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은 잠시 생각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못 할 것도 없죠. 하지만 회사의 일을 끝마치고 나서야 가능할 것 같네요.”심명은 다정하나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괜찮아요. 기다릴게요.”그러자 구연은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 곧은 자세를 잡더니 펜을 꺼내 서류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중요한 내용은 없어요. 단순한 절차일 뿐이니, 심명 씨는 그냥 사인만 해주시죠.”심명은 이번에는 미련 없이 사인했다.“협조해 주셔서 고마워요.”구연은 서류를 챙겨 일어나더니, 더 이상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뒤돌아 나갔다.심명은 다시 주스를 마시며 속으로 생각했다. 구연이 자신이 기대한 만큼 영리하지는 않은 듯했다.예를 들어, 심명은 자신을 보면서도 왜 혼자 이곳에 있는지 묻는 걸 깜빡한 것이었다.구연은 회사로 돌아와 구택이 회의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서류를 들고 들어가 보고했다.구택은 짙은 색 정장을 입고 넓은 책상 뒤에 앉아, 한 손으로는 서류를 검토하면서 다른 한쪽 귀로 보고를 듣고 있었다.업무 보고가 끝나자, 구연은 잔잔히 웃으며 물었다.“사장님, 요즘 사모님을 회사에 모시고 오시지 않네요?”구택은 고개를 숙인 채 사인하며 무심하게 말했다.“아내는 요즘 도씨 저택에 있거든요.”이에 구연은 마치 혼잣말처럼 덧붙였다.“오늘 호원도로 쪽 카페에서 사모님을 본 것 같은데, 아마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겠네요.”구택의 펜이 순간 멈추더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호원도로요?”구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제가 제대로 확인한 건 아니에요. 사모님이 아니었을 거예요.”구택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이제 나가서 일 보세요.”“네.”구연은 사장실을 나와 자리로 돌아와 서류를 내려놓고, 물컵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화장실 문을 닫은 뒤, 구연은 주머니에서 작은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스위치를 켰다.곧 귓속에 구택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소희 오늘 어디에 갔는지 알아봐.”약 5분쯤 지나자 전화가
서재로 돌아온 구연은 구경이 차 사고를 당한 사실을 백호균에게 말하지 못하고 말했다.“제 생각에는 구경이는 국내에 남아 있어서는 안 돼요. 남아 있으면 더 많은 약점을 잡혀 우리 백씨 가문을 공격받을 뿐이라서, 그래서 사람을 시켜 외국으로 보내려고요.”백호균은 이미 경성대학에서는 더 이상 졸업할 길이 없고 국내에 머무르는 것도 소용없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빨리 보내.”“네.” “뉴스 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백호균의 질문에 구연이 답했다.“이미 여론 통제에 들어갔어요.”한쪽으로만 백씨 가문을 비난하던 네티즌들이 이제 반박을 시작했고, 백씨 가문이 국가 과학기술에 기여한 여러 업적을 열거하기 시작했다.[백씨 가문이 이만큼 공헌했는데 그거 좀 누리는 것이 어때서, 일부 사람들의 부에 대한 증오가 병적 수준이네.][백씨 가문을 욕하는 사람들은 그냥 집에 앉아서 키보드 두드리는 놈들이겠지. 그게 아니면 월급 100만도 못 받으며 온라인에서 존재감을 찾는 사람들이겠지.][자식들에게 도움을 제공하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하지 못하고. 욕하는 놈들은 자기들이 사회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백씨 가문에 불리한 발언들이 차례로 사라지자 다음 날에는 구경에 관한 화제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구연은 상대가 단지 반격해 경고하려는 의도였을 뿐 다음 단계는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저녁 식사 자리에서 백호균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진전 있어?”구연의 눈빛은 어두웠다.“더 속도를 낼게요.”백호균은 이미 약간 답답함을 느끼는 듯했다.“빨리 처리해. 단, 다시는 백씨 가문을 연루시키지 말아라.”구연은 마음이 불편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네.”월요일, 구연은 차를 몰고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카페 앞을 지났다. 여자의 시선은 무심코 밖에 세워진 차 한 대에 멈췄고 속도를 줄였다.파란색 롤스로이스, 연번 번호판, 슈퍼카가 즐비한 강성에서도 지나치게 눈에 띄는 차였다. 한 번 보
