 말을 멈췄다. 채이는 기다렸다. 도진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회사 경로로 올라오는 자료를 보겠습니다.”
방금 바뀐 문장을 채이는 알아들었다. 대신 처리하겠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가 스스로 멈춘 것이 고마웠다.
“집에서는 그냥 들어주시면 돼요.”
“무엇을요?”
“가족 일이라고 눈감고 싶은 마음이 아주 안 드는 건 아니라는 거요.”
채이는 냅킨 끝을 접었다. 오천만 원을 갚은 날 숙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한 일인데도 배은망덕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회사 문제까지 제기하면 그는 어떤 말을 할까.
“돈은 다 갚았어요. 그래도 도와준 건 사실이잖아요. 엄마도 그때 고마워하셨고요.”
“네.”
도진은 그 사실을 작게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고객이 설치도 못 했는데 체험했다는 사람이 될 수는 없어요. 엄마가 돈 빌려주신 분한테 고마운 거랑, 제가 여기서 일하는 건 다른 일이니까.”
채이는 접던 냅킨을 펴놓았다.
“우리 집 일이라고 회사 일을 덮을 수는 없어요.”
도진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 말, 내 가족에게도 똑같이 해주세요.”
채이는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 가족도요?”
“필요한 일이 생기면요. 저도 포함해서.”
쉽게 약속하기 어려운 말이라는 걸 알았다. 채이는 대답 대신 그를 조금 오래 봤다. 그가 시선을 피하지 않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화내시면 안 돼요.”
“화가 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윤 대리의 말이 틀린 건 아니겠죠.”
그 답이 완벽해서 좋은 건 아니었다. 화내지 않겠다고 장담하는 대신, 화가 나도 구별하겠다는 말이어서 좋았다.
채이는 빈 그릇 두 개를 포갰다. 도진이 반대편에서 물컵을 들었다.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오늘 음식은 대표님이 준비하셨잖아요.”
“주문을 했습니다.”
“그것도 준비예요.”
잠깐의 실랑이 끝에 채이가 그릇을 헹구고 도진이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안쪽 선반에 큰 접시가 걸리자 둘이 동시에 몸을 숙였다. 어깨가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채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수도를 잠갔다. 오늘은 누가 자신의 일을 대신해주지 않았는데도, 혼자였던 날보다 덜 지쳤다.
변경 요청 경로는 그날 저녁에 도착했다.채이는 팀장이 전달한 회신을 끝까지 읽었다. 실무 심사 결과에 따른 변경이 아니었다. 대표실 요청으로 편성 담당이 역할을 조정했고, 최종 승인자는 서도진이었다.은정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요청 내용 원문도 본인 관련 부분은 받을 수 있대. 원하면 연결할게.”“받겠습니다.”채이는 말을 마친 뒤 한 번 숨을 골랐다. 이름 하나를 확인했을 뿐인데 몸 안의 온도가 달라졌다.은정이 전화를 걸어 담당자를 연결했다. 채이는 자기 이름과 소속을 밝힌 뒤 요청했다.“제가 받은 후보 통지 이후 어떤 평가가 추가됐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수화기 너머로 키보드 소리가 났다.“추가 점수는 없습니다. 대외 역할 조정 요청이 반영됐습니다.”“자진 철회로 처리된 건 아니죠?”“네. 그렇게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그러면 제가 동의한 변경도 아니라는 점을 남겨주세요.”옆에서 은정의 펜이 멈췄다. 채이는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심사 기회를 잃는다고 사전에 안내받은 적도 없습니다.”담당자는 확인해 함께 기록하겠다고 했다. 이미 바뀐 명단을 전화 한 통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대신 무엇이 일어났는지 흐리지 않는 일부터 할 수 있었다.회신을 받은 뒤 은정이 종이를 한 장 뽑아줬다. 채이와 관련된 요청 부분이었다. 외부 이슈에 따른 부담을 고려해 후보에서 제외하고 지원 실무로 조정한다. 도진의 승인 표시 아래에는 익숙한 서명이 있었다.“팀장님은 이 내용을 언제 받으셨어요?”“네
