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그만두면 요요 데리고 시카고로 돌아갈 건가요?” 장시원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시원이 서명을 마쳤는데 청아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춰 섰는데, 힘이 너무 세어 종이를 뚫을 듯했다.이내 평정심을 찾은 시원은 사직서를 청아에게 밀어주었다. 준수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표정이 어두웠고, 깊은 눈빛은 마치 심연 같았다.“잘 가세요.”청아는 목에 뭐가 걸린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장님도요,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습니다.”청아는 사직서를 들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갔다. 곧은 등은 마치 몇 킬로그램의 짐을 짊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청아는 여전히 느리지 않게,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갔다.시원은 청아의 뒷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함께 사라진 듯 허무했다....저녁에 시원은 약속이 있었고, 끝나고 났을 때에는 이미 반쯤 취한 상태였다.벌써 밤 11시였기에 주성이 운전하며 공손히 물었다. “사장님, 본가로 돌아가시겠습니까?”시원은 창밖의 화려한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쯤 취한 시원의 검은 눈동자에 불빛이 반사되어, 눈 속의 허무함을 비추었다.잠시 후, 시원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정으로 가죠.”주성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어정 쪽으로 운전했다.반 시간 뒤, 차가 건물 아래에 멈췄고, 주성은 시원이 오늘 기분이 좋지 않고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을 알고 차에서 내려 그를 도우려 했다.“필요 없어요!” 시원이 주성의 손을 밀어내고 굳건히 혼자 걸어갔다.“혼자 올라갈 수 있습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문을 연 시원은 불을 킨 상태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아마 가슴도 빈 집처럼 텅 빈것같아 굉장히 힘들어 보였다.시원은 언젠가 청아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게스트룸으로 걸어가 문을 열자, 시원의 눈에 깊은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방 안에는 크고 작은
우강남은 자기 전에 갑자기 내일이 추석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허홍연과 상의했다.“엄마, 내일 추석인데 청아한테 전화해서 집에 오라고 할까요?”“오랜만에 오니까 내일 아침에 시장에 가서 청아가 좋아하는 음식을 많이 사오죠.”“그리고 요요도 있으니까 우리 가족이 함께 즐거운 명절을 보내자고요.”강남이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 청아에게 전화하려 했지만 허홍연의 얼굴색이 변하며 서둘러 말렸다. “전화하지 마!”“왜 그래요?” 강남이 당황해서 묻자 허홍연은 동공이 흔들렸다. 허홍연은 우임승이 이미 일을 찾아 떠났다는 것을 모르고 우임승이 여전히 청아와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청아가 오면 우임승도 함께 오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허홍연은 우임승이 새집을 찾아오고 여기에 살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본인과 우임승이 한집에서 사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갔고, 허홍연은 매일 싸우고 싶지 않았다.더욱이 정소연이 강남에게 이런 도박꾼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화를 내면서 친정으로 돌아가게될까 봐서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허홍연은 소연이 빨리 손주를 낳기를 바랐다.“청아가 오늘 오후에 전화 왔어, 내일 일 한다고 못 온다고 했고!” 허홍연은 아무 생각 없이 변명하자 강남이 미간을 찌푸렸다.“추석에도 일을 나간다고요?”그러자 소연이 다가와서 비웃듯이 말했다. “큰 회사니 바쁘지. 당신 동생은 사장님 곁의 사람이니 일이 더 많을 거야.”“당신처럼 열심히 일해도 월급이 쥐꼬리만큼 일 거라고 생각해?”강남은 소연의 쓸데없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급히 말했다. “그럼 됐어, 청아 보고 일하라고 하고 시간 날 때 부르지 뭐.”허홍연이 소연이 주방에 물을 마시러 간 사이에 강남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서 낮게 말했다. “소연이 너한테 불만이 있는 거 아니야?”“아니에요!” 강남이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방금 그건 농담이었어요.”강남의 대답에 그제야 안심이 된 허홍연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이제 일이 그렇게 바쁘지 않으니 자주 야