아침이 되어 성연희가 잠에서 깨어나고서야, 전날 자신과 노명성이 탔던 첫 번째 차량이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임씨 집안 쪽 차량이 신호 대기 중 뒤에서 달려온 차에 들이받히며, 앞쪽 차량이 무려 십여 미터나 밀려 나간 것이었다.가해 운전자는 음주 상태였고, 곧바로 구속되었다.임씨 집안의 기사도 머리를 부딪혀 상처가 난 정도라 큰일은 아니었지만, 만약 그 차에 연희가 탔더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결과였을 터였다.전날 밤 명성이 자신과 함께 차를 갈아탄 것은 소희의 지시였다고 했다. 그리고 첫 번째 차가 사고를 당한 사실을 접한 순간 연희는 모든 걸 이해했다.명성은 사람을 보내 뒷수습을 시킨 뒤 방으로 돌아왔고, 아직도 놀란 기색이 가시지 않은 연희를 보며 물었다.“너랑 소희, 대체 누구한테 원한을 샀길래 이러는 거야? 어제 내가 기사한테 일부러 우회로를 택하게 했는데도, 결국 이렇게 찾아낸 거잖아.”소희가 직접 전화해 차를 바꾸라 했을 때 이미 그들은 감시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량도 바꾸고 길까지 돌렸지만 결국 사고가 벌어진 셈이었다.만약 부딪힌 차량에 연희가 있었다면, 명성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이에 연희는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쓰레기들이지, 뭐.”백씨 저택주말이었지만 구연은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다.훈련실에서 두 시간 동안 권투 연습을 하고 샤워를 마친 뒤, 곧장 백호균의 서재로 향했다.기분이 나쁘지 않았는지 도우미가 물컵을 엎질렀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러나 서재에 다다르기 직전, 걸려온 전화를 받자 구연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그리고 문을 두드릴 겨를도 없이 성급히 안으로 들어섰다.“할아버지!”백호균은 이미 소식을 알고 있었는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경성대학에서 공고를 냈는데, 본교 학생 백구경이 졸업 논문 표절로 인해 학적을 박탈당했다는 내용이었다.사건의 당사자가 백씨 집안 사람이라는 점에서, 경성 사회 전체가 벌집 쑤셔놓은 듯 떠들썩했다.“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시원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전화기 너머에서 유진은 부끄러운 듯 이불 속에 파묻혀 킥킥 웃고 있었다.“굳이 배웅하지 마. 너는 휴가나 마음껏 즐겨.”[응.] 유진이 대답하더니 곧장 물었다.[의린 언니 말로는 너 남자친구 생겼다던데, 진짜야?]“아니, 그냥 회사 동료야. 그 사람이 나를 쫓아다니긴 했는데 내가 받아주진 않았어.” 시원이 담담히 설명하자 유진은 싱긋 웃었다.[남자친구 생기면 제일 먼저 나한테 말해야 해!]“걱정하지 마, 제일 먼저 알려줄게.”[길 조심하고 잘 다녀와.]전화를 끊은 뒤 시원은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진구가 떠올라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말로는 싫다면서도 몸은 참 정직했으니까.‘역시 남자란 건 다 그런 거지.’두 시간이 더 지난 뒤, 진구가 간신히 눈을 떴다. 어리둥절하게 방 안을 둘러보다가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그러자 전날 밤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남자는 숨을 거칠게 들이켰다.“방시원!”진구는 급히 일어나려다 허리에 한기가 스쳤다.황급히 수건을 잡아 허리에 두르고 집 안을 찾아 헤맸지만, 욕실에도 거실에도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터져 나오려던 분노는 발산할 길을 잃고 속에서만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하며 메시지가 도착했다.[아침 아홉 시 비행기라 회사로 돌아가요. 선배는 일어나면 문 꼭 잠그고 나가주고요. 고마워요!]진구는 얼어붙은 듯 휴대폰을 움켜쥐었다.‘가 버렸다고? 이렇게 그냥?’곧이어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미안해요, 이렇게 또 한 번 자버렸네요!]짧은 글자마다 시원의 익살스러움과 뻔뻔스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진구의 머릿속은 웅웅 울리고 당장이라도 공항으로 달려가 붙잡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그런 시계를 보니 이미 9시 10분이었고 비행기는 날아간 뒤였다.이에 진구는 주저앉은 채 허탈하게 웃었다. 마치 주먹이 허공을 치는 듯, 무력감만 밀려왔다.한참을 앉아 있던 여구는 결국 메시지를