발표 편성안에는 네 명의 이름이 있었다. 도진은 맨 아래에 붙은 후보별 역할표를 두 번 읽었다. 윤채이. 고객 경험 개선 및 현지 적용안.오정환은 책상 옆에 서서 최종 심사 일정을 설명했다. 후보들은 합동 리허설을 거친 뒤 각자의 안으로 발표자 심사를 받게 돼 있었다. 지금 명단에서 빠지면 그 일정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다른 지원 역할은 있습니까?”도진이 물었다.“발표 지원 실무가 있습니다. 자료 취합과 질의 대응 보조입니다.”“윤 대리를 그쪽으로 옮기는 건.”정환은 문장 끝을 기다렸다. 도진이 시선을 들자 그가 답했다.“후보자가 원했습니까?”“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그럼 의사 확인이 먼저입니다.”도진은 펜을 손에 쥐었다. 남색 펜케이스는 보고서 바로 옆에 있었다. 어젯밤 채이가 괜찮다고 웃으며 씻으러 들어갔던 모습이 떠올랐다. 괜찮다는 말 아래 얼마나 긴장이 깔려 있었는지도 보았다.“외부 논란이 겹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무대에 세우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윤 대리에게는 후보 심사 기회가 없어지는 조치입니다.”정환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평소보다 느렸다. 도진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실무 기여는 별도로 남기고, 발표가 끝난 뒤 후속 업무에서 역할을 검토하세요.”“그걸 같은 기회로 볼 수는 없습니다.”“알고 있습니다.”대답은 했지만 그 무게를 끝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지금 채이가 사람들 앞에서 혼인 관계를 해명하는 장면만 자꾸 떠올랐다. 몇 주라도 뒤로 옮기면
현지 검토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얇은 재킷은 두툼한 코트로 바뀌었다. 발표 준비를 시작한 지도 한 달이 훌쩍 넘었다. 후보자 공통 질의가 도착한 것은 자료를 한 번 더 줄인 날이었다.채이는 설치 조건 검증 항목을 읽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손을 멈췄다. 후보자와 관련된 거래업체가 있는 경우 평가 근거를 별도로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유성컴퍼니라는 이름은 없었다.유나가 의자를 끌고 왔다.“우리 쪽 얘기 같은데.”“자료는 있어. 팀장님이 취합하신대.”“또 네가 만든 걸 네가 만들었다고 설명하는 거야?”채이는 문장을 다시 읽었다. 속이 잠깐 답답해졌지만 화면을 닫지는 않았다.“필요하면 설명해야지. 대신 뭘 확인하려는 건지 먼저 물어보려고.”은정에게 전달하자 곧 답이 왔다. 요청 범위와 제출 목적을 심사 담당에게 확인한 뒤 팀 단위로 회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채이 혼자 집안 이야기를 꺼내서 해명할 일은 아니었다.오후 회의에서 은정은 팀원들의 작성 기록과 기존 평가표를 같은 폴더에 모으도록 했다. 현수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확인 끝난 초안 도용 건을 또 따지는 건 아니라고 답 받았습니다. 업체와 연결된 실적을 분리해서 보겠답니다.”“그러면 개선 성과는 유성 보고 수치 말고 실제 설치 기록 기준으로 제출할게요.”채이가 말했다.“그건 원래부터 그렇게 했잖아.”유나의 말에 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 다시 만들 필요도 없어.”그녀는 파일을 열었다. 처음 기록이 틀리지 않은 날에는 같은 화면을 다시 보는 일이 견딜 만했다. 다만 지우고 싶은 질문까지 파일 밖에서 함께
문구점 유리창에 펜케이스가 두 줄로 걸려 있었다. 채이는 저녁 약속에 가는 유나를 먼저 보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짙은 남색, 회색, 검정. 셋 다 비슷해 보였지만 남색의 안감만 밝아서 안에 든 물건이 잘 보였다.“선물하실 거예요?”직원이 물었다. 채이는 도진이 회의에서 펜을 찾던 모습을 떠올렸다. 비싼 펜은 갖고 있었지만, 집에서 급하게 메모할 때면 늘 식탁 위의 볼펜을 빌렸다. 서재와 거실을 오가다 어디 두었는지 잊는다고 했다.“네. 근데 포장은 작게 해주세요.”“카드도 넣어드릴까요?”채이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상자나 리본은 어울리지 않았다.계산대에서 개인 카드를 꺼냈다. 월급 통장에 연결된 카드였다. 오늘은 어디서 나온 돈인지 자신이 알았으면 했다.작은 카드에는 첫 문장을 쓰고 지웠다. 늘 고마워요.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물건을 고른 이유가 모자랐다. 채이는 새 카드에 천천히 다시 썼다. 자꾸 찾는 물건 곁에 두세요.그 아래에는 이름만 적었다. 윤채이.집에 도착했을 때 도진은 서재에서 통화 중이었다. 채이는 식탁에 작은 봉투를 올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방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면 바로 선물을 건네야 할 것 같아 주방으로 갔다. 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괜히 봉투 위치를 두 번 바꿨다.도진이 나왔을 때 그녀는 이미 봉투를 손에 쥐고 있었다.“뭐야?”“이거요.”채이가 덧붙였다.“선물이에요. 비싼 건 아니고.”도진은 봉투를 바로 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먼저 봤다.“무슨 날인데?”“무슨 날이어야 주나요?