소희가 조용히 말했다. “둘이 화해했는지 안 했는지, 당신도 몰라?”“모르겠어, 명절 전에 바빠서 이 며칠 동안 장시원 못 봤어.”이에 소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보아하니 청아와 시원 오빠 사이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청아를 설득해서 요요의 일을 시원에게 말하게 하는 건 어때?”임구택의 말에 소희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청아는 말하지 않을 거야. 특히 시원 오빠 어머니가 요요를 만난 적이 있다면 더더욱.”“요요가 시원 오빠 아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요요를 청아 곁에서 데려갈 수도 있어. 그리고 청아는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아 하고.”그러자 구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청아가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는 건 아닐까?”“청아에게는 약점이 있고,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어. 그리고 요요를 위해서라도 청아는 신중해야 해.”소희의 눈빛이 차갑게 식으며 말했다. “명절에 청아와 요요가 본가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평소에 청아에게 얼마나 냉담한지 알 수 있어.”“청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 사람들이 청아를 위해 나설 것 같아?”우씨 집안 사람들이 청아를 끌어내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소희는 그들이 양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허홍연은 우임승을 부양할 책임을 모두 청아에게 미루고 지금까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타인인 소희도 화가 나는데 하물며 친딸인 청아는 오죽할까!진연이 소동을 편애하는 것은 소동이 어렸을 때부터 진연의 곁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진연은 모든 사랑과 정성을 소동에게 쏟아부었고, 이는 바꿀 수 없는것이었다. 그런데 왜 허홍연은 진연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소희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구택이 옆으로 누워 소희를 안아 주며 어깨를 감싸며 낮게 말했다. “아마도 우씨 집안 사람들의 냉담함이 시원이 청아를 더욱 연민하게 만들어. 그리고 어떤 사랑은 상쇄되는 것일 거야.”소희가 구택의 가슴에 기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일 청아한테 물어볼
소희는 상쾌하게 세수하고 우청아의 집으로 내려갔다.“구택 오빠는 왜 안 왔어?” 청아가 문을 열자 소희 혼자 온 걸 보고는 웃으며 물었다.“내 짐 정리해 주고 있어.”소희가 말하고 요요에게 다가가 아침을 같이 먹으러 가자며 요요를 안아 들었다.식사하면서 소희가 청아에게 함께 운성으로 명절을 보내자고 제안하자 청아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운성으로 간다고?”“응!” 소희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 혼자 계시고 사람이 많은 걸 좋아하셔.”소희의 말에 청아가 조금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불편하시지 않을까?”“전혀, 숙소 걱정도 할 필요 없어!” 소희가 생각할수록 이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식사 끝나면 나한테 설거지를 맡기고, 너랑 요요는 짐을 싸. 우리 9시에 출발하게!”소희가 말을 마치고 요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이모랑 함께 이모 고향에 가서 명절 보내는 거 어때?”요요는 활발했고 활기찬 걸 좋아해서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청아는 소희가 언급한 바 있는 소희를 입양하신 할아버지에 대해 항상 들어왔기에, 그저 어르신을 만나보는 걸로 생각하고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그리고 곧장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운성에서 이틀 동안 있을 예정이라 청아는 2일 치 옷을 가져갔고, 요요는 어린아이라 짐이 좀 더 많았다.모든 준비를 마치자 9시에 명우의 차가 아래로 도착했고 모두가 곧이어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요요는 놀러간다고 하니 계속 신이 나 있었다....10시에 비행기가 정시에 이륙했고, 사설 비행기였기 때문에 운성까지는 1시간 조금 넘게 걸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였다.오석은 일찍부터 소희를 기다리고 있었고, 일행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아가씨, 임구택 씨!”“집사 할아버지, 추석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구택이 말했다.“평안하세요!”오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구택 씨가 보내주신 추석 선물