진구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따라오더니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너 뭐 하는 거야?”시원은 곧장 차 문을 열어 남자를 안으로 밀어 넣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았다. 이어서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더니 곧장 자신의 집 쪽으로 차를 몰았다.가는 길 내내 시원은 속력을 높이며 앞만 보고 달렸다. 진구가 뒷좌석에서 고함을 치고 욕설을 퍼부어도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짜증이 치밀었는지 시원은 갑자기 악셀을 더 밟았다. 이에 차가 튀듯 앞으로 치고 나가며 진구는 의자에 세게 부딪히며 짧게 신음을 토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요동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집 앞에 도착해 차를 세운 시원은 다시 문을 열고 진구를 억지로 끌어내렸다.진구는 키가 훌쩍 커 180에 가까웠고, 시원은 작고 아담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의 힘으로 남자를 끌고 갔다. 술과 어지럼증에 휘청대던 진구는 버티지도 못한 채 질질 끌려 올라갔다.집 안으로 들어오자 시원은 진구를 침실로 데리고 가더니 그대로 침대 위로 내던졌다.진구는 술기운이 다소 가신 듯, 경계심을 드러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너 뭐 하려는 거야?”시원은 굽 높은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침대 위에 올라타 진구의 허리를 짓누르듯 앉았다. 두 손을 침대에 짚고,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채 낮게 말했다.“날 더 미워하게 만들 일이요.”어둠 속에서 둘의 시선이 맞닿았고, 가까운 거리에서 진구의 호흡은 거칠어졌다.잠시의 대치 끝에 진구는 손으로 시원을 밀쳐내고 몸을 뒤집어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시원이 진구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아 다시 눌러 눕히더니, 셔츠 단추를 힘껏 잡아 찢으며 입술을 덮쳤다.부드러운 입술이었으나 전기가 흐르듯 진구의 온몸을 강타했다. 순간 머릿속이 쿵 하고 울리고 온몸에 기운이 빠져 몸을 뻗은 채 저항을 하는 것 잊어버렸다....그날 밤, 늦은 시각.구연은 서재의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보고 차를 우리어 들고 갔고, 백호균은 책을 읽으며 의자에 편히 기대어 있었다
시원이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오다 호텔 정문 앞을 지날 때, 거기 서 있는 진구를 보았다. 밤은 이미 깊었고, 아마도 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잠시 망설인 끝에 시원은 차를 그쪽으로 몰았다. 차가 막 멈추기도 전에, 진구는 스스로 차 문을 열고 아무렇지 않게 올라탔다.술에 취한 진구는 뒷좌석에 몸을 던지듯 기대더니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영경팰리스로 가세요.”‘헉.’시원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 남자 지금 나를 개인 기사쯤으로 아는 건가?’시원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차를 영경팰리스 방향으로 몰았다.막 사거리를 지난 순간 진구의 휴대전화가 울리자, 남자는 대충 전화를 집어 들며 짧게 말했다.“여보세요?”폰을 귀에서 멀리 대고 있어서, 상대방 목소리가 차 안에 고스란히 울려 퍼졌다.[사장님, 호텔 정문 앞에 도착했는데 왜 안 보이시죠?]진구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시원은 백미러를 통해 남자의 눈빛이 멍청할 정도로 허탈해 보이는 걸 똑똑히 보았다.[사장님?] 운전기사가 다급하게 묻자 진구가 낮게 대답했다.“이미 차에 탔어요.”[누구 차를 타셨어요?]“모르겠는데.”시원은 참다못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운전기사한테 말해요. 방시원이라고요.”차 안 조명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고 진구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이윽고 남자는 이를 갈 듯 낮게 말했다.“너, 나 납치한 거야?”시원은 두 눈이 커졌다.“무슨 소리예요?”[사장님?] 운전기사가 불안해하며 다시 물었다.“아무 일도 없어요.” 진구는 차갑게 잘라 말하고는 곧장 시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세워. 지금 내릴 거니까.”시원은 핸들을 꽉 쥔 채 담담하게 말했다.“이미 이쯤 왔으니 그냥 집까지 데려다줄게요.”“세우라고 했어.” 진구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싸늘했다.“싫은 사람과 같은 차 안에 있는 건, 단 1초도 못 참아.”시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차가 요란하게 멈추며, 진구는 몸을 앞으로 내던져졌다가 간신히 버텼다