“어머니가 제일 싫어하시는 게 뭐야?”토요일 오전, 상계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도진이 물었다. 채이는 무릎에 놓인 종이봉투를 내려다봤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빵 네 개와 집에서 챙겨온 밀폐용기가 들어 있었다.“다 드시지도 못할 과일 상자요. 나눠주시러 다니느라 더 바빠져요.”“그럼 과일은 빼고.”“뭘 더 준비하려고요?”“너무 빈손 같아서.”채이는 봉투를 그에게 살짝 보여줬다.“엄마는 이만큼을 다 드시는 쪽이 좋아요. 그리고 뭘 들여놓을 때 먼저 물어보고요. 좁은 집이라 하나 들어오면 하나 나가야 하거든요.”도진은 잠깐 고개를 끄덕였다. 채이는 덧붙였다.“창가 의자에 방석 있으면 거기는 엄마 자리예요. 햇빛 드는 쪽에서 차 마시는 거 좋아하시니까.”“알겠어.”“식사는 잘하고 계시는지 계속 묻지는 말고요. 만나는 사람마다 물으면 엄마도 밥 먹는 게 숙제 같대요.”“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지?”어려운 회의를 앞둔 듯 진지한 얼굴에 채이가 웃었다.“그냥 도진 씨 얘기요. 이번 주에 파를 얼마나 썰었는지 같은 거.”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채이가 웃음을 삼키며 창밖을 보자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벌써 네가 설명할 얼굴인데.”정숙은 집 앞 계단까지 나오지 않고 현관에서 두 사람을 맞았다. 채이가 벨을 누르자 안쪽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도진은 봉투를 한 손에 모아 들고 다른 손으로 문이 닫히지 않게 받쳤다.“어머니, 저희 왔습니다.&rdqu
“윤 대리. 싱가포르 사업 발표 후보에 올렸어.”은정은 결재 서류를 내려놓듯 담백하게 말했다. 채이는 손에 쥔 펜을 고쳐 잡았다. 잘못 들었을 가능성을 확인하느라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제가요?”“응. 아직 최종 발표자는 아니고. 실무 검토 통과한 후보 중에 마지막 심사가 남았어.”채이는 몇 달 전부터 자료의 맨 끝에 붙여뒀던 해외 적용 항목을 떠올렸다. 고치던 자료에 정말 자기 이름까지 따라갈 줄은 몰랐다. 은정이 평가표를 돌려놓았다.“좋게 본 부분부터 말할게. 광고 유입이 아니라 설치가 끝난 뒤 고객이 뭘 겪는지까지 이어서 봤어. 현지에 그대로 가져가면 안 되는 점도 네가 먼저 썼고.”채이는 손끝으로 용지를 눌렀다. 표의 마지막 칸에 보완 의견이 길게 적혀 있었다.“현지 주거 형태와 설치 방식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는 거죠?”“그것도. 그리고 네 발표가 자료보다 약해.”은정은 웃지 않았다.“질문받기 전에 근거를 전부 설명하려고 해. 십 분 안에 다 말하려다 결론이 마지막 삼십 초에 나와. 듣는 사람이 널 따라가느라 바쁘면 사업 판단을 못 해.”“앞에 결론을 놓겠습니다.”“그걸 말로 해봐.”채이는 잠깐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머릿속에서 표 세 장이 한꺼번에 펼쳐졌다. 은정이 기다려줬다.“하루온이 해외에서 먼저 약속해야 하는 건 싼 월 구독료가 아니라, 고객이 지불할 총비용과 실제 이용 일정입니다.”“좋아. 그 다음에 숫자를 보여줘.”은정은 후보 통지서를 밀어줬다. 실무평가 의견과 후속 일정,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