“소희의 친구라고?” 강재석은 오석과 마찬가지로 놀라면서도 기뻐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아, 좋아!”강재석은 요요를 바라보다가 소희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어쩐지 말이 안 된다고 했어. 네가 어떻게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낳을 수 있겠어?”갑작스러운 공격에 소희는 할 말을 잃었다....곧이어 강재석이 하인을 불러 말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 좀 가져와. 없으면 지금 바로 사 오고!”이에 청아가 서둘러 말했다. “괜찮아요, 오늘 길에 이미 많이 먹었어요.”요요는 친절하고 다정한 강재석을 좋아했고,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활짝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할아버지!”강재석은 요요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더욱 다정하게 웃으며 요요에게 손을 내밀었다. “할아버지한테 와봐!”요요가 팔을 벌리고 강재석에게 달려가자 그는 요요를 번쩍 들어 올리며 활짝 웃었다. “자, 우리 밥부터 먹자!”구택의 곁을 지나면서 강재석이 낮게 말했다. “너와 소희도 서둘러, 나도 손주 좀 안아 보게!”그러자 구택이 소희를 향해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곧 안겨드릴게요.”“염두에 두고 있다니 그러면 됐어!” 강재석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요요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식당에서 하인들이 밥을 차리고 있었는데, 열 개의 반찬과 국 한 가지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운성 지역의 요리로 특색이 있었다.“청아 씨가 같이 올 줄 몰라서 점심은 좀 간단하게 준비했어요. 이해 바랄게요.”오석이 웃으며 말하자 청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이미 아주 풍성한데요!”강재석도 한마디 거들었다. “모두 운성 지역의 음식이고, 입에 맞지 않는 게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지 말해요.”그러자 청아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실 강성의 많은 요리는 운성 요리에서 발전했죠. 여기에 다른 요리를 접목해서 발전한 거니까.”“강성의 음식이 퓨전이라면, 운성의 음식은 전통적이고 깔끔하다고 할 수 있죠
소정인 역시 소희더러 집으로 돌아와 명절을 함께 보내자고 했는데 소정인의 말에 진심이 어려 있었다. 소동은 일정 기간 심리 치료를 받은 후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소동도 이제 자신의 과거 행동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진심으로 사과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소희가 집으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했지만 소희의 눈빛은 차가웠고, 어이없다는 듯 피식 비웃었다. “소동이 내가 집에 돌아오길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돌아갈 수 없겠죠?”갑작스러운 말에 소정인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말했다. “그런 건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거야. 너와 소동이는 우리 딸이고, 너희 둘도 좋은 자매가 될 수 있어.”“괜찮아요. 엄마가 공개적으로 말했잖아요.”“나는 단지 입양한 딸일 뿐이고, 내 모든 것이 당신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면서요. 셋이 함께 잘 사세요.”소희의 목소리는 무심했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임구택이 서 있었다.“별일 아니야!” 소희가 구택을 보자 아까까지만 해도 냉기가 가득 서려 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고 다정하게 구택을 쳐다봤다.“응.” 구택이 다가와 소희의 손을 잡고 식사를 계속하러 방으로 들어갔다.식사 동안 요요와 강재석은 금세 친해졌다. 특히 강재석이 요요에게 자신의 연못 속 물고기를 자랑하자, 요요는 오후 낮잠도 거르고 함께 낚시하겠다고 했다. 둘은 연못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는데, 전혀 세대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한편 청아는 복도의 목조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미소를 지을 때 양 볼에 생기는 작은 보조개가 매력적이었다. “소희야, 네 집이 이렇게 부유할 줄 몰랐어!”강씨 저택으로 온 후 소희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원래 소희가 고아로, 산속에서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소희를 입양한 곳이 강씨 집안이었더니.두 사람은 복도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연꽃이 가득한 연못이, 뒤에는 자줏빛 대나무 길이 있었다. 건축을 전공한 데다가 산들바람과, 고
“아니, 나도 적절한 기회에 그만두려고 했어.” 청아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연인 사이가 될 수 없다면, 확실히 끊는 게 나으니까.”“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시카고로 돌아갈 거야?” “아니!” 청아의 눈빛은 맑고 깨끗했다. “3 년 전에 이미 한 번 도망쳤어.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을 거야. 나는 강성에서 자랐고 강성이 좋아.”“그래서 더 이상 떠돌지 않을 거고, 더 이상 요요에게 떠돌이 생활을 시키고 싶진 않아.”“한 회사에 이력서를 냈고, 추석 연휴가 지나면 면접 보러 갈 거야. 내 전공이랑 관련된 일이야.” 청아가 손으로 볼을 받치며 눈에는 기대가 가득 차 있었다. “원래 내 꿈은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거였어.”“이 몇 년 동안 가족을 위해, 요요를 위해 살았지만, 나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은 없었어.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거야!”소희는 이렇게 단호한 청아를 보며 진심을 다해서 응원했다.“넌 할 수 있을 거야!”이에 청아가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 소희야!”“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 소희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연못가에서 요요가 흥분해서 박수치며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둘이 돌아보니, 두 사람이 긴 팔의 큰 물고기를 잡아 올린 것이었다. 강재석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석을 불렀다.“오늘 밤에는 이 물고기를 먹도록 하지!”그때 청아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전화를 확인해 보니 우임승의 전화였다. “청아야, 오늘 명절인데 집에 갔어?”“아니요, 친구랑 함께 있어요.”“명절에 왜 엄마랑 함께 시간을 안 보내?”이에 청아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아빠는 어때요?”“괜찮아, 상사들이 나를 잘 챙겨줘. 명절에는 많은 혜택도 줬어.”“네가 걱정할 필요 없어. 너는 너랑 요요만 잘 돌보면 돼.” 우임승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냥 안부 전화였어.”청아는 우임승이 정말로 제대로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위에서 통화하고 있어!” 이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달콤한 월병을 집어 들고 오현빈에게 물었다. “너 뭐 먹을래?”“난 배 안 고파, 저녁에 먹자.”“난 뒷마당에 내 꽃이 피었는지 보러 갈게요!” 임유진이 월병을 하나 들고 뒷마당으로 향했고 위에서 서인은 발코니의 등나무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며 졸고 있었다.잠시 후, 휴대폰이 진동하며 서인을 깨웠다. 서인은 겨우 눈을 뜨고 나른하게 화면을 살펴보다가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버지가 명절에 집에 오라고 하신 전화였는데, 어제부터 시작해서 벌써 세 번째였다. 곧이어 서인이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이미 말했잖아요, 안 갈 거라고요. 알아서 명절 보내세요.”“서인아, 오늘은 가족이 모이는 날이야. 어떻게 너만 안 올 수 있니? 우리 몇 년간 함께 추석 보낸 적이 없잖아!” 구은태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몸 상태 너도 잘 알잖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거. 이번이 우리 부자가 같이 쇨 수 있는 마지막 추석일지도 몰라.”“그냥 내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되겠니?”서인이 담배를 찾았고 얼굴에 분명한 불쾌함이 드러났다. “그저 추석일 뿐인데, 그렇게 중요한가요?”“너에게는 앞으로도 많은 추석이 있겠지만, 아빠에게는 너와 함께 보낼 추석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구은태가 진지하게 말했다.“6시에 갈게요.”딸칵, 서인이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차분히 말했다. “좋아, 좋아!” 구은태가 연신 대답하며 말했다. “우리는 너 오길 기다릴게!”“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서인이 전화를 끊었고 잠깐 들르기만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서인은 그 ‘집'에 대해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못했다. 더욱이 서민지 모녀를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다.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 나서 서인은 일어나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에서 현빈과 다른 이들이 수박을 자르고 월병을 나누고 있었는데 서인이 내려오는 것을 보자 그에게 월병을 권했다.“어디서 